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민성 “여전히 미래를 설계중”①

입력 2007.12.0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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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면 매서운 겨울 날씨에 옷을 빼앗겼다는 생각 보다는 겨울바람 그대로를 맞이하며 묵은 것들을 씻어 내고자 하는 미동 없는 몸부림으로 다가 온다.
봄, 여름, 가을을 거치며 원치 않게 짊어 져야 했을 묵은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겨울나무는 그래서 특별하다. 겨울이라는 계절의 존재감도 여기에 있다. 매서운 바람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져 시리고 시릴 테지만 다가오는 봄에는 가볍고 올 곧을 테니 대수롭지 않다.

겨울나무 같은 사람이 있다. FC 서울의 이민성 선수가 그 주인공이다. 부상 때문에 올 시즌을 일찌감치 마무리 한 그에게 2007년은 체증 같은 한해였다.
하지만 그는 묵은 것들은 멀찍이 밀어 두고 2008년 시즌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다. FC 서울 구리연습구장의 겨울바람은 지난 미련과 아쉬움은 모두 털어 버리라는 듯 이민성 선수를 향해 불어대고 있었다.



재활기간은 온전한 자기계발 시간

“3개월간 독일에 머물면서 재활 치료를 받다가 7월에 귀국했어요. 플레이오프에 나간다는 가정 하에 훈련을 해왔는데 아쉽게도 일찍 시즌을 접게 되었네요. 지금은 마무리 훈련하면서 내년을 준비하고 있어요. 부상은 거의 다 완쾌되었어요. 경기에 지장 없습니다.”

예상대로 근황과 함께 부상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민성 선수는 지난 4월 4일 경남과의 원정 경기에서 오른쪽 무릎 십자 인대가 완전히 파열되어 6개월간 경기를 뛰기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헌데 그의 음성은 의외로 매우 밝았다.
스포츠 선수들이 부상을 입게 되면 몸보다는 마음이 다치기 마련이다. 죄책감, 좌절감 등과 같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쉽사리 마음을 다잡지 못한다. 하지만 이민성 선수는 재활 기간을 온전히 자기 계발 시간으로 만들어 기어이 장점을 단점 위에 올려놓는다.

“재활 기간 동안 제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겼어요. 독일에서 팀, 앞으로의 진로 등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죠. 하지만 그라운드에 나가지 못하는 것 자체는 너무 아쉬웠어요. 제가 너무 원했던 포지션을 맡았는데 경기를 계속할 수 없었던 점이 아쉬웠죠. 한 시즌을 무사히 마쳤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나서 팬들에게 평가를 받는 자리에 섰다면 훨씬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수비형 미드필더로 다시 태어나다

결국 그 역시 누구나 가지기 마련인 이러한 아쉬움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은 아닐까 무던히 고민하는 축구 선수였던 것이다.
심리적 갈등 속에서도 무사히 부상을 극복하고 그라운드로 돌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을 무엇보다도 새로운 포지션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민성 선수는 올 시즌 들어 본격적으로 수비수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한 기간은 짧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줬고 이는 곧 내년 시즌에 대한 충만한 기대감으로 작용한다.



“수비형 미드필더를 하면서 심적으로는 오히려 편했어요. 중앙 수비수를 보게 되면 경기의 마지막 선이기 때문에 10번 중에 9번 잘하다가도 1번 실패하고 실점하면 모든 책임이 돌아오기 때문에 심적 부담이 크죠. 반면 미드필더에서는 선수들을 컨트롤 하기가 쉽고 볼터치 횟수도 많기 때문에 마음이 훨씬 편해요. 개인적으로 수비형 미드필더에 더 맞는 것 같아요. 이을용, 기성용 선수와 호흡이 잘 맞았어요. 그래서 더 하기 수월했던 것 같아요.”

이민성 선수의 보직 변경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그가 지키는 서울의 중원은 굳건했다.
실제로 2007 시즌 초반 7경기에서 서울은 6승 1무라는 성적을 거두었는데 그 공로를 이민성 선수에게 돌리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민성 선수는 그때 경기를 이렇게 기억한다.

“제가 항상 그 경기를 봤었는데 저보다는 (이)청용이나 (이)을용이가 상당히 많은 수비 역할을 해줬어요. 제가 못한 부분을 (이)청용이와 (이)을용이가 많이 메워줬던 그런 경기였죠. (이)청용이 같은 경우는 젊은데다가 기동력이 좋아서 줄기차게 수비, 공격을 해줬고 그래서 저는 거의 중앙에서 위치 선정만 하고 있을 수 있었죠. (이)청용이와 (기)성용이가 컨트롤을 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에요.”

"제가 대인마크가 좋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못하는 것 같아요.(웃음) 공격수들을 따라다는데 많이 지쳤고 내가 항상 수동적이 되는 것 같아 너무 싫었어요. 또 공격수들은 자동적으로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잖아요. 저는 스피드도 부족해서 대인마크를 잘 못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헤딩력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생각해봐도 장점은 없는 것 같아요. 옆에서 리딩 역할을 해주는 것이 그나마 장점인 것 같네요. 선수들이 쉽게 쉽게 볼을 줄 수 있는거요.”

겸손하다. K-리그에 데뷔한지는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었고 올림픽 대표와 월드컵 대표 경력까지 있는 그가 장점이 없다고 말한다.
본인의 입으로 말하지 않는 자랑거리를 들추고 싶은 장난기 아닌 장난기가 발동하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민성 선수의 과거 행적을 좇았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어요”

“축구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제가 누나가 셋이거든요. 여자 형제들 틈에서 자라다 보니 성격이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어요. 그런 저를 보고 아버님께서 축구를 권하셨고 지금까지 하게 됐죠.”

“축구를 처음 시작할 때는 골키퍼였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센터 포워드를 보면서 중, 고등학교 때는 공격수를 많이 했어요. 대학교 들어와서 수비수로 전향했고 여기까지 왔죠. 포항 선수 시절에 최순호 감독님께서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겼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여기까지 왔어요.”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던 그가 축구를 통해 활동적이고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로 변모했다. 축구 말고는 다른 꿈을 가져 볼 여유도 없었다. 공격수, 수비수, 미드필더, 골키퍼에 이르기까지. 축구의 영역도 그에게는 광활하게만 느껴졌다.
산이 높을수록, 혹은 험할수록 정복하고자 하는 욕구는 강해지는 법.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어느새 또 다른 기회가 되어 이민성 선수 앞에 나타났다.

“고 2때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빈혈에 걸렸어요. 철 결핍성 빈혈이었죠. 철이 일반 사람들의 반 정도 수치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최대의 위기였죠. 약물 치료만 6개월을 받았으니까요. 대학 진학 문제가 걸려있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는데 주춤하게 된 것이죠. 그때 아주대학교의 김희태 감독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셨죠. 고등학교 때 아주대와 여러 차례 경기를 가졌는데 그때 저를 좋게 보셔서 안 좋은 상황에서도 뽑아주셨던 것 같아요.”

“고 2때 축구 선수에 대해 가장 많은 생각을 했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기도 했어요. 부산 대우 시절에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죠. 부산 대우에 처음 입단했을 때 워낙 나이든 선배가 많아 주눅이 많이 들었거든요. 항상 우러러 보고 영웅이라 생각했던 선배들과 운동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었어요.”

“그래도 그때 ‘민똘’이라는 별명을 얻었죠. 현재 인천의 장외룡 감독님께서 대우의 코치로 계셨을 때 제가 똘똘하다며 지어주신 별명이었어요(웃음).”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한 차례 시끌벅적 하더니 선수들이 유유히 숙소를 벗어난다. 동계 훈련을 마치고 나름의 자유 시간을 보내려고 분주한 모습이다.
그 선수들에게 시선을 두지는 못해도 호기심 많은 내 귀는 연신 그들의 대화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문득 이민성 선수의 여가 시간이 궁금해졌다.

“내 취미는 딸과 노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딸하고 같이 노는 것이 취미가 됐어요. 애교 많은 딸이 너무 좋아요. 달려와서 뽀뽀하고 그래요(웃음). 아내는 후배의 소개로 만났어요. (이민성 선수의 팬은 아니었나요?) 아니에요. 축구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이었어요. 2003년도에 결혼했죠. (이민성 선수의 어떤 점이 좋았다고 하던가요?) 착하데요. 말 잘 듣고(웃음).”

“운동 선수들이 매번 똑같은데 전지 훈련이다 합숙한다 하면서 많이 소홀해요. 올해는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꼈던 한해였어요. 특히 제가 부상 당했을 때 아내가 많이 위로해줬어요. 지금이 전부는 아니고 오래 쉬었기 때문에 모든 에너지가 충전되어서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줬어요. 미안함과 고마움 때문에 항상 잘해주려고 노력해요. 아내 말 잘 듣고 일찍 귀가 하고 남는 시간은 무조건 가족과 보내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나이를 잊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이민성 선수의 체력도 가족이 그 원동력이었다.

“겨울철이 되면 아내가 보약을 해주고 장인 어른께서 매년 산삼을 구해다 주세요. 대부분 잘 먹는데 보양식이라면 이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운동 시간 외적으로는 대부분 집에 있는 편입니다. 외출이나 사적인 만남을 잘 하지 않죠. 체력이 소모되는 행동을 자제하는 것이에요. 결혼하고 나서 4년 정도 이렇게 생활했는데 체력적으로 많이 비축이 되는 것 같아요.”

이처럼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바탕으로 젊은 선수들과 맞서며 2007년 시즌과 함께 그라운드 주전 자리 굳히기에 들어갔다.
시즌 초반 미드필더진과의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FC 서울은 무패 행진을 이어갔지만 이민성 선수의 부상과 함께 그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다수의 서울 주전 선수가 부상을 입게 되고 강력한 6강 플레이오프 후보로 점철되던 FC 서울은 결국 6강 PO행 티켓을 타 구단에 내줘야만 했다.

“한국을 대표하고 서울을 대표하는 팀으로써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선수들이 많이 반성을 하고 있어요. 서울 시민들에게도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떨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변명할 것이 없고 선수들의 실력 문제였다고 생각해요. 내년 시즌에는 더 독한 마음으로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팀의 맏형다운 발언이었다. 서울 구단에 몸담은 지도 올해도 3년째인데 그래서 인지 구단이나 서울 팬들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K-리그 명예기자 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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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이민성 “여전히 미래를 설계중”①
    • 입력 2007-12-05 17:39:59
    축구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면 매서운 겨울 날씨에 옷을 빼앗겼다는 생각 보다는 겨울바람 그대로를 맞이하며 묵은 것들을 씻어 내고자 하는 미동 없는 몸부림으로 다가 온다. 봄, 여름, 가을을 거치며 원치 않게 짊어 져야 했을 묵은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겨울나무는 그래서 특별하다. 겨울이라는 계절의 존재감도 여기에 있다. 매서운 바람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져 시리고 시릴 테지만 다가오는 봄에는 가볍고 올 곧을 테니 대수롭지 않다. 겨울나무 같은 사람이 있다. FC 서울의 이민성 선수가 그 주인공이다. 부상 때문에 올 시즌을 일찌감치 마무리 한 그에게 2007년은 체증 같은 한해였다. 하지만 그는 묵은 것들은 멀찍이 밀어 두고 2008년 시즌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다. FC 서울 구리연습구장의 겨울바람은 지난 미련과 아쉬움은 모두 털어 버리라는 듯 이민성 선수를 향해 불어대고 있었다.
재활기간은 온전한 자기계발 시간 “3개월간 독일에 머물면서 재활 치료를 받다가 7월에 귀국했어요. 플레이오프에 나간다는 가정 하에 훈련을 해왔는데 아쉽게도 일찍 시즌을 접게 되었네요. 지금은 마무리 훈련하면서 내년을 준비하고 있어요. 부상은 거의 다 완쾌되었어요. 경기에 지장 없습니다.” 예상대로 근황과 함께 부상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민성 선수는 지난 4월 4일 경남과의 원정 경기에서 오른쪽 무릎 십자 인대가 완전히 파열되어 6개월간 경기를 뛰기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헌데 그의 음성은 의외로 매우 밝았다. 스포츠 선수들이 부상을 입게 되면 몸보다는 마음이 다치기 마련이다. 죄책감, 좌절감 등과 같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쉽사리 마음을 다잡지 못한다. 하지만 이민성 선수는 재활 기간을 온전히 자기 계발 시간으로 만들어 기어이 장점을 단점 위에 올려놓는다. “재활 기간 동안 제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겼어요. 독일에서 팀, 앞으로의 진로 등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죠. 하지만 그라운드에 나가지 못하는 것 자체는 너무 아쉬웠어요. 제가 너무 원했던 포지션을 맡았는데 경기를 계속할 수 없었던 점이 아쉬웠죠. 한 시즌을 무사히 마쳤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나서 팬들에게 평가를 받는 자리에 섰다면 훨씬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수비형 미드필더로 다시 태어나다 결국 그 역시 누구나 가지기 마련인 이러한 아쉬움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은 아닐까 무던히 고민하는 축구 선수였던 것이다. 심리적 갈등 속에서도 무사히 부상을 극복하고 그라운드로 돌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을 무엇보다도 새로운 포지션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민성 선수는 올 시즌 들어 본격적으로 수비수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한 기간은 짧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줬고 이는 곧 내년 시즌에 대한 충만한 기대감으로 작용한다.
“수비형 미드필더를 하면서 심적으로는 오히려 편했어요. 중앙 수비수를 보게 되면 경기의 마지막 선이기 때문에 10번 중에 9번 잘하다가도 1번 실패하고 실점하면 모든 책임이 돌아오기 때문에 심적 부담이 크죠. 반면 미드필더에서는 선수들을 컨트롤 하기가 쉽고 볼터치 횟수도 많기 때문에 마음이 훨씬 편해요. 개인적으로 수비형 미드필더에 더 맞는 것 같아요. 이을용, 기성용 선수와 호흡이 잘 맞았어요. 그래서 더 하기 수월했던 것 같아요.” 이민성 선수의 보직 변경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그가 지키는 서울의 중원은 굳건했다. 실제로 2007 시즌 초반 7경기에서 서울은 6승 1무라는 성적을 거두었는데 그 공로를 이민성 선수에게 돌리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민성 선수는 그때 경기를 이렇게 기억한다. “제가 항상 그 경기를 봤었는데 저보다는 (이)청용이나 (이)을용이가 상당히 많은 수비 역할을 해줬어요. 제가 못한 부분을 (이)청용이와 (이)을용이가 많이 메워줬던 그런 경기였죠. (이)청용이 같은 경우는 젊은데다가 기동력이 좋아서 줄기차게 수비, 공격을 해줬고 그래서 저는 거의 중앙에서 위치 선정만 하고 있을 수 있었죠. (이)청용이와 (기)성용이가 컨트롤을 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에요.” "제가 대인마크가 좋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못하는 것 같아요.(웃음) 공격수들을 따라다는데 많이 지쳤고 내가 항상 수동적이 되는 것 같아 너무 싫었어요. 또 공격수들은 자동적으로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잖아요. 저는 스피드도 부족해서 대인마크를 잘 못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헤딩력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생각해봐도 장점은 없는 것 같아요. 옆에서 리딩 역할을 해주는 것이 그나마 장점인 것 같네요. 선수들이 쉽게 쉽게 볼을 줄 수 있는거요.” 겸손하다. K-리그에 데뷔한지는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었고 올림픽 대표와 월드컵 대표 경력까지 있는 그가 장점이 없다고 말한다. 본인의 입으로 말하지 않는 자랑거리를 들추고 싶은 장난기 아닌 장난기가 발동하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민성 선수의 과거 행적을 좇았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어요” “축구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제가 누나가 셋이거든요. 여자 형제들 틈에서 자라다 보니 성격이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어요. 그런 저를 보고 아버님께서 축구를 권하셨고 지금까지 하게 됐죠.” “축구를 처음 시작할 때는 골키퍼였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센터 포워드를 보면서 중, 고등학교 때는 공격수를 많이 했어요. 대학교 들어와서 수비수로 전향했고 여기까지 왔죠. 포항 선수 시절에 최순호 감독님께서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겼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여기까지 왔어요.”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던 그가 축구를 통해 활동적이고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로 변모했다. 축구 말고는 다른 꿈을 가져 볼 여유도 없었다. 공격수, 수비수, 미드필더, 골키퍼에 이르기까지. 축구의 영역도 그에게는 광활하게만 느껴졌다. 산이 높을수록, 혹은 험할수록 정복하고자 하는 욕구는 강해지는 법.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어느새 또 다른 기회가 되어 이민성 선수 앞에 나타났다. “고 2때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빈혈에 걸렸어요. 철 결핍성 빈혈이었죠. 철이 일반 사람들의 반 정도 수치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최대의 위기였죠. 약물 치료만 6개월을 받았으니까요. 대학 진학 문제가 걸려있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는데 주춤하게 된 것이죠. 그때 아주대학교의 김희태 감독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셨죠. 고등학교 때 아주대와 여러 차례 경기를 가졌는데 그때 저를 좋게 보셔서 안 좋은 상황에서도 뽑아주셨던 것 같아요.” “고 2때 축구 선수에 대해 가장 많은 생각을 했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기도 했어요. 부산 대우 시절에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죠. 부산 대우에 처음 입단했을 때 워낙 나이든 선배가 많아 주눅이 많이 들었거든요. 항상 우러러 보고 영웅이라 생각했던 선배들과 운동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었어요.” “그래도 그때 ‘민똘’이라는 별명을 얻었죠. 현재 인천의 장외룡 감독님께서 대우의 코치로 계셨을 때 제가 똘똘하다며 지어주신 별명이었어요(웃음).”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한 차례 시끌벅적 하더니 선수들이 유유히 숙소를 벗어난다. 동계 훈련을 마치고 나름의 자유 시간을 보내려고 분주한 모습이다. 그 선수들에게 시선을 두지는 못해도 호기심 많은 내 귀는 연신 그들의 대화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문득 이민성 선수의 여가 시간이 궁금해졌다. “내 취미는 딸과 노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딸하고 같이 노는 것이 취미가 됐어요. 애교 많은 딸이 너무 좋아요. 달려와서 뽀뽀하고 그래요(웃음). 아내는 후배의 소개로 만났어요. (이민성 선수의 팬은 아니었나요?) 아니에요. 축구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이었어요. 2003년도에 결혼했죠. (이민성 선수의 어떤 점이 좋았다고 하던가요?) 착하데요. 말 잘 듣고(웃음).” “운동 선수들이 매번 똑같은데 전지 훈련이다 합숙한다 하면서 많이 소홀해요. 올해는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꼈던 한해였어요. 특히 제가 부상 당했을 때 아내가 많이 위로해줬어요. 지금이 전부는 아니고 오래 쉬었기 때문에 모든 에너지가 충전되어서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줬어요. 미안함과 고마움 때문에 항상 잘해주려고 노력해요. 아내 말 잘 듣고 일찍 귀가 하고 남는 시간은 무조건 가족과 보내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나이를 잊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이민성 선수의 체력도 가족이 그 원동력이었다. “겨울철이 되면 아내가 보약을 해주고 장인 어른께서 매년 산삼을 구해다 주세요. 대부분 잘 먹는데 보양식이라면 이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운동 시간 외적으로는 대부분 집에 있는 편입니다. 외출이나 사적인 만남을 잘 하지 않죠. 체력이 소모되는 행동을 자제하는 것이에요. 결혼하고 나서 4년 정도 이렇게 생활했는데 체력적으로 많이 비축이 되는 것 같아요.” 이처럼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바탕으로 젊은 선수들과 맞서며 2007년 시즌과 함께 그라운드 주전 자리 굳히기에 들어갔다. 시즌 초반 미드필더진과의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FC 서울은 무패 행진을 이어갔지만 이민성 선수의 부상과 함께 그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다수의 서울 주전 선수가 부상을 입게 되고 강력한 6강 플레이오프 후보로 점철되던 FC 서울은 결국 6강 PO행 티켓을 타 구단에 내줘야만 했다. “한국을 대표하고 서울을 대표하는 팀으로써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선수들이 많이 반성을 하고 있어요. 서울 시민들에게도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떨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변명할 것이 없고 선수들의 실력 문제였다고 생각해요. 내년 시즌에는 더 독한 마음으로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팀의 맏형다운 발언이었다. 서울 구단에 몸담은 지도 올해도 3년째인데 그래서 인지 구단이나 서울 팬들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K-리그 명예기자 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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