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달리는 지하철 위에 조는 기관사?…또 다른 ‘지옥철’의 세계

입력 2018.07.18 (07:01) 수정 2018.07.18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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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오전 8시 50분, 서울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

출근길 직장인들을 가득 태운 종합운동장행 일반 열차가 플랫폼에 멈춰 서더니, 출입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다음 역으로 출발합니다.

기관사가 출입문을 여는 걸 깜빡하고 역을 지나쳐 버린 겁니다.

황당한 사고에, 국회의사당에 내리려던 승객들은 다음 역인 여의도역까지 가서야 하차할 수 있었습니다.

9호선에는 "출근 시간에 국회의사당역 무정차가 대체 무슨 일이냐" "안내 방송도 안 나와서 우왕좌왕했다" "늦고, 반대로 타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는 등의 승객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이런 지하철 사고가 날 때마다, 다들 '승객 불편'을 먼저 이야기하는 게 사실입니다.

여기서 조금만 관점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사고를 낸 기관사 A씨가 대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말이지요.

A 씨는 이날 새벽 3시 50분에 개화역에서 회사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근무표상 출근은 새벽 4시 30분까지 강남에 있는 지하철역으로 돼 있지만, 셔틀버스를 타려면 이보다 40분 일찍 나와야 하는 셈입니다.

여기에 출근 준비를 하려면 새벽 3시 전에는 일어나야 하고, 그조차도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게 현직 기관사들의 공통된 얘기입니다.

늦잠이라도 자면 전체 열차 운행에 큰 차질을 주기 때문에, 첫차를 운전하는 새벽 출근자들이 받는 심적인 압박은 매우 크다고 합니다.

결국, 기상 알람이 울리기 1~2시간 전에 눈을 떠서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심한 경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이렇다 보니 기관사들이 몽롱한 상태로 운전대를 잡는 일이 발생합니다.

"열차 운행을 할 때 종종 반대편에서 오는 열차 기관사들을 보잖아요. 대부분 머리를 숙이거나 밑으로 박고 있어요…. 졸고 있거나 피곤한 상태라는 거죠." (기관사 B 씨)

새벽 4시경, 9호선 첫차 담당 기관사들을 태운 셔틀버스가 도로를 달리고 있다. 9호선 기관사 157명 중 152명은 사흘에 한 번꼴로 새벽 6시 전에 출근하고 있는 상황이다.새벽 4시경, 9호선 첫차 담당 기관사들을 태운 셔틀버스가 도로를 달리고 있다. 9호선 기관사 157명 중 152명은 사흘에 한 번꼴로 새벽 6시 전에 출근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고가 난 그날, 기관사 A 씨 역시 피곤함을 떨쳐내지 못한 채 운전석에 탑승했습니다.

종합운동장-개화역 구간 열차를 운행한 뒤, 다시 개화역에서 종합운동장 방향으로 열차를 운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당산역에서 승객이 출입문에 끼는 일이 발생했고, 기관사 A 씨는 출입문을 다시 열었다 닫기 위해 출입문 작동 모드를 기존의 '자동 모드'에서 '수동 모드'로 변경했습니다.

이후 A 씨는 다시 출입문을 '자동 모드'로 정상 복귀시켜야 했지만, 몽롱한 상태에서 이를 깜빡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다음역인 국회의사당역에서도 직접 출입문을 열고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A 씨는 원래 시스템대로 출입문이 자동 개폐된 것으로 착각했고, 결국 하차해야 하는 승객을 그대로 태운 채 다음 역으로 출발해 버렸습니다.

국회의사당 출입문 미취급 사고에 대한 승객 항의 글에 9호선에서 작성한 답글.국회의사당 출입문 미취급 사고에 대한 승객 항의 글에 9호선에서 작성한 답글.

물론 이런 전후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기관사의 잘못이 사라지는 건 결코 아닐 겁니다.

해당 기관사는 일단 철도안전법 위반으로 과태료 30만 원을 냈습니다.

승객들의 항의에 9호선 운영사도 "해당 기관사에 대한 정신교육 및 집중교육을 실시하고, 전체 기관사에 대한 전파 교육을 시행해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고의 책임을 기관사 개인이 홀로 져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출입문 미취급과 무정차 같은 사고가 9호선 개통 이후 20번 이상 반복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사고의 원인을 과연 특정 기관사 개인의 부주의에서만 찾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모든 기관사가 열차를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는 환경과 노동 조건을 만들어나가는 건 사측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그제(16일) KBS 뉴스9가 보도했듯이(▶ 승객도 기관사도 ‘지옥철’) 서울시가 용역을 맡겨 조사한 9호선 기관사들의 노동 조건 실태는 열악했습니다.

기관사의 12%는 법정 최소 휴게시간인 1시간도 쉬지 못하는 채로 일하고 있고, 지하철 1~8호선과 달리 주박(숙박 근무) 제도가 없어서 기관사 10명 중 3명이 돌아가며 새벽 6시 이전에 출근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 새벽 출근자들은 셔틀버스 때문에 출근 시간보다 40분 이상 일찍 나와야 하는데도 이를 근로시간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또 간이 화장실이 2곳뿐이고 이용할 시간도 빠듯해 비닐봉지(간이 변기)에 볼일을 보거나 아예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근로기준법 위반 여지가 큰 사항도 11개나 지적됐습니다.

승객뿐 아니라 기관사들 사이에서조차 9호선이 '지옥철'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서울시 계획에 따르면, 내년 6월까지 9호선 열차 전체(45편)가 6량으로 전환됩니다.

이렇게 되면 혼잡도가 크게 낮아져서 승객들이 더이상 '지옥철'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게 서울시의 설명인데요.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기관사들의 고통이 계속되는 한, 9호선이 '지옥철'의 오명을 벗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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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달리는 지하철 위에 조는 기관사?…또 다른 ‘지옥철’의 세계
    • 입력 2018-07-18 07:01:31
    • 수정2018-07-18 07:10:20
    취재후·사건후
지난달 20일 오전 8시 50분, 서울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

출근길 직장인들을 가득 태운 종합운동장행 일반 열차가 플랫폼에 멈춰 서더니, 출입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다음 역으로 출발합니다.

기관사가 출입문을 여는 걸 깜빡하고 역을 지나쳐 버린 겁니다.

황당한 사고에, 국회의사당에 내리려던 승객들은 다음 역인 여의도역까지 가서야 하차할 수 있었습니다.

9호선에는 "출근 시간에 국회의사당역 무정차가 대체 무슨 일이냐" "안내 방송도 안 나와서 우왕좌왕했다" "늦고, 반대로 타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는 등의 승객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이런 지하철 사고가 날 때마다, 다들 '승객 불편'을 먼저 이야기하는 게 사실입니다.

여기서 조금만 관점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사고를 낸 기관사 A씨가 대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말이지요.

A 씨는 이날 새벽 3시 50분에 개화역에서 회사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근무표상 출근은 새벽 4시 30분까지 강남에 있는 지하철역으로 돼 있지만, 셔틀버스를 타려면 이보다 40분 일찍 나와야 하는 셈입니다.

여기에 출근 준비를 하려면 새벽 3시 전에는 일어나야 하고, 그조차도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게 현직 기관사들의 공통된 얘기입니다.

늦잠이라도 자면 전체 열차 운행에 큰 차질을 주기 때문에, 첫차를 운전하는 새벽 출근자들이 받는 심적인 압박은 매우 크다고 합니다.

결국, 기상 알람이 울리기 1~2시간 전에 눈을 떠서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심한 경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이렇다 보니 기관사들이 몽롱한 상태로 운전대를 잡는 일이 발생합니다.

"열차 운행을 할 때 종종 반대편에서 오는 열차 기관사들을 보잖아요. 대부분 머리를 숙이거나 밑으로 박고 있어요…. 졸고 있거나 피곤한 상태라는 거죠." (기관사 B 씨)

새벽 4시경, 9호선 첫차 담당 기관사들을 태운 셔틀버스가 도로를 달리고 있다. 9호선 기관사 157명 중 152명은 사흘에 한 번꼴로 새벽 6시 전에 출근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고가 난 그날, 기관사 A 씨 역시 피곤함을 떨쳐내지 못한 채 운전석에 탑승했습니다.

종합운동장-개화역 구간 열차를 운행한 뒤, 다시 개화역에서 종합운동장 방향으로 열차를 운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당산역에서 승객이 출입문에 끼는 일이 발생했고, 기관사 A 씨는 출입문을 다시 열었다 닫기 위해 출입문 작동 모드를 기존의 '자동 모드'에서 '수동 모드'로 변경했습니다.

이후 A 씨는 다시 출입문을 '자동 모드'로 정상 복귀시켜야 했지만, 몽롱한 상태에서 이를 깜빡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다음역인 국회의사당역에서도 직접 출입문을 열고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A 씨는 원래 시스템대로 출입문이 자동 개폐된 것으로 착각했고, 결국 하차해야 하는 승객을 그대로 태운 채 다음 역으로 출발해 버렸습니다.

국회의사당 출입문 미취급 사고에 대한 승객 항의 글에 9호선에서 작성한 답글.
물론 이런 전후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기관사의 잘못이 사라지는 건 결코 아닐 겁니다.

해당 기관사는 일단 철도안전법 위반으로 과태료 30만 원을 냈습니다.

승객들의 항의에 9호선 운영사도 "해당 기관사에 대한 정신교육 및 집중교육을 실시하고, 전체 기관사에 대한 전파 교육을 시행해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고의 책임을 기관사 개인이 홀로 져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출입문 미취급과 무정차 같은 사고가 9호선 개통 이후 20번 이상 반복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사고의 원인을 과연 특정 기관사 개인의 부주의에서만 찾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모든 기관사가 열차를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는 환경과 노동 조건을 만들어나가는 건 사측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그제(16일) KBS 뉴스9가 보도했듯이(▶ 승객도 기관사도 ‘지옥철’) 서울시가 용역을 맡겨 조사한 9호선 기관사들의 노동 조건 실태는 열악했습니다.

기관사의 12%는 법정 최소 휴게시간인 1시간도 쉬지 못하는 채로 일하고 있고, 지하철 1~8호선과 달리 주박(숙박 근무) 제도가 없어서 기관사 10명 중 3명이 돌아가며 새벽 6시 이전에 출근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 새벽 출근자들은 셔틀버스 때문에 출근 시간보다 40분 이상 일찍 나와야 하는데도 이를 근로시간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또 간이 화장실이 2곳뿐이고 이용할 시간도 빠듯해 비닐봉지(간이 변기)에 볼일을 보거나 아예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근로기준법 위반 여지가 큰 사항도 11개나 지적됐습니다.

승객뿐 아니라 기관사들 사이에서조차 9호선이 '지옥철'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서울시 계획에 따르면, 내년 6월까지 9호선 열차 전체(45편)가 6량으로 전환됩니다.

이렇게 되면 혼잡도가 크게 낮아져서 승객들이 더이상 '지옥철'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게 서울시의 설명인데요.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기관사들의 고통이 계속되는 한, 9호선이 '지옥철'의 오명을 벗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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