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도는 ‘삼청교육’ 피해 보상

입력 2006.03.06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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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지난 80년대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시절의 이른바 삼청 교육대, 사회 정화라는 미명아래 자행된 무자비한 인권 유린 사례로 우리 현대사의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25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당시 피해자나 유족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들에 대한 명예 회복 관련법이 마련되긴 했지만 허울뿐인 보상으로 인해 피해자들은 여전히 사회의 그늘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리포트>

한가로운 농촌 마을인 경주시 건천읍. 지난 80년 8월 이 곳 주민 5명이 삼청 교육대에 끌려갔습니다. 사회 질서 문란 사범이라는 이유였지만 이들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4명은 세상을 뜨고 이제 칠순을 넘긴 백규태 노인만이 혼자 남아 있습니다. 6.25 참전 용사이기도 했던 그에게 삼청 교육대는 아직도 악몽 그 자쳅니다. 잦은 구타로 척추를 다친데다 합병증마저 얻어 반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백규태(삼청 교육대 피해자): “당뇨 왔지요 결핵 걸렸죠 또 뭐 원인 모르는 질병이 생겼어요. 팔 다리 못 쓰죠 척추 때문에 그런데 척추가 안에 염증이 도질 적에는 가다가 쉬어야 하고,,,”

하지만 뒤늦게 정부로부터 통보받은 보상금은 고작 천 4백만 원. 각종 진단서를 떼서 보상 심의위원회에 제출했지만 명확하게 후유증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답변뿐이었습니다.

고향인 목포를 등지고 연고도 없는 제주도로 쫓기듯 내려온 이양섭씨. 벌써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가슴 속 응어리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삼청 교육대에 1년간 끌려갔다 온 후
사업은 망한데다 가정마저 파탄 났습니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웃들의 따가운 시선…

이씨는 결국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엄동 설한에 팔다리에 피가 터지도록 폭행을 당했던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인터뷰> 이양섭(삼청 교육대 피해자): “완전히 갈기갈기 벗겨져서 그 당시에 내가 우리 막사까지 오는데 포복을 해서 왔는데 그 눈밭이 내가 포복해서 오는 그 길은 벌건 피로 물들어서,,,”

이 때문에 폐 결핵까지 걸려 지금은 한 쪽 폐가 거의 사라진 상태지만 정부가 통보해 온 보상금은 고작 8백 20만원. 보건소에서 결핵 약을 받아 복용한 사실을 입증해 추가 보상을 받으려 했지만 25년이 지난 지금 관련 자료가 모두 폐기돼 그마저도 어렵게 됐습니다.

<인터뷰> 이양섭(삼청 교육대 피해자): “지금의 내가 병신 되고 이것이 국가에서 보상이라고 내주는 이 자체가 참 말이 안 나오네요. 이건 어느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내 젊음을 완전히 소멸시켜버린 이 국가가….”

영정도 조화도 없이 비석만이 외롭게 서 있는 무덤 앞에 유족이 오열하고 있습니다. 삼청 교육대에 끌려 갔다 온 뒤 몸과 마음에 병을 얻어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3년 만에 숨진 이해기 씨의 묘집니다. 부인 정영주 씨는 이씨가 숨진 뒤 어린 자식 4명을 홀로 키우며 숱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인터뷰> 정영주(삼청 교육대 피해자 유족): “병원에 가서 나으면 안 된다고요. 나으면 또 잡아 간다고 병원도 입원 안 하려고 하고 약도 안 먹고. 의사 불러서 주사 링거 꼽아 놓으면 빼 버리고 그리고 창고에 숨어요. 정신이 이상해서 나왔어요.”

이씨는 삼청 교육대로 끌려 가기 전만 해도 주유소와 신문지국을 운영하면서 농사까지 지었지만 어느 것 하나 인정되지 않고 단순 노무자로 분류됐습니다. 유족들이 받을 보상금은 천 6백만 원뿐입니다. 제대로 보상을 받기 위해 남편의 당시 수입을 입증하려 해도 근거 자료를 구하기가 어려운데다 이웃 주민들의 사실 확인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인터뷰> 정영주(삼청 교육대 피해자 유족): “너무 원망스럽죠 20년 싸워 가지고 나온 돈이 이렇게 나왔어요. 20년을 싸웠어요 정부하고요”.

삼청 교육 당시 군부대 내에서 목숨을 잃은 입소자 수나 이들의 사망 원인은 아직 명쾌하게 확인되지 못한 상탭니다. 국방부 공식 발표로는 50여명이 사고나 가혹행위 등에 의해 우발적으로 숨진 것으로 돼 있습니다. 하지만 실종 처리된 사안에 대한 재조사가 이뤄지면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뿐더러 잔혹한 살상 행위도 있었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인터뷰> 삼청 교육대 피해자: “우리는 너무 억울해서 사단장 면담을 시켜라. 이런 과정에서 충돌이 있었어요 . 밀고 나가는데 소대장이 발포 명령을 내려 버린 거지. 그냥 M 16으로 그대로 사정없이 갈겨 버렸지..”

지난달 21일 국가기록원은 삼청 교육대 사건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상당수의 국가 기록물이 비밀이 해제되지 않은 상태로 대거 보존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삼청 교육 피해자들은 국가기록원의 발표로 한껏 고무된 분위기였습니다. 국방부 과거사 진상 규명위원회가 이미 지난해 9월 삼청 교육대 사건을 조사 대상에 포함시킨 상황에서 제대로 된 명예 회복과 보상이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방부는 국가기록원의 발표와는 달리 상당 부분의 자료가 이미 과거 국회 청문회 등을 통해 공개된 것이며 더 이상 특별히 새로운 자료가 나올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정확한 진상 규명 작업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인터뷰> 탁미선(삼청 교육 피해자 및 유족 연합 대표): “지금 보상도 보상이지만 우리 피해자 분들은 사실은 진상 규명을 더 원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진상 규명이 안되다 보니까 특히 젊은 층들은 거의 깡패 집단이 다녀온 걸로 되어 있어서 집회를 하자고 그래도 나올 수 없고요.”

지난 80년 당시 삼청 교육대에는 외국인도 끌려간 사실이 25 년이나 지나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당시 20대 초반의 청춘이었던 유기본 씨의 국적은 타이완. 화교인 유씨는 술자리에서의 사소한 싸움이 화근이 됐습니다. 상대방과 합의를 했지만 6개월이 지나 막무가내로 연행된 유씨에겐 외국인이란 사실조차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유씨는 당시 구타로 인한 온갖 후유증에 정신 질환까지 앓고 있습니다.

<인터뷰> 유기본(삼청 교육대 피해자/타이완 국적):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서 당했을 때는 그렇게 하더니 막상 중국 사람인 내가 이렇게 당하니까 모른 채 하고 이제 와서 이렇게 실컷 두드려 패 놓고 거의 반병신이나 만들어 놓고서 이제 와서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유씨는 지난 2004년 삼청 교육 피해자 명예회복과 보상법이 시행돼 보상 신청을 했습니다.
하지만 피해 사실이 확인됐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한 푼도 보상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 남인수(삼청 교육대 피해자 명예회복.보상 심의위원회 법무 담당): “삼청 보상법상의 청구권은 사회적 기본권으로 해석을 하여 그 대상을 대한민국 국민에 한정하고 외국인은 제외하고 있습니다. 화교나 외국인이 설마 입소를 했으리라는 것까지는 아마 입법 당시에 확인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 80년 8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사회악 일소 특별 조치 발표로 전국 각지에서 6만여 명이 체포됐습니다. 이 가운데 4만 여명은 군부대에서 이른바 삼청 교육이라는 순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삼청 교육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신군부가 정권 유지 차원에서 사회 정화라는 미명아래 유래 없는 인권 탄압을 자행한 것이었습니다.

<인터뷰> 이창수(새사회연대 대표): “사회질서를 바로 잡는 명목을 갖고 삼청 교육대를 운영했는데 그것은 사실상 민주 세력의 저항 의지를 꺾고 사회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어 정권을 유지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삼청 교육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보상에 관한 법률은 피해자와 인권 단체들의 꾸준한 탄원과 호소로 20여 년이 지난 2004년에야 제정됐습니다. 하지만 보상심의위원회가 지난해 7월 말까지로 정한 마감 시한까지 접수를 마친 보상 신청 건수는 4천 6백여 건에 불과합니다.

애초부터 입소 사실 자체만으로는 보상 대상에서 제외 덴데다 정확한 사망 원인이나 부상, 후유증 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많은 피해자들이 아예 신청을 포기한 것입니다.

<인터뷰> 탁미선(삼청 교육 피해자 및 유족 연합 대표): “지금 삼청교육대 피해자 분들이 25년이 지나다 보니까 지금 병원 기록도 거의 없고요. 그러다 보니까 실질적인 보상이 안 되는데 특히 지금 보상에서는 입소자 전체에게 되어 있는 게 아니라 부상자라든지 사망자에게 되어 있는데 부상자들은 병원 기록이 없으면 거의 지금 보상 자체가 안 되고 있어요.”

보상 심의위원회는 법조인과 의사, 공무원, 시민 단체 등으로 구성된 각 분과 위원회에서 나름대로 정밀 조사를 거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인터뷰> 김해식(삼청 교육 피해자 명예회복.보상 심의위원회 총괄팀장):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입증이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저희가 참고인 진술 등 최대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확인한 후에 전문의 검진을 참고하여 위원회에서 결정하고 있습니다. 저희로서는 그 검진 결과를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자 측과 보상 심의위원회간에 똑같은 병명을 두고 판단이 엇갈리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년 상반기까지 보상을 완료하려던 계획도 차질이 불가피한 실정입니다. 현재까지 보상이 이뤄진 것은 접수된 4천 6백 여 건의 32%인 천 4백 80건에 불과합니다.

<인터뷰> 김해식(삼청 교육 피해자 명예회복.보상 심의위원회 총괄팀장): “오래된 일이기 때문에 증거 수집하는 데 상당 시간을 소요하고 있기 때문에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상금이 피해자들이 느끼기에 적은 금액이기 때문에 재심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정치권 일각에서도 보상 과정의 불합리함을 지적하며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개정 법안은 보상 심의 위원회에 피해자 측 대표 5명 이상을 참여시켜 공정성을 높이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보상 대상에 부상자나 사망자뿐 아니라 입소자 모두를 포함시키고 입소 기간 동안 상실한 소득과 치료비 외에 생활 지원금 등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장영달(열린 우리당 의원): “그 때 국가공권력에 의해서 피해를 받은 모든 이들이 원상 회복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최소한의 상처의 치유 그리고 법적인 보호 이런 것들을 복구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번에 개정안을 만들게 됐죠.”

그러나 이렇게 하려면 적어도 3천억 원 이상의 재원이 더 소요될 것으로 보여 개정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에는 적잖은 난관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2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명예 회복과 보상법이 마련되긴 했지만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보상 규정으로 삼청 교육대 피해자들의 상처를 보듬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보상도 보상이거니와 정확한 진상 규명을 통한 명예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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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겉도는 ‘삼청교육’ 피해 보상
    • 입력 2006-03-06 10:39:37
    취재파일K
<앵커 멘트> 지난 80년대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시절의 이른바 삼청 교육대, 사회 정화라는 미명아래 자행된 무자비한 인권 유린 사례로 우리 현대사의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25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당시 피해자나 유족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들에 대한 명예 회복 관련법이 마련되긴 했지만 허울뿐인 보상으로 인해 피해자들은 여전히 사회의 그늘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리포트> 한가로운 농촌 마을인 경주시 건천읍. 지난 80년 8월 이 곳 주민 5명이 삼청 교육대에 끌려갔습니다. 사회 질서 문란 사범이라는 이유였지만 이들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4명은 세상을 뜨고 이제 칠순을 넘긴 백규태 노인만이 혼자 남아 있습니다. 6.25 참전 용사이기도 했던 그에게 삼청 교육대는 아직도 악몽 그 자쳅니다. 잦은 구타로 척추를 다친데다 합병증마저 얻어 반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백규태(삼청 교육대 피해자): “당뇨 왔지요 결핵 걸렸죠 또 뭐 원인 모르는 질병이 생겼어요. 팔 다리 못 쓰죠 척추 때문에 그런데 척추가 안에 염증이 도질 적에는 가다가 쉬어야 하고,,,” 하지만 뒤늦게 정부로부터 통보받은 보상금은 고작 천 4백만 원. 각종 진단서를 떼서 보상 심의위원회에 제출했지만 명확하게 후유증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답변뿐이었습니다. 고향인 목포를 등지고 연고도 없는 제주도로 쫓기듯 내려온 이양섭씨. 벌써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가슴 속 응어리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삼청 교육대에 1년간 끌려갔다 온 후 사업은 망한데다 가정마저 파탄 났습니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웃들의 따가운 시선… 이씨는 결국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엄동 설한에 팔다리에 피가 터지도록 폭행을 당했던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인터뷰> 이양섭(삼청 교육대 피해자): “완전히 갈기갈기 벗겨져서 그 당시에 내가 우리 막사까지 오는데 포복을 해서 왔는데 그 눈밭이 내가 포복해서 오는 그 길은 벌건 피로 물들어서,,,” 이 때문에 폐 결핵까지 걸려 지금은 한 쪽 폐가 거의 사라진 상태지만 정부가 통보해 온 보상금은 고작 8백 20만원. 보건소에서 결핵 약을 받아 복용한 사실을 입증해 추가 보상을 받으려 했지만 25년이 지난 지금 관련 자료가 모두 폐기돼 그마저도 어렵게 됐습니다. <인터뷰> 이양섭(삼청 교육대 피해자): “지금의 내가 병신 되고 이것이 국가에서 보상이라고 내주는 이 자체가 참 말이 안 나오네요. 이건 어느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내 젊음을 완전히 소멸시켜버린 이 국가가….” 영정도 조화도 없이 비석만이 외롭게 서 있는 무덤 앞에 유족이 오열하고 있습니다. 삼청 교육대에 끌려 갔다 온 뒤 몸과 마음에 병을 얻어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3년 만에 숨진 이해기 씨의 묘집니다. 부인 정영주 씨는 이씨가 숨진 뒤 어린 자식 4명을 홀로 키우며 숱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인터뷰> 정영주(삼청 교육대 피해자 유족): “병원에 가서 나으면 안 된다고요. 나으면 또 잡아 간다고 병원도 입원 안 하려고 하고 약도 안 먹고. 의사 불러서 주사 링거 꼽아 놓으면 빼 버리고 그리고 창고에 숨어요. 정신이 이상해서 나왔어요.” 이씨는 삼청 교육대로 끌려 가기 전만 해도 주유소와 신문지국을 운영하면서 농사까지 지었지만 어느 것 하나 인정되지 않고 단순 노무자로 분류됐습니다. 유족들이 받을 보상금은 천 6백만 원뿐입니다. 제대로 보상을 받기 위해 남편의 당시 수입을 입증하려 해도 근거 자료를 구하기가 어려운데다 이웃 주민들의 사실 확인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인터뷰> 정영주(삼청 교육대 피해자 유족): “너무 원망스럽죠 20년 싸워 가지고 나온 돈이 이렇게 나왔어요. 20년을 싸웠어요 정부하고요”. 삼청 교육 당시 군부대 내에서 목숨을 잃은 입소자 수나 이들의 사망 원인은 아직 명쾌하게 확인되지 못한 상탭니다. 국방부 공식 발표로는 50여명이 사고나 가혹행위 등에 의해 우발적으로 숨진 것으로 돼 있습니다. 하지만 실종 처리된 사안에 대한 재조사가 이뤄지면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뿐더러 잔혹한 살상 행위도 있었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인터뷰> 삼청 교육대 피해자: “우리는 너무 억울해서 사단장 면담을 시켜라. 이런 과정에서 충돌이 있었어요 . 밀고 나가는데 소대장이 발포 명령을 내려 버린 거지. 그냥 M 16으로 그대로 사정없이 갈겨 버렸지..” 지난달 21일 국가기록원은 삼청 교육대 사건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상당수의 국가 기록물이 비밀이 해제되지 않은 상태로 대거 보존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삼청 교육 피해자들은 국가기록원의 발표로 한껏 고무된 분위기였습니다. 국방부 과거사 진상 규명위원회가 이미 지난해 9월 삼청 교육대 사건을 조사 대상에 포함시킨 상황에서 제대로 된 명예 회복과 보상이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방부는 국가기록원의 발표와는 달리 상당 부분의 자료가 이미 과거 국회 청문회 등을 통해 공개된 것이며 더 이상 특별히 새로운 자료가 나올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정확한 진상 규명 작업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인터뷰> 탁미선(삼청 교육 피해자 및 유족 연합 대표): “지금 보상도 보상이지만 우리 피해자 분들은 사실은 진상 규명을 더 원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진상 규명이 안되다 보니까 특히 젊은 층들은 거의 깡패 집단이 다녀온 걸로 되어 있어서 집회를 하자고 그래도 나올 수 없고요.” 지난 80년 당시 삼청 교육대에는 외국인도 끌려간 사실이 25 년이나 지나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당시 20대 초반의 청춘이었던 유기본 씨의 국적은 타이완. 화교인 유씨는 술자리에서의 사소한 싸움이 화근이 됐습니다. 상대방과 합의를 했지만 6개월이 지나 막무가내로 연행된 유씨에겐 외국인이란 사실조차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유씨는 당시 구타로 인한 온갖 후유증에 정신 질환까지 앓고 있습니다. <인터뷰> 유기본(삼청 교육대 피해자/타이완 국적):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서 당했을 때는 그렇게 하더니 막상 중국 사람인 내가 이렇게 당하니까 모른 채 하고 이제 와서 이렇게 실컷 두드려 패 놓고 거의 반병신이나 만들어 놓고서 이제 와서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유씨는 지난 2004년 삼청 교육 피해자 명예회복과 보상법이 시행돼 보상 신청을 했습니다. 하지만 피해 사실이 확인됐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한 푼도 보상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 남인수(삼청 교육대 피해자 명예회복.보상 심의위원회 법무 담당): “삼청 보상법상의 청구권은 사회적 기본권으로 해석을 하여 그 대상을 대한민국 국민에 한정하고 외국인은 제외하고 있습니다. 화교나 외국인이 설마 입소를 했으리라는 것까지는 아마 입법 당시에 확인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 80년 8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사회악 일소 특별 조치 발표로 전국 각지에서 6만여 명이 체포됐습니다. 이 가운데 4만 여명은 군부대에서 이른바 삼청 교육이라는 순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삼청 교육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신군부가 정권 유지 차원에서 사회 정화라는 미명아래 유래 없는 인권 탄압을 자행한 것이었습니다. <인터뷰> 이창수(새사회연대 대표): “사회질서를 바로 잡는 명목을 갖고 삼청 교육대를 운영했는데 그것은 사실상 민주 세력의 저항 의지를 꺾고 사회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어 정권을 유지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삼청 교육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보상에 관한 법률은 피해자와 인권 단체들의 꾸준한 탄원과 호소로 20여 년이 지난 2004년에야 제정됐습니다. 하지만 보상심의위원회가 지난해 7월 말까지로 정한 마감 시한까지 접수를 마친 보상 신청 건수는 4천 6백여 건에 불과합니다. 애초부터 입소 사실 자체만으로는 보상 대상에서 제외 덴데다 정확한 사망 원인이나 부상, 후유증 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많은 피해자들이 아예 신청을 포기한 것입니다. <인터뷰> 탁미선(삼청 교육 피해자 및 유족 연합 대표): “지금 삼청교육대 피해자 분들이 25년이 지나다 보니까 지금 병원 기록도 거의 없고요. 그러다 보니까 실질적인 보상이 안 되는데 특히 지금 보상에서는 입소자 전체에게 되어 있는 게 아니라 부상자라든지 사망자에게 되어 있는데 부상자들은 병원 기록이 없으면 거의 지금 보상 자체가 안 되고 있어요.” 보상 심의위원회는 법조인과 의사, 공무원, 시민 단체 등으로 구성된 각 분과 위원회에서 나름대로 정밀 조사를 거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인터뷰> 김해식(삼청 교육 피해자 명예회복.보상 심의위원회 총괄팀장):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입증이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저희가 참고인 진술 등 최대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확인한 후에 전문의 검진을 참고하여 위원회에서 결정하고 있습니다. 저희로서는 그 검진 결과를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자 측과 보상 심의위원회간에 똑같은 병명을 두고 판단이 엇갈리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년 상반기까지 보상을 완료하려던 계획도 차질이 불가피한 실정입니다. 현재까지 보상이 이뤄진 것은 접수된 4천 6백 여 건의 32%인 천 4백 80건에 불과합니다. <인터뷰> 김해식(삼청 교육 피해자 명예회복.보상 심의위원회 총괄팀장): “오래된 일이기 때문에 증거 수집하는 데 상당 시간을 소요하고 있기 때문에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상금이 피해자들이 느끼기에 적은 금액이기 때문에 재심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정치권 일각에서도 보상 과정의 불합리함을 지적하며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개정 법안은 보상 심의 위원회에 피해자 측 대표 5명 이상을 참여시켜 공정성을 높이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보상 대상에 부상자나 사망자뿐 아니라 입소자 모두를 포함시키고 입소 기간 동안 상실한 소득과 치료비 외에 생활 지원금 등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장영달(열린 우리당 의원): “그 때 국가공권력에 의해서 피해를 받은 모든 이들이 원상 회복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최소한의 상처의 치유 그리고 법적인 보호 이런 것들을 복구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번에 개정안을 만들게 됐죠.” 그러나 이렇게 하려면 적어도 3천억 원 이상의 재원이 더 소요될 것으로 보여 개정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에는 적잖은 난관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2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명예 회복과 보상법이 마련되긴 했지만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보상 규정으로 삼청 교육대 피해자들의 상처를 보듬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보상도 보상이거니와 정확한 진상 규명을 통한 명예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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