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속 독립운동]④ 그 영국인은 왜 임시정부 비밀요원이 됐을까

입력 2019.08.14 (07:02) 수정 2019.08.14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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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일제시대 판결문을 통해 김구나 유관순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소소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민초들과 외국인까지, 우리에게 그동안 잘 안 알려졌던 독립운동가들의 국권 회복 노력과 고초를 재조명하는 연속 보도를 마련했습니다.

내란죄로 법정에 선 '이륭양행' 설립자 조지 루이스 쇼

일제시대 독립운동과 관련한 당시 법원의 판결문에 내란죄의 피고인으로 등장하는 영국인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 1907년 중국 안동현 내 영국 조계지에서 무역회사 겸 선박대리점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설립해 운영했던 아일랜드계 영국인입니다. 쇼의 회사인 이륭양행은 1919년 4월 11일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사무소와 다름없었습니다.

영국은 1902년 영·일 동맹을 체결한 이래 서구 열강 가운데 일제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우방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우방국의 국적을 가진 쇼는 왜 하필 조선의 독립을 열성적으로 지원하며 일제를 괴롭혔을까요.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 활동에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제공했을까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의 조직체계 (1919년 9월 10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의 조직체계 (1919년 9월 10일)

상해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국내와 만주지역으로 흩어진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교통부와 그 아래 교통국을 설치했습니다. 교통국은 교통부가 지휘하는 일종의 연락책으로, 중국 안동현이나 압록강 일대 등 주요 거점에서 임시정부의 활동자금을 모금하고 정보원을 모집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교통국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조직은 점차 국내로 확산됐는데, 그럴수록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교통망의 필요성은 더 커졌습니다.


바로 이때 쇼의 회사인 이륭양행이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합니다. 이륭양행이 위치한 안동현은 압록강변이란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이미 독립운동가들의 국내 침투 공작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쇼는 아예 이륭양행 2층을 임시정부 안동교통국에 제공했습니다. 1919년 10월 '임시안동교통사무국'으로 명칭을 바꾼 교통국의 관할구역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였는데, 쇼의 지원에 힘입어 자금모집과 정보수집 등 기본적인 임무뿐 아니라 지도와 탄약 등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치외법권' 때문에 김구 등 독립운동들이 이용했던 '이륭양행'

이륭양행은 또 상해와 안동을 왕복하는 선박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실어날랐습니다. 영국 조계지에 위치한 무역회사의 선박은 일종의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백범 김구가 3.1운동 직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해로 망명할 때 이용했던 선박이 이륭양행 소유 선박이었습니다.

"나는 중국인의 인력거를 불러 타고 바로 큰 다리 위로 지나서 안동현의 어떤 여관에서 변성명하고 좁쌀장수라 하고서 7일을 경과한 뒤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상해로 출발하였다. 황해안을 지나갈 때 일본 경비선이 나팔을 불고 따라오며 배를 세울 것을 요구하나 영국인 선장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전속력으로 경비구역을 지나서 4일 후 무사히 포동(浦東) 선창에 내렸다. 같이 탄 동지는 모두 15명이었다." - '백범일지' 中

님 웨일즈의 '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진 독립혁명가 김산도 이륭양행의 선박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철호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일제가 김산이 탄 배를 파악하고 세우려 했으나 쇼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상륙했다는 기록이 여러 사람을 통해 전해진다"고 밝혔습니다. 한철호 교수는 "1920년대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망명할 때 조지 루이스 쇼의 배가 가장 안전하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면서 "쇼가 일제의 '눈엣가시'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조지 루이스 쇼가 일본 방문 시 촬영한 사진(연도미상)조지 루이스 쇼가 일본 방문 시 촬영한 사진(연도미상)

그렇다면 쇼는 왜 이렇게 일제의 눈엣가시를 자처했을까요. 많은 학자들은 그가 아일랜드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습니다. 아일랜드를 식민지배한 영국에 대한 반감이 결국 반일 의식으로 이어졌다는 겁니다.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은 "1920년대 초반은 아일랜드의 혁명가 마이클 콜린스가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을 창설한 직후로 반영 의식이 극도로 고조됐던 시기"라며 "쇼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 호감을 갖고 지원한 것도 제국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 때문이었을 것"이라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출신을 감안하더라도 쇼의 활약은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열성적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 엘렌 오시(Ellen Oh'sea)와 부인 사이토 후미도 일본인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쇼를 체포하지 않으면 불령선인의 뿌리 뽑을 수 없어"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도왔던 쇼는 당연히 조선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됐습니다. 총독부 경무국은 쇼가 1920년 7월 11일 일본에서 오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신의주에 도착하자마자 체포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체포 이유에 대해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이후 내란죄로 기소했습니다. 총독부 경무국장은 "쇼를 체포하지 않으면 '불령선인(不逞鮮人)'(일제 강점기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의 뿌리를 뽑을 수 없다"고 주장했고, 사이토 총독이 이를 수용해 체포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철호 교수는 최근 연구에서 당시 사이토 총독이 "일본인, 조선인, 외국인이라도 나쁜 놈은 나쁜 놈이지 않냐"고 말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쇼의 체포는 곧바로 외교 문제로 번졌습니다. 영국 정부와 국회, 언론까지 나서 쇼의 석방을 요구했고, 이에 부담을 느낀 일본 정부도 조선총독부를 설득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일본은 영국에 보석을 제안했고, 쇼는 1,500원의 보증금을 내고 체포 4개월 만인 1920년 11월 19일 석방돼 안동으로 돌아갔습니다.

지난 5월 3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쇼의 외증손녀 레이첼 사씨(Rachel Sassi)에게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를 수여했다.지난 5월 3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쇼의 외증손녀 레이첼 사씨(Rachel Sassi)에게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를 수여했다.

광복 74년 만에 전달된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

쇼는 석방된 이후 더 적극적으로 임시정부를 도왔습니다. 1921년 1월에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금색공로장을 받는가 하면, 5월에는 김문규를 이륭양행 직원으로 채용해 연락기능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의열단원에게도 선박을 제공했고,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권총을 구입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38년 4월 경영난에 봉착함에 따라 이륭양행을 안동에서 푸저우로 옮기면서 독립운동 지원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쇼는 결국 일제의 항복과 한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3년 11월 13일 63세의 나이로 푸저우에서 숨졌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3월 쇼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49년 뒤인 2012년 8월 16일에야 훈장을 쇼의 친손녀 마조리 허칭스(Majorie Hutchings)에게 전달했습니다. 올해 5월에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호주에 거주 중인 쇼의 외증손녀 레이첼 사씨(Rachel Sassi)에게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를 수여했습니다.

광복 74주년을 앞둔 이 순간에도 쇼는 여전히 낯선 이방인입니다. 하지만 그가 일제로부터 석방된 직후 이륭양행의 사무원 김문규에게 했다는 이 말은 광복에 대한 열망을 그 어떤 메시지보다도 강렬하고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의 대세를 보라.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의 독립 역시 가까이에 존재한다. 다음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만족할 만한 일은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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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결문속 독립운동]④ 그 영국인은 왜 임시정부 비밀요원이 됐을까
    • 입력 2019-08-14 07:02:00
    • 수정2019-08-14 08:02:15
    취재K
KBS는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일제시대 판결문을 통해 김구나 유관순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소소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민초들과 외국인까지, 우리에게 그동안 잘 안 알려졌던 독립운동가들의 국권 회복 노력과 고초를 재조명하는 연속 보도를 마련했습니다.

내란죄로 법정에 선 '이륭양행' 설립자 조지 루이스 쇼

일제시대 독립운동과 관련한 당시 법원의 판결문에 내란죄의 피고인으로 등장하는 영국인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 1907년 중국 안동현 내 영국 조계지에서 무역회사 겸 선박대리점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설립해 운영했던 아일랜드계 영국인입니다. 쇼의 회사인 이륭양행은 1919년 4월 11일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사무소와 다름없었습니다.

영국은 1902년 영·일 동맹을 체결한 이래 서구 열강 가운데 일제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우방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우방국의 국적을 가진 쇼는 왜 하필 조선의 독립을 열성적으로 지원하며 일제를 괴롭혔을까요.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 활동에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제공했을까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의 조직체계 (1919년 9월 10일)
상해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국내와 만주지역으로 흩어진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교통부와 그 아래 교통국을 설치했습니다. 교통국은 교통부가 지휘하는 일종의 연락책으로, 중국 안동현이나 압록강 일대 등 주요 거점에서 임시정부의 활동자금을 모금하고 정보원을 모집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교통국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조직은 점차 국내로 확산됐는데, 그럴수록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교통망의 필요성은 더 커졌습니다.


바로 이때 쇼의 회사인 이륭양행이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합니다. 이륭양행이 위치한 안동현은 압록강변이란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이미 독립운동가들의 국내 침투 공작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쇼는 아예 이륭양행 2층을 임시정부 안동교통국에 제공했습니다. 1919년 10월 '임시안동교통사무국'으로 명칭을 바꾼 교통국의 관할구역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였는데, 쇼의 지원에 힘입어 자금모집과 정보수집 등 기본적인 임무뿐 아니라 지도와 탄약 등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치외법권' 때문에 김구 등 독립운동들이 이용했던 '이륭양행'

이륭양행은 또 상해와 안동을 왕복하는 선박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실어날랐습니다. 영국 조계지에 위치한 무역회사의 선박은 일종의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백범 김구가 3.1운동 직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해로 망명할 때 이용했던 선박이 이륭양행 소유 선박이었습니다.

"나는 중국인의 인력거를 불러 타고 바로 큰 다리 위로 지나서 안동현의 어떤 여관에서 변성명하고 좁쌀장수라 하고서 7일을 경과한 뒤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상해로 출발하였다. 황해안을 지나갈 때 일본 경비선이 나팔을 불고 따라오며 배를 세울 것을 요구하나 영국인 선장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전속력으로 경비구역을 지나서 4일 후 무사히 포동(浦東) 선창에 내렸다. 같이 탄 동지는 모두 15명이었다." - '백범일지' 中

님 웨일즈의 '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진 독립혁명가 김산도 이륭양행의 선박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철호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일제가 김산이 탄 배를 파악하고 세우려 했으나 쇼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상륙했다는 기록이 여러 사람을 통해 전해진다"고 밝혔습니다. 한철호 교수는 "1920년대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망명할 때 조지 루이스 쇼의 배가 가장 안전하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면서 "쇼가 일제의 '눈엣가시'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조지 루이스 쇼가 일본 방문 시 촬영한 사진(연도미상)
그렇다면 쇼는 왜 이렇게 일제의 눈엣가시를 자처했을까요. 많은 학자들은 그가 아일랜드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습니다. 아일랜드를 식민지배한 영국에 대한 반감이 결국 반일 의식으로 이어졌다는 겁니다.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은 "1920년대 초반은 아일랜드의 혁명가 마이클 콜린스가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을 창설한 직후로 반영 의식이 극도로 고조됐던 시기"라며 "쇼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 호감을 갖고 지원한 것도 제국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 때문이었을 것"이라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출신을 감안하더라도 쇼의 활약은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열성적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 엘렌 오시(Ellen Oh'sea)와 부인 사이토 후미도 일본인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쇼를 체포하지 않으면 불령선인의 뿌리 뽑을 수 없어"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도왔던 쇼는 당연히 조선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됐습니다. 총독부 경무국은 쇼가 1920년 7월 11일 일본에서 오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신의주에 도착하자마자 체포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체포 이유에 대해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이후 내란죄로 기소했습니다. 총독부 경무국장은 "쇼를 체포하지 않으면 '불령선인(不逞鮮人)'(일제 강점기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의 뿌리를 뽑을 수 없다"고 주장했고, 사이토 총독이 이를 수용해 체포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철호 교수는 최근 연구에서 당시 사이토 총독이 "일본인, 조선인, 외국인이라도 나쁜 놈은 나쁜 놈이지 않냐"고 말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쇼의 체포는 곧바로 외교 문제로 번졌습니다. 영국 정부와 국회, 언론까지 나서 쇼의 석방을 요구했고, 이에 부담을 느낀 일본 정부도 조선총독부를 설득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일본은 영국에 보석을 제안했고, 쇼는 1,500원의 보증금을 내고 체포 4개월 만인 1920년 11월 19일 석방돼 안동으로 돌아갔습니다.

지난 5월 3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쇼의 외증손녀 레이첼 사씨(Rachel Sassi)에게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를 수여했다.
광복 74년 만에 전달된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

쇼는 석방된 이후 더 적극적으로 임시정부를 도왔습니다. 1921년 1월에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금색공로장을 받는가 하면, 5월에는 김문규를 이륭양행 직원으로 채용해 연락기능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의열단원에게도 선박을 제공했고,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권총을 구입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38년 4월 경영난에 봉착함에 따라 이륭양행을 안동에서 푸저우로 옮기면서 독립운동 지원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쇼는 결국 일제의 항복과 한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3년 11월 13일 63세의 나이로 푸저우에서 숨졌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3월 쇼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49년 뒤인 2012년 8월 16일에야 훈장을 쇼의 친손녀 마조리 허칭스(Majorie Hutchings)에게 전달했습니다. 올해 5월에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호주에 거주 중인 쇼의 외증손녀 레이첼 사씨(Rachel Sassi)에게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를 수여했습니다.

광복 74주년을 앞둔 이 순간에도 쇼는 여전히 낯선 이방인입니다. 하지만 그가 일제로부터 석방된 직후 이륭양행의 사무원 김문규에게 했다는 이 말은 광복에 대한 열망을 그 어떤 메시지보다도 강렬하고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의 대세를 보라.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의 독립 역시 가까이에 존재한다. 다음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만족할 만한 일은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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