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WTO 분쟁 서로 이겼다는 한일…대체 누가 이긴거야?

입력 2019.09.1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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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일) 새벽, 온라인상에선 누리꾼들의 '갑론을박'이 펼쳐졌습니다. 자정쯤 나온 세계무역기구(WTO) 보고서 때문입니다. 보고서는 한국이 일본산 공기압 밸브에 관세를 부과한 조치에 대한 WTO의 최종 심리 결과가 담겼습니다. 먼저 우리 언론의 보도 내용입니다.

●韓, 日과 공기압 밸브 WTO 분쟁서 대부분 승소 (조선일보)
●'공기압 밸브 한일 분쟁' 韓 최종 승소 (매일경제)
●WTO 한일 공기압 밸브 분쟁 韓 승소…'이변은 없었다'(뉴시스)

그런데 같은 시간, 일본 언론은 이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WTO, 韓 고관세 시정 요구 최종판단…일본 승소 (NHK)
●WTO, 韓 과세조치에 시정 권고…일본 승소 (산케이신문)
●日 WTO 2심에서도 한국에 승소 (교도통신)

양국이 서로 "우리가 이겼다"고 주장하는 상황. 12라운드를 끝낸 복서가 판정이 나오기 전 승리를 외치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미 판정이 나온 상황이라면 사정이 다르겠죠. 한국과 일본, 도대체 어느 쪽이 이긴 걸까요?


이번 소송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공기압 전송용 밸브'는 전기로 압축 공기를 조정하는 밸브를 뜻합니다. 자동차나 가전제품, 반도체 조립공장에서 쓰는 산업용 로봇 등의 미세한 제어에 필수적인 부품이죠. 한국은 2015년 8월, "일본산 공기압 밸브가 너무 싼 가격으로 판매돼 국내 산업에 손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향후 5년간 11.66~22.77%의 반덤핑 관세를 도입했습니다. 당시 국내 시장에서 일본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70%가 넘었습니다. 이에 일본은 이듬해 6월 "한국의 조치가 WTO 협정에 위배될 가능성이 있다"며 제소했습니다.

분쟁이 접수되면 WTO는 먼저 60일 이내에 당사국끼리 협의를 거칠 것을 요청합니다. 합의가 안 되면 1심 격인 분쟁해결기구(DSB) 패널이 설치돼 심리 결과를 담은 보고서로 냅니다. 양쪽이 승복하면 보고서가 채택되지만, 한쪽이라도 불복하면 다시 60일 이내에 상급심(최종심)에 상소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4월 DSB 패널 보고서에 이어, 이번에 상소기구의 보고서가 나온 것이죠. 이번 보고서는 30일 이내에 DSB에서 채택됨으로써 최종 확정됩니다.


먼저 우리 정부(산업통상자원부)와 언론이 '한국 승리'를 선언한 배경은 이렇습니다.

"WTO 상소기구는 대부분의 실질적 쟁점에서 우리나라 반덤핑 조치의 WTO 협정 위배성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정함에 따라 기존 승소 판정이 유지됐다. 패널설치요청서 내용 흠결로 인해 패널심에서 각하 판정을 받은 5개 쟁점이 번복됐으나, 이어진 상소기구 심사에서 4개 사안에서는 우리 조치가 협정 위반으로 판정되지 않았으며, 1개 사안(덤핑이 국내가격에 미치는 효과입증)에서만 부분적으로 우리 조치가 협정에 위배된다고 판정했다. 패널에서 우리가 패소한 유일한 실체적 사안(인과관계 판단 시 가격비교방법상의 흠결)은 번복됐으며, 우리 측이 승소한 3개 쟁점은 모두 유지됐다."

반면에 일본 정부(경제산업성)와 언론이 '일본 승리'를 주장한 핵심 근거입니다.

"WTO 상소기구가 한국에 의한 일본제 공기압 전송용 밸브에 대한 반덤핑 과세 조치가 WTO 협정 위반이라는 판단과 함께 시정을 권고했다. 보고서는 우리나라(일본)의 주장을 인정해 한국의 반덤핑 과세조치가 손해·인과 관계의 인정과 절차의 투명성에서 문제가 있어서 WTO 반덤핑 협정에 정합하지(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한국에 조치의 시정을 권고했다. 한국이 보고서의 권고를 조기에 이행해 조치를 신속하게 철폐하기를 요구하며, 만약 권고를 이행하지 않으면 WTO 협정이 정한 절차에 따라 대항(보복) 조치를 발동할 수 있다"


양쪽 정부 설명과 언론 보도를 봐도 누가 이겼다는 건지 여전히 와 닿지 않습니다. 국제 통상법 전문가인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사진)에게 견해를 물었습니다.

Q. 이번 WTO 보고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A. WTO에는 이런 형태의 분쟁이 자주 제기된다. 그 결과로 '일방적 패소', '일방적 승소'는 거의 없다. 대부분이 '부분 승소·패소'이다. 그러면 해당 국가 정부와 언론은 "우리가 이겼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같은 물컵을 두고 한쪽은 '절반이나', 한쪽은 '절반밖에'라고 말하는 식이다. 미·중 무역 분쟁에서도 양국 상무부는 늘 그런 식의 공표를 해왔다.

Q. 일본 정부는 '반덤핑 과세 철폐를 권고했다'고 주장하는데?
A. 사실과 다르다. '철폐'는 곧 '한국의 완패'를 뜻하는데 그게 아니다. 핵심 이슈의 결과가 관건인데, 이번 역시 '부분 승소·패소'가 나왔다. 한국의 세금 부과에 일부 문제점(흠결)이 있으니 이걸 시정해 다시 부과하라는 판정이다. 특별한 것도 없다. WTO의 전형적인 판정 범위 안에 든다. '철폐 요구'는 일본의 '과잉 해석'이다.

Q. 이후 어떻게 되나?
A. 한·일 각각이 일부 쟁점에선 인용, 일부 쟁점에서 기각 결정을 받은 만큼 우선 이를 정리해 당사국 논의와 조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 보통 8~10개월 정도 소요된다. 이 기간 협의가 불발되면 WTO에서 이행 기간을 다시 한 번 정하게 된다. 따라서 이번 보고서는 먼 과정상 '중간 지점'을 지난 정도로 보면 된다. 다만, 일본이 제소국이었던 만큼 피제소국인 한국이 '일부 패소'한 부분에 대한 이행 의무를 지게 됐다는 점은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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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WTO 분쟁 서로 이겼다는 한일…대체 누가 이긴거야?
    • 입력 2019-09-11 13:58:16
    특파원 리포트
오늘(11일) 새벽, 온라인상에선 누리꾼들의 '갑론을박'이 펼쳐졌습니다. 자정쯤 나온 세계무역기구(WTO) 보고서 때문입니다. 보고서는 한국이 일본산 공기압 밸브에 관세를 부과한 조치에 대한 WTO의 최종 심리 결과가 담겼습니다. 먼저 우리 언론의 보도 내용입니다.

●韓, 日과 공기압 밸브 WTO 분쟁서 대부분 승소 (조선일보)
●'공기압 밸브 한일 분쟁' 韓 최종 승소 (매일경제)
●WTO 한일 공기압 밸브 분쟁 韓 승소…'이변은 없었다'(뉴시스)

그런데 같은 시간, 일본 언론은 이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WTO, 韓 고관세 시정 요구 최종판단…일본 승소 (NHK)
●WTO, 韓 과세조치에 시정 권고…일본 승소 (산케이신문)
●日 WTO 2심에서도 한국에 승소 (교도통신)

양국이 서로 "우리가 이겼다"고 주장하는 상황. 12라운드를 끝낸 복서가 판정이 나오기 전 승리를 외치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미 판정이 나온 상황이라면 사정이 다르겠죠. 한국과 일본, 도대체 어느 쪽이 이긴 걸까요?


이번 소송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공기압 전송용 밸브'는 전기로 압축 공기를 조정하는 밸브를 뜻합니다. 자동차나 가전제품, 반도체 조립공장에서 쓰는 산업용 로봇 등의 미세한 제어에 필수적인 부품이죠. 한국은 2015년 8월, "일본산 공기압 밸브가 너무 싼 가격으로 판매돼 국내 산업에 손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향후 5년간 11.66~22.77%의 반덤핑 관세를 도입했습니다. 당시 국내 시장에서 일본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70%가 넘었습니다. 이에 일본은 이듬해 6월 "한국의 조치가 WTO 협정에 위배될 가능성이 있다"며 제소했습니다.

분쟁이 접수되면 WTO는 먼저 60일 이내에 당사국끼리 협의를 거칠 것을 요청합니다. 합의가 안 되면 1심 격인 분쟁해결기구(DSB) 패널이 설치돼 심리 결과를 담은 보고서로 냅니다. 양쪽이 승복하면 보고서가 채택되지만, 한쪽이라도 불복하면 다시 60일 이내에 상급심(최종심)에 상소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4월 DSB 패널 보고서에 이어, 이번에 상소기구의 보고서가 나온 것이죠. 이번 보고서는 30일 이내에 DSB에서 채택됨으로써 최종 확정됩니다.


먼저 우리 정부(산업통상자원부)와 언론이 '한국 승리'를 선언한 배경은 이렇습니다.

"WTO 상소기구는 대부분의 실질적 쟁점에서 우리나라 반덤핑 조치의 WTO 협정 위배성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정함에 따라 기존 승소 판정이 유지됐다. 패널설치요청서 내용 흠결로 인해 패널심에서 각하 판정을 받은 5개 쟁점이 번복됐으나, 이어진 상소기구 심사에서 4개 사안에서는 우리 조치가 협정 위반으로 판정되지 않았으며, 1개 사안(덤핑이 국내가격에 미치는 효과입증)에서만 부분적으로 우리 조치가 협정에 위배된다고 판정했다. 패널에서 우리가 패소한 유일한 실체적 사안(인과관계 판단 시 가격비교방법상의 흠결)은 번복됐으며, 우리 측이 승소한 3개 쟁점은 모두 유지됐다."

반면에 일본 정부(경제산업성)와 언론이 '일본 승리'를 주장한 핵심 근거입니다.

"WTO 상소기구가 한국에 의한 일본제 공기압 전송용 밸브에 대한 반덤핑 과세 조치가 WTO 협정 위반이라는 판단과 함께 시정을 권고했다. 보고서는 우리나라(일본)의 주장을 인정해 한국의 반덤핑 과세조치가 손해·인과 관계의 인정과 절차의 투명성에서 문제가 있어서 WTO 반덤핑 협정에 정합하지(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한국에 조치의 시정을 권고했다. 한국이 보고서의 권고를 조기에 이행해 조치를 신속하게 철폐하기를 요구하며, 만약 권고를 이행하지 않으면 WTO 협정이 정한 절차에 따라 대항(보복) 조치를 발동할 수 있다"


양쪽 정부 설명과 언론 보도를 봐도 누가 이겼다는 건지 여전히 와 닿지 않습니다. 국제 통상법 전문가인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사진)에게 견해를 물었습니다.

Q. 이번 WTO 보고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A. WTO에는 이런 형태의 분쟁이 자주 제기된다. 그 결과로 '일방적 패소', '일방적 승소'는 거의 없다. 대부분이 '부분 승소·패소'이다. 그러면 해당 국가 정부와 언론은 "우리가 이겼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같은 물컵을 두고 한쪽은 '절반이나', 한쪽은 '절반밖에'라고 말하는 식이다. 미·중 무역 분쟁에서도 양국 상무부는 늘 그런 식의 공표를 해왔다.

Q. 일본 정부는 '반덤핑 과세 철폐를 권고했다'고 주장하는데?
A. 사실과 다르다. '철폐'는 곧 '한국의 완패'를 뜻하는데 그게 아니다. 핵심 이슈의 결과가 관건인데, 이번 역시 '부분 승소·패소'가 나왔다. 한국의 세금 부과에 일부 문제점(흠결)이 있으니 이걸 시정해 다시 부과하라는 판정이다. 특별한 것도 없다. WTO의 전형적인 판정 범위 안에 든다. '철폐 요구'는 일본의 '과잉 해석'이다.

Q. 이후 어떻게 되나?
A. 한·일 각각이 일부 쟁점에선 인용, 일부 쟁점에서 기각 결정을 받은 만큼 우선 이를 정리해 당사국 논의와 조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 보통 8~10개월 정도 소요된다. 이 기간 협의가 불발되면 WTO에서 이행 기간을 다시 한 번 정하게 된다. 따라서 이번 보고서는 먼 과정상 '중간 지점'을 지난 정도로 보면 된다. 다만, 일본이 제소국이었던 만큼 피제소국인 한국이 '일부 패소'한 부분에 대한 이행 의무를 지게 됐다는 점은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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