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K] 궁궐도 ‘공사실명제’ 했다는데…창경궁 명정전 ‘묵서명’은 어디에?

입력 2019.05.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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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명정전 내부가 공개됐다는 소식을 지난달 뉴스를 통해 전해드렸습니다. 명정전은 경복궁 근정전처럼 왕실의 공식행사를 치르던 창경궁의 중심건물입니다. 조선 성종 때인 1483년 처음 지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광해군 때인 1616년 다시 지었습니다.

그 뒤로는 다행히 궁궐의 수많은 화재를 비켜나가 4백 년 동안 제모습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또, 숭례문이 불타면서 명정전은 조선의 궁성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지위도 갖게 됐습니다.

창경궁 명정전(국보 제226호) 사진제공: 창경궁관리소창경궁 명정전(국보 제226호) 사진제공: 창경궁관리소

궁궐 건물이니만큼 내력이 모두 왕조실록에 실려 있긴 하지만, 명정전 내부를 촬영하면서 혹시 건물 내부에 내력이 기록된 '상량문(上樑文)'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상량문이란 새로 짓거나 고친 내력과 공사 일시 등을 적은 글입니다.

창경궁관리소는 명정전에 상량문은 없다면서 대신 상량문처럼 1616년 공사에 참가한 인물들이 적힌 '묵서명(墨書銘)'이 있다는 답을 했습니다. 대들보에 잘 보이게 적힌 상량문과는 달리 이 묵서명은 건물 안쪽,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내용이 궁금해 관리소에 사진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사진을 찾을 수 없다는 답신과 함께 묵서명의 내용이 기록된 짤막한 학술논문의 존재를 알려왔습니다.

묵서명이 실린 1963년 논문. 활자가 아닌 손글씨로 작성된 것이 이채롭다.묵서명이 실린 1963년 논문. 활자가 아닌 손글씨로 작성된 것이 이채롭다.

'창경궁 명정전의 묵서명'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대목장 신영훈 선생이 <미술사학연구>라는 학술지에 실은 겁니다. 여기에 창경궁 명정전 보수공사를 하던 1963년 건물 오른쪽 합각머리에서 판자에 새겨진 묵서명을 발견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논문에는 묵서명의 내용도 그대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일부 글자는 판독이 어려웠던 듯 공란으로 처리되긴 했지만 '우의정 정창행'을 시작으로 공사에 관여한 대신들의 이름과 함께 1616년을 가리키는 '만력 44년'이라는 명나라 연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진 가운데 세모꼴로 된 어두운 부분이 합각머리. 이 안에 묵서명이 쓰인 판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사진 가운데 세모꼴로 된 어두운 부분이 합각머리. 이 안에 묵서명이 쓰인 판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합각머리는 사진에서처럼 기와지붕의 양 측면을 막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합각머리 안쪽에 쓰인 판자에 대신들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하니, 건물의 공사 책임자의 이름을 적어놓는 현대의 머릿돌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건물을 지은 공적을 기리는 동시에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소재를 가리는 '공사실명제'이기도 한 셈이죠. 논문을 통해 묵서명의 내용은 알게 됐지만, 실물이나 사진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남았습니다.

발견 당시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1960년대부터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에서 일했던 윤홍로 전 문화재위원에게 관련 내용을 문의했습니다. 오랜 경력으로 '한국 건축 문화재 복원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분이지만, 아쉽게도 윤 전 위원은 1967년부터 근무했고 창경궁 보수공사는 1963년이었습니다.

윤 전 위원은 "당시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묵서명이 발견된 판자의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면 교체하지 않고 다시 자재로 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진이 남아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는 "1967년 문화재관리국에 들어가 보니 국 전체에 사진기가 딱 한 대 있었다."면서 "해당 판자를 그대로 사용했다면 굳이 귀한 사진기를 가져다 촬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엔 논문을 작성한 신영훈 대목장에게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신 대목장은 같은 해인 1963년 숭례문 보수공사를 맡았던 당시 대표적인 목수였기 때문에, 명정전 보수공사도 신 대목장이 맡아서 진행하면서 묵서명의 실물을 보고 논문을 썼을 가능성이 큽니다. 수소문 끝에 신 대목장의 아들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런데 여든이 넘은 신 대목장이 최근 건강이 크게 나빠져 대화가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사실상 마지막 단서였기에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지만, 병상에 있는 분에게 50년도 넘은 일을 캐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묵서명 취재는 막다른 길로 끝나버렸습니다. 묵서명 판자가 그대로 합각머리 안에 있다면 다행이지만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1960년대의 사정이 그랬다 하더라도 이미 일제가 1915년부터 《조선고적도보》라는 이름으로 우리 문화재의 상세한 사진을 기록했던 것을 보면, 아쉬운 처리였음은 분명합니다.

건물 안에 잘 있다고 해도 앞서 논문에서처럼 판독되지 않을 정도로 지워지는 글자가 더 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로써는 묵서명이 건물 안에 무탈하게 있다가 언젠가 1963년처럼 전면적인 보수 공사가 진행될 때 다시 모습을 드러내 주길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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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27 07:00:43
    취재K
창경궁 명정전 내부가 공개됐다는 소식을 지난달 뉴스를 통해 전해드렸습니다. 명정전은 경복궁 근정전처럼 왕실의 공식행사를 치르던 창경궁의 중심건물입니다. 조선 성종 때인 1483년 처음 지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광해군 때인 1616년 다시 지었습니다.

그 뒤로는 다행히 궁궐의 수많은 화재를 비켜나가 4백 년 동안 제모습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또, 숭례문이 불타면서 명정전은 조선의 궁성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지위도 갖게 됐습니다.

창경궁 명정전(국보 제226호) 사진제공: 창경궁관리소
궁궐 건물이니만큼 내력이 모두 왕조실록에 실려 있긴 하지만, 명정전 내부를 촬영하면서 혹시 건물 내부에 내력이 기록된 '상량문(上樑文)'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상량문이란 새로 짓거나 고친 내력과 공사 일시 등을 적은 글입니다.

창경궁관리소는 명정전에 상량문은 없다면서 대신 상량문처럼 1616년 공사에 참가한 인물들이 적힌 '묵서명(墨書銘)'이 있다는 답을 했습니다. 대들보에 잘 보이게 적힌 상량문과는 달리 이 묵서명은 건물 안쪽,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내용이 궁금해 관리소에 사진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사진을 찾을 수 없다는 답신과 함께 묵서명의 내용이 기록된 짤막한 학술논문의 존재를 알려왔습니다.

묵서명이 실린 1963년 논문. 활자가 아닌 손글씨로 작성된 것이 이채롭다.
'창경궁 명정전의 묵서명'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대목장 신영훈 선생이 <미술사학연구>라는 학술지에 실은 겁니다. 여기에 창경궁 명정전 보수공사를 하던 1963년 건물 오른쪽 합각머리에서 판자에 새겨진 묵서명을 발견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논문에는 묵서명의 내용도 그대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일부 글자는 판독이 어려웠던 듯 공란으로 처리되긴 했지만 '우의정 정창행'을 시작으로 공사에 관여한 대신들의 이름과 함께 1616년을 가리키는 '만력 44년'이라는 명나라 연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진 가운데 세모꼴로 된 어두운 부분이 합각머리. 이 안에 묵서명이 쓰인 판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합각머리는 사진에서처럼 기와지붕의 양 측면을 막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합각머리 안쪽에 쓰인 판자에 대신들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하니, 건물의 공사 책임자의 이름을 적어놓는 현대의 머릿돌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건물을 지은 공적을 기리는 동시에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소재를 가리는 '공사실명제'이기도 한 셈이죠. 논문을 통해 묵서명의 내용은 알게 됐지만, 실물이나 사진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남았습니다.

발견 당시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1960년대부터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에서 일했던 윤홍로 전 문화재위원에게 관련 내용을 문의했습니다. 오랜 경력으로 '한국 건축 문화재 복원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분이지만, 아쉽게도 윤 전 위원은 1967년부터 근무했고 창경궁 보수공사는 1963년이었습니다.

윤 전 위원은 "당시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묵서명이 발견된 판자의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면 교체하지 않고 다시 자재로 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진이 남아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는 "1967년 문화재관리국에 들어가 보니 국 전체에 사진기가 딱 한 대 있었다."면서 "해당 판자를 그대로 사용했다면 굳이 귀한 사진기를 가져다 촬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엔 논문을 작성한 신영훈 대목장에게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신 대목장은 같은 해인 1963년 숭례문 보수공사를 맡았던 당시 대표적인 목수였기 때문에, 명정전 보수공사도 신 대목장이 맡아서 진행하면서 묵서명의 실물을 보고 논문을 썼을 가능성이 큽니다. 수소문 끝에 신 대목장의 아들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런데 여든이 넘은 신 대목장이 최근 건강이 크게 나빠져 대화가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사실상 마지막 단서였기에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지만, 병상에 있는 분에게 50년도 넘은 일을 캐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묵서명 취재는 막다른 길로 끝나버렸습니다. 묵서명 판자가 그대로 합각머리 안에 있다면 다행이지만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1960년대의 사정이 그랬다 하더라도 이미 일제가 1915년부터 《조선고적도보》라는 이름으로 우리 문화재의 상세한 사진을 기록했던 것을 보면, 아쉬운 처리였음은 분명합니다.

건물 안에 잘 있다고 해도 앞서 논문에서처럼 판독되지 않을 정도로 지워지는 글자가 더 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로써는 묵서명이 건물 안에 무탈하게 있다가 언젠가 1963년처럼 전면적인 보수 공사가 진행될 때 다시 모습을 드러내 주길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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