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마음을 잇겠다’는 코레일, 수단은 후원금?

입력 2018.09.14 (07:00) 수정 2018.09.21 (07:18)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선물은 됐고, 수업 잘 들으면 학점 잘 나갑니다"

대학 신입생 때였습니다. 담당 교수님을 찾아가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400만 원 가까운 등록금을 내고 학교 정문으로 당당히 입학했습니다.
학교에 빚진 것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당시 학생 용돈으로는 부담스러운 가격의 고급 과자 선물세트를 사 들고 교수님께 말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은 단호하셨습니다.

"선물은 됐고, 수업 잘 들으면 학점 잘 나갑니다"


'마음을 잇겠습니다'...마음 잇는 수단은 돈?

한국철도공사 코레일의 서비스 슬로건은 '마음을 잇겠습니다'입니다.
사람과 세상 미래를 잇는 것이 대한민국 철도 코레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한 제보를 접하고, 대학 신입생 때의 부끄러웠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코레일 직원인데요, 국감(국정감사) 앞두고 국회의원들한테 잘 보여야 한다고 후원금 내라네요."

해당 직원이 코레일 측에서 받은 메일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전담 위원실(국회 국토교통위원회)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후원금이 많이 모금될 수 있게 당부드리니 직원 여러분이 많이 참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후원금을 내는 것이야 개인의 선택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정감사'라는 전제가 달려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관례(?)상 그렇게 해왔다고 이해하더라도 그다음 문장을 보고 취재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의사항: ‘한국철도공사’ 등 회사 관련 내용은 기재하지 말 것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코레일이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에는 첨부 문서도 있었습니다.
문서에는 어느 의원에게 얼마를, 카드납부인지 계좌이체인지 엑셀파일로 자세하게 정리하게 돼 있습니다.
물론, 코레일 소속 부서와 이름, 직위도 적게 돼 있지요.

그런데도 코레일은 입금을 할 때는 한국철도공사 코레일이라는 '티가 안 나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왜일까요?

제보자는 "법인이 후원금을 내는 것은 불법이니 개인 후원처럼 보이게 하려 한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실제 정치자금법 제31조는 '법인 및 단체는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돈을 보냈지만 안 보낸 것처럼 하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은 모르게 '은밀히' 보내라는 거였을까요?


"형, 의원실에 다섯 명 후원금 보냈어"

국토교통위 의원실에 물어봤습니다.
저희가 접촉한 국토위 소속 의원실에서는 "아는 바가 없다"거나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연간 300만 원 이하의 소액기부자의 인적 사항과 금액은 공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법인이나 단체가 직원들을 동원해 이른바 '쪼개기 후원'을 하더라도, 의원실에서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의원실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연말이면 기관들에서 십시일반 도와준다는 의미로 후원금을 모아요. 친분이 있는 직원들이 많이 내지요. 그 다음에 전화를 합니다. '형, 의원실에 5명 후원금 보냈어.' 이름과 연락처, 주소를 적은 명단과 함께요."

어차피 돌려 받는 돈? 그 돈은 없는 돈?

보도 직후 기사 댓글에는 이런 반응들이 심심찮게 보였습니다.
'어차피 돌려받는 돈이라 문제가 없다'

물론 개인이 내는 정치 후원금은 1년에 10만 원까지는 세액 공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례에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다른 해석을 합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투명한 정치자금의 원활한 조성을 위하여' 정치 후원금에 세금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소액 다수 후원으로 정치인은 불법적, 음성적 정치 자금에 대한 유혹을 떨쳐낼 수 있고, 유권자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국회의원에 힘을 보탤 수 있습니다.

즉, '어차피 돌려받는 10만 원'이 아니라 정치발전에 밀알이 되는 10만 원인 겁니다.

선관위는 실제로 강압이 있었는지 확인 중입니다.

오영식 코레일 사장오영식 코레일 사장

코레일, '부패방지 최우수기관'

코레일은 2010년대 들어 국민권익위원회 청렴도 평가에서 수년째 꼴찌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KTX 속도처럼, 최근에 청렴도 순위가 급격히 올랐습니다.

실제로 올해 국민권익위원회의 '2017년 공공기관 부패방지시책 평가'에서 1등급을 받아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됐습니다.

당시 코레일은 "임직원들의 적극적인 청렴 실천 의지와 조직 내 청렴 생태계 조성으로 다양한 청렴 시책을 전개한 결과"라고 설명했습니다.

오영식 코레일 사장은 "모든 임직원이 청렴한 기업 만들기에 자발적으로 동참한 결과"라고 말했지요.

채 한 달도 안 남은 올해 국정감사.

코레일과 오영식 사장은 이번에도 같은 입장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취재후] ‘마음을 잇겠다’는 코레일, 수단은 후원금?
    • 입력 2018-09-14 07:00:48
    • 수정2018-09-21 07:18:16
    취재후·사건후
"선물은 됐고, 수업 잘 들으면 학점 잘 나갑니다"

대학 신입생 때였습니다. 담당 교수님을 찾아가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400만 원 가까운 등록금을 내고 학교 정문으로 당당히 입학했습니다.
학교에 빚진 것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당시 학생 용돈으로는 부담스러운 가격의 고급 과자 선물세트를 사 들고 교수님께 말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은 단호하셨습니다.

"선물은 됐고, 수업 잘 들으면 학점 잘 나갑니다"


'마음을 잇겠습니다'...마음 잇는 수단은 돈?

한국철도공사 코레일의 서비스 슬로건은 '마음을 잇겠습니다'입니다.
사람과 세상 미래를 잇는 것이 대한민국 철도 코레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한 제보를 접하고, 대학 신입생 때의 부끄러웠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코레일 직원인데요, 국감(국정감사) 앞두고 국회의원들한테 잘 보여야 한다고 후원금 내라네요."

해당 직원이 코레일 측에서 받은 메일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전담 위원실(국회 국토교통위원회)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후원금이 많이 모금될 수 있게 당부드리니 직원 여러분이 많이 참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후원금을 내는 것이야 개인의 선택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정감사'라는 전제가 달려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관례(?)상 그렇게 해왔다고 이해하더라도 그다음 문장을 보고 취재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의사항: ‘한국철도공사’ 등 회사 관련 내용은 기재하지 말 것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코레일이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에는 첨부 문서도 있었습니다.
문서에는 어느 의원에게 얼마를, 카드납부인지 계좌이체인지 엑셀파일로 자세하게 정리하게 돼 있습니다.
물론, 코레일 소속 부서와 이름, 직위도 적게 돼 있지요.

그런데도 코레일은 입금을 할 때는 한국철도공사 코레일이라는 '티가 안 나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왜일까요?

제보자는 "법인이 후원금을 내는 것은 불법이니 개인 후원처럼 보이게 하려 한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실제 정치자금법 제31조는 '법인 및 단체는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돈을 보냈지만 안 보낸 것처럼 하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은 모르게 '은밀히' 보내라는 거였을까요?


"형, 의원실에 다섯 명 후원금 보냈어"

국토교통위 의원실에 물어봤습니다.
저희가 접촉한 국토위 소속 의원실에서는 "아는 바가 없다"거나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연간 300만 원 이하의 소액기부자의 인적 사항과 금액은 공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법인이나 단체가 직원들을 동원해 이른바 '쪼개기 후원'을 하더라도, 의원실에서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의원실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연말이면 기관들에서 십시일반 도와준다는 의미로 후원금을 모아요. 친분이 있는 직원들이 많이 내지요. 그 다음에 전화를 합니다. '형, 의원실에 5명 후원금 보냈어.' 이름과 연락처, 주소를 적은 명단과 함께요."

어차피 돌려 받는 돈? 그 돈은 없는 돈?

보도 직후 기사 댓글에는 이런 반응들이 심심찮게 보였습니다.
'어차피 돌려받는 돈이라 문제가 없다'

물론 개인이 내는 정치 후원금은 1년에 10만 원까지는 세액 공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례에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다른 해석을 합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투명한 정치자금의 원활한 조성을 위하여' 정치 후원금에 세금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소액 다수 후원으로 정치인은 불법적, 음성적 정치 자금에 대한 유혹을 떨쳐낼 수 있고, 유권자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국회의원에 힘을 보탤 수 있습니다.

즉, '어차피 돌려받는 10만 원'이 아니라 정치발전에 밀알이 되는 10만 원인 겁니다.

선관위는 실제로 강압이 있었는지 확인 중입니다.

오영식 코레일 사장
코레일, '부패방지 최우수기관'

코레일은 2010년대 들어 국민권익위원회 청렴도 평가에서 수년째 꼴찌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KTX 속도처럼, 최근에 청렴도 순위가 급격히 올랐습니다.

실제로 올해 국민권익위원회의 '2017년 공공기관 부패방지시책 평가'에서 1등급을 받아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됐습니다.

당시 코레일은 "임직원들의 적극적인 청렴 실천 의지와 조직 내 청렴 생태계 조성으로 다양한 청렴 시책을 전개한 결과"라고 설명했습니다.

오영식 코레일 사장은 "모든 임직원이 청렴한 기업 만들기에 자발적으로 동참한 결과"라고 말했지요.

채 한 달도 안 남은 올해 국정감사.

코레일과 오영식 사장은 이번에도 같은 입장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