[특파원리포트] 사막기후에서 벼농사 일군 고려인들

입력 2017.08.15 (09:07)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특파원리포트] 사막기후에서 벼농사 일군 고려인들

[특파원리포트] 사막기후에서 벼농사 일군 고려인들

올해는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는 해이다. 러시아 극동에 살던 18만 명의 고려인들이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 중의 일부가 러시아 남부 칼미크 공화국에까지 들어가서 벼농사를 성공시킨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러시아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다시 칼미크 공화국으로 이주한 고려인들의 애환을 추적해 봤다.


칼미크 공화국은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300km 떨어진 곳이다. 서쪽으로 카프카스 산맥, 오른쪽으로는 카스피해와 인접한 지역이다. 국토 대부분은 초원과 반사막지대로 건조한 기후에 목축업이 위주이다. 칼미크 사람들은 몽골족 후예라 생김새가 한국 사람이랑 너무도 닮았다.

여름철 낮기온은 섭씨 40도를 훌쩍 넘는다. 수도 엘리스타 건물 외벽에 설치된 온도계가 낮최고기온 48도를 표시하는 걸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보스호트 벼농장보스호트 벼농장

수도 엘리스타에서 북쪽으로 280km를 달리면, 악짜브리스키 주의 보스호트 농장이 나온다. 사방에 끝도없이 펼쳐진 광활한 들판에 녹색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벼다. 관개시설도 잘 돼 있어서 적당히 물이 차 있는 '논'에 벼가 자라고 있다. 건조한 기후에 바짝 마른 대지가 대부분이건만, 이곳에 논이 있고 벼가 자란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보스호트 농장의 면적은 200ha가 넘는데 보야린이라는 종자를 심었다고, 코르니코프 농장 수석 관리인은 말했다. 코르니코프는 "이제 몇 주 뒤면 벼 이삭이 나올텐데 지금은 물이 부족하지 않게 대주는게 일이다. 물 대주는 관리인이 아침 저녁으로 논을 살피면서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벼 수확 때는 ha당 4t 정도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스호트 취수장보스호트 취수장

벼농사를 짓는데는 물이 필수적인데, 이곳에선 60km 떨어진 볼가강에서 물을 끌어오고 있다.전체 농장에 취수장이 9개 정도 있다고 했다. 동서남북으로 수로를 잘 만들어서 물 걱정은 없어 보였다. 코르니코프 관리인은 "50년 전에 이 농장이 형성될 무렵에 취수장이 건설됐다.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이곳에 왔을 때 새로 취수장을 더 짓고 논을 키워나갔다. 당시 고려인들은 200~300 ha의 논을 경작했다."고 말했다.

벼농사 주역...박 바실리

벼농사의 주역 박 바실리의 두 아들 알렉산드르 씨와 발레리 씨(왼쪽부터)벼농사의 주역 박 바실리의 두 아들 알렉산드르 씨와 발레리 씨(왼쪽부터)

칼미크 공화국 보스호트 농장으로의 이주를 주도한 인물은 고려인 박 바실리였다. 볼고그라드(보스호트 농장에서 북쪽으로 120km 거리)에 살고 있는 박 바실리의 두 아들들. 둘째 아들 박 발레리(72살), 셋째 아들 박 알렉산드르(66살)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이들은 아버지 박 바실리와 함께 1965년 우즈벡에서 칼미크로 이주했다.

박 바실리는 1905년 러시아 극동 하산에서 태어나 수력학을 공부했다. 29살이던 1937년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온 가족이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전공인 수력학을 살려 목화 생산에 혁혁한 기여를 했고, 그 결과 1948년 당시 훈장 중에 가장 격이 높은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러던 그에게 칼미크 고위 인사가 칼미크로 와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박 바실리의 둘째 아들 박 발레리가 당시 상황을 설명해줬다.

"칼미크의 고위 인사가 '땅이든 무엇이든 제공하겠다.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벼를 키워보자'라고 답해서 모두들 놀랐다고 한다. 아버지는 '땅도 물도 있고 수로도 있다. 필요한 건 모두 다 있으니 한번 해보자'라고 설명했다. 칼미크인들도 수락했다."

박 바실리와 농장 사람들박 바실리와 농장 사람들

소브호즈, 콜호즈 같은 집단 농장들이 생겨나면서 농업생산 증대를 다그치던 1960년대 목축업 밖에 모르던 칼미크인들이 농사 잘 짓는 고려인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박 발레리는 "고려인들이 농업을 갖고 들어온 것이다. 칼미크 인들은 농사도 모르고 채소 가꾸는 법도 몰랐다. 고려인들이 그들을 가르쳤다. 벼 뿐만 아니라 채소.사료 재배법을 가르쳤다"고 설명했다.

1965년 박 바실리는 10여 명의 고려인 농업 전문가들과 함께 보스호트 농장에 도착했다. 초기 정착 시절, 농장 근처에 마을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다고 한다. 셋째 아들 박 알렉산드르의 말이다.

"건조한 기후라 마실 물이 부족했다. 논에 댈 물은 풍족했는데 마실 물이 부족하니 역설적이었다. 또 제대로 된 길이 없다는 게 큰 고통이었다. 아스팔트 도로가 없고 겨우 흙길 밖에 없는데 날씨가 좋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했다. 그냥 흙길이 마를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박 바실리와 그가 받은 레닌 훈장박 바실리와 그가 받은 레닌 훈장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정착 3년 만에 최대 벼 수확량을 기록해 박 바실리는 또 한 번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 땅이 경작한 적 없는 처녀지였기 때문에 비료 한 번 주지 않았어도 수확이 좋았던 점도 있었지만, 모든 것이 고려인들의 근면성실함 때문이라고 박 바실리의 아들 박 발레리는 증언했다.

"고려인들은 책임감이 강하다. 다른 민족이 칼미크에 왔었더라면 실패했을 것이다. 오직 고려인들만 해냈고, 성공한 것이다."

줄어드는 고려인 공동체

보스호트 마을보스호트 마을

현재 보스호트 마을에는 140여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악짜브리스키 주에는 보스호트 외에도 볼쇼이 짜른 등 2개의 농장이 더 있는데, 3곳 농장지역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들을 다 합해도 600명 정도라고 한다. 한때 이 지역에는 최대 1,500명 이상의 고려인들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60~80대 노인들만 남고 청년·중장년층은 모두 일자리를 찾아 외지로 나간 상태다.

과거 소련 시절에는 국가 주도의 집단농장 체제에서, 보수도 좋고 풍족한 지원이 이뤄졌던 반면, 지금은 농업에도 경제 논리가 적용된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헨 루드밀라 보스호트 행정 책임자는 "소련 시절과 달리 이제는 모든 것에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땅도 물도 모기약도 비료도 사야 된다. 농장은 그럴만한 돈이 없어서 경작지가 자꾸만 줄어든다. 그러니 일자리가 없어지고 젊은층이 도시로 외지로 자꾸 빠져 나가는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보스호트 고려인 문화 센터보스호트 고려인 문화 센터

보스호트 마을 한복판에 '고려인 문화 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1997년 뜻있는 고려인들이 한국 문화를 전수하기 위해 건립했다. 초기 어른과 아이들 20여 명으로 시작해서 한글과 한국 전통 음악, 춤 등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3년 전부터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3년간 방치된 결과 건물 내부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여 창고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9월에 다시 문을 열려고 내부 수리를 시도 중이지만, 엄두를 못내고 있는 실정이다.

장 스베틀라나 문화센터장은 "지금 시급한 것은 한글을 가르칠 선생님이 없다. 책도 교과서도 없고.. 건물이 위험한 상태라 공부를 계속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수리할만 한 자금이 부족한 상태다."

한국인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고려인들의 노력이 지금 벽에 부딪힌 상태다.

칼미크 공화국의 수도 엘리스타칼미크 공화국의 수도 엘리스타

칼미크 공화국의 수도 엘리스타에서 알렉세이 올로프 행정수반을 만나 고려인들의 사연을 들려주고 대책을 물어보았다. 척박한 이 땅에 이주해서 벼농사를 성공시키고 농업생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점을 들어, 이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고 문화센터까지 건립했는데 형편이 어려우니 좀 도와줄 수 없겠느냐는 취지로 물었던 것인데, 돌아온 대답은 대단히 냉정했다.

올로프 칼미크 공화국 행정수반올로프 칼미크 공화국 행정수반

올로프 행정수반은 러시아가 다민족 국가로 이뤄진 점을 강조하면서, 체첸이나 다게스탄, 카작 민족 공동체들도 모두 자신들의 힘으로 민족 문화를 보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로프 행정수반은 "그 민족 공동체에서 기금과 자선, 후원, 사업가를 찾아서 고유의 말을 가르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이 이곳 고려인들에게도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민족들 모두 그렇게 하고 있으니, 고려인이라고 특별 대우를 해줄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돌아서는 내내 아쉬움과 서운함이 가득했다. 행정수반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칼미크 내 고려인 공동체의 수가 너무나 적고, 한국에서는 칼미크의 고려인들에 대해 너무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러시아 극동에서 원치않게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가 다시 칼미크에까지 와서 삶의 터전을 닦은 고려인들. 그들이 평생 한국인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처럼, 이제는 한국이 그들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연관기사] 취재파일K 칼미크로 간 고려인들의 사연은?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특파원리포트] 사막기후에서 벼농사 일군 고려인들
    • 입력 2017-08-15 09:07:21
    특파원 리포트
올해는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는 해이다. 러시아 극동에 살던 18만 명의 고려인들이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 중의 일부가 러시아 남부 칼미크 공화국에까지 들어가서 벼농사를 성공시킨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러시아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다시 칼미크 공화국으로 이주한 고려인들의 애환을 추적해 봤다.


칼미크 공화국은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300km 떨어진 곳이다. 서쪽으로 카프카스 산맥, 오른쪽으로는 카스피해와 인접한 지역이다. 국토 대부분은 초원과 반사막지대로 건조한 기후에 목축업이 위주이다. 칼미크 사람들은 몽골족 후예라 생김새가 한국 사람이랑 너무도 닮았다.

여름철 낮기온은 섭씨 40도를 훌쩍 넘는다. 수도 엘리스타 건물 외벽에 설치된 온도계가 낮최고기온 48도를 표시하는 걸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보스호트 벼농장
수도 엘리스타에서 북쪽으로 280km를 달리면, 악짜브리스키 주의 보스호트 농장이 나온다. 사방에 끝도없이 펼쳐진 광활한 들판에 녹색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벼다. 관개시설도 잘 돼 있어서 적당히 물이 차 있는 '논'에 벼가 자라고 있다. 건조한 기후에 바짝 마른 대지가 대부분이건만, 이곳에 논이 있고 벼가 자란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보스호트 농장의 면적은 200ha가 넘는데 보야린이라는 종자를 심었다고, 코르니코프 농장 수석 관리인은 말했다. 코르니코프는 "이제 몇 주 뒤면 벼 이삭이 나올텐데 지금은 물이 부족하지 않게 대주는게 일이다. 물 대주는 관리인이 아침 저녁으로 논을 살피면서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벼 수확 때는 ha당 4t 정도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스호트 취수장
벼농사를 짓는데는 물이 필수적인데, 이곳에선 60km 떨어진 볼가강에서 물을 끌어오고 있다.전체 농장에 취수장이 9개 정도 있다고 했다. 동서남북으로 수로를 잘 만들어서 물 걱정은 없어 보였다. 코르니코프 관리인은 "50년 전에 이 농장이 형성될 무렵에 취수장이 건설됐다.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이곳에 왔을 때 새로 취수장을 더 짓고 논을 키워나갔다. 당시 고려인들은 200~300 ha의 논을 경작했다."고 말했다.

벼농사 주역...박 바실리

벼농사의 주역 박 바실리의 두 아들 알렉산드르 씨와 발레리 씨(왼쪽부터)
칼미크 공화국 보스호트 농장으로의 이주를 주도한 인물은 고려인 박 바실리였다. 볼고그라드(보스호트 농장에서 북쪽으로 120km 거리)에 살고 있는 박 바실리의 두 아들들. 둘째 아들 박 발레리(72살), 셋째 아들 박 알렉산드르(66살)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이들은 아버지 박 바실리와 함께 1965년 우즈벡에서 칼미크로 이주했다.

박 바실리는 1905년 러시아 극동 하산에서 태어나 수력학을 공부했다. 29살이던 1937년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온 가족이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전공인 수력학을 살려 목화 생산에 혁혁한 기여를 했고, 그 결과 1948년 당시 훈장 중에 가장 격이 높은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러던 그에게 칼미크 고위 인사가 칼미크로 와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박 바실리의 둘째 아들 박 발레리가 당시 상황을 설명해줬다.

"칼미크의 고위 인사가 '땅이든 무엇이든 제공하겠다.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벼를 키워보자'라고 답해서 모두들 놀랐다고 한다. 아버지는 '땅도 물도 있고 수로도 있다. 필요한 건 모두 다 있으니 한번 해보자'라고 설명했다. 칼미크인들도 수락했다."

박 바실리와 농장 사람들
소브호즈, 콜호즈 같은 집단 농장들이 생겨나면서 농업생산 증대를 다그치던 1960년대 목축업 밖에 모르던 칼미크인들이 농사 잘 짓는 고려인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박 발레리는 "고려인들이 농업을 갖고 들어온 것이다. 칼미크 인들은 농사도 모르고 채소 가꾸는 법도 몰랐다. 고려인들이 그들을 가르쳤다. 벼 뿐만 아니라 채소.사료 재배법을 가르쳤다"고 설명했다.

1965년 박 바실리는 10여 명의 고려인 농업 전문가들과 함께 보스호트 농장에 도착했다. 초기 정착 시절, 농장 근처에 마을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다고 한다. 셋째 아들 박 알렉산드르의 말이다.

"건조한 기후라 마실 물이 부족했다. 논에 댈 물은 풍족했는데 마실 물이 부족하니 역설적이었다. 또 제대로 된 길이 없다는 게 큰 고통이었다. 아스팔트 도로가 없고 겨우 흙길 밖에 없는데 날씨가 좋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했다. 그냥 흙길이 마를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박 바실리와 그가 받은 레닌 훈장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정착 3년 만에 최대 벼 수확량을 기록해 박 바실리는 또 한 번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 땅이 경작한 적 없는 처녀지였기 때문에 비료 한 번 주지 않았어도 수확이 좋았던 점도 있었지만, 모든 것이 고려인들의 근면성실함 때문이라고 박 바실리의 아들 박 발레리는 증언했다.

"고려인들은 책임감이 강하다. 다른 민족이 칼미크에 왔었더라면 실패했을 것이다. 오직 고려인들만 해냈고, 성공한 것이다."

줄어드는 고려인 공동체

보스호트 마을
현재 보스호트 마을에는 140여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악짜브리스키 주에는 보스호트 외에도 볼쇼이 짜른 등 2개의 농장이 더 있는데, 3곳 농장지역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들을 다 합해도 600명 정도라고 한다. 한때 이 지역에는 최대 1,500명 이상의 고려인들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60~80대 노인들만 남고 청년·중장년층은 모두 일자리를 찾아 외지로 나간 상태다.

과거 소련 시절에는 국가 주도의 집단농장 체제에서, 보수도 좋고 풍족한 지원이 이뤄졌던 반면, 지금은 농업에도 경제 논리가 적용된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헨 루드밀라 보스호트 행정 책임자는 "소련 시절과 달리 이제는 모든 것에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땅도 물도 모기약도 비료도 사야 된다. 농장은 그럴만한 돈이 없어서 경작지가 자꾸만 줄어든다. 그러니 일자리가 없어지고 젊은층이 도시로 외지로 자꾸 빠져 나가는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보스호트 고려인 문화 센터
보스호트 마을 한복판에 '고려인 문화 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1997년 뜻있는 고려인들이 한국 문화를 전수하기 위해 건립했다. 초기 어른과 아이들 20여 명으로 시작해서 한글과 한국 전통 음악, 춤 등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3년 전부터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3년간 방치된 결과 건물 내부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여 창고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9월에 다시 문을 열려고 내부 수리를 시도 중이지만, 엄두를 못내고 있는 실정이다.

장 스베틀라나 문화센터장은 "지금 시급한 것은 한글을 가르칠 선생님이 없다. 책도 교과서도 없고.. 건물이 위험한 상태라 공부를 계속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수리할만 한 자금이 부족한 상태다."

한국인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고려인들의 노력이 지금 벽에 부딪힌 상태다.

칼미크 공화국의 수도 엘리스타
칼미크 공화국의 수도 엘리스타에서 알렉세이 올로프 행정수반을 만나 고려인들의 사연을 들려주고 대책을 물어보았다. 척박한 이 땅에 이주해서 벼농사를 성공시키고 농업생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점을 들어, 이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고 문화센터까지 건립했는데 형편이 어려우니 좀 도와줄 수 없겠느냐는 취지로 물었던 것인데, 돌아온 대답은 대단히 냉정했다.

올로프 칼미크 공화국 행정수반
올로프 행정수반은 러시아가 다민족 국가로 이뤄진 점을 강조하면서, 체첸이나 다게스탄, 카작 민족 공동체들도 모두 자신들의 힘으로 민족 문화를 보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로프 행정수반은 "그 민족 공동체에서 기금과 자선, 후원, 사업가를 찾아서 고유의 말을 가르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이 이곳 고려인들에게도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민족들 모두 그렇게 하고 있으니, 고려인이라고 특별 대우를 해줄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돌아서는 내내 아쉬움과 서운함이 가득했다. 행정수반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칼미크 내 고려인 공동체의 수가 너무나 적고, 한국에서는 칼미크의 고려인들에 대해 너무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러시아 극동에서 원치않게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가 다시 칼미크에까지 와서 삶의 터전을 닦은 고려인들. 그들이 평생 한국인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처럼, 이제는 한국이 그들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연관기사] 취재파일K 칼미크로 간 고려인들의 사연은?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