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그녀는 왜 편지를 보냈을까?

입력 2018.04.20 (16:20) 수정 2018.04.2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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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간식유편'(簡式類編)이란 책이 있다. 1739년 이인석이라는 사람이 썼다. 쉽게 말하자면 편지쓰는 법을 정리한 책이다. 상대방 안부를 어떤 순서로 묻고 나의 안부를 어떻게 답하며 언제쯤 할 말을 하고 무슨 말로 끝낼지를 적었다. 편지가 유일한 소통의 도구이자 창구였던 당시, 더도 덜도 말고 예를 갖추고 말을 하자는 취지였다. 편지는 마음과 뜻을 담기 때문이다.

며칠 전, 딸 아이가 석죽은 얼굴로 다가왔다. 걱정이라며 자기 휴대전화 메시지를 보여줬다. "이 메시지를 본 사람은 10통을 보내지 않으면 귀신이 쫓아오고…" 일명 '행운의 편지'다. 웃음이 났지만 아이의 앙 다문 입술을 보니 겉으로 내놓지 못했다.
아이의 표정은 30여 년 전으로 기억을 되돌렸다. 어느 날 교실 안 책상 위에 놓여있던 행운의 편지. 그래도 그땐 영국에서 시작돼 케네디 암살도 나오고, 나름의 품격(?)이 있었다. 역사도 깊다. 1928년 8월 1일 자 신문에는 "미국에서 온 행운의 편지가 유행해 당국이 골머리를 앓는다"는 가십도 실렸다. 행운의 편지를 보내지 않고도 이렇게 어여쁜 딸을 둔 행운을 얻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편지 하나에 울고 웃는다.

요즘 하나의 이메일이 이슈다. 홍일표 청와대 행정관의 부인 장 모 씨가 존스홉킨스대에 보낸 메일이다. 방문연구원으로 가는 과정에서 썼다. 홍 행정관은 김기식 전 금감원장의 19대 의원 시절 보좌관이었다. 당시 김 의원과 홍 보좌관은 존스홉킨스대의 한미연구소가 방만하게 운영됐다며 질타한 바 있다. 그러니 걱정이었나 보다. 자신을 홍일표의 부인이 아닌 대한민국 감사원 국장으로 봐달라 했다. 나름 고위공무원이고 실력이 있는데, 남편에 대한 선입견이 자신을 가로막는다고 볼 수도 있다. 이미 소속기관인 감사원이나 주변에 연수간다 해놓고 거절당하면 참 곤혹스러울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모면하고자 쓴 메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 문구가 영 찝찝하다. "김기식의 행동이 연구소측을 어렵게 했다면 자신의 남편이 그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Mr. Kim's behavior brought hardship to your institute, my husband could become a mediator….)

이 편지를 작성한 건 2017년 1월이다. 당시 김 전 원장이나, 홍 행정관은 민간인 신분이었다. 문재인 정부도 출범하기 전이다. 그래서 무슨 힘이 있었겠느냐 반문하기도 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공직에는 이름이 없었지만, 김 전 원장과 홍 행정관은 민주당 싱크탱크격인 더미래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다. 민간인이었다는 말을 그대로 들을 수 없는 이유다.

남편은 국가 예산 낭비와 부실 운영을 두고 한미연구소를 비판하고 있었다. 부인인 장 씨는 그 연구소를 굳이(?) 가려 했다. 편지를 보내고 두 달 뒤 장 씨는 연구원으로 선정됐다. 장씨가 연구원으로 다녀온 뒤 연구소는 지원이 끊겼다. 홍 행정관은 관직에 복귀한 뒤 연구소 지원 중단 과정에 관여했다.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져 지나가는 뱀이 맞아 죽었다." 불경에 나오는 말이다. 우연이라 해도 원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연관기사][뉴스9] 靑 행정관 부인, ‘부적절’ 이메일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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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그녀는 왜 편지를 보냈을까?
    • 입력 2018-04-20 16:20:39
    • 수정2018-04-26 16:35:04
    취재후·사건후
조선시대 '간식유편'(簡式類編)이란 책이 있다. 1739년 이인석이라는 사람이 썼다. 쉽게 말하자면 편지쓰는 법을 정리한 책이다. 상대방 안부를 어떤 순서로 묻고 나의 안부를 어떻게 답하며 언제쯤 할 말을 하고 무슨 말로 끝낼지를 적었다. 편지가 유일한 소통의 도구이자 창구였던 당시, 더도 덜도 말고 예를 갖추고 말을 하자는 취지였다. 편지는 마음과 뜻을 담기 때문이다.

며칠 전, 딸 아이가 석죽은 얼굴로 다가왔다. 걱정이라며 자기 휴대전화 메시지를 보여줬다. "이 메시지를 본 사람은 10통을 보내지 않으면 귀신이 쫓아오고…" 일명 '행운의 편지'다. 웃음이 났지만 아이의 앙 다문 입술을 보니 겉으로 내놓지 못했다.
아이의 표정은 30여 년 전으로 기억을 되돌렸다. 어느 날 교실 안 책상 위에 놓여있던 행운의 편지. 그래도 그땐 영국에서 시작돼 케네디 암살도 나오고, 나름의 품격(?)이 있었다. 역사도 깊다. 1928년 8월 1일 자 신문에는 "미국에서 온 행운의 편지가 유행해 당국이 골머리를 앓는다"는 가십도 실렸다. 행운의 편지를 보내지 않고도 이렇게 어여쁜 딸을 둔 행운을 얻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편지 하나에 울고 웃는다.

요즘 하나의 이메일이 이슈다. 홍일표 청와대 행정관의 부인 장 모 씨가 존스홉킨스대에 보낸 메일이다. 방문연구원으로 가는 과정에서 썼다. 홍 행정관은 김기식 전 금감원장의 19대 의원 시절 보좌관이었다. 당시 김 의원과 홍 보좌관은 존스홉킨스대의 한미연구소가 방만하게 운영됐다며 질타한 바 있다. 그러니 걱정이었나 보다. 자신을 홍일표의 부인이 아닌 대한민국 감사원 국장으로 봐달라 했다. 나름 고위공무원이고 실력이 있는데, 남편에 대한 선입견이 자신을 가로막는다고 볼 수도 있다. 이미 소속기관인 감사원이나 주변에 연수간다 해놓고 거절당하면 참 곤혹스러울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모면하고자 쓴 메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 문구가 영 찝찝하다. "김기식의 행동이 연구소측을 어렵게 했다면 자신의 남편이 그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Mr. Kim's behavior brought hardship to your institute, my husband could become a mediator….)

이 편지를 작성한 건 2017년 1월이다. 당시 김 전 원장이나, 홍 행정관은 민간인 신분이었다. 문재인 정부도 출범하기 전이다. 그래서 무슨 힘이 있었겠느냐 반문하기도 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공직에는 이름이 없었지만, 김 전 원장과 홍 행정관은 민주당 싱크탱크격인 더미래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다. 민간인이었다는 말을 그대로 들을 수 없는 이유다.

남편은 국가 예산 낭비와 부실 운영을 두고 한미연구소를 비판하고 있었다. 부인인 장 씨는 그 연구소를 굳이(?) 가려 했다. 편지를 보내고 두 달 뒤 장 씨는 연구원으로 선정됐다. 장씨가 연구원으로 다녀온 뒤 연구소는 지원이 끊겼다. 홍 행정관은 관직에 복귀한 뒤 연구소 지원 중단 과정에 관여했다.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져 지나가는 뱀이 맞아 죽었다." 불경에 나오는 말이다. 우연이라 해도 원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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