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밟힌 17살 소녀, 샌프란시스코에 우뚝 서다

입력 2017.12.09 (08:03) 수정 2017.12.2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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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힌 17살 소녀, 샌프란시스코에 우뚝 서다

짓밟힌 17살 소녀, 샌프란시스코에 우뚝 서다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 최초 증언 고 김학순 할머니 20주기

“17살에 낯선 남자들에게 납치됐다. 조그마한 헛간방에 갇혔다. 하루 일곱, 여덟 명의 남자에게 강간당했다. 지옥 같은 하루 하루, 죽어도 이 보단 나았을 것이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탈출이라도 시도해보는 편이 낫다.

어느 날, 방에 들어온 마흔 살 언저리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에게 부탁했다. 제발 탈출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4개월 만에 성노예에서 벗어났고, 정착을 도와준 남자와 결혼했다. 딸과 아들을 낳고 잠시나마 행복을 맛보았다. 하지만 새파란 20대 중반에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익사 사고로 떠나 보냈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이 인생 역정. 1991년 8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실명으로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의 초년입니다. 돌아가신지 만 20인 올해, 김 할머니가 뿌린 씨앗이 마침내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최근 제가 지내고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에서도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잇따라 반가운 소식들이 들려왔습니다. 모두가 들떠 시끌벅적한 추수감사절 직전(현지시각 11월 22일), 샌프란시스코 에드 리 시장이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와 해당 부지를 시 소유로 받아들이는 결의안에 서명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와 1957년부터 60년간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일본 오사카는 시장이 앞장서서 일방적으로 자매결연을 끊었고, 아베 총리와 스가 관방장관까지 나서서 유감을 표명하며 발끈했습니다.

이 일을 뉴욕타임즈, BBC 등 유수 언론들이 대서특필하는 등 국제적인 이슈가 됐습니다. 이어서 한국 정부는 내년부터 8월 14일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지정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날은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실명 증언한 날입니다. 이를 기념해 2012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지정됐고, 이제는 정식 국가 기념일로 정해졌습니다.

위안부 기림비 상이 있는 세인트 메리스 스퀘어(St. Mary’s Square)위안부 기림비 상이 있는 세인트 메리스 스퀘어(St. Mary’s Square)

12월 16일 김 할머니의 20주기를 앞두고 할머니의 동상이 서 있는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메리스 스퀘어를 찾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와 주변지역을 일컫는 ‘베이 에어리어(Bay Area)’를 연결하는 전철 바트(BART)를 이용했습니다. 차이나 타운의 ‘드래곤 게이트’와도 가까운 곳에 아담하게 꾸며진 공원입니다.

트위터와 우버 등 IT 기업의 본사가 몰려있는 지식정보 산업의 중심지 샌프란시스코 전경. 마천루가 밀집한 사진 왼쪽 지역이 파이낸셜 디스트릭트! 바로 이 곳에 위안부 기림비가 서 있습니다.트위터와 우버 등 IT 기업의 본사가 몰려있는 지식정보 산업의 중심지 샌프란시스코 전경. 마천루가 밀집한 사진 왼쪽 지역이 파이낸셜 디스트릭트! 바로 이 곳에 위안부 기림비가 서 있습니다.


맛집과 쇼핑 장소로 유명해 관광객 필수코스인 몽고메리 스테이션에서 공원까지 걸어서 5분도 안되는 거리…‘역세권’ 임을 보여주는 구글 맵. 꼭 한번 들렀다 가시길…맛집과 쇼핑 장소로 유명해 관광객 필수코스인 몽고메리 스테이션에서 공원까지 걸어서 5분도 안되는 거리…‘역세권’ 임을 보여주는 구글 맵. 꼭 한번 들렀다 가시길…

공원 안으로 들어서자 우뚝 솟은 마천루를 배경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대리석 바닥 위에 위안부 기림비가 서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 인권, 자유와 진보의 상징과 동의어인 샌프란시스코, 그 중에서도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와 유명 은행인 웰스 파고, 지갑 안에 누구나 하나 이상은 들고 있는 VISA 카드 등의 기업체의 본사가 있어 ‘서부의 월 스트리트’라고 불리는 이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에 우뚝 선 기림비는 쾌거로 다가왔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과 유수의 금융맨들이 북적대는 이 도시의 심장부에서 자국의 추악한 과거를 영원히 드러내놓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일본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현장에 와보니 일본 정부가 왜 그렇게 발끈하고 나섰는지, 오사카 시장이 자매결연을 끊는 ‘오버’를 했는지 감이 팍 옵니다.

가까이에서 살펴본 동상은 자그마한 체구에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눈동자가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습니다. 할머니의 시선은 기둥 위에 서 있는 소녀들에게 향해 있습니다. 우리네 소녀상처럼 치마저고리를 입은 한국 위안부와, 중국, 필리핀 위안부 소녀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손을 맞잡고 있는 형상입니다. 이들 모두의 얼굴은 너무나도 정교한 나머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먹먹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기림비를 세우는 데 중심축이 된 사람들은 중국계 여성 릴리안 싱과 줄리 탕입니다. 두 분은 30년 이상 캘리포니아주 판사로 재직했고 현재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한 정의연대 CWJC(Comfort Women Justice Coalition)’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해 한국 정부의 책임있는 리더십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한국의 지난 정부가 “범죄 인정과 진상 규명, 공식 사죄 등 핵심 요구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비상식적인 협의를 한 당사자”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한일 양국 문제로 좁힐 것이 아니라 중국, 대만, 필리핀 등 다른 피해국까지 아우르는 논의를 위해 국제적인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삼국의 위안부 소녀들이 손을 맞잡은 동상이 시사하는 바를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지난 9월 기림비 제막식. 미국에서만 8번 째 위안부 기림비입니다.지난 9월 기림비 제막식. 미국에서만 8번 째 위안부 기림비입니다.

일본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비판이 전 세계적으로 이어지는데도 일본 정부는 위로금 내지는 지원금 명목으로 돈을 줬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의 20주기를 앞두고 세워진 동상이 간절한 염원을 담아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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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짓밟힌 17살 소녀, 샌프란시스코에 우뚝 서다
    • 입력 2017-12-09 08:03:17
    • 수정2017-12-26 14:12:38
    김가림의 생생 샌프란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 최초 증언 고 김학순 할머니 20주기 “17살에 낯선 남자들에게 납치됐다. 조그마한 헛간방에 갇혔다. 하루 일곱, 여덟 명의 남자에게 강간당했다. 지옥 같은 하루 하루, 죽어도 이 보단 나았을 것이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탈출이라도 시도해보는 편이 낫다. 어느 날, 방에 들어온 마흔 살 언저리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에게 부탁했다. 제발 탈출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4개월 만에 성노예에서 벗어났고, 정착을 도와준 남자와 결혼했다. 딸과 아들을 낳고 잠시나마 행복을 맛보았다. 하지만 새파란 20대 중반에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익사 사고로 떠나 보냈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이 인생 역정. 1991년 8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실명으로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의 초년입니다. 돌아가신지 만 20인 올해, 김 할머니가 뿌린 씨앗이 마침내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최근 제가 지내고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에서도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잇따라 반가운 소식들이 들려왔습니다. 모두가 들떠 시끌벅적한 추수감사절 직전(현지시각 11월 22일), 샌프란시스코 에드 리 시장이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와 해당 부지를 시 소유로 받아들이는 결의안에 서명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와 1957년부터 60년간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일본 오사카는 시장이 앞장서서 일방적으로 자매결연을 끊었고, 아베 총리와 스가 관방장관까지 나서서 유감을 표명하며 발끈했습니다. 이 일을 뉴욕타임즈, BBC 등 유수 언론들이 대서특필하는 등 국제적인 이슈가 됐습니다. 이어서 한국 정부는 내년부터 8월 14일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지정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날은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실명 증언한 날입니다. 이를 기념해 2012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지정됐고, 이제는 정식 국가 기념일로 정해졌습니다. 위안부 기림비 상이 있는 세인트 메리스 스퀘어(St. Mary’s Square) 12월 16일 김 할머니의 20주기를 앞두고 할머니의 동상이 서 있는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메리스 스퀘어를 찾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와 주변지역을 일컫는 ‘베이 에어리어(Bay Area)’를 연결하는 전철 바트(BART)를 이용했습니다. 차이나 타운의 ‘드래곤 게이트’와도 가까운 곳에 아담하게 꾸며진 공원입니다. 트위터와 우버 등 IT 기업의 본사가 몰려있는 지식정보 산업의 중심지 샌프란시스코 전경. 마천루가 밀집한 사진 왼쪽 지역이 파이낸셜 디스트릭트! 바로 이 곳에 위안부 기림비가 서 있습니다. 맛집과 쇼핑 장소로 유명해 관광객 필수코스인 몽고메리 스테이션에서 공원까지 걸어서 5분도 안되는 거리…‘역세권’ 임을 보여주는 구글 맵. 꼭 한번 들렀다 가시길… 공원 안으로 들어서자 우뚝 솟은 마천루를 배경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대리석 바닥 위에 위안부 기림비가 서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 인권, 자유와 진보의 상징과 동의어인 샌프란시스코, 그 중에서도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와 유명 은행인 웰스 파고, 지갑 안에 누구나 하나 이상은 들고 있는 VISA 카드 등의 기업체의 본사가 있어 ‘서부의 월 스트리트’라고 불리는 이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에 우뚝 선 기림비는 쾌거로 다가왔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과 유수의 금융맨들이 북적대는 이 도시의 심장부에서 자국의 추악한 과거를 영원히 드러내놓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일본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현장에 와보니 일본 정부가 왜 그렇게 발끈하고 나섰는지, 오사카 시장이 자매결연을 끊는 ‘오버’를 했는지 감이 팍 옵니다. 가까이에서 살펴본 동상은 자그마한 체구에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눈동자가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습니다. 할머니의 시선은 기둥 위에 서 있는 소녀들에게 향해 있습니다. 우리네 소녀상처럼 치마저고리를 입은 한국 위안부와, 중국, 필리핀 위안부 소녀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손을 맞잡고 있는 형상입니다. 이들 모두의 얼굴은 너무나도 정교한 나머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먹먹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기림비를 세우는 데 중심축이 된 사람들은 중국계 여성 릴리안 싱과 줄리 탕입니다. 두 분은 30년 이상 캘리포니아주 판사로 재직했고 현재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한 정의연대 CWJC(Comfort Women Justice Coalition)’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해 한국 정부의 책임있는 리더십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한국의 지난 정부가 “범죄 인정과 진상 규명, 공식 사죄 등 핵심 요구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비상식적인 협의를 한 당사자”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한일 양국 문제로 좁힐 것이 아니라 중국, 대만, 필리핀 등 다른 피해국까지 아우르는 논의를 위해 국제적인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삼국의 위안부 소녀들이 손을 맞잡은 동상이 시사하는 바를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지난 9월 기림비 제막식. 미국에서만 8번 째 위안부 기림비입니다. 일본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비판이 전 세계적으로 이어지는데도 일본 정부는 위로금 내지는 지원금 명목으로 돈을 줬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의 20주기를 앞두고 세워진 동상이 간절한 염원을 담아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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