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 연우네는 설날에 ‘비건식 차례상’을 차렸습니다”

입력 2020.01.25 (09:00) 수정 2020.01.25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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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앞에 잘 차려진 차례상, 자주 보던 음식이 가득합니다. 잘 익은 배와 사과, 노릇노릇한 산적과 동그랑땡, 지단을 얹은 떡국까지…. 명절마다 봐왔던 익숙한 차례상입니다. 그런데 이 차례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료가 특별하다고 합니다.


산적 꼬치엔 게맛살 대신 콩으로 만든 햄과 버섯이 꽂혀 있습니다. 노르스름한 동그랑땡은 달걀옷이 아닌 '카레 전분물'을 묻혀 완성됐습니다. 새우살을 발라 만든 줄 알았던 꼬치는 알고보니 새우 모양을 낸 곤약입니다.

고기라곤 일절 사용하지 않은, 완전한 채식 재료로 만든 이른바 '비건(Vegan) 차례상'입니다.

"콩고기 고명 얹은 떡국으로 새해 맞아요"

연휴를 앞두고 경기도 하남시의 자택에서 만난 49살 이신정 씨. 올해로 벌써 15번째 비건식 차례상을 차렸습니다. 이 씨는 "채식만으로도 차릴 수 있는 차례 음식이 정말 많다"며 준비한 차례상을 선보였습니다. 이날 이 씨의 차례상에는 앞서 본 산적과 곤약 새우를 비롯해 20가지가 넘는 음식이 올랐습니다.

이신정 씨와 채식동호회 회원 최양미 씨가 함께 차린 비건식 차례상. 대체육과 식물성 재료로만 20여 가지의 차례 음식을 준비했다.이신정 씨와 채식동호회 회원 최양미 씨가 함께 차린 비건식 차례상. 대체육과 식물성 재료로만 20여 가지의 차례 음식을 준비했다.

이 씨는 21년 전부터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됐습니다. 폭력적인 동물 사육과 도살 과정을 본 뒤부터 고기는 물론 우유와 달걀, 생선까지 모두 끊었습니다. 이 씨는 "채식을 시작한 뒤 채식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조리법을 공유하며 고기 없이도 충분히 맛있게 삼시 세끼를 먹으며 지내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명절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 고기가 들어간 메뉴를 하나씩 바꿔왔다"며 "대체육과 채식 재료만을 사용해도 충분히 차례상을 차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남편도 명절 때마다 아이디어를 내며 채식 요리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채식을 의아해했던 시부모도 지금은 맛과 식감에 모두 만족하며 명절마다 비건 차례상을 즐깁니다.

콩고기와 다시마, 두부 고명을 얹은 비건식 떡국.콩고기와 다시마, 두부 고명을 얹은 비건식 떡국.

이 씨의 1남 2녀 중 막내인 9살 연우는 스스로를 '모태 비건'이라고 밝혔습니다. 태어나서 고기나 유제품을 한 번도 먹지 않은 연우는 이날 채수로 국물을 내고, 다시마와 콩고기 고명을 얹은 떡국 한 그릇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연우는 "반 친구들도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 걸 다 안다"라며 "고기를 안 먹어봐서 맛은 모르겠지만, 엄마가 차려주는 음식이 다 맛있어서 딱히 고기를 먹어보고 싶지는 않다"며 웃어 보였습니다.

구절판에 비건 케이크 등장한 '채식 결혼식'

명절을 앞두고 채식 식사를 하며 소박하게 결혼식을 올린 부부도 있습니다. 22일 서울 종로구 체부동의 한 한식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김경배 씨와 강선이 씨의 이야기입니다. 4년 연애의 결실을 맺을 장소로 부부는 예식장이나 호텔이 아닌, 평소 자주 오던 채식 식당을 골랐습니다.

22일 서울 종로구 체부동의 한 채식 식당에서 김경배·강선이 부부가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22일 서울 종로구 체부동의 한 채식 식당에서 김경배·강선이 부부가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자신들은 물론, 양가 부모님도 채식을 즐겨온 만큼 결혼만큼은 비(非) 채식이 아닌 채식 식사를 하며 행복하게 보내고 싶었다는 이 부부. 오후 다섯 시 시작된 부부의 결혼식에는 화려한 조명은커녕, 성혼 선언문조차 없었습니다. 대신 달걀을 넣지 않고 만든 비건 케이크, 그리고 채 썬 파프리카와 당근, 호박과 버섯 등이 담긴 구절판이 등장했습니다. 모두 평소에 즐겨먹던 음식들입니다.

따뜻한 한 끼 식사 동안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며, 이들은 평생을 함께하자고 약속했습니다. 아내인 강 씨는 "환경과 동물권 문제에 관심이 많아 채식을 시작하게 됐고, 남편도 내 뜻에 동의해 간헐적 채식을 하게 됐다"며 "평상시에는 비채식자 위주로 식당을 갈 일이 많은데, 결혼만큼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채식 결혼식을 올리자는 뜻에서 이곳에서 결혼하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강씨의 어머니 오희순 씨는 "딸과 사위가 평소 즐겨먹던 채식 밥상이 결혼식 상에 올라 의미가 더 남다른 것 같다"며 "결혼과 같은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채식 식당이 더 많아져서 채식하는 사람들의 선택지가 다양해지길 바란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남편 김 씨의 어머니인 박주원 씨도 "나 또한 30년 넘게 채식을 해왔다"면서 "채식을 이해하는 가족을 만나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뜻이 통하는 며느리를 얻어서 기쁘다"라고 말했습니다.

"주1회·특별한 날 한 끼 채식도 환경에 도움"

최근 환경과 생명 보호의 중요성이 커지며,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이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채식을 실천하는 방식도 다양합니다. 완전한 채식이 아니더라도, 달걀과 생선까지는 포함한 식단을 이어가는 것 또한 채식으로 분류됩니다. 더 넓게 보면 평상시에는 식물성 음식을 주로 먹되, 가끔씩 고기도 먹으며 유연하게 식단을 조절하는 사람도 '유연한 채식주의자'에 포함됩니다.

일주일에 한 번, 특별한 날 한 끼 식사와 같이 간헐적인 채식을 통해 채식과 친숙해지려는 시도도 점차 늘고 있습니다. 채식 사회와 전문가들은 이러한 흐름을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채식 한식당 '마지' 대표인 김현진 씨는 "최근에는 채식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뀐 것 같다"며 "채식을 하나의 트렌드로 보고, 더 편안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즐기는 손님들이 많아진 것을 체감한다"고 말했습니다.

조길예 기후행동비건네트워크 상임대표는 "일주일에 한 번, 하루에 한 끼, 혹은 명절이나 행사 때 비건 채식을 하는 것만으로도 식량 위기와 기후변화, 동물보호 등 여러 관점에서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조 대표는 특히, 비건식 차례상을 언급하며 "불고기나 육류가 아닌 대체육으로 만든 비건식 차례상의 경우, 온실가스를 10분의 1 정도 감축하는 효과가 있다고 분석한다"며 채식이 환경에 미치는 순기능을 강조했습니다.

한국채식연합은 우리나라의 채식 인구가 10여년 전보다 10배 정도 늘어난 200만 명 정도로 추산합니다. 채식을 선택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건강과 다이어트와 같은 개인적 차원에서 동물 보호와 기후 위기 등 사회적 차원으로 그 범위가 점차 확장되는 추세입니다. 환경과 사회를 위해 내 식탁에 오르는 음식부터 바꾸자는 '착한 먹거리'를 찾는 시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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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1-25 09:00:03
    • 수정2020-01-25 12:12:19
    취재K
꼬마 앞에 잘 차려진 차례상, 자주 보던 음식이 가득합니다. 잘 익은 배와 사과, 노릇노릇한 산적과 동그랑땡, 지단을 얹은 떡국까지…. 명절마다 봐왔던 익숙한 차례상입니다. 그런데 이 차례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료가 특별하다고 합니다.


산적 꼬치엔 게맛살 대신 콩으로 만든 햄과 버섯이 꽂혀 있습니다. 노르스름한 동그랑땡은 달걀옷이 아닌 '카레 전분물'을 묻혀 완성됐습니다. 새우살을 발라 만든 줄 알았던 꼬치는 알고보니 새우 모양을 낸 곤약입니다.

고기라곤 일절 사용하지 않은, 완전한 채식 재료로 만든 이른바 '비건(Vegan) 차례상'입니다.

"콩고기 고명 얹은 떡국으로 새해 맞아요"

연휴를 앞두고 경기도 하남시의 자택에서 만난 49살 이신정 씨. 올해로 벌써 15번째 비건식 차례상을 차렸습니다. 이 씨는 "채식만으로도 차릴 수 있는 차례 음식이 정말 많다"며 준비한 차례상을 선보였습니다. 이날 이 씨의 차례상에는 앞서 본 산적과 곤약 새우를 비롯해 20가지가 넘는 음식이 올랐습니다.

이신정 씨와 채식동호회 회원 최양미 씨가 함께 차린 비건식 차례상. 대체육과 식물성 재료로만 20여 가지의 차례 음식을 준비했다.
이 씨는 21년 전부터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됐습니다. 폭력적인 동물 사육과 도살 과정을 본 뒤부터 고기는 물론 우유와 달걀, 생선까지 모두 끊었습니다. 이 씨는 "채식을 시작한 뒤 채식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조리법을 공유하며 고기 없이도 충분히 맛있게 삼시 세끼를 먹으며 지내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명절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 고기가 들어간 메뉴를 하나씩 바꿔왔다"며 "대체육과 채식 재료만을 사용해도 충분히 차례상을 차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남편도 명절 때마다 아이디어를 내며 채식 요리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채식을 의아해했던 시부모도 지금은 맛과 식감에 모두 만족하며 명절마다 비건 차례상을 즐깁니다.

콩고기와 다시마, 두부 고명을 얹은 비건식 떡국.
이 씨의 1남 2녀 중 막내인 9살 연우는 스스로를 '모태 비건'이라고 밝혔습니다. 태어나서 고기나 유제품을 한 번도 먹지 않은 연우는 이날 채수로 국물을 내고, 다시마와 콩고기 고명을 얹은 떡국 한 그릇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연우는 "반 친구들도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 걸 다 안다"라며 "고기를 안 먹어봐서 맛은 모르겠지만, 엄마가 차려주는 음식이 다 맛있어서 딱히 고기를 먹어보고 싶지는 않다"며 웃어 보였습니다.

구절판에 비건 케이크 등장한 '채식 결혼식'

명절을 앞두고 채식 식사를 하며 소박하게 결혼식을 올린 부부도 있습니다. 22일 서울 종로구 체부동의 한 한식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김경배 씨와 강선이 씨의 이야기입니다. 4년 연애의 결실을 맺을 장소로 부부는 예식장이나 호텔이 아닌, 평소 자주 오던 채식 식당을 골랐습니다.

22일 서울 종로구 체부동의 한 채식 식당에서 김경배·강선이 부부가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자신들은 물론, 양가 부모님도 채식을 즐겨온 만큼 결혼만큼은 비(非) 채식이 아닌 채식 식사를 하며 행복하게 보내고 싶었다는 이 부부. 오후 다섯 시 시작된 부부의 결혼식에는 화려한 조명은커녕, 성혼 선언문조차 없었습니다. 대신 달걀을 넣지 않고 만든 비건 케이크, 그리고 채 썬 파프리카와 당근, 호박과 버섯 등이 담긴 구절판이 등장했습니다. 모두 평소에 즐겨먹던 음식들입니다.

따뜻한 한 끼 식사 동안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며, 이들은 평생을 함께하자고 약속했습니다. 아내인 강 씨는 "환경과 동물권 문제에 관심이 많아 채식을 시작하게 됐고, 남편도 내 뜻에 동의해 간헐적 채식을 하게 됐다"며 "평상시에는 비채식자 위주로 식당을 갈 일이 많은데, 결혼만큼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채식 결혼식을 올리자는 뜻에서 이곳에서 결혼하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강씨의 어머니 오희순 씨는 "딸과 사위가 평소 즐겨먹던 채식 밥상이 결혼식 상에 올라 의미가 더 남다른 것 같다"며 "결혼과 같은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채식 식당이 더 많아져서 채식하는 사람들의 선택지가 다양해지길 바란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남편 김 씨의 어머니인 박주원 씨도 "나 또한 30년 넘게 채식을 해왔다"면서 "채식을 이해하는 가족을 만나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뜻이 통하는 며느리를 얻어서 기쁘다"라고 말했습니다.

"주1회·특별한 날 한 끼 채식도 환경에 도움"

최근 환경과 생명 보호의 중요성이 커지며,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이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채식을 실천하는 방식도 다양합니다. 완전한 채식이 아니더라도, 달걀과 생선까지는 포함한 식단을 이어가는 것 또한 채식으로 분류됩니다. 더 넓게 보면 평상시에는 식물성 음식을 주로 먹되, 가끔씩 고기도 먹으며 유연하게 식단을 조절하는 사람도 '유연한 채식주의자'에 포함됩니다.

일주일에 한 번, 특별한 날 한 끼 식사와 같이 간헐적인 채식을 통해 채식과 친숙해지려는 시도도 점차 늘고 있습니다. 채식 사회와 전문가들은 이러한 흐름을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채식 한식당 '마지' 대표인 김현진 씨는 "최근에는 채식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뀐 것 같다"며 "채식을 하나의 트렌드로 보고, 더 편안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즐기는 손님들이 많아진 것을 체감한다"고 말했습니다.

조길예 기후행동비건네트워크 상임대표는 "일주일에 한 번, 하루에 한 끼, 혹은 명절이나 행사 때 비건 채식을 하는 것만으로도 식량 위기와 기후변화, 동물보호 등 여러 관점에서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조 대표는 특히, 비건식 차례상을 언급하며 "불고기나 육류가 아닌 대체육으로 만든 비건식 차례상의 경우, 온실가스를 10분의 1 정도 감축하는 효과가 있다고 분석한다"며 채식이 환경에 미치는 순기능을 강조했습니다.

한국채식연합은 우리나라의 채식 인구가 10여년 전보다 10배 정도 늘어난 200만 명 정도로 추산합니다. 채식을 선택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건강과 다이어트와 같은 개인적 차원에서 동물 보호와 기후 위기 등 사회적 차원으로 그 범위가 점차 확장되는 추세입니다. 환경과 사회를 위해 내 식탁에 오르는 음식부터 바꾸자는 '착한 먹거리'를 찾는 시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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