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실파’ 동인 백영수 화백

입력 2007.11.08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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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다들 가난했어요. 게다가 그림 그린다고 하면 한강에 가서 뛰어내리라고 할 때였지. 그래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술대학이 많이 생겼고, 후배들도 우리 뒤를 이었지요"
30년째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는 백영수(85) 화백이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 당시를 회상한 말이다.
김환기(1913-1974)가 주축이 된 '신사실파'는 해방과 전쟁으로 어수선하던 우리나라에서 거의 처음으로 순수 조형미술을 하겠다며 1947년에 만들어진 미술가 모임이다.
이 모임에 동참했던 작가는 김환기를 비롯해 유영국, 장욱진, 이규상, 이중섭, 백영수 등이다. 한국근대미술의 거목들인 이들 가운데 가장 막내였던 백영수 화백만 유일하게 생존해있다.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마련한 '신사실파 60주년 기념전'은 국내 미술계에서는 드물게 1930-1950년대에 그려진 신사실파 동인들의 작품을 모은 전시다. 전시에는 1953년 3월 부산 광복동에 피란 나와있던 국립박물관에서 열렸던 신사실파 3회전에 출품됐던 작품 몇 점도 모습을 드러냈다.
작가 6명의 전시공간을 각각 구분한 이번 전시에서는 수십년간 보기 힘들었던 귀한 작품이 많다.
김환기가 달과 산, 항아리 등을 넣은 파란색 풍경화들이 개인소장가와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의 도움으로 공개됐고, 김환기가 색다른 화풍으로 그린 1951년 작품 '피난열차', 김환기가 추상화로 진입하는 문턱에 해당하는 작품인 1938년작 '론도' 등도 귀한 작품이다.
위작파문으로 전시가 잘 되지 않고 있는 이중섭의 황소 그림, 아이들과 물고기 등의 작품도 오래간만에 볼 수 있다. 산을 잘 그린 유영국의 1950년대 산 그림, 장욱진의 1940-1950년대 유화 등도 여러 점 소개된다.
전시개막을 하루 앞둔 8일 미술관에서 만난 백영수 화백은 "우리나라에는 이런 근대미술 소개전이 많이 열려야된다"며 "현대미술만 다루는 것은 우리 미술사에서 큰 부분을 건너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김환기도 뉴욕으로 가서 예술세계를 꽃피웠고 유영국, 장욱진 등도 끝까지 작품활동을 잘 했지만 가장 불쌍한 사람은 이중섭"이라며 요즘의 위작파문과 관련해서도 "그가 살아있을 때도 그를 괴롭혔던 나쁜 미술인들이 많았다"고 가슴아파했다.
그는 신사실파 동인들이 피란시절 조각가 윤효중이 있던 진해로 놀러 다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시 윤효중은 해군본부 의뢰로 충무공 동상을 제작하면서 월급을 받고 있어서 신사실파가 진해로 놀러가면 여관비, 식비, 술값 등을 도맡아 대며 반겨줬다.
"그날도 종일 몰려다닌 뒤 여관에서 자는데 이중섭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해요. 김환기가 벌떡 일어나 이중섭을 발로 차며 '왜 밤마다 울어대. 재수없게스리…' 라고 화를 내자 이중섭이 '너무 고마워서…'라며 훌쩍여요. 그 이야기듣고 나도 마음이 서글퍼졌지. 이중섭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누군가가 이중섭이 그린 아이들 그림을 보고 '공산주의 그림 같다'고 무심코 한마디 했거든. 그러자 이중섭이 밤새 잠을 못자고 고민하더니 그 다음날 아침 파출소로 가서 '나는 공산주의자 아니에요'라고 해. 듣던 순경이 기가차서 그냥 가라고 쫓아냈어요"
백 화백은 1960년대, 1970년대 교과서와 어린이 잡지 '새벗', '어깨동무' 같은 잡지에 삽화로도 잘 알려졌으며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에도 20차례 이상 전시회를 가진 작가다. 머리를 갸우뚱한 채 발가벗은 까까머리 소년과 나무, 새 등이 등장하는 그의 그림은 편안하고 토속적이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그동안 간직하고 있던 많은 편지와 자료사진도 공개했다. 별관 전시실에 마련된 기록 사진과 전시회 리플릿 등은 신사실파 동인들의 혈기방장했던 30대 시절을 보여준다.
아직도 그림을 그린다는 그는 "이제는 파리와 의정부의 집을 오가며 살 생각"이라며 "마음은 아직 30대라 전시회도 한번 근사하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환기미술관의 전시는 9일부터 내년 1월 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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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사실파’ 동인 백영수 화백
    • 입력 2007-11-08 17:13:00
    연합뉴스
"그때는 다들 가난했어요. 게다가 그림 그린다고 하면 한강에 가서 뛰어내리라고 할 때였지. 그래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술대학이 많이 생겼고, 후배들도 우리 뒤를 이었지요" 30년째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는 백영수(85) 화백이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 당시를 회상한 말이다. 김환기(1913-1974)가 주축이 된 '신사실파'는 해방과 전쟁으로 어수선하던 우리나라에서 거의 처음으로 순수 조형미술을 하겠다며 1947년에 만들어진 미술가 모임이다. 이 모임에 동참했던 작가는 김환기를 비롯해 유영국, 장욱진, 이규상, 이중섭, 백영수 등이다. 한국근대미술의 거목들인 이들 가운데 가장 막내였던 백영수 화백만 유일하게 생존해있다.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마련한 '신사실파 60주년 기념전'은 국내 미술계에서는 드물게 1930-1950년대에 그려진 신사실파 동인들의 작품을 모은 전시다. 전시에는 1953년 3월 부산 광복동에 피란 나와있던 국립박물관에서 열렸던 신사실파 3회전에 출품됐던 작품 몇 점도 모습을 드러냈다. 작가 6명의 전시공간을 각각 구분한 이번 전시에서는 수십년간 보기 힘들었던 귀한 작품이 많다. 김환기가 달과 산, 항아리 등을 넣은 파란색 풍경화들이 개인소장가와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의 도움으로 공개됐고, 김환기가 색다른 화풍으로 그린 1951년 작품 '피난열차', 김환기가 추상화로 진입하는 문턱에 해당하는 작품인 1938년작 '론도' 등도 귀한 작품이다. 위작파문으로 전시가 잘 되지 않고 있는 이중섭의 황소 그림, 아이들과 물고기 등의 작품도 오래간만에 볼 수 있다. 산을 잘 그린 유영국의 1950년대 산 그림, 장욱진의 1940-1950년대 유화 등도 여러 점 소개된다. 전시개막을 하루 앞둔 8일 미술관에서 만난 백영수 화백은 "우리나라에는 이런 근대미술 소개전이 많이 열려야된다"며 "현대미술만 다루는 것은 우리 미술사에서 큰 부분을 건너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김환기도 뉴욕으로 가서 예술세계를 꽃피웠고 유영국, 장욱진 등도 끝까지 작품활동을 잘 했지만 가장 불쌍한 사람은 이중섭"이라며 요즘의 위작파문과 관련해서도 "그가 살아있을 때도 그를 괴롭혔던 나쁜 미술인들이 많았다"고 가슴아파했다. 그는 신사실파 동인들이 피란시절 조각가 윤효중이 있던 진해로 놀러 다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시 윤효중은 해군본부 의뢰로 충무공 동상을 제작하면서 월급을 받고 있어서 신사실파가 진해로 놀러가면 여관비, 식비, 술값 등을 도맡아 대며 반겨줬다. "그날도 종일 몰려다닌 뒤 여관에서 자는데 이중섭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해요. 김환기가 벌떡 일어나 이중섭을 발로 차며 '왜 밤마다 울어대. 재수없게스리…' 라고 화를 내자 이중섭이 '너무 고마워서…'라며 훌쩍여요. 그 이야기듣고 나도 마음이 서글퍼졌지. 이중섭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누군가가 이중섭이 그린 아이들 그림을 보고 '공산주의 그림 같다'고 무심코 한마디 했거든. 그러자 이중섭이 밤새 잠을 못자고 고민하더니 그 다음날 아침 파출소로 가서 '나는 공산주의자 아니에요'라고 해. 듣던 순경이 기가차서 그냥 가라고 쫓아냈어요" 백 화백은 1960년대, 1970년대 교과서와 어린이 잡지 '새벗', '어깨동무' 같은 잡지에 삽화로도 잘 알려졌으며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에도 20차례 이상 전시회를 가진 작가다. 머리를 갸우뚱한 채 발가벗은 까까머리 소년과 나무, 새 등이 등장하는 그의 그림은 편안하고 토속적이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그동안 간직하고 있던 많은 편지와 자료사진도 공개했다. 별관 전시실에 마련된 기록 사진과 전시회 리플릿 등은 신사실파 동인들의 혈기방장했던 30대 시절을 보여준다. 아직도 그림을 그린다는 그는 "이제는 파리와 의정부의 집을 오가며 살 생각"이라며 "마음은 아직 30대라 전시회도 한번 근사하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환기미술관의 전시는 9일부터 내년 1월 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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