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나는 살인자입니다’ 15년 만에 자백한 뒷이야기

입력 2019.10.16 (17:10) 수정 2019.10.16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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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범의 자백으로 드러났다 또다시 미궁...'비오는 목요일의 괴담'

2004년 8월 16일 서울 강동구 명일동. 한 남성이 가정집에 침입해 혼자 있던 40대 여성을 흉기로 찌르고 금품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사흘 뒤, 강북구 미아동에서도 새벽에 길을 걷던 18살 여성이 흉기에 수차례 찔려 중상을 입었고, 10분 뒤 또 다른 20살 여성도 흉기에 찔렸습니다. 며칠 사이 잇따른 끔찍한 살인 미수 사건에 서울 종암경찰서는 신고 포상금 천만 원을 걸고 용의자 수배에 나섰습니다. 키 160cm 안팎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20대 남성 몽타주를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흉기 등 물증이 없어 목격자가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찾아내지 못하고 사건은 '미제'로 남았습니다.

‘비오는 목요일 괴담’으로 불린 강북구 미아동 살인미수 사건. 당시 경찰이 몽타주까지 작성해 용의자 수배에 나섰다. (출처: KBS 추적 60분 ‘연쇄살인마가 던진 진실 게임’(2016.4.27.))‘비오는 목요일 괴담’으로 불린 강북구 미아동 살인미수 사건. 당시 경찰이 몽타주까지 작성해 용의자 수배에 나섰다. (출처: KBS 추적 60분 ‘연쇄살인마가 던진 진실 게임’(2016.4.27.))

사건은 8년이 지난 2012년에야 해결의 단서가 나타났습니다.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공범 이 모 씨가 자백을 한 겁니다. 경찰은 마침내, 역시 교도소에 있던 당시 46살 이 모 씨를 명일동 살인 사건과 미아동 살인 미수 사건의 피의자로 특정했습니다.

당시 경찰은 '무기수의 양심 고백으로 8년 만에 범인을 붙잡았다'며 언론 브리핑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CCTV나 범행 도구 등 물증이나 목격자가 없었고, 현장에서 이 씨의 DNA도 발견되지 않은 상태. '공범'의 자백에만 의존하고 있어 석연치 않게 보는 시선이 많았습니다.

결국, 3년 뒤 검찰에서 '불기소' 처리를 합니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검찰 관계자는 KBS 취재진에 "(이 씨가) 경찰 수사 단계에서 자백했지만, 이를 부인했고 증거가 불충분해 혐의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습니다. 사건은 또다시 '미제'로 남았습니다.


이 씨는 이때도 '송파구 석촌동 전당포 연쇄살인 사건'과 '방이동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옛 청송교도소에 수감 중이었습니다. 당시 이 씨는 불기소 처분된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명일동과 미아동 사건은 전부 조작이었다", "DNA가 나왔다든가 소지품이 나왔다든가 하는 것 없이 (증거가) 부족하지 않았냐"면서, "경찰이 사기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씨가 범행 직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이동했다는 전북 익산의 한 마을이 씨가 범행 직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이동했다는 전북 익산의 한 마을

■ '공소시효 닷새 앞두고 재판 넘겨져'..15년 만에 자백

그렇게 미제로 남게된 명일동, 미아동 사건을 서울 강남경찰서에서 재수사하게 된 건 지난해 초의 일입니다. 석촌동 연쇄 살인 사건을 수사했던 수사관이 '이 씨가 명일동 살인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겁니다. 한 차례 무산됐던 미제 사건 수사였던 만큼 재수사 결심이 쉽진 않았지만, 구체적인 첩보를 무시할 수 없어, 과거 검찰에 송치된 수사 기록을 다시 받아 이 씨를 찾아갔습니다.

수차례 만남으로 신뢰를 쌓은 경찰은 15년 만에 새로운 진술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증거 인멸' 관련 진술이었습니다. 이 씨는 명일동에서 살인을 저지른 뒤, 곧바로 공범 이 모 씨가 당시 종종 거주했다는 전북 익산의 한 마을로 함께 내려가 범행 당시 입었던 옷가지와 범행 도구 등을 땅에 묻었다는 겁니다.

경찰은 이 씨의 진술을 토대로 해당 마을을 찾아냈고, 주민들을 수소문해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한 뒤, 다시 한 번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넘겼고, 마침내 대구지검 의성지청은 미아동 살인 미수 사건을 15년 만인 지난 8월 재판에 넘겼습니다. 명일동 사건 역시 기소를 앞두고 있습니다.

[연관기사][단독] 7년 전 진술 번복…이번엔 어떻게 자백 받았나?(KBS 1TV ‘뉴스9’ 2019.10.14.)


■ 분노와 상처로 고통받는 피해자와 가족들...'죗값 치를 수 있을까'

취재진은 수사 상황을 확인한 뒤, 피해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잔혹한 사건에 당하고 남은 무고한 피해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상을 난도질한 범인이 지금까지 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이제야 잡힌 것은 알고 있을까'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한순간에 소중한 가족을 떠나보낸 명일동 사건의 유가족은 해당 사건 직후 명일동을 떠나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아동 피해자들의 가족과는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습니다. 피해 여성 A씨의 아버지는 범인이 여전히 잡히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피해자가 결혼해 새 가정을 꾸렸지만, 악몽이 떠올라서 신랑이 없으면 여전히 힘들어한다"고 전했습니다.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하면서도, "이제 와서 범인을 잡는다 한들 상처가 남은 것이 치료가 되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피해 여성 B씨의 가족은 완곡하게 취재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연관기사] “저런 놈을 왜 밥 먹여줘”…15년이 지나도 또렷한 상처(KBS 1TV ‘뉴스9’ 2019.10.15.)

공소시효가 남겨진 상태로 재판에 넘겨진 만큼, 이 씨는 한 피해자 가족의 말씀대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됐습니다.

'이제껏 잘못했던 것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전하면 조금 빠르게 제가 죗값을 치를 수 있을까..'

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 씨는 다시 범행을 자백하면서, 경찰에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자필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수차례 자신을 찾아온 수사관에 솔직한 속내 일부를 털어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씨의 이러한 속내에, 긴 고통의 터널을 걸어온, 그리고 계속해서 걸어가야 할 피해자와 가족들, 유족들은 어떻게 대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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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나는 살인자입니다’ 15년 만에 자백한 뒷이야기
    • 입력 2019-10-16 17:10:57
    • 수정2019-10-16 17:11:19
    취재후·사건후
■ 공범의 자백으로 드러났다 또다시 미궁...'비오는 목요일의 괴담'

2004년 8월 16일 서울 강동구 명일동. 한 남성이 가정집에 침입해 혼자 있던 40대 여성을 흉기로 찌르고 금품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사흘 뒤, 강북구 미아동에서도 새벽에 길을 걷던 18살 여성이 흉기에 수차례 찔려 중상을 입었고, 10분 뒤 또 다른 20살 여성도 흉기에 찔렸습니다. 며칠 사이 잇따른 끔찍한 살인 미수 사건에 서울 종암경찰서는 신고 포상금 천만 원을 걸고 용의자 수배에 나섰습니다. 키 160cm 안팎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20대 남성 몽타주를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흉기 등 물증이 없어 목격자가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찾아내지 못하고 사건은 '미제'로 남았습니다.

‘비오는 목요일 괴담’으로 불린 강북구 미아동 살인미수 사건. 당시 경찰이 몽타주까지 작성해 용의자 수배에 나섰다. (출처: KBS 추적 60분 ‘연쇄살인마가 던진 진실 게임’(2016.4.27.))
사건은 8년이 지난 2012년에야 해결의 단서가 나타났습니다.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공범 이 모 씨가 자백을 한 겁니다. 경찰은 마침내, 역시 교도소에 있던 당시 46살 이 모 씨를 명일동 살인 사건과 미아동 살인 미수 사건의 피의자로 특정했습니다.

당시 경찰은 '무기수의 양심 고백으로 8년 만에 범인을 붙잡았다'며 언론 브리핑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CCTV나 범행 도구 등 물증이나 목격자가 없었고, 현장에서 이 씨의 DNA도 발견되지 않은 상태. '공범'의 자백에만 의존하고 있어 석연치 않게 보는 시선이 많았습니다.

결국, 3년 뒤 검찰에서 '불기소' 처리를 합니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검찰 관계자는 KBS 취재진에 "(이 씨가) 경찰 수사 단계에서 자백했지만, 이를 부인했고 증거가 불충분해 혐의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습니다. 사건은 또다시 '미제'로 남았습니다.


이 씨는 이때도 '송파구 석촌동 전당포 연쇄살인 사건'과 '방이동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옛 청송교도소에 수감 중이었습니다. 당시 이 씨는 불기소 처분된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명일동과 미아동 사건은 전부 조작이었다", "DNA가 나왔다든가 소지품이 나왔다든가 하는 것 없이 (증거가) 부족하지 않았냐"면서, "경찰이 사기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씨가 범행 직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이동했다는 전북 익산의 한 마을
■ '공소시효 닷새 앞두고 재판 넘겨져'..15년 만에 자백

그렇게 미제로 남게된 명일동, 미아동 사건을 서울 강남경찰서에서 재수사하게 된 건 지난해 초의 일입니다. 석촌동 연쇄 살인 사건을 수사했던 수사관이 '이 씨가 명일동 살인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겁니다. 한 차례 무산됐던 미제 사건 수사였던 만큼 재수사 결심이 쉽진 않았지만, 구체적인 첩보를 무시할 수 없어, 과거 검찰에 송치된 수사 기록을 다시 받아 이 씨를 찾아갔습니다.

수차례 만남으로 신뢰를 쌓은 경찰은 15년 만에 새로운 진술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증거 인멸' 관련 진술이었습니다. 이 씨는 명일동에서 살인을 저지른 뒤, 곧바로 공범 이 모 씨가 당시 종종 거주했다는 전북 익산의 한 마을로 함께 내려가 범행 당시 입었던 옷가지와 범행 도구 등을 땅에 묻었다는 겁니다.

경찰은 이 씨의 진술을 토대로 해당 마을을 찾아냈고, 주민들을 수소문해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한 뒤, 다시 한 번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넘겼고, 마침내 대구지검 의성지청은 미아동 살인 미수 사건을 15년 만인 지난 8월 재판에 넘겼습니다. 명일동 사건 역시 기소를 앞두고 있습니다.

[연관기사][단독] 7년 전 진술 번복…이번엔 어떻게 자백 받았나?(KBS 1TV ‘뉴스9’ 2019.10.14.)


■ 분노와 상처로 고통받는 피해자와 가족들...'죗값 치를 수 있을까'

취재진은 수사 상황을 확인한 뒤, 피해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잔혹한 사건에 당하고 남은 무고한 피해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상을 난도질한 범인이 지금까지 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이제야 잡힌 것은 알고 있을까'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한순간에 소중한 가족을 떠나보낸 명일동 사건의 유가족은 해당 사건 직후 명일동을 떠나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아동 피해자들의 가족과는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습니다. 피해 여성 A씨의 아버지는 범인이 여전히 잡히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피해자가 결혼해 새 가정을 꾸렸지만, 악몽이 떠올라서 신랑이 없으면 여전히 힘들어한다"고 전했습니다.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하면서도, "이제 와서 범인을 잡는다 한들 상처가 남은 것이 치료가 되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피해 여성 B씨의 가족은 완곡하게 취재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연관기사] “저런 놈을 왜 밥 먹여줘”…15년이 지나도 또렷한 상처(KBS 1TV ‘뉴스9’ 2019.10.15.)

공소시효가 남겨진 상태로 재판에 넘겨진 만큼, 이 씨는 한 피해자 가족의 말씀대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됐습니다.

'이제껏 잘못했던 것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전하면 조금 빠르게 제가 죗값을 치를 수 있을까..'

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 씨는 다시 범행을 자백하면서, 경찰에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자필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수차례 자신을 찾아온 수사관에 솔직한 속내 일부를 털어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씨의 이러한 속내에, 긴 고통의 터널을 걸어온, 그리고 계속해서 걸어가야 할 피해자와 가족들, 유족들은 어떻게 대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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