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비싼 농산물과 갈아엎는 농작물, 왜?…거대자본이 장악한 유통망

입력 2019.10.22 (07:00) 수정 2019.10.2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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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부터 경제부에 왔습니다. 올해 봄에도 다른 해처럼 산지폐기가 많았습니다. 양배추, 배추를 비롯해 대파와 마늘까지. 대량으로 농작물을 갈아엎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출입기자가 되니, 한 사람의 소비자로서 품었던 궁금증보다 더 많이 궁금해졌습니다. 왜 한쪽에서는 애써 키운 작물을 버리고 한쪽에서는 비싼 가격에 사 먹는지. 왜 우리나라 농작물 생산이 풍년과 흉년에 이렇게 대비가 안 되는 것인지.

올해 봄에는 산지폐기로 고통받는 농민들의 얘기를 들었고, 올가을에는 유통 상인들의 실태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세상사가 모두 그러하듯, 문제의 원인을 한두 가지로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합니다. 생산자, 소비자, 중간 유통 상인, 그리고 정부. 모두 왜곡된 농산물 시장에 각자의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책임의 큰 부분을 유통 업체들이 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상의 ‘독과점’ 체제

우리나라 농산물 도매법인은 모두 49개입니다. 지난 1980년대 초반부터 도매법인 체제가 생겼습니다. 이 가운데 다섯 개 도매법인과 농협이 가락시장에 들어갑니다. 가락시장은 우리나라 농산물 유통의 30% 이상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가락시장의 가격은 사실상 국내 농산물 가격의 표준이 됩니다. 그러니 가락시장에 들어가는 도매법인들이 국내 농산물 유통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농산물 도매법인들은 어떻게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도매법인 사업을 하려면 지자체장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농산물 유통 및 가격 안정에 관한 법률 (이하 농안법) 23조를 보면 도매법인이 갖춰야 할 요건을 적어놓고 있습니다. "도매시장 법인이 되려면 도매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지식과 도매시장이나 공판장 업무에 종사한 경험이 있는 담당 임원이 2명 이상 있어야 한다.” 자격요건치고는 그 허들이 낮고, 규정도 사뭇 모호하죠.

재지정 평가도 허술하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유통 관련 전문가들이 도매법인을 점검하고 있는데, 지난 1990년대 농수산물 도매법인 재지정 평가가 시작된 이후 한 번도 강제적으로 법인허가가 취소된 적은 없습니다. 지정이 취소된 사례가 2건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해당 업체들의 재정상태 불량, 그러니까 업체 파산이 취소사유였습니다. 한번 농산물 도매법인으로 허가를 받고 이 시장에 진입하면 사실상의 독과점 상태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평균 영업이익률 18%...도소매업종 평균의 8배

국회 농해수위 김종회 의원실이 입수한 자료를 토대로, 가락시장에 들어가는 다섯 개 도매법인들의 소유 구조를 살펴봤습니다. 모두 재벌 또는 사모펀드 등 거대자본이 소유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들 법인이 거둬들이고 있는 수수료도 살펴봤습니다. 해당 도매법인들은 농산물 거래 수수료를 최대 7%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가락시장 사용료는 거래액의 0.55%만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매법인 측은 본인들의 수수료율은 외부에 있는 사설, 민간유통업체들이 받는 수수료와 비교하면 오히려 현저하게 낮은 수준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농산물 도매법인들은 정부로부터 결제자금 등의 명목으로 해마다 350억 원가량의 자금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1~3% 내외의 저금리입니다. 도매법인들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18%, 최대 22%에 달합니다. 전체 도소매업종 평균 이익률의 8배가 넘는 규모입니다.


수급 조절 대신 경매, 유통 사업에 '집중'

이처럼 도매법인들은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영업을 시작해 과점체제를 유지하고, 정부로부터 저리 융자, 저렴한 시장 사용료 등 다양한 혜택들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공적 기능을 수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농안법에는‘농수산물종합유통센터’를 농수산물의 수집ㆍ포장ㆍ가공ㆍ보관ㆍ수송ㆍ판매 및 그 정보처리 등을 하는 시설로 정하고 있습니다. 법을 넓게 해석하면 유통센터 안에 들어가는 도매법인들도 농수산물의 수집, 가공, 보관 등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매법인들이 농산물 유통의 업무를 넘어서서, 농산물이 넘치고 모자랄 때 적절히 수급 조절을 하는 기능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현재 도매법인들은 경매와 유통 업무 이외에 위와 같은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공적인 역할에는 소홀한 채 손쉽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경매 사업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하지만 도매법인들은 법인 본연의 역할이 농민이 맡긴 물건을 판매하고, 대금을 주는 역할인 만큼, 그 이상의 역할, 부수적인 역할까지 할 이유는 없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까

농산물 유통의 모순을 푸는 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농산물은 기후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저장도 쉽지 않기에, 풍흉에 따른 가격 오르내림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수매와 가격을 통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정부가 채소가격안정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농민들이 이런 공공 수매의 우산 아래로 모두 들어가기도 사실상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는 유통 상인들의 역할이 정말 중요한 데, 이들 업체의 투명성을 유지하는 것도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전국 49개의 도매법인이 농산물 수급을 20년 넘게 과점 체제로 독점하고 있습니다. 가락시장 법인 4곳은 지난해 담합 혐의로 공정위로부터 과징금 116억 원을 부과받았습니다. 생산자는 제값을 받고, 소비자는 저렴하게 농산물을 소비할 수 있는 건강한 시장이 가능할까요? 풀기 쉽지 않은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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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비싼 농산물과 갈아엎는 농작물, 왜?…거대자본이 장악한 유통망
    • 입력 2019-10-22 07:00:30
    • 수정2019-10-22 09:03:46
    취재후·사건후
올해 3월부터 경제부에 왔습니다. 올해 봄에도 다른 해처럼 산지폐기가 많았습니다. 양배추, 배추를 비롯해 대파와 마늘까지. 대량으로 농작물을 갈아엎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출입기자가 되니, 한 사람의 소비자로서 품었던 궁금증보다 더 많이 궁금해졌습니다. 왜 한쪽에서는 애써 키운 작물을 버리고 한쪽에서는 비싼 가격에 사 먹는지. 왜 우리나라 농작물 생산이 풍년과 흉년에 이렇게 대비가 안 되는 것인지.

올해 봄에는 산지폐기로 고통받는 농민들의 얘기를 들었고, 올가을에는 유통 상인들의 실태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세상사가 모두 그러하듯, 문제의 원인을 한두 가지로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합니다. 생산자, 소비자, 중간 유통 상인, 그리고 정부. 모두 왜곡된 농산물 시장에 각자의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책임의 큰 부분을 유통 업체들이 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상의 ‘독과점’ 체제

우리나라 농산물 도매법인은 모두 49개입니다. 지난 1980년대 초반부터 도매법인 체제가 생겼습니다. 이 가운데 다섯 개 도매법인과 농협이 가락시장에 들어갑니다. 가락시장은 우리나라 농산물 유통의 30% 이상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가락시장의 가격은 사실상 국내 농산물 가격의 표준이 됩니다. 그러니 가락시장에 들어가는 도매법인들이 국내 농산물 유통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농산물 도매법인들은 어떻게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도매법인 사업을 하려면 지자체장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농산물 유통 및 가격 안정에 관한 법률 (이하 농안법) 23조를 보면 도매법인이 갖춰야 할 요건을 적어놓고 있습니다. "도매시장 법인이 되려면 도매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지식과 도매시장이나 공판장 업무에 종사한 경험이 있는 담당 임원이 2명 이상 있어야 한다.” 자격요건치고는 그 허들이 낮고, 규정도 사뭇 모호하죠.

재지정 평가도 허술하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유통 관련 전문가들이 도매법인을 점검하고 있는데, 지난 1990년대 농수산물 도매법인 재지정 평가가 시작된 이후 한 번도 강제적으로 법인허가가 취소된 적은 없습니다. 지정이 취소된 사례가 2건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해당 업체들의 재정상태 불량, 그러니까 업체 파산이 취소사유였습니다. 한번 농산물 도매법인으로 허가를 받고 이 시장에 진입하면 사실상의 독과점 상태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평균 영업이익률 18%...도소매업종 평균의 8배

국회 농해수위 김종회 의원실이 입수한 자료를 토대로, 가락시장에 들어가는 다섯 개 도매법인들의 소유 구조를 살펴봤습니다. 모두 재벌 또는 사모펀드 등 거대자본이 소유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들 법인이 거둬들이고 있는 수수료도 살펴봤습니다. 해당 도매법인들은 농산물 거래 수수료를 최대 7%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가락시장 사용료는 거래액의 0.55%만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매법인 측은 본인들의 수수료율은 외부에 있는 사설, 민간유통업체들이 받는 수수료와 비교하면 오히려 현저하게 낮은 수준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농산물 도매법인들은 정부로부터 결제자금 등의 명목으로 해마다 350억 원가량의 자금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1~3% 내외의 저금리입니다. 도매법인들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18%, 최대 22%에 달합니다. 전체 도소매업종 평균 이익률의 8배가 넘는 규모입니다.


수급 조절 대신 경매, 유통 사업에 '집중'

이처럼 도매법인들은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영업을 시작해 과점체제를 유지하고, 정부로부터 저리 융자, 저렴한 시장 사용료 등 다양한 혜택들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공적 기능을 수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농안법에는‘농수산물종합유통센터’를 농수산물의 수집ㆍ포장ㆍ가공ㆍ보관ㆍ수송ㆍ판매 및 그 정보처리 등을 하는 시설로 정하고 있습니다. 법을 넓게 해석하면 유통센터 안에 들어가는 도매법인들도 농수산물의 수집, 가공, 보관 등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매법인들이 농산물 유통의 업무를 넘어서서, 농산물이 넘치고 모자랄 때 적절히 수급 조절을 하는 기능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현재 도매법인들은 경매와 유통 업무 이외에 위와 같은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공적인 역할에는 소홀한 채 손쉽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경매 사업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하지만 도매법인들은 법인 본연의 역할이 농민이 맡긴 물건을 판매하고, 대금을 주는 역할인 만큼, 그 이상의 역할, 부수적인 역할까지 할 이유는 없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까

농산물 유통의 모순을 푸는 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농산물은 기후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저장도 쉽지 않기에, 풍흉에 따른 가격 오르내림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수매와 가격을 통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정부가 채소가격안정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농민들이 이런 공공 수매의 우산 아래로 모두 들어가기도 사실상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는 유통 상인들의 역할이 정말 중요한 데, 이들 업체의 투명성을 유지하는 것도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전국 49개의 도매법인이 농산물 수급을 20년 넘게 과점 체제로 독점하고 있습니다. 가락시장 법인 4곳은 지난해 담합 혐의로 공정위로부터 과징금 116억 원을 부과받았습니다. 생산자는 제값을 받고, 소비자는 저렴하게 농산물을 소비할 수 있는 건강한 시장이 가능할까요? 풀기 쉽지 않은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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