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IN] ‘에비타’ 에바 페론…그녀는 누구?

입력 2019.05.09 (10:48) 수정 2019.05.0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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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940년대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에바 페론이 태어난 지 백 년이 됐습니다.

서른 셋의 짧지만 강렬했던 삶을 살고 간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리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구촌 인에서 만나보시죠.

[리포트]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나는 그대를 떠나지 않아요."]

이 노래,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1978년 초연된 뮤지컬 에비타에서 여주인공 에비타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에비타는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에바 페론인데요.

미국 공연계 거장이 주목한 남미의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은 한 시기를 가장 극적으로 살아낸 여인이었습니다.

[체실라 플라치랜드/에바 페론 팬 : "에비타는 20세기 아르헨티나의 가장 중요한 상징입니다. 단순히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우리 모두에게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어느 시골마을, 가난한 집안의 사생아로 태어난 에바 페론은 15살 무렵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이후 온갖 역경을 딛고, 삼류 연극배우로 시작해 마침내 연예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요.

그러던 1944년 대 지진 구호 기금 마련 운동 중 훗날 대통령이 되는 후안 페론을 운명처럼 만났습니다.

에바 페론은 남편 후안 페론의 선거 유세 자리에 동행하며 아름다운 외모와 확신에 찬 연설로 아르헨티나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렇게 영부인이 된 후 대통령보다 더 사랑받는 대통령 부인이 되었는데요.

우선, 남편과 함께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파격적인 복지정책을 내놓았습니다.

또, 여성에게 선거 투표권을 부여하고, 친권과 혼인에서 남녀평등을 헌법으로 보장해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켰습니다.

[엘사 간둘포/에바 페론 팬 : "에비타는 우리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기 위해 싸운 선구자였습니다."]

그러나 1952년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백혈병과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간 감춰졌던 페론 정권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개혁 정책들이 인기를 노린 포퓰리즘이었고, 사회 약자들의 삶은 여전히 피폐했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비타만큼은 여전히 아르헨티나에서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지난 6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에비타 박물관에서는 생전, 에비타 재단에서 나눠줬던 장난감들을 기부받아 전시회를 열었는데요.

70년 전 한쪽 팔을 잃은 소년은 에비타에게 받은 장난감 기차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며 소회를 밝혔습니다.

[살 맥시즌/80살/에비타 재단 장난감 기부자 : "이웃의 아이들이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어요. 저 작은 장난감 기차 덕분에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죠."]

그녀의 고향, 로스톨도스에서도 작은 축제가 열렸는데요.

[패트리시아 벨라즈퀘즈/에바 페론 팬 : "에바 페론은 항상 대중, 노동자, 가난한 이들을 생각했습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고,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 대중에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엘레나 발렌티/에바 페론 사촌 :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으쓱합니다. 과거 그녀에 대한 평가가 엇갈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잖아요. 제게 큰 기쁨입니다."]

그녀가 떠난 지 60년이 지났지만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여전히 그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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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촌 IN] ‘에비타’ 에바 페론…그녀는 누구?
    • 입력 2019-05-09 10:57:57
    • 수정2019-05-09 11:21:09
    지구촌뉴스
[앵커]

1940년대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에바 페론이 태어난 지 백 년이 됐습니다.

서른 셋의 짧지만 강렬했던 삶을 살고 간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리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구촌 인에서 만나보시죠.

[리포트]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나는 그대를 떠나지 않아요."]

이 노래,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1978년 초연된 뮤지컬 에비타에서 여주인공 에비타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에비타는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에바 페론인데요.

미국 공연계 거장이 주목한 남미의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은 한 시기를 가장 극적으로 살아낸 여인이었습니다.

[체실라 플라치랜드/에바 페론 팬 : "에비타는 20세기 아르헨티나의 가장 중요한 상징입니다. 단순히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우리 모두에게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어느 시골마을, 가난한 집안의 사생아로 태어난 에바 페론은 15살 무렵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이후 온갖 역경을 딛고, 삼류 연극배우로 시작해 마침내 연예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요.

그러던 1944년 대 지진 구호 기금 마련 운동 중 훗날 대통령이 되는 후안 페론을 운명처럼 만났습니다.

에바 페론은 남편 후안 페론의 선거 유세 자리에 동행하며 아름다운 외모와 확신에 찬 연설로 아르헨티나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렇게 영부인이 된 후 대통령보다 더 사랑받는 대통령 부인이 되었는데요.

우선, 남편과 함께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파격적인 복지정책을 내놓았습니다.

또, 여성에게 선거 투표권을 부여하고, 친권과 혼인에서 남녀평등을 헌법으로 보장해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켰습니다.

[엘사 간둘포/에바 페론 팬 : "에비타는 우리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기 위해 싸운 선구자였습니다."]

그러나 1952년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백혈병과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간 감춰졌던 페론 정권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개혁 정책들이 인기를 노린 포퓰리즘이었고, 사회 약자들의 삶은 여전히 피폐했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비타만큼은 여전히 아르헨티나에서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지난 6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에비타 박물관에서는 생전, 에비타 재단에서 나눠줬던 장난감들을 기부받아 전시회를 열었는데요.

70년 전 한쪽 팔을 잃은 소년은 에비타에게 받은 장난감 기차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며 소회를 밝혔습니다.

[살 맥시즌/80살/에비타 재단 장난감 기부자 : "이웃의 아이들이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어요. 저 작은 장난감 기차 덕분에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죠."]

그녀의 고향, 로스톨도스에서도 작은 축제가 열렸는데요.

[패트리시아 벨라즈퀘즈/에바 페론 팬 : "에바 페론은 항상 대중, 노동자, 가난한 이들을 생각했습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고,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 대중에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엘레나 발렌티/에바 페론 사촌 :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으쓱합니다. 과거 그녀에 대한 평가가 엇갈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잖아요. 제게 큰 기쁨입니다."]

그녀가 떠난 지 60년이 지났지만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여전히 그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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