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스모그 1300m 상공, 마침내 맑은 공기가 펼쳐졌다

입력 2019.01.15 (15:52) 수정 2019.01.15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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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만에 최악의 미세먼지가 닥친 어제(14일) 오전, 기자가 찾은 김포공항은 온통 스모그에 뒤덮여 있었습니다. '헬기 띄우면 그림 잘 나오겠군.' 주말 동안 헬기 취재를 준비한 보람을 느낀 것도 잠시, KBS 항공 1호기 조종사인 유태정 팀장 입에서 뜻밖의 얘기가 들렸습니다. "지금 못 떠요. 시정이 1/4마일밖에 안 나와. 오후에나 뜰 수 있으려나 모르겠는데요." 헬기에 함께 탑승해 관측하기로 한 강원대 대기질예측연구실 학생들의 표정에도 걱정이 묻어났습니다.

한낮에도 이어진 짙은 스모그

10여 년 전 공군 기상예보관으로 복무하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헬기 임무는 보통 시정이 2마일(약 3.2km) 이상 나와야 가능한데 짙은 스모그가 끼면 예보관들로서도 곤욕이기 때문입니다. 낮이 되면 사라지는 안개와 달라서 예보도 빗나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미세먼지 농도 150㎍/㎥ 이상의 고농도 스모그에도 예보관들은 '미세먼지 농도가 높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미세먼지가 해로운 물질인지조차 몰랐던 시절이었죠. 대신 기상학 용어인 '연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륙 대기 중인 KBS 항공 1호기이륙 대기 중인 KBS 항공 1호기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오전 10시 반에 예정됐던 착륙 시간은 하염없이 연기됐습니다. 특히 예정 경로 상에 있는 경기 남부와 서해안 지역은 시정이 더 좋지 않았습니다. 고속도로 CCTV로 확인해보니 차량이 속도를 내기에도 버거운 날씨였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오후 1시가 돼서야 햇빛이 두꺼운 스모그 층을 뚫고 지면에 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2시 이륙이 확정됐습니다.

남산 타워도 롯데 타워도 사라진 서울

회색빛 스모그에 갇힌 여의도회색빛 스모그에 갇힌 여의도

이륙 당시 서울 지역 관측소에서 측정한 초미세먼지 농도는 평균 146㎍/㎥, 평소의 6배에 달했습니다. 과연 서울 하늘의 공기 질은 어떨까 궁금했습니다. 상공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은 더 심각했습니다. 한강에서 불과 3km 떨어진 남산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높이 555m의 롯데타워도 평소 우뚝 솟은 모습이 온데간데없었습니다. 해발 300m 상공, 강원대 연구팀이 헬기 밖에서 호스로 공기를 빨아들여 초미세먼지를 측정했습니다. 농도는 90㎍/㎥ 안팎. 지면 부근보다는 좋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 권고치의 4배에 가까운 수준입니다.

해발 1,300m 상공에 뚜렷이 그어진 경계선

1,300m 상공에서 하늘을 둘로 가른 행성경계층1,300m 상공에서 하늘을 둘로 가른 행성경계층

언제쯤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을까. 고도를 더 높여봤습니다. 해발 1,300m 상공, 마침내 하늘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높은 하늘에 구름이 껴 있어 파란 하늘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구름의 색깔조차 아래와 확연히 달랐습니다. 위쪽의 은빛 구름과 아래쪽의 회색 스모그가 선명히 구분됐습니다. 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초미세먼지 농도도 급변했습니다. 불과 고도 100m 정도 차이인데 아래쪽은 50㎍/㎥로 '나쁨' 수준, 위쪽은 5㎍/㎥로 '좋음' 수준이었습니다. 5㎍/㎥이면 캐나다 같은 청정 지역에서나 마실 수 있는 공기입니다. "여기 빨대라도 설치해서 밑에서 공기 좀 빨아들였으면 좋겠다." 유태정 팀장이 씁쓸한 농담을 뱉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계층은 왜 생기는 걸까요? 기상학적으로 이 층의 정확한 이름은 행성경계층(Planetary Boundary Layer)입니다. 지면의 영향을 직접 받는 대기층을 말합니다. 지면 부근에서 배출된 오염 물질이 이 층 안에서 뒤섞여 1.3km 고도까지도 뿌연 모습입니다. 반면 그 위의 은빛 구름이 펼쳐진 하늘은 자유 대기(Free Atmosphere)로 구분됩니다.

경계층 두께 줄어드는 겨울철에 미세먼지 농도 높아

행성경계층이 생기는 원리행성경계층이 생기는 원리

문제는 이 경계층의 두께가 계절에 따라, 또 밤낮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초미세먼지 농도가 여름철에 낮다가도 겨울철에 높아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도 이 경계층의 두께와 관련이 깊습니다. 지표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여름에는 경계층의 두께도 최고 2km 이상 부풀어 오릅니다. 그러나 지면이 차갑게 식는 겨울철은 상황이 다릅니다. 하루 중 경계층의 두께가 가장 두꺼울 때가 1km 안팎이고 밤에는 심할 때 수 십m까지 낮아지기도 합니다.

충남 지역 상공으로 오염 물질을 뿜어내는 공장충남 지역 상공으로 오염 물질을 뿜어내는 공장

여름철과 겨울철에 똑같이 경유차가 다니고 공장과 발전소에서 오염 물질을 배출해도 미세먼지 농도가 차이 나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겨울철의 경우 지면 부근에서 배출된 오염 물질이 마치 펌프로 누른 듯 낮아진 경계층에 갇히면서 더 농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나마 추위가 몰려올 때는 강한 바람이 수평 방향으로라도 미세먼지를 흩어주지만, 요 며칠처럼 포근한 날씨에 수평 방향의 바람마저 잦아들면 한반도 상공에 갇힌 미세먼지는 좀처럼 빠져나갈 길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상 조건에서는 기체 상태로 배출된 오염 물질들끼리 서로 반응할 기회가 많아져 2차 생성으로 만들어지는 초미세먼지의 양도 늘어납니다.

중국 오염 + 한국 오염 + 기상 조건 = 고농도 미세먼지

스모그로 뿌옇게 보이는 서해안 모습스모그로 뿌옇게 보이는 서해안 모습

중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름철과 비교하면 겨울철의 미세먼지 농도가 월등히 높습니다. 중국에 쌓인 미세먼지는 느린 서풍을 타고 서해를 거쳐 스멀스멀 한반도 상공으로 밀려듭니다. 고농도 미세먼지가 발생하는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이번 헬기 비행 중에도 서해 상공에 바다 안개와 뒤섞인 미세먼지 띠가 선명히 관측됐습니다. 이렇듯 한반도 상공에 갇힌 중국 등 외부 오염 물질과 국내 오염 물질이 기상 조건이 맞아떨어지자 고농도 미세먼지로 변해 숨 막힐 듯 답답한 회색빛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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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스모그 1300m 상공, 마침내 맑은 공기가 펼쳐졌다
    • 입력 2019-01-15 15:52:58
    • 수정2019-01-15 15:53:06
    취재후·사건후
16년 만에 최악의 미세먼지가 닥친 어제(14일) 오전, 기자가 찾은 김포공항은 온통 스모그에 뒤덮여 있었습니다. '헬기 띄우면 그림 잘 나오겠군.' 주말 동안 헬기 취재를 준비한 보람을 느낀 것도 잠시, KBS 항공 1호기 조종사인 유태정 팀장 입에서 뜻밖의 얘기가 들렸습니다. "지금 못 떠요. 시정이 1/4마일밖에 안 나와. 오후에나 뜰 수 있으려나 모르겠는데요." 헬기에 함께 탑승해 관측하기로 한 강원대 대기질예측연구실 학생들의 표정에도 걱정이 묻어났습니다.

한낮에도 이어진 짙은 스모그

10여 년 전 공군 기상예보관으로 복무하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헬기 임무는 보통 시정이 2마일(약 3.2km) 이상 나와야 가능한데 짙은 스모그가 끼면 예보관들로서도 곤욕이기 때문입니다. 낮이 되면 사라지는 안개와 달라서 예보도 빗나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미세먼지 농도 150㎍/㎥ 이상의 고농도 스모그에도 예보관들은 '미세먼지 농도가 높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미세먼지가 해로운 물질인지조차 몰랐던 시절이었죠. 대신 기상학 용어인 '연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륙 대기 중인 KBS 항공 1호기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오전 10시 반에 예정됐던 착륙 시간은 하염없이 연기됐습니다. 특히 예정 경로 상에 있는 경기 남부와 서해안 지역은 시정이 더 좋지 않았습니다. 고속도로 CCTV로 확인해보니 차량이 속도를 내기에도 버거운 날씨였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오후 1시가 돼서야 햇빛이 두꺼운 스모그 층을 뚫고 지면에 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2시 이륙이 확정됐습니다.

남산 타워도 롯데 타워도 사라진 서울

회색빛 스모그에 갇힌 여의도
이륙 당시 서울 지역 관측소에서 측정한 초미세먼지 농도는 평균 146㎍/㎥, 평소의 6배에 달했습니다. 과연 서울 하늘의 공기 질은 어떨까 궁금했습니다. 상공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은 더 심각했습니다. 한강에서 불과 3km 떨어진 남산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높이 555m의 롯데타워도 평소 우뚝 솟은 모습이 온데간데없었습니다. 해발 300m 상공, 강원대 연구팀이 헬기 밖에서 호스로 공기를 빨아들여 초미세먼지를 측정했습니다. 농도는 90㎍/㎥ 안팎. 지면 부근보다는 좋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 권고치의 4배에 가까운 수준입니다.

해발 1,300m 상공에 뚜렷이 그어진 경계선

1,300m 상공에서 하늘을 둘로 가른 행성경계층
언제쯤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을까. 고도를 더 높여봤습니다. 해발 1,300m 상공, 마침내 하늘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높은 하늘에 구름이 껴 있어 파란 하늘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구름의 색깔조차 아래와 확연히 달랐습니다. 위쪽의 은빛 구름과 아래쪽의 회색 스모그가 선명히 구분됐습니다. 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초미세먼지 농도도 급변했습니다. 불과 고도 100m 정도 차이인데 아래쪽은 50㎍/㎥로 '나쁨' 수준, 위쪽은 5㎍/㎥로 '좋음' 수준이었습니다. 5㎍/㎥이면 캐나다 같은 청정 지역에서나 마실 수 있는 공기입니다. "여기 빨대라도 설치해서 밑에서 공기 좀 빨아들였으면 좋겠다." 유태정 팀장이 씁쓸한 농담을 뱉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계층은 왜 생기는 걸까요? 기상학적으로 이 층의 정확한 이름은 행성경계층(Planetary Boundary Layer)입니다. 지면의 영향을 직접 받는 대기층을 말합니다. 지면 부근에서 배출된 오염 물질이 이 층 안에서 뒤섞여 1.3km 고도까지도 뿌연 모습입니다. 반면 그 위의 은빛 구름이 펼쳐진 하늘은 자유 대기(Free Atmosphere)로 구분됩니다.

경계층 두께 줄어드는 겨울철에 미세먼지 농도 높아

행성경계층이 생기는 원리
문제는 이 경계층의 두께가 계절에 따라, 또 밤낮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초미세먼지 농도가 여름철에 낮다가도 겨울철에 높아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도 이 경계층의 두께와 관련이 깊습니다. 지표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여름에는 경계층의 두께도 최고 2km 이상 부풀어 오릅니다. 그러나 지면이 차갑게 식는 겨울철은 상황이 다릅니다. 하루 중 경계층의 두께가 가장 두꺼울 때가 1km 안팎이고 밤에는 심할 때 수 십m까지 낮아지기도 합니다.

충남 지역 상공으로 오염 물질을 뿜어내는 공장
여름철과 겨울철에 똑같이 경유차가 다니고 공장과 발전소에서 오염 물질을 배출해도 미세먼지 농도가 차이 나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겨울철의 경우 지면 부근에서 배출된 오염 물질이 마치 펌프로 누른 듯 낮아진 경계층에 갇히면서 더 농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나마 추위가 몰려올 때는 강한 바람이 수평 방향으로라도 미세먼지를 흩어주지만, 요 며칠처럼 포근한 날씨에 수평 방향의 바람마저 잦아들면 한반도 상공에 갇힌 미세먼지는 좀처럼 빠져나갈 길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상 조건에서는 기체 상태로 배출된 오염 물질들끼리 서로 반응할 기회가 많아져 2차 생성으로 만들어지는 초미세먼지의 양도 늘어납니다.

중국 오염 + 한국 오염 + 기상 조건 = 고농도 미세먼지

스모그로 뿌옇게 보이는 서해안 모습
중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름철과 비교하면 겨울철의 미세먼지 농도가 월등히 높습니다. 중국에 쌓인 미세먼지는 느린 서풍을 타고 서해를 거쳐 스멀스멀 한반도 상공으로 밀려듭니다. 고농도 미세먼지가 발생하는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이번 헬기 비행 중에도 서해 상공에 바다 안개와 뒤섞인 미세먼지 띠가 선명히 관측됐습니다. 이렇듯 한반도 상공에 갇힌 중국 등 외부 오염 물질과 국내 오염 물질이 기상 조건이 맞아떨어지자 고농도 미세먼지로 변해 숨 막힐 듯 답답한 회색빛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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