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줄다리기’ 공수처…‘패스트트랙’까지 멈추나

입력 2019.03.23 (07:14) 수정 2019.03.2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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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질 듯 말 듯했던 여야 4당의 선거제 개편 '패스트트랙' 협상은 지난주, 예상과 달리 순풍에 돛 단 듯 진행됐습니다. 3월 초 본격적으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불과 열흘 만인 지난 15일 밤 세부 쟁점까지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일사천리였습니다.

"이번에 합의 못 하면 전쟁이 나도 선거법은 못 고친다." 선거법 개정 협상에 참여했던 민주당 핵심 관계자의 말입니다. 이런 절박함이 각 당으로부터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큰 '양보'를 이끌어냈고,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의 표현을 빌자면 '최선'이 아닌 '차악'이 돼버렸지만 어쨌든 선거법 개정 협상안은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패키지 법안'으로 협상 테이블에 오른 사개특위 법안 논의만 마무리하면 정말 '패스트트랙'을 타는가, 했습니다. 사개특위 법안은 여야 간에, 이미 오랜 기간에 걸쳐 수많은 논의가 이뤄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난데없는 암초가 등장했습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이른바 공수처 법안입니다.

공수처 도입 둘러싼 여야의 20년 줄다리기

'고위 공직자 비리를 수사하기 위한 독립적인 기관이 필요하다.'

화두가 등장한 건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김대중 정부 때입니다. 건국 이래 첫 정권교체로 공직 기강 확립이 범정부적 이슈로 떠오른 시절이었고, 오랜 야당 생활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회의가 팽배했던 정권이기도 했습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비슷한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도 2002년 10월, 김대중 정부 말기입니다. 법안명은 고위공직자 비리조사처 설치법안. 발의에 참여한 의원 28명 가운데 송영길, 이종걸, 이재정, 임종석, 정동영, 천정배 등의 이름이 눈에 띕니다.

2002년 10월, 김대중 정부 말기에 발의된 첫 ‘고위공직자 비리 조사처’ 설치 법안2002년 10월, 김대중 정부 말기에 발의된 첫 ‘고위공직자 비리 조사처’ 설치 법안

공수처를 본격적으로 논의의 장에 올린 건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검찰 개혁'을 지상 과제로 내걸었고, 그 실천 방안으로 대검 중수부를 폐지하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고비처 또는 공수처)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2004년 11월에는 정부 안으로 '공직 부패 수사처' 설치 법안까지 발의됐습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평검사와의 대화’를 진행하는 모습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평검사와의 대화’를 진행하는 모습

하지만 반발은 거셌습니다.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이 검찰 개혁안에 대해 "정치적 저의가 있는 것 같다", "내 목을 치라"고 불만을 쏟아내자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국가 기강 문란 행위'라고 엄중 경고했습니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대통령 직속으로 제2의 사정 기구를 만드는 것은 야당 탄압이라면서 '공수처 신설 추진 계획 백지화 결의안'을 내기도 했습니다. 서명한 의원 30명 가운데 안상수, 유승민, 주호영, 김재원, 유기준, 정갑윤 등의 이름이 눈에 띕니다.

2004년 한나라당 의원 30명이 제출한 ‘공수처 신설 추진 계획 백지화’ 결의안2004년 한나라당 의원 30명이 제출한 ‘공수처 신설 추진 계획 백지화’ 결의안

공수처를 둘러싼 정치권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이렇게 이어져 왔습니다. 제안하고, 추진하고, 반발하고, 무산된 것이 20년에 걸쳐 지금이 몇 번째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포기하지 않았고, 한국당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암초로 등장한 공수처법…'패스트트랙'까지 좌초되나

민주당 일각에서는 "이번에는 정말 되겠다"하는 기류가 있었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선거법 개정안 '패스트트랙' 지정 협상이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면서 합의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선거법이 문제이지 공수처법이나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은 합의가 어렵지 않다"는 게 의원들의 중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 국면에 와서 공수처법이 암초로 등장했습니다. 바른미래당 내부 반발 속에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김관영 원내대표가 "(공수처법과 관련해) 우리 당 입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패스트트랙 절차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21일 통첩했기 때문입니다.

민주당 원내 지도부에서는 술렁하는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김 원내대표의 통보를 언론 보도를 보고 접했다면서 무슨 내용인지 파악해 봐야겠다며 불쾌해 하는 기색도 전해졌습니다.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바른미래당 안에 대해 "그건 공수처가 아니다."라고 짧게 언급했습니다.

민주당 안 vs. 바른미래당 안, 뭐가 문제기에….

그렇게 어려워 보였던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협상도 절충에 절충을 거듭하며 이뤄낸 여야 4당인데, 공수처법 협상은 뭐가 걸림돌이 됐을까요. 쟁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공수처 검사에게 기소권을 줄 것인지 말 것 인지입니다.

민주당 안은 공수처에 수사권과 함께 기소권을 부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공수처 소속 검사가 수사도 하고, 직접 기소 여부를 판단해 재판에 넘길 수도 있도록 한 것입니다. 반면 바른미래당 안은 공수처에 수사권만 주고 기소를 할 때는 검찰에 송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둘째, 공수처장의 추천 방법입니다.

민주당과 바른미래당이 발의한 법안은 공통적으로 공수처장 추천위원회를 7명으로 구성하고, 법무부 장관과 법원행정처장, 변협 회장, 그리고 국회에서 추천한 4명을 추천위원으로 임명이나 위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국회에서 추천한 4명'입니다. 법안에는 구체적인 방법이 적시되지 않았는데, 바른미래당은 협상 과정에 '여당 추천 1명 + 다른 교섭단체 추천 3명' 안을 제시했습니다.

기소권과 공수처장 추천권을 놓고 이렇게 의견이 엇갈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민주당은 공수처를 독립된 기관으로 보고 힘을 실어주려고 하고, 바른미래당은 정권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보고 견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민주당은 바른미래당 안에 대해 "박근혜 정부에서 만든 청와대 특별감찰관처럼 야당 반대 때문에 공수처장 임명조차 못 하는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바른미래당은 "정권이 마음만 먹으면 무소불위 권력이 되는 것은 견제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입니다.

'공수처법' 협상...절충의 묘미는 발휘될까

국회에서는 공수처법 때문에 "협상이 물 건너갈 것 같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아직 단정하기는 이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04년 정부 안으로 발의했던 공수처 설치 법안이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임기 만료로 폐기된 것을 자신의 자서전 <운명>에서 '민정수석을 두 번 하면서 끝내 못한 일, 그래서 아쉬움으로 남는 것' 가운데 하나로 꼽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국민들의 지지여론이 높고 양대 후보(이회창-노무현)가 함께 제시했던 공약인데도 법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장애가 생겼다. 공수처 수사대상 때문이었다. (공수처 수사대상에) 국회의원도 당연히 포함돼 있었는데 국회에서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국회는 이 법안 처리에 거의 파업을 했다. 형평성 문제가 있지만, 국회의원을 빼고서라도 추진했어야 할 법안이고, 법안통과를 목표로 했다면 국회의원을 수사대상에서 빼는 것을 고려했어야 했다. 국회도 문제였지만 우리 쪽도 유연성이 부족했다." 

이번에는 마지막 순간 여야가 유연성을 발휘해 극적 타협을 이뤄낼지, 조금 더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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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년 줄다리기’ 공수처…‘패스트트랙’까지 멈추나
    • 입력 2019-03-23 07:14:03
    • 수정2019-03-23 11:09:47
    취재K
깨질 듯 말 듯했던 여야 4당의 선거제 개편 '패스트트랙' 협상은 지난주, 예상과 달리 순풍에 돛 단 듯 진행됐습니다. 3월 초 본격적으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불과 열흘 만인 지난 15일 밤 세부 쟁점까지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일사천리였습니다.

"이번에 합의 못 하면 전쟁이 나도 선거법은 못 고친다." 선거법 개정 협상에 참여했던 민주당 핵심 관계자의 말입니다. 이런 절박함이 각 당으로부터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큰 '양보'를 이끌어냈고,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의 표현을 빌자면 '최선'이 아닌 '차악'이 돼버렸지만 어쨌든 선거법 개정 협상안은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패키지 법안'으로 협상 테이블에 오른 사개특위 법안 논의만 마무리하면 정말 '패스트트랙'을 타는가, 했습니다. 사개특위 법안은 여야 간에, 이미 오랜 기간에 걸쳐 수많은 논의가 이뤄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난데없는 암초가 등장했습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이른바 공수처 법안입니다.

공수처 도입 둘러싼 여야의 20년 줄다리기

'고위 공직자 비리를 수사하기 위한 독립적인 기관이 필요하다.'

화두가 등장한 건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김대중 정부 때입니다. 건국 이래 첫 정권교체로 공직 기강 확립이 범정부적 이슈로 떠오른 시절이었고, 오랜 야당 생활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회의가 팽배했던 정권이기도 했습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비슷한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도 2002년 10월, 김대중 정부 말기입니다. 법안명은 고위공직자 비리조사처 설치법안. 발의에 참여한 의원 28명 가운데 송영길, 이종걸, 이재정, 임종석, 정동영, 천정배 등의 이름이 눈에 띕니다.

2002년 10월, 김대중 정부 말기에 발의된 첫 ‘고위공직자 비리 조사처’ 설치 법안
공수처를 본격적으로 논의의 장에 올린 건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검찰 개혁'을 지상 과제로 내걸었고, 그 실천 방안으로 대검 중수부를 폐지하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고비처 또는 공수처)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2004년 11월에는 정부 안으로 '공직 부패 수사처' 설치 법안까지 발의됐습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평검사와의 대화’를 진행하는 모습
하지만 반발은 거셌습니다.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이 검찰 개혁안에 대해 "정치적 저의가 있는 것 같다", "내 목을 치라"고 불만을 쏟아내자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국가 기강 문란 행위'라고 엄중 경고했습니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대통령 직속으로 제2의 사정 기구를 만드는 것은 야당 탄압이라면서 '공수처 신설 추진 계획 백지화 결의안'을 내기도 했습니다. 서명한 의원 30명 가운데 안상수, 유승민, 주호영, 김재원, 유기준, 정갑윤 등의 이름이 눈에 띕니다.

2004년 한나라당 의원 30명이 제출한 ‘공수처 신설 추진 계획 백지화’ 결의안
공수처를 둘러싼 정치권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이렇게 이어져 왔습니다. 제안하고, 추진하고, 반발하고, 무산된 것이 20년에 걸쳐 지금이 몇 번째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포기하지 않았고, 한국당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암초로 등장한 공수처법…'패스트트랙'까지 좌초되나

민주당 일각에서는 "이번에는 정말 되겠다"하는 기류가 있었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선거법 개정안 '패스트트랙' 지정 협상이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면서 합의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선거법이 문제이지 공수처법이나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은 합의가 어렵지 않다"는 게 의원들의 중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 국면에 와서 공수처법이 암초로 등장했습니다. 바른미래당 내부 반발 속에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김관영 원내대표가 "(공수처법과 관련해) 우리 당 입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패스트트랙 절차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21일 통첩했기 때문입니다.

민주당 원내 지도부에서는 술렁하는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김 원내대표의 통보를 언론 보도를 보고 접했다면서 무슨 내용인지 파악해 봐야겠다며 불쾌해 하는 기색도 전해졌습니다.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바른미래당 안에 대해 "그건 공수처가 아니다."라고 짧게 언급했습니다.

민주당 안 vs. 바른미래당 안, 뭐가 문제기에….

그렇게 어려워 보였던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협상도 절충에 절충을 거듭하며 이뤄낸 여야 4당인데, 공수처법 협상은 뭐가 걸림돌이 됐을까요. 쟁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공수처 검사에게 기소권을 줄 것인지 말 것 인지입니다.

민주당 안은 공수처에 수사권과 함께 기소권을 부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공수처 소속 검사가 수사도 하고, 직접 기소 여부를 판단해 재판에 넘길 수도 있도록 한 것입니다. 반면 바른미래당 안은 공수처에 수사권만 주고 기소를 할 때는 검찰에 송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둘째, 공수처장의 추천 방법입니다.

민주당과 바른미래당이 발의한 법안은 공통적으로 공수처장 추천위원회를 7명으로 구성하고, 법무부 장관과 법원행정처장, 변협 회장, 그리고 국회에서 추천한 4명을 추천위원으로 임명이나 위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국회에서 추천한 4명'입니다. 법안에는 구체적인 방법이 적시되지 않았는데, 바른미래당은 협상 과정에 '여당 추천 1명 + 다른 교섭단체 추천 3명' 안을 제시했습니다.

기소권과 공수처장 추천권을 놓고 이렇게 의견이 엇갈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민주당은 공수처를 독립된 기관으로 보고 힘을 실어주려고 하고, 바른미래당은 정권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보고 견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민주당은 바른미래당 안에 대해 "박근혜 정부에서 만든 청와대 특별감찰관처럼 야당 반대 때문에 공수처장 임명조차 못 하는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바른미래당은 "정권이 마음만 먹으면 무소불위 권력이 되는 것은 견제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입니다.

'공수처법' 협상...절충의 묘미는 발휘될까

국회에서는 공수처법 때문에 "협상이 물 건너갈 것 같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아직 단정하기는 이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04년 정부 안으로 발의했던 공수처 설치 법안이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임기 만료로 폐기된 것을 자신의 자서전 <운명>에서 '민정수석을 두 번 하면서 끝내 못한 일, 그래서 아쉬움으로 남는 것' 가운데 하나로 꼽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국민들의 지지여론이 높고 양대 후보(이회창-노무현)가 함께 제시했던 공약인데도 법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장애가 생겼다. 공수처 수사대상 때문이었다. (공수처 수사대상에) 국회의원도 당연히 포함돼 있었는데 국회에서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국회는 이 법안 처리에 거의 파업을 했다. 형평성 문제가 있지만, 국회의원을 빼고서라도 추진했어야 할 법안이고, 법안통과를 목표로 했다면 국회의원을 수사대상에서 빼는 것을 고려했어야 했다. 국회도 문제였지만 우리 쪽도 유연성이 부족했다." 

이번에는 마지막 순간 여야가 유연성을 발휘해 극적 타협을 이뤄낼지, 조금 더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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