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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와 두 개의 양심]② “재판결과 유출 왜 문제냐” 묻자…동문서답한 판사
입력 2019.04.20 (07:00) 수정 2019.06.04 (07:10) 취재K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② “재판결과 유출 왜 문제냐” 묻자…동문서답한 판사
●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재판의 요모조모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두 번째 순서로, 지난 17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서 진행된 시진국 창원지법 통원지원 부장판사(사법연수원 32기·전 법원행정처 기획제1·2심의관)에 대한 증인신문 내용을 살펴봅니다.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 시나리오 검토".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 방안" . "카토 타스야 前 산께이신문 서울지국장 사건 설명자료".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분들―그래서 이 기사도 읽어주시는 분들―이라면, 다들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이 유명한 '재판 거래' 의혹 문건들의 최종 작성자가 바로 시진국 부장판사입니다. 그는 이 일로 지난해 말 대법원 법관징계위 결정으로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받았는데요. 7시간 가까이 이어진 이 재판의 몇 가지 장면을 뽑아봤습니다.


#1. "나는 '말단'이었다"

준비해 온 파란 골무를 손가락에 끼고, 증인신문 전에 자신의 검찰 진술조서를 꼼꼼이 살펴본 시진국부장판사. 이윽고 그의 입에서 "제일 말단"이라는 단어가 튀어 나옵니다.

- 검사: 증인을 비롯한 심의관들이 담당하는 대국회 업무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가 있나요?
- 증인: 심의관들의 역할이라는 것이(웃음) 제일 말단이고, 어찌보면 의사결정하는 간부진들의 지시에 따라서 하는 작업들입니다. 솔직히 제일 많이 했던 건 간부들이 국회 방문할 때 국회 수행하는 업무. 그리고 나머지 부분들은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 소위원회 열릴 때 필요한 업무보고 자료, 설명자료, 법률안 관련 의견자료. 이런 것들. 기획 1,2 심의관이 직접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에서 작성해놓은 문건들 취합, 정리하거나 편집해서 실장급 이상에게 보고하거나 이런 일을 주로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자신이 맡았던 법원행정처 심의관직은 별 권한 없이 시키는 일만 하는 하급자라는 취지인데요. 사실 행정처 심의관은 일반 행정부처로 치면 국장급의 고위공무원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심의관 말단설'. 아무래도 무리가 아닌가 싶은데, 검찰도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 검사: 법원행정처 심의관은 단순히 실·국장의 업무를 단순 보좌, 보조하는 보조자로서 지속적으로 시키는 일을 지시대로 이행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좌기관으로서 각자 독자적인 분장사무를 가지고 전문적 지식을 활용하여 실·국장에 대한 참모 역할을 수행하는 걸로 보이는데 맞습니까?
- 증인: 이론상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제 기억으로는 그렇게 일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론상으로는 힘이 있지만, 내가 해보니 실제로는 힘이 없었다는 진술이 신문 내내 이어졌습니다.


#2. '특별 임무' 제대로 못하면 찍혔다?

시 부장판사의 말에 따르면, 이런 힘없는 심의관들을 더 위축시킨 것은 행정처의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 검사: 증인이 피고인 지시에 대해 거부하면 생길 수 있는 불이익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요?
- 증인: 아마 그 질문이 이판사판 카페 보고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업무를 특정해서 제가 말씀드려야 오해가 좀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업무에 관련해 그랬다는 건 아니고요. 특수한 성격의 보고서 지시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하는 측면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사실상 행정처 분위기가 행정을 하는 조직이다보니 경직되어 있고, 그런 분위기에서 보고서 작성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데 어려움은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불이익이 있는지 말하진 못했지만, 이른바 '정무적 보고서' 작성과 같은 특별한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취지로 읽힙니다. 잘 나가는 판사들만 모인다는 법원행정처. 이곳도 결국 군대 조직과 비슷했던 걸까요? 시 부장판사는 검찰 조사에서 보다 생생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검찰이 재판에서 공개한 그의 진술 내용을 보시죠.

- "행정처 분위기 자체가 워낙 경직돼 있고 관료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거부하는 게 쉽지가 않았고, 한번 거부하게 되면 생활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 "(피고인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임종헌 차장의 지시에 부합하지 않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심의관들이 소위 찍혀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시 부장판사는 또 임 전 차장이 "단말마적으로 갑작스럽게" "뜬금없이" 보고서 지시를 내렸고, "피고인 스타일이 지레짐작, 선제적 검토를 워낙 좋아하는 스타일"이라며, 임 전 차장에게 받았던 압박이 컸음을 법정에서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시진국 부장판사가 법원행정처 심의관 당시 작성한 대외비 문건.시진국 부장판사가 법원행정처 심의관 당시 작성한 대외비 문건.

#3. "거부할 능력도, 생각도 없었다"

권한이 적으면 으레 그에 따른 책임도 줄어들기 마련이죠. 시 부장판사는 행정처 심의관으로서 자신은 힘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결국 예상대로 이 '재판 거래' 의혹 사건에서 본인의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진술로 이어졌습니다.

- 검사: 결론적으로는 (그런 '재판 거래' 의혹 문건 작성이) 최소한 부적절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럼 사후에라도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상급자에게, 피고인에게 "아, 이거는 왜 이렇게 작성해야 합니까" 이의제기를 한다든가 상세한 배경에 대해 물어볼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이때 방청석에 있던 임 전 차장의 부인이 소리내어 웃음]
- 증인: 한 번도 없었던 것 같고요. 심의관들한테 그런 여력이 없었을 뿐더러. 조금 더 말씀드리면 보고서라는 게(웃음) … 대외비라는 표지가 명확히 찍힌 내부 통용 문서여서 … 받아보고 폐기할 수도 있을 거고 … 실행이 더 나아가 되는지 안되는지 … 전혀 심의관들이 알 수가 없고 … 그 부분 중에 왜 (현재 재판 중인) 사건을 다룬 내용이 있는가 이런 의문이 든다고 해서 지시자한테 가서 "어떻게 됐습니까" 또는 "왜 이런 지시 하셨습니까" 이렇게 따진다는 건 현실적으론 그 당시 행정처 분위기상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부적절한 지시라고 할지라도 이행하는 게 불가피했다, 거부할 능력이 안됐다는 건데요. 그의 증언을 듣다보면, 사실 지시를 거부할 능력뿐 아니라 거부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 검사: 증인이 작성한 문건을 보면, 상고법원 관련 문건들 같은 경우에는 청와대와 국회 등 정치권의 협조를 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고, 강제징용 관련 문건에서는 외교부의 대외비 문건을 전달받아서 그 내용을 원용하면서 실제 재판의 구체적인 시나리오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고 그것을 법원행정처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 자체로 사법행정권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최소한 그런 우려가 있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여지는데, 최소한 우려가 있다는 인식, 위법성의 인식에 대해 한번 여쭤보는 것입니다.
- 재판장: 네. 그 당시 인식을 묻는 것으로 이해하고 답하시면 되겠습니다.
- 증인: 그 당시에는 그런 정도의 큰 문제의식, 재판 개입, 그런 인식은 없었던 것 같고요.

곧바로 이어진 증언에서, 그는 검찰의 '재판 거래' 의혹 제기를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자신이 쓴 문건은 내용만 놓고 보면 충분히 작성할 수 있는, 별 문제 없는 문건이었다는 겁니다.

- 증인: … 저희(심의관들)는 이 보고서 왜 쓰는 건지 그 자체가 약간 정확하게 확인이 잘 안 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쓰고 난 이후에 그 내용만 놓고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는데, 모르겠습니다. 강제징용 보고서도 보시면, 법원에 계류되어 있는 관련 사건 현황을 수집하고요. 이런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객관적 상황이기 때문에. 외교부 작성 문건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도 부적절한 측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오해 소지가 있어 외교부에 대한 거(외교부 문건을 발췌했다는 점) 병기했고요, 재판 시나리오도 1~5까지. 그 재판부에서 취할 수 있는 진행 시나리오를 다 언급한 것이거든요. … 어떤 시나리오 옳다고 결론낸 거 아니고 … 상정 가능한 걸 다 언급한 것인데. … 그것만 놓고 재판개입 이뤄지겠다 이렇게 인식하는 건, 좀 그러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시 부장판사는 다만 (문건을 쓸 때는 별 의식이 없었지만) "보고서 내용 중에 작성 당시 시점에 일선 법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건을 어떤 식으로든 언급하거나 그런 부분은 적절하진 않았던 것 같다"라고 뒤늦게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4. '고구마' 증인에…질문 5번 반복한 재판장

일부 부적절한 측면은 있을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잘못된 점은 없다는 입장을 재판 내내 고수한 증인. 다음날 재판이 있어 빨리 내려가봐야 한다는 그에게, 재판장인 윤종섭 부장판사가 마지막 순서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 재판장: 자 증인, 두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증인,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근무한 전후로 지금까지 담당한 재판과 관련해서, 특정 사건의 예상 선고 결과와 판결 이유 등을 판결 선고 전에 법원행정처 관계자를 비롯한 외부에 공개한 적 있습니까?
- 증인: 제 기억으론 없습니다.

옳다구나. 재판장이 질문을 이어갑니다.

- 재판장: 왜 그렇게 하였습니까? 왜 공개하지 않은 것입니까?
- 증인: 그런 부탁이나 요청을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답변이 이상합니다. 재판 결과를 미리 알려달라는 요청이 없어서 알려주지 않았다. 그럼 그런 요청이 있었다면 재판 결과를 미리 밖에 알려줬을 거라는 얘기인가요? 판사가 아무런 가치 판단 없이, 외부의 자극에 따라 기계적으로 반응해왔다는 건가요. 마음이 답답해졌습니다. 재판장이 다시 물었지만, 또 같은 답변이 되돌아옵니다.

- 재판장: 공개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증인: 공개할 필요를 느낄 그럴 상황 자체가 없었습니다.

재판장이 질문의 의미를 조금 풀어 설명하자, 이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급히 대답하는 증인.

- 재판장: 공개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은 것입니까?
- 증인: 예 물론 공개해선 안된다고...

재판장이 다섯 번째로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시 부장판사의 입에서 약 7시간 만에 처음으로 "재판 공정성"이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 재판장: 공개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증인: [7초 정도 침묵] 음.. 그런 걸 혹시라도 소송관계인이나 이런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재판 공정성에 대한 의심이 들 수 있기 때문에 공개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재판장: 그 외에 더 하고 싶은 얘기 있습니까?
- 증인: 없습니다.
- 재판장: 수고하셨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시 부장판사는 재판부에 따로 인사를 하지 않고, 다소 진이 빠진듯한 모습으로 법정 밖으로 나갔습니다.

재판장의 이 마지막 신문은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정처의 말단으로 자신을 위치짓고, 윗선의 지시에 따라 문제의식 없이 일을 해온 결과, 공정한 재판이라는 사법부의 기본 가치를 떠올리는 데 어려움을 느낄 지경이 된 판사의 모습 말입니다.


#번외. "도표 좋아하는 할매"…판사들이 본 박 대통령

지금까지의 내용과 달리 조금 흥미로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검사의 신문 과정에서 행정처 심의관들이 임 전 차장의 지시에 따라 주고 받은 이메일의 내용이 소개됐는데요. 여기에 당시 대통령에 대한 특이한(?) 별칭이 등장한 겁니다.

- 검사: 박상언 심의관이 2015년 7월 27일 17시 20분 경 증인에게 "접견 자료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이메일을 보냅니다. 거기에 첨부 파일을 하나 보내는데. "150720 상고법원 입법추진을 위한 BH 설득전략(박상언 추가)"라는 파일로 보내고, 이메일 본문 내용을 보면 "특히 할매 불신 원인은 정말 소설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VIP가 불신하는 원인들이 무엇인지 분석하는 내용 기재했고, 그것이 7.28일자 보고서에 반영됐는데 맞습니까?
- 증인: 네 맞습니다.
- 검사: 박상언 심의관이 이메일 본문에 "할매 불신"이라고 했는데 거기서 말하는 "할매"는 박근혜 대통령을 지칭하는 것이 맞습니까?
- 증인: 아마 그랬던 거 같습니다.

심의관들은 박 전 대통령이 사법부를 불신하는 이유를 분석하면서, 보고서에 박 전 대통령의 친필 일기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아래 사진)


재판 방청객들의 졸음을 떨치게 했던 판사들의 대통령 이야기.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임종헌 전 차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VIP 보고서"를 만들라고 2015년 7월 지시하는데요.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은 1장 이상 넘어가면 절대 보고서를 읽지 않고, 도표를 좋아하기 때문에 각각의 주제마다 1페이지 분량으로 총 5페이지짜리 보고서를 쓰라."

그렇게 심의관들이 힘을 모아 만든 VIP 보고서에는, 실제로 그 어떤 문건보다 도표가 많이 들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② “재판결과 유출 왜 문제냐” 묻자…동문서답한 판사
    • 입력 2019.04.20 (07:00)
    • 수정 2019.06.04 (07:10)
    취재K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② “재판결과 유출 왜 문제냐” 묻자…동문서답한 판사
●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재판의 요모조모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두 번째 순서로, 지난 17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서 진행된 시진국 창원지법 통원지원 부장판사(사법연수원 32기·전 법원행정처 기획제1·2심의관)에 대한 증인신문 내용을 살펴봅니다.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 시나리오 검토".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 방안" . "카토 타스야 前 산께이신문 서울지국장 사건 설명자료".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분들―그래서 이 기사도 읽어주시는 분들―이라면, 다들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이 유명한 '재판 거래' 의혹 문건들의 최종 작성자가 바로 시진국 부장판사입니다. 그는 이 일로 지난해 말 대법원 법관징계위 결정으로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받았는데요. 7시간 가까이 이어진 이 재판의 몇 가지 장면을 뽑아봤습니다.


#1. "나는 '말단'이었다"

준비해 온 파란 골무를 손가락에 끼고, 증인신문 전에 자신의 검찰 진술조서를 꼼꼼이 살펴본 시진국부장판사. 이윽고 그의 입에서 "제일 말단"이라는 단어가 튀어 나옵니다.

- 검사: 증인을 비롯한 심의관들이 담당하는 대국회 업무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가 있나요?
- 증인: 심의관들의 역할이라는 것이(웃음) 제일 말단이고, 어찌보면 의사결정하는 간부진들의 지시에 따라서 하는 작업들입니다. 솔직히 제일 많이 했던 건 간부들이 국회 방문할 때 국회 수행하는 업무. 그리고 나머지 부분들은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 소위원회 열릴 때 필요한 업무보고 자료, 설명자료, 법률안 관련 의견자료. 이런 것들. 기획 1,2 심의관이 직접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에서 작성해놓은 문건들 취합, 정리하거나 편집해서 실장급 이상에게 보고하거나 이런 일을 주로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자신이 맡았던 법원행정처 심의관직은 별 권한 없이 시키는 일만 하는 하급자라는 취지인데요. 사실 행정처 심의관은 일반 행정부처로 치면 국장급의 고위공무원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심의관 말단설'. 아무래도 무리가 아닌가 싶은데, 검찰도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 검사: 법원행정처 심의관은 단순히 실·국장의 업무를 단순 보좌, 보조하는 보조자로서 지속적으로 시키는 일을 지시대로 이행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좌기관으로서 각자 독자적인 분장사무를 가지고 전문적 지식을 활용하여 실·국장에 대한 참모 역할을 수행하는 걸로 보이는데 맞습니까?
- 증인: 이론상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제 기억으로는 그렇게 일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론상으로는 힘이 있지만, 내가 해보니 실제로는 힘이 없었다는 진술이 신문 내내 이어졌습니다.


#2. '특별 임무' 제대로 못하면 찍혔다?

시 부장판사의 말에 따르면, 이런 힘없는 심의관들을 더 위축시킨 것은 행정처의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 검사: 증인이 피고인 지시에 대해 거부하면 생길 수 있는 불이익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요?
- 증인: 아마 그 질문이 이판사판 카페 보고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업무를 특정해서 제가 말씀드려야 오해가 좀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업무에 관련해 그랬다는 건 아니고요. 특수한 성격의 보고서 지시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하는 측면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사실상 행정처 분위기가 행정을 하는 조직이다보니 경직되어 있고, 그런 분위기에서 보고서 작성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데 어려움은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불이익이 있는지 말하진 못했지만, 이른바 '정무적 보고서' 작성과 같은 특별한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취지로 읽힙니다. 잘 나가는 판사들만 모인다는 법원행정처. 이곳도 결국 군대 조직과 비슷했던 걸까요? 시 부장판사는 검찰 조사에서 보다 생생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검찰이 재판에서 공개한 그의 진술 내용을 보시죠.

- "행정처 분위기 자체가 워낙 경직돼 있고 관료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거부하는 게 쉽지가 않았고, 한번 거부하게 되면 생활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 "(피고인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임종헌 차장의 지시에 부합하지 않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심의관들이 소위 찍혀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시 부장판사는 또 임 전 차장이 "단말마적으로 갑작스럽게" "뜬금없이" 보고서 지시를 내렸고, "피고인 스타일이 지레짐작, 선제적 검토를 워낙 좋아하는 스타일"이라며, 임 전 차장에게 받았던 압박이 컸음을 법정에서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시진국 부장판사가 법원행정처 심의관 당시 작성한 대외비 문건.시진국 부장판사가 법원행정처 심의관 당시 작성한 대외비 문건.

#3. "거부할 능력도, 생각도 없었다"

권한이 적으면 으레 그에 따른 책임도 줄어들기 마련이죠. 시 부장판사는 행정처 심의관으로서 자신은 힘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결국 예상대로 이 '재판 거래' 의혹 사건에서 본인의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진술로 이어졌습니다.

- 검사: 결론적으로는 (그런 '재판 거래' 의혹 문건 작성이) 최소한 부적절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럼 사후에라도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상급자에게, 피고인에게 "아, 이거는 왜 이렇게 작성해야 합니까" 이의제기를 한다든가 상세한 배경에 대해 물어볼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이때 방청석에 있던 임 전 차장의 부인이 소리내어 웃음]
- 증인: 한 번도 없었던 것 같고요. 심의관들한테 그런 여력이 없었을 뿐더러. 조금 더 말씀드리면 보고서라는 게(웃음) … 대외비라는 표지가 명확히 찍힌 내부 통용 문서여서 … 받아보고 폐기할 수도 있을 거고 … 실행이 더 나아가 되는지 안되는지 … 전혀 심의관들이 알 수가 없고 … 그 부분 중에 왜 (현재 재판 중인) 사건을 다룬 내용이 있는가 이런 의문이 든다고 해서 지시자한테 가서 "어떻게 됐습니까" 또는 "왜 이런 지시 하셨습니까" 이렇게 따진다는 건 현실적으론 그 당시 행정처 분위기상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부적절한 지시라고 할지라도 이행하는 게 불가피했다, 거부할 능력이 안됐다는 건데요. 그의 증언을 듣다보면, 사실 지시를 거부할 능력뿐 아니라 거부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 검사: 증인이 작성한 문건을 보면, 상고법원 관련 문건들 같은 경우에는 청와대와 국회 등 정치권의 협조를 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고, 강제징용 관련 문건에서는 외교부의 대외비 문건을 전달받아서 그 내용을 원용하면서 실제 재판의 구체적인 시나리오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고 그것을 법원행정처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 자체로 사법행정권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최소한 그런 우려가 있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여지는데, 최소한 우려가 있다는 인식, 위법성의 인식에 대해 한번 여쭤보는 것입니다.
- 재판장: 네. 그 당시 인식을 묻는 것으로 이해하고 답하시면 되겠습니다.
- 증인: 그 당시에는 그런 정도의 큰 문제의식, 재판 개입, 그런 인식은 없었던 것 같고요.

곧바로 이어진 증언에서, 그는 검찰의 '재판 거래' 의혹 제기를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자신이 쓴 문건은 내용만 놓고 보면 충분히 작성할 수 있는, 별 문제 없는 문건이었다는 겁니다.

- 증인: … 저희(심의관들)는 이 보고서 왜 쓰는 건지 그 자체가 약간 정확하게 확인이 잘 안 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쓰고 난 이후에 그 내용만 놓고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는데, 모르겠습니다. 강제징용 보고서도 보시면, 법원에 계류되어 있는 관련 사건 현황을 수집하고요. 이런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객관적 상황이기 때문에. 외교부 작성 문건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도 부적절한 측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오해 소지가 있어 외교부에 대한 거(외교부 문건을 발췌했다는 점) 병기했고요, 재판 시나리오도 1~5까지. 그 재판부에서 취할 수 있는 진행 시나리오를 다 언급한 것이거든요. … 어떤 시나리오 옳다고 결론낸 거 아니고 … 상정 가능한 걸 다 언급한 것인데. … 그것만 놓고 재판개입 이뤄지겠다 이렇게 인식하는 건, 좀 그러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시 부장판사는 다만 (문건을 쓸 때는 별 의식이 없었지만) "보고서 내용 중에 작성 당시 시점에 일선 법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건을 어떤 식으로든 언급하거나 그런 부분은 적절하진 않았던 것 같다"라고 뒤늦게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4. '고구마' 증인에…질문 5번 반복한 재판장

일부 부적절한 측면은 있을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잘못된 점은 없다는 입장을 재판 내내 고수한 증인. 다음날 재판이 있어 빨리 내려가봐야 한다는 그에게, 재판장인 윤종섭 부장판사가 마지막 순서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 재판장: 자 증인, 두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증인,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근무한 전후로 지금까지 담당한 재판과 관련해서, 특정 사건의 예상 선고 결과와 판결 이유 등을 판결 선고 전에 법원행정처 관계자를 비롯한 외부에 공개한 적 있습니까?
- 증인: 제 기억으론 없습니다.

옳다구나. 재판장이 질문을 이어갑니다.

- 재판장: 왜 그렇게 하였습니까? 왜 공개하지 않은 것입니까?
- 증인: 그런 부탁이나 요청을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답변이 이상합니다. 재판 결과를 미리 알려달라는 요청이 없어서 알려주지 않았다. 그럼 그런 요청이 있었다면 재판 결과를 미리 밖에 알려줬을 거라는 얘기인가요? 판사가 아무런 가치 판단 없이, 외부의 자극에 따라 기계적으로 반응해왔다는 건가요. 마음이 답답해졌습니다. 재판장이 다시 물었지만, 또 같은 답변이 되돌아옵니다.

- 재판장: 공개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증인: 공개할 필요를 느낄 그럴 상황 자체가 없었습니다.

재판장이 질문의 의미를 조금 풀어 설명하자, 이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급히 대답하는 증인.

- 재판장: 공개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은 것입니까?
- 증인: 예 물론 공개해선 안된다고...

재판장이 다섯 번째로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시 부장판사의 입에서 약 7시간 만에 처음으로 "재판 공정성"이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 재판장: 공개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증인: [7초 정도 침묵] 음.. 그런 걸 혹시라도 소송관계인이나 이런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재판 공정성에 대한 의심이 들 수 있기 때문에 공개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재판장: 그 외에 더 하고 싶은 얘기 있습니까?
- 증인: 없습니다.
- 재판장: 수고하셨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시 부장판사는 재판부에 따로 인사를 하지 않고, 다소 진이 빠진듯한 모습으로 법정 밖으로 나갔습니다.

재판장의 이 마지막 신문은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정처의 말단으로 자신을 위치짓고, 윗선의 지시에 따라 문제의식 없이 일을 해온 결과, 공정한 재판이라는 사법부의 기본 가치를 떠올리는 데 어려움을 느낄 지경이 된 판사의 모습 말입니다.


#번외. "도표 좋아하는 할매"…판사들이 본 박 대통령

지금까지의 내용과 달리 조금 흥미로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검사의 신문 과정에서 행정처 심의관들이 임 전 차장의 지시에 따라 주고 받은 이메일의 내용이 소개됐는데요. 여기에 당시 대통령에 대한 특이한(?) 별칭이 등장한 겁니다.

- 검사: 박상언 심의관이 2015년 7월 27일 17시 20분 경 증인에게 "접견 자료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이메일을 보냅니다. 거기에 첨부 파일을 하나 보내는데. "150720 상고법원 입법추진을 위한 BH 설득전략(박상언 추가)"라는 파일로 보내고, 이메일 본문 내용을 보면 "특히 할매 불신 원인은 정말 소설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VIP가 불신하는 원인들이 무엇인지 분석하는 내용 기재했고, 그것이 7.28일자 보고서에 반영됐는데 맞습니까?
- 증인: 네 맞습니다.
- 검사: 박상언 심의관이 이메일 본문에 "할매 불신"이라고 했는데 거기서 말하는 "할매"는 박근혜 대통령을 지칭하는 것이 맞습니까?
- 증인: 아마 그랬던 거 같습니다.

심의관들은 박 전 대통령이 사법부를 불신하는 이유를 분석하면서, 보고서에 박 전 대통령의 친필 일기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아래 사진)


재판 방청객들의 졸음을 떨치게 했던 판사들의 대통령 이야기.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임종헌 전 차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VIP 보고서"를 만들라고 2015년 7월 지시하는데요.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은 1장 이상 넘어가면 절대 보고서를 읽지 않고, 도표를 좋아하기 때문에 각각의 주제마다 1페이지 분량으로 총 5페이지짜리 보고서를 쓰라."

그렇게 심의관들이 힘을 모아 만든 VIP 보고서에는, 실제로 그 어떤 문건보다 도표가 많이 들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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