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독립유공자 3,000명, 후손도 못 찾아

입력 2010.03.0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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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독립유공자들을 찾아서 정부는 해마다 훈포장을 추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독립유공자 상당수가 후손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습니다.

청주총국 함영구 기자 연결해 자세한 내용 알아보겠습니다.

함 기자! (네, 함영구입니다.)

<질문>

독립유공자의 3명 중에 한명은 후손을 찾지 못하고 있다죠?

<답변>

네, 충남 아산에 살고 있는 노기순 할머니는 지난해 말에서야 조부가 독립유공자인 사실을 알았습니다.

노 할머니의 조부인 노규현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혹독한 옥살이 끝에 숨을 거뒀는데요.

국가보훈처는 지난 2006년, 노규현 선생에게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을 수여했습니다.

하지만, 후손을 찾은 것은 4년이 지난 지난해 말이었고, 노기순 할머니도 그제서야 자신이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뒤늦게 할아버지 영정에 훈장을 바쳤지만 노 할머니는 아직도, 회한의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습니다.

노 할머니의 말씀 들어보시죠.

<인터뷰> 노기순(79세/독립유공자 후손) : "하루라도 빨리 (조부를) 국립묘지로 모시는 것이 소망이죠. 내가 죽어도 한이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노 할머니의 경우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만주에서 광복군을 이끌다 피살된 채 찬 선생.

그리고, 1907년 의병 활동을 하다 생사 여부조차 확인이 되지 않은 이중봉 선생 등 독립운동가 3천여 명은 아직도 후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을 기리기 위한 훈포장은 아직도, 국가보훈처 자료실에 그대로 보관돼 있습니다.

<질문>

3천 여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후손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답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군.경의 시선을 피해 비밀리에 활동해야 했던 독립운동의 특성 때문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일제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가명을 쓰거나, 주소와, 출생지 등을 감추며 활동했습니다.

또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와 일본 등 외국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하면서 그들의 발자취가 대부분 사라졌고, 망명길에 오른 독립운동가도 적지 않았습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인터뷰> 이수진(청주 보훈지청장) : "가명을 쓰셨던 분들, 망명길에 오른 분들 때문에 후손 찾기가 힘든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살아왔던 분들.

하지만, 후손마저 찾지 못한 독립유공자들을 생각하면, 일제 강점기의 아픔이 되살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청주에서 KBS 뉴스 함영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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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트워크] 독립유공자 3,000명, 후손도 못 찾아
    • 입력 2010-03-02 0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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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독립유공자들을 찾아서 정부는 해마다 훈포장을 추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독립유공자 상당수가 후손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습니다. 청주총국 함영구 기자 연결해 자세한 내용 알아보겠습니다. 함 기자! (네, 함영구입니다.) <질문> 독립유공자의 3명 중에 한명은 후손을 찾지 못하고 있다죠? <답변> 네, 충남 아산에 살고 있는 노기순 할머니는 지난해 말에서야 조부가 독립유공자인 사실을 알았습니다. 노 할머니의 조부인 노규현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혹독한 옥살이 끝에 숨을 거뒀는데요. 국가보훈처는 지난 2006년, 노규현 선생에게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을 수여했습니다. 하지만, 후손을 찾은 것은 4년이 지난 지난해 말이었고, 노기순 할머니도 그제서야 자신이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뒤늦게 할아버지 영정에 훈장을 바쳤지만 노 할머니는 아직도, 회한의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습니다. 노 할머니의 말씀 들어보시죠. <인터뷰> 노기순(79세/독립유공자 후손) : "하루라도 빨리 (조부를) 국립묘지로 모시는 것이 소망이죠. 내가 죽어도 한이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노 할머니의 경우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만주에서 광복군을 이끌다 피살된 채 찬 선생. 그리고, 1907년 의병 활동을 하다 생사 여부조차 확인이 되지 않은 이중봉 선생 등 독립운동가 3천여 명은 아직도 후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을 기리기 위한 훈포장은 아직도, 국가보훈처 자료실에 그대로 보관돼 있습니다. <질문> 3천 여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후손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답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군.경의 시선을 피해 비밀리에 활동해야 했던 독립운동의 특성 때문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일제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가명을 쓰거나, 주소와, 출생지 등을 감추며 활동했습니다. 또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와 일본 등 외국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하면서 그들의 발자취가 대부분 사라졌고, 망명길에 오른 독립운동가도 적지 않았습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인터뷰> 이수진(청주 보훈지청장) : "가명을 쓰셨던 분들, 망명길에 오른 분들 때문에 후손 찾기가 힘든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살아왔던 분들. 하지만, 후손마저 찾지 못한 독립유공자들을 생각하면, 일제 강점기의 아픔이 되살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청주에서 KBS 뉴스 함영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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