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와 ‘노동’사이, 서울시 조례에서 사라진 ‘근로’

입력 2019.03.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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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교육청 조례에서 '근로' 표현 지우고 '노동'으로 대체
■ 과거 정권, 의도적으로 '노동' 표현 배제
■ 국회에도 관련법 계류 중…우리 정부는 여전히 '근로' 고수
■ "단어가 가진 힘 고려할 때 '근로'는 '노동'으로 바꿔야"

지난주 서울시 의회에서는 '서울특별시 조례 일괄정비를 위한 조례안'과 '서울특별시 교육·학예에 관한 일괄정비 조례'가 통과됐습니다. 서울시 의회 권수정 의원(정의당)이 발의한 이 조례가 통과되면서 서울시와 서울교육청의 50여 개 조례에서 '근로'라는 용어가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는 '노동'이라는 단어로 바뀌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조례 속 '근로자'가 '노동자'로 바뀌는 것은 당연하고, '자활근로'는 '자활노동'으로, 근로계약서'는 '노동계약서로, '근로소득'은 '노동소득'으로, '공공근로요원'은 '공공노동요원'으로 바뀝니다. 앞서 서울시는 2016년부터 국내 최초로 공공기관 경영에 노동조합 쪽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노동이사제'를 도입했습니다만 정작 지금까지 정식 명칭은 '근로자이사제'였습니다. 이것도 이제 '노동자이사제'로 관련 조례가 개정됐습니다.

권수정 의원의 조례안권수정 의원의 조례안

이 과정에서 서울시 실무자들의 반대가 꽤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른바 노동3법 중 하나가 근로기준법입니다. 이 밖에도 여러 법령에서 '근로'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조례라는 게 상위 법령에 근거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상위법령에 '근로', '근로자'라고 표기돼 있는데 하위 조례에서 이를 다르게 표현하게 되면 "상위법과 충돌되며, 사무적으로 힘들다"는 목소리가 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상위법령을 인용해서 표현할 때는 '근로'를 인용해 병기하되, 서울시 조례는 '노동'으로 대체됐습니다.

'근로'와 '노동' 어떤 차이 있길래?

사실 '근로'와 '노동'.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습니다. 권 의원은 왜 굳이 이런저런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조례를 발의했을까요. 국립국어원과 표준국어대사전을 보겠습니다.


결국, 일하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만 '근로'라는 단어는 '부지런함', 근면성을 더욱 강조하는 반면 '노동'은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점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과거 정권이 의도적으로 '노동'이라는 단어를 배제해 온 현대사가 있습니다.

"노동은 불온한 것"…의도적 배제한 과거 정권

전 세계적으로 노동절은 5월 1일입니다. 1886년 5월 1일 노동시간 단축 등을 요구하다 죽고 다친 미국 노동자들을 기리는 전 세계 노동자들의 기념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강점기인 1923년 5월 1일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노동절 행사가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 시절 1957년 기념일이 3월 10일로 변경됩니다. 당시 정권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대한노총의 창립기념일이 그 날이었습니다. "메이데이(노동절)는 공산주의자들이 기념하는 날"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1963년 '노동절'이라는 명칭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뀝니다. 1994년 5월 1일로 날짜는 옮겨졌지만 '노동절'이라는 이름은 되찾지 못했습니다. 현대사를 거치면서 '노동'이라는 단어에는 뭔가 '불온한' 느낌이 덧씌워진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근로'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 '근로보국대'같은 식민지 수탈의 역사에 어원을 찾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한 '근로' 고수…"노동 현실 은폐 수단"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나라 노동3법 중 하나는 근로기준법입니다. 노동 관련 정부부처는 '고용노동부'이지만 현장에서 관리 감독하는 공무원은 '근로감독관'이라고 부릅니다. 연말정산을 하고 나면 '근로소득세 원천징수 영수증'이 발급됩니다. '근로'와 '노동'이 혼재된 상황입니다. 2014년 국립국어원은 트위터 계정에서 "'노동자'는 '근로자'로 다듬어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답했다가 이어지는 비판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며 한발 물러선 적도 있습니다.

200여 개국 노동자, 사용자, 정부대표가 모이는 국제노동기구, ILO 총회에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참석했던 정소연 변호사는 지난해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국제적으로 노동자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은 '워커(worker)'로 고정돼 있는데 우리 정부 당국자들은 굳이 '임플로이(employee)'를 고집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임플로이(employee)'는 기업과 노동계약을 맺은 경우를 가리키는 한정된 표현입니다. 정 변호사는 이런 우리 정부의 태도를 "기만적"이라고 표현하면서 "정확히 어떤 범주의 노동자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모르게 만들어, 결국 한국의 노동 현실을 간접적으로 은폐하는 효과를 낸다"고 지적했습니다.

권수정 서울시의원권수정 서울시의원

지난해 3월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발의 헌법개정안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조국 민정수석은 기본권 부분을 설명하면서 "'근로'라는 용어를 '노동'으로 수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미 국회에도 '근로'라는 표현을 '노동'으로 바꾸자는 법안들이 제출돼 있습니다. 하지만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권수정 의원은 "중앙정부, 국회 차원에서 막혀 있는 논의지만 어느 단위에서라도 합의를 이뤄내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노동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매우 아름다운 것인데 초등학생부터 젊은 친구들조차도
'더러운 것' '가난한 것'이라는 인식을 상당히 갖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단어가 갖고 있는 힘, 용어가 지닌 의미 자체를 생각할 때
'근로'라는 단어는 '노동'으로 바뀌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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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로’와 ‘노동’사이, 서울시 조례에서 사라진 ‘근로’
    • 입력 2019-03-15 07:00:38
    취재K
■ 서울시·교육청 조례에서 '근로' 표현 지우고 '노동'으로 대체
■ 과거 정권, 의도적으로 '노동' 표현 배제
■ 국회에도 관련법 계류 중…우리 정부는 여전히 '근로' 고수
■ "단어가 가진 힘 고려할 때 '근로'는 '노동'으로 바꿔야"

지난주 서울시 의회에서는 '서울특별시 조례 일괄정비를 위한 조례안'과 '서울특별시 교육·학예에 관한 일괄정비 조례'가 통과됐습니다. 서울시 의회 권수정 의원(정의당)이 발의한 이 조례가 통과되면서 서울시와 서울교육청의 50여 개 조례에서 '근로'라는 용어가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는 '노동'이라는 단어로 바뀌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조례 속 '근로자'가 '노동자'로 바뀌는 것은 당연하고, '자활근로'는 '자활노동'으로, 근로계약서'는 '노동계약서로, '근로소득'은 '노동소득'으로, '공공근로요원'은 '공공노동요원'으로 바뀝니다. 앞서 서울시는 2016년부터 국내 최초로 공공기관 경영에 노동조합 쪽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노동이사제'를 도입했습니다만 정작 지금까지 정식 명칭은 '근로자이사제'였습니다. 이것도 이제 '노동자이사제'로 관련 조례가 개정됐습니다.

권수정 의원의 조례안
이 과정에서 서울시 실무자들의 반대가 꽤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른바 노동3법 중 하나가 근로기준법입니다. 이 밖에도 여러 법령에서 '근로'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조례라는 게 상위 법령에 근거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상위법령에 '근로', '근로자'라고 표기돼 있는데 하위 조례에서 이를 다르게 표현하게 되면 "상위법과 충돌되며, 사무적으로 힘들다"는 목소리가 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상위법령을 인용해서 표현할 때는 '근로'를 인용해 병기하되, 서울시 조례는 '노동'으로 대체됐습니다.

'근로'와 '노동' 어떤 차이 있길래?

사실 '근로'와 '노동'.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습니다. 권 의원은 왜 굳이 이런저런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조례를 발의했을까요. 국립국어원과 표준국어대사전을 보겠습니다.


결국, 일하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만 '근로'라는 단어는 '부지런함', 근면성을 더욱 강조하는 반면 '노동'은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점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과거 정권이 의도적으로 '노동'이라는 단어를 배제해 온 현대사가 있습니다.

"노동은 불온한 것"…의도적 배제한 과거 정권

전 세계적으로 노동절은 5월 1일입니다. 1886년 5월 1일 노동시간 단축 등을 요구하다 죽고 다친 미국 노동자들을 기리는 전 세계 노동자들의 기념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강점기인 1923년 5월 1일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노동절 행사가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 시절 1957년 기념일이 3월 10일로 변경됩니다. 당시 정권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대한노총의 창립기념일이 그 날이었습니다. "메이데이(노동절)는 공산주의자들이 기념하는 날"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1963년 '노동절'이라는 명칭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뀝니다. 1994년 5월 1일로 날짜는 옮겨졌지만 '노동절'이라는 이름은 되찾지 못했습니다. 현대사를 거치면서 '노동'이라는 단어에는 뭔가 '불온한' 느낌이 덧씌워진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근로'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 '근로보국대'같은 식민지 수탈의 역사에 어원을 찾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한 '근로' 고수…"노동 현실 은폐 수단"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나라 노동3법 중 하나는 근로기준법입니다. 노동 관련 정부부처는 '고용노동부'이지만 현장에서 관리 감독하는 공무원은 '근로감독관'이라고 부릅니다. 연말정산을 하고 나면 '근로소득세 원천징수 영수증'이 발급됩니다. '근로'와 '노동'이 혼재된 상황입니다. 2014년 국립국어원은 트위터 계정에서 "'노동자'는 '근로자'로 다듬어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답했다가 이어지는 비판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며 한발 물러선 적도 있습니다.

200여 개국 노동자, 사용자, 정부대표가 모이는 국제노동기구, ILO 총회에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참석했던 정소연 변호사는 지난해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국제적으로 노동자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은 '워커(worker)'로 고정돼 있는데 우리 정부 당국자들은 굳이 '임플로이(employee)'를 고집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임플로이(employee)'는 기업과 노동계약을 맺은 경우를 가리키는 한정된 표현입니다. 정 변호사는 이런 우리 정부의 태도를 "기만적"이라고 표현하면서 "정확히 어떤 범주의 노동자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모르게 만들어, 결국 한국의 노동 현실을 간접적으로 은폐하는 효과를 낸다"고 지적했습니다.

권수정 서울시의원
지난해 3월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발의 헌법개정안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조국 민정수석은 기본권 부분을 설명하면서 "'근로'라는 용어를 '노동'으로 수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미 국회에도 '근로'라는 표현을 '노동'으로 바꾸자는 법안들이 제출돼 있습니다. 하지만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권수정 의원은 "중앙정부, 국회 차원에서 막혀 있는 논의지만 어느 단위에서라도 합의를 이뤄내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노동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매우 아름다운 것인데 초등학생부터 젊은 친구들조차도
'더러운 것' '가난한 것'이라는 인식을 상당히 갖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단어가 갖고 있는 힘, 용어가 지닌 의미 자체를 생각할 때
'근로'라는 단어는 '노동'으로 바뀌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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