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성폭력, 그 이후 발달장애인들의 ‘삶’

입력 2018.06.24 (09:00) 수정 2018.06.2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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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다니는 피해자의 이야기

마을 이장에게 20년 동안 성폭행을 당한 언니를 데리고 마을을 도망쳐나온 박소연(가명) 씨. 반복되는 성폭력에도 '피해 사실을 알리면 소문 내겠다'며 협박을 하자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언니와 이곳저곳을 떠돌던 박 씨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용기를 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하지만 더 끔찍한 악몽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이사를 할 때마다 어떻게든 알고 계속해서 찾아오는 이장. 그는 '합의'를 위해 박 씨를 찾았다고 하지만 박 씨에게는 그저 위협이고 공포였습니다.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하고 항상 내가 오히려 죄인처럼 두리번거리고... 사는 게 정말 사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죠."

설상가상으로 경찰과 검찰은 물증이 없다며 사건을 불기소 처리했습니다. 이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자매가 '거짓말을 했다'며 음해했습니다. 이들은 더이상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됐습니다. 성폭행을 신고한 후 이들의 삶은 더욱 불행해졌습니다.

"같이 그 근처에 가면 차 안에 숨기 바빠요. 내 고향인데 가지도 못하고 마음이 많이 아파요. 그냥 그 동네가 아예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요."

수사가 종결되면 모든 게 끝난 걸까요.

'다 끝났다'고 안도하는 수사기관과 피의자들은 그 이후를 살아가야 하는 피해자의 인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발달장애 성폭력 피해자가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은 죄를 지은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선경 발달장애인 성폭력 전문 변호사는 실제로 상담과 조력을 받았던 발달장애인이 수차례 또다시 성폭행 피해자가 되어 자신을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계속 오는 사람들은 계속 와요. 발달장애인이면 처벌을 피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가해자들이 발달장애인만 찾는거죠." -이선경 변호사-


그런 피해자들을 가해자로부터 일차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곳은 쉼터와 상담소입니다. 하지만 그 숫자는 역부족입니다. 전국에 있는 전문 상담소는 22곳. 그 중에서 40%가 수도권에 몰려있습니다. 강원과 대구, 제주 등에는 한 곳도 없습니다. 개별 상담소를 들여다보면, 천 건 이상의 상담을 3, 4명이 맡고 있는데 이들이 현장조사와 수사지원까지 나서고 있습니다. 치료와 재활은 어렵기만 한 상황입니다.

피해자들이 가해자로부터 떨어져 보호받을 수 있는 장애인 쉼터는 모두 8곳입니다. 110여 명의 피해자들을 수용하지만 이마저도 지금 쉼터에서 생활을 하는 누군가가 빠져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각 쉼터에 배정된 지원 인력은 2명에서 4명 정도. 교대 근무를 생각하면 10명이 넘는 발달장애인을 한, 두 명이서 도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피해를 당한 발달장애인은 심각한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입고도 치유되지 못한 채 보호시설에 잠시 머무르다가 다시 동네로 돌아오게 됩니다. 자신이 범죄 피해를 입었지만, 떠날 수 없는 '익숙한 그 곳'에서 또 다시 위험에 노출되게 됩니다.

평범한 일상의 중요성
"일상에서 안전하면서도 서로가 긍정적인 관계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주어져야 된다는 거죠."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 양애리아 부소장-
"가해자를 처벌하는 건 결국 사후약방문이거든요. 누군가가 이 장애인을 계속 지켜보고 방문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해주면 범죄 피해도 줄어듭니다." -이선경 변호사-


발달장애인 10명 중 6명은 일주일 간 가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이같이 폐쇄적인 환경에서 발달장애인들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욕구가 더욱 커집니다. 호의를 베푸는 척 조금만 잘해줘도 마음을 쉽게 열게 되는 겁니다. 결국 전문가들은 이들이 우리 사회 안에서 건전하게 인간관계를 맺고 교류를 할 수 있다면 피해가 줄어들 거라고 지적합니다. 일상에서 다양한 대인 교류를 하는 발달장애인은 자신의 몸에 대해 보다 주체적인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고 이 때문에 반복되는 성폭력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발달장애는 선택도, 질병도 아닙니다. 태어나보니 자폐나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달장애'가 '소외'를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고립이 초래한 범죄 피해, '발달장애인 성폭력'의 상처는 그들이 더 이상 소외되지 않을 때 비로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연관 기사] [뉴스9] 혼자 낫지 않는 상처…“함께 노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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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성폭력, 그 이후 발달장애인들의 ‘삶’
    • 입력 2018-06-24 09:00:10
    • 수정2018-06-24 09:49:12
    취재후·사건후
◆도망다니는 피해자의 이야기

마을 이장에게 20년 동안 성폭행을 당한 언니를 데리고 마을을 도망쳐나온 박소연(가명) 씨. 반복되는 성폭력에도 '피해 사실을 알리면 소문 내겠다'며 협박을 하자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언니와 이곳저곳을 떠돌던 박 씨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용기를 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하지만 더 끔찍한 악몽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이사를 할 때마다 어떻게든 알고 계속해서 찾아오는 이장. 그는 '합의'를 위해 박 씨를 찾았다고 하지만 박 씨에게는 그저 위협이고 공포였습니다.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하고 항상 내가 오히려 죄인처럼 두리번거리고... 사는 게 정말 사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죠."

설상가상으로 경찰과 검찰은 물증이 없다며 사건을 불기소 처리했습니다. 이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자매가 '거짓말을 했다'며 음해했습니다. 이들은 더이상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됐습니다. 성폭행을 신고한 후 이들의 삶은 더욱 불행해졌습니다.

"같이 그 근처에 가면 차 안에 숨기 바빠요. 내 고향인데 가지도 못하고 마음이 많이 아파요. 그냥 그 동네가 아예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요."

수사가 종결되면 모든 게 끝난 걸까요.

'다 끝났다'고 안도하는 수사기관과 피의자들은 그 이후를 살아가야 하는 피해자의 인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발달장애 성폭력 피해자가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은 죄를 지은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선경 발달장애인 성폭력 전문 변호사는 실제로 상담과 조력을 받았던 발달장애인이 수차례 또다시 성폭행 피해자가 되어 자신을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계속 오는 사람들은 계속 와요. 발달장애인이면 처벌을 피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가해자들이 발달장애인만 찾는거죠." -이선경 변호사-


그런 피해자들을 가해자로부터 일차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곳은 쉼터와 상담소입니다. 하지만 그 숫자는 역부족입니다. 전국에 있는 전문 상담소는 22곳. 그 중에서 40%가 수도권에 몰려있습니다. 강원과 대구, 제주 등에는 한 곳도 없습니다. 개별 상담소를 들여다보면, 천 건 이상의 상담을 3, 4명이 맡고 있는데 이들이 현장조사와 수사지원까지 나서고 있습니다. 치료와 재활은 어렵기만 한 상황입니다.

피해자들이 가해자로부터 떨어져 보호받을 수 있는 장애인 쉼터는 모두 8곳입니다. 110여 명의 피해자들을 수용하지만 이마저도 지금 쉼터에서 생활을 하는 누군가가 빠져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각 쉼터에 배정된 지원 인력은 2명에서 4명 정도. 교대 근무를 생각하면 10명이 넘는 발달장애인을 한, 두 명이서 도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피해를 당한 발달장애인은 심각한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입고도 치유되지 못한 채 보호시설에 잠시 머무르다가 다시 동네로 돌아오게 됩니다. 자신이 범죄 피해를 입었지만, 떠날 수 없는 '익숙한 그 곳'에서 또 다시 위험에 노출되게 됩니다.

평범한 일상의 중요성
"일상에서 안전하면서도 서로가 긍정적인 관계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주어져야 된다는 거죠."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 양애리아 부소장-
"가해자를 처벌하는 건 결국 사후약방문이거든요. 누군가가 이 장애인을 계속 지켜보고 방문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해주면 범죄 피해도 줄어듭니다." -이선경 변호사-


발달장애인 10명 중 6명은 일주일 간 가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이같이 폐쇄적인 환경에서 발달장애인들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욕구가 더욱 커집니다. 호의를 베푸는 척 조금만 잘해줘도 마음을 쉽게 열게 되는 겁니다. 결국 전문가들은 이들이 우리 사회 안에서 건전하게 인간관계를 맺고 교류를 할 수 있다면 피해가 줄어들 거라고 지적합니다. 일상에서 다양한 대인 교류를 하는 발달장애인은 자신의 몸에 대해 보다 주체적인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고 이 때문에 반복되는 성폭력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발달장애는 선택도, 질병도 아닙니다. 태어나보니 자폐나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달장애'가 '소외'를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고립이 초래한 범죄 피해, '발달장애인 성폭력'의 상처는 그들이 더 이상 소외되지 않을 때 비로소 치유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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