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속 독립운동]② ‘아우내 함성’ 주역 유관순, 폭행죄로 수감되다

입력 2019.08.12 (07:00) 수정 2019.08.14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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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일제시대 판결문을 통해 김구나 유관순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소소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민초들과 외국인까지, 우리에게 그동안 잘 안 알려졌던 독립운동가들의 국권 회복 노력과 고초를 재조명하는 연속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아우내장터에서 부모 잃은 유관순 열사…경찰 폭행으로 '소요죄' 적용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됐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4월 1일,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천안 아우내장터에서도 3천 명의 민중이 모였습니다. 당시 만세운동에는 유관순의 부모님과 작은 아버지, 사촌 언니까지 온 가족이 참여했습니다.

일제는 민중들을 향해 총을 발포해 19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30여 명이 중상을 당했습니다. 유관순의 부모도 당일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한 유관순이 경찰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공무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폭행과 협박 혐의가 성립돼 '소요죄'를 받게됩니다.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1919년 유관순 징역형 판결문 원본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1919년 유관순 징역형 판결문 원본

"시장으로 달려가 태극기를 흔들며 치안을 방해"…적극적인 만세 운동 주모자

지금으로 치면 서울고등법원에 해당하는 당시 경성복심법원은 아우내 만세시위 주동자 11명에 대해 유죄판결을 하게 된 이유에서, 유관순이 주모자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3.1 운동을 목격한 유관순이 고향에 내려와 천안의 대규모 만세운동을 조직했다는 대목입니다.

「피고 유관순은 경성에 있는 이화학당 생도인데,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의 선언을 발표하고 독립시위운동을 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 시장의 개시를 이용해 조선독립시위운동을 할 것을 계획하고, 자택에서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오후 1시경 시장으로 달려가 수천명의 군중 단체에 참가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시위 운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했다.」

유관순 기념비문도 "만세운동을 기획한 유관순은 20여 일을 돌아다니며 교회, 학교, 유림 대표들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거사의 장소와 시일을 약속한 다음 마침내 음력 2월 그믐날 밤에 유관순은 매봉에 올라가 내일을 알리는 봉화를 높게 들었다"며 만세 운동 당시 유관순의 행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사망에 격분한 유관순이 총을 피하려 헌병을 붙잡고 흔들어"

아우내 장터에서 열린 평화 시위는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격렬히 변해갔습니다. 앞서 밝힌 대로 유관순의 아버지인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도 당일 희생됐습니다. 유관순은 만세 운동 중에 아버지가 총칼에 찔려 작은 아버지에게 들쳐 업혀 치료를 받기 위해 주재소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주재소로 찾아갑니다. 판결문에 나온 당시 유관순의 행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터에서 50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병천 헌병주재소 헌병은 만세 운동을 제지했으나 뜻대로 응하지 않자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피고 유관순의 아버지이며 피고 유중무의 형인 유중권도 검으로 옆구리와 머리부분이 크게 베여 그 사망 피해자의 한 명이 됐다. 그러자 유관순과 유중무 등 군중들은 아버지인 유중권을 둘레메고 치료를 위해 주재소로 몰려갔다.」

하지만 유관순의 아버지는 치료를 받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됐고, 유관순과 작은 아버지는 이에 격분하게 됩니다.

「유관순의 작은 아버지 유중무는 두루마기의 끈을 풀고 큰 소리를 내며 헌병을 붙잡으려 했고, 또 사망한 그의 형을 사무실로 들고 들어가려 할 때 이를 헌병보조원인 맹 모 씨가 제지하자 "너는 이 나라에서 일본의 보조원을 몇 십 년이나 할 것 같으냐, 때려 죽이겠다"고 말을 했다.

유관순 또한 헌병의 웃옷에 핏자욱이 있는 것을 가르키며 "자신의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총칼을 사용해 민족을 죽이느냐" 외치자 헌병이 유관순에게 총을 쏘려했다. 그러자 총을 피하려 그를 붙잡고 흔들고 또 가슴에 매달리며 행동을 저지했다.」


이후 주재소 측에서는 천안 헌병분대에 지원을 요청했고, 당일 오후 2시쯤 아우내 장터에 도착한 현병들이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또다시 발포 했습니다. 이로 인해 유관순의 어머니 이소제를 포함한 수십 명이 추가로 사망하게 됩니다.

일제가 감시대상 인물기록을 만들기 위해 찍은 유관순 전면, 측면 사진일제가 감시대상 인물기록을 만들기 위해 찍은 유관순 전면, 측면 사진

헌병 폭행했다며 '소요죄' 적용…'3·1 만세 운동자' 중 최고 형량

유관순은 이후 공주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소요죄 혐의가 적용돼 징역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군중들과 함께 소란을 일으키고 경찰을 폭행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이에 불복한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에 항소를 했고 징역 3년으로 경감됐습니다. 당시 판결문은 말미에 형량을 낮춘 이유로 "피고 유관순 등의 1심 판결의 형이 과중해 타당치 않아 이들의 공소는 각각 이유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어 이전의 형량이 과중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형량이 줄었다고 해도 징역 3년은 당시 만세 운동자 징형 가운데 최고형입니다.

유관순은 고문 끝에 1920년 9월 28일,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2013년 11월 19일 국가기록원이 주일대사관으로부터 이관 받아 공개한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에는 유관순에 대해 '3.1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되어 옥중에서 타살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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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결문속 독립운동]② ‘아우내 함성’ 주역 유관순, 폭행죄로 수감되다
    • 입력 2019-08-12 07:00:30
    • 수정2019-08-14 08:02:15
    취재K
KBS는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일제시대 판결문을 통해 김구나 유관순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소소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민초들과 외국인까지, 우리에게 그동안 잘 안 알려졌던 독립운동가들의 국권 회복 노력과 고초를 재조명하는 연속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아우내장터에서 부모 잃은 유관순 열사…경찰 폭행으로 '소요죄' 적용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됐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4월 1일,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천안 아우내장터에서도 3천 명의 민중이 모였습니다. 당시 만세운동에는 유관순의 부모님과 작은 아버지, 사촌 언니까지 온 가족이 참여했습니다.

일제는 민중들을 향해 총을 발포해 19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30여 명이 중상을 당했습니다. 유관순의 부모도 당일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한 유관순이 경찰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공무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폭행과 협박 혐의가 성립돼 '소요죄'를 받게됩니다.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1919년 유관순 징역형 판결문 원본
"시장으로 달려가 태극기를 흔들며 치안을 방해"…적극적인 만세 운동 주모자

지금으로 치면 서울고등법원에 해당하는 당시 경성복심법원은 아우내 만세시위 주동자 11명에 대해 유죄판결을 하게 된 이유에서, 유관순이 주모자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3.1 운동을 목격한 유관순이 고향에 내려와 천안의 대규모 만세운동을 조직했다는 대목입니다.

「피고 유관순은 경성에 있는 이화학당 생도인데,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의 선언을 발표하고 독립시위운동을 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 시장의 개시를 이용해 조선독립시위운동을 할 것을 계획하고, 자택에서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오후 1시경 시장으로 달려가 수천명의 군중 단체에 참가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시위 운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했다.」

유관순 기념비문도 "만세운동을 기획한 유관순은 20여 일을 돌아다니며 교회, 학교, 유림 대표들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거사의 장소와 시일을 약속한 다음 마침내 음력 2월 그믐날 밤에 유관순은 매봉에 올라가 내일을 알리는 봉화를 높게 들었다"며 만세 운동 당시 유관순의 행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사망에 격분한 유관순이 총을 피하려 헌병을 붙잡고 흔들어"

아우내 장터에서 열린 평화 시위는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격렬히 변해갔습니다. 앞서 밝힌 대로 유관순의 아버지인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도 당일 희생됐습니다. 유관순은 만세 운동 중에 아버지가 총칼에 찔려 작은 아버지에게 들쳐 업혀 치료를 받기 위해 주재소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주재소로 찾아갑니다. 판결문에 나온 당시 유관순의 행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터에서 50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병천 헌병주재소 헌병은 만세 운동을 제지했으나 뜻대로 응하지 않자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피고 유관순의 아버지이며 피고 유중무의 형인 유중권도 검으로 옆구리와 머리부분이 크게 베여 그 사망 피해자의 한 명이 됐다. 그러자 유관순과 유중무 등 군중들은 아버지인 유중권을 둘레메고 치료를 위해 주재소로 몰려갔다.」

하지만 유관순의 아버지는 치료를 받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됐고, 유관순과 작은 아버지는 이에 격분하게 됩니다.

「유관순의 작은 아버지 유중무는 두루마기의 끈을 풀고 큰 소리를 내며 헌병을 붙잡으려 했고, 또 사망한 그의 형을 사무실로 들고 들어가려 할 때 이를 헌병보조원인 맹 모 씨가 제지하자 "너는 이 나라에서 일본의 보조원을 몇 십 년이나 할 것 같으냐, 때려 죽이겠다"고 말을 했다.

유관순 또한 헌병의 웃옷에 핏자욱이 있는 것을 가르키며 "자신의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총칼을 사용해 민족을 죽이느냐" 외치자 헌병이 유관순에게 총을 쏘려했다. 그러자 총을 피하려 그를 붙잡고 흔들고 또 가슴에 매달리며 행동을 저지했다.」


이후 주재소 측에서는 천안 헌병분대에 지원을 요청했고, 당일 오후 2시쯤 아우내 장터에 도착한 현병들이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또다시 발포 했습니다. 이로 인해 유관순의 어머니 이소제를 포함한 수십 명이 추가로 사망하게 됩니다.

일제가 감시대상 인물기록을 만들기 위해 찍은 유관순 전면, 측면 사진
헌병 폭행했다며 '소요죄' 적용…'3·1 만세 운동자' 중 최고 형량

유관순은 이후 공주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소요죄 혐의가 적용돼 징역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군중들과 함께 소란을 일으키고 경찰을 폭행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이에 불복한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에 항소를 했고 징역 3년으로 경감됐습니다. 당시 판결문은 말미에 형량을 낮춘 이유로 "피고 유관순 등의 1심 판결의 형이 과중해 타당치 않아 이들의 공소는 각각 이유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어 이전의 형량이 과중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형량이 줄었다고 해도 징역 3년은 당시 만세 운동자 징형 가운데 최고형입니다.

유관순은 고문 끝에 1920년 9월 28일,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2013년 11월 19일 국가기록원이 주일대사관으로부터 이관 받아 공개한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에는 유관순에 대해 '3.1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되어 옥중에서 타살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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