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포탈 보고서]⑤ ‘일당 7천만 원’…황제노역이 가능한 이유는?

입력 2020.03.13 (07:03) 수정 2020.03.24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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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억 세금 포탈했지만…'벌금 많이 부과했다'며 집행유예

고물상에게서 고철이나 비철을 사다 제련공장 등에 판매한 김 모 씨가 있습니다. 물건을 살 때 가격의 10%가 붙는 부가가치세를 내지 않으려고 현금 거래를 했습니다. 하지만 세금을 내고 산 것처럼 허위 세금계산서를 작성해 부가세 206억 원 상당을 포탈했습니다.

김 씨는 최종심에서 1심과 거의 같은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벌금 595억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부는 1심 '선고형의 결정'에서 "김 씨의 가담 정도가 아주 중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다액의 벌금이 병과되는 점 등을 참작해 양형기준 권고형의 하한보다 낮은 형을 선고한다"고 밝혔습니다.

김 씨에 대한 권고형의 범위는 4년~9년이었는데요. 형법상 집행유예를 받으려면 3년 이하로 선고받아야 가능한데, 김 씨는 권고형의 하한이 4년이어서 당초에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하한보다 낮은 2년 6개월을 선고해 집행유예를 받게 해줬습니다. 그리고 판결을 내릴 때 벌금이 6백억 원 가까이 선고되는 점 등을 고려했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입니다.


벌금 6백억, 하루 6천만 원 씩 탕감…'황제노역' 논란

조세 포탈범들은 포탈세액이 클수록 벌금형을 같이 내릴 수 있도록 규정이 정해져 있습니다. 일반 조세 포탈범들은 징역형 또는 포탈세액의 2~3배에 상당하는 벌금형, 혹은 둘을 함께 내릴 수 있고요. 연간 포탈세액이 5억 원 이상으로 특가법 적용 대상이 되면, 징역형과 함께 2~5배 이하에 상당하는 벌금형을 부과해야 합니다. 고액의 조세를 포탈할수록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김 씨의 경우 포탈세액이 2백억 원이 넘으니 특가법 적용대상이고, 벌금이 함께 부과됩니다. 벌금은 규정상 포탈세액의 2~5배 사이에서 정해야 하는데, 김 씨의 경우는 3배인 6백억 원가량으로 정해진 겁니다.

하지만 형법상 벌금을 안 내면 일정 기간 노역장에 유치해 일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해줍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 씨가 벌금으로 노역을 대신하면, 하루에 벌금을 5900만 원씩 깎아주겠다고 밝혔습니다. 하루 일당을 6천만 원 정도로 쳐주는 셈입니다.

김 씨는 벌금이 6백억 원 가까이 나왔지만, 1009일, 약 2년 9개월 동안 노역장에서 일하면 벌금을 모두 탕감받게 됩니다. 이처럼 고액의 벌금이 나와도 짧은 기간 노역으로 대신하는 걸 두고 '황제노역'이라고 부릅니다.


1인당 평균 벌금 58억…하루 노역 일당 770만 원

그렇다면 벌금형을 받은 조세 포탈범들은 벌금을 다 제대로 냈을까요? 아니면 노역으로 대신했을까요?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최근 5년간 조세 포탈범 166명 가운데 벌금이 부과된 경우는 128명이었는데요. 1인당 평균 벌금은 58억 원에 달했습니다.

이를 노역으로 탕감해 줄 경우, 하루 일당은 평균 767만 원으로 책정됐습니다. 벌금이 많이 나와도 하루 8백만 원 가까이 깎아주는 겁니다. 일당이 고액이다 보니 노역 일수는 적게 산출됐습니다. 평균 644일, 약 1년 9개월만 노역을 하면 벌금이 없어지는 겁니다.


벌금 7400억 걷혔을까?…집행금액 96% 노역으로 대체

KBS 데이터저널리즘팀은 대검찰청에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자료를 분석해서 128명에 대한 벌금형 집행 현황을 살펴봤습니다. 대검찰청은 이들에 대한 벌금 확정액은 약 7367억 원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가운데 1월 1일 기준으로 벌금형이 집행된 건 모두 120명, 5568억 원 상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금액은 모두 걷힌 게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벌금을 납부한 건 4.5%인 252억 원에 그쳤습니다. 나머지 95.5%에 달하는 벌금 5316억 원 어치는 어떻게 집행된 걸까요? 검찰은 이 금액은 노역장 유치로 차감됐다고 밝혔습니다. 집행된 벌금의 95.5%, 거의 전체가 실제로 낸 것이 아니라 노역으로 대체됐다는 뜻입니다.

검찰은 개인별 납부, 노역 내역에 대해서는 개인 정보상의 이유를 들어 자료 제공을 거부했습니다.


유치기간 하한에 가깝게…'고액 포탈범 봐주기?'

'황제노역'에 대한 비판은 2014년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하루 5억 원 일당의 노역을 살면서 정점에 달했는데요. 벌금 254억 원을 50일 노역으로 탕감받게 되자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노역장 유치에 관한 세부 기준이 신설됐는데요. 벌금 액수에 따라 유치기간을 어느 이상으로 정하라고 구간을 나눴습니다. 벌금이 1억 원 이상~5억 원 미만이면 300일 이상 노역을 살게 하고, 벌금 5억 원 이상~50억 원 미만이면 500일 이상, 벌금 50억 이상이면 1000일 이상 유치하도록 했습니다.


이 제도가 시행돼 적용이 된 사례는 51명이었는데요. 각 구간별로 유치 기간이 얼마로 결정됐나 분석해봤습니다. 벌금 1억~5억 구간에 해당되는 건 3명으로, 노역 기간은 평균 388일이었습니다. 벌금 5억~50억 나온 사람은 32명이었는데, 노역 기간은 평균 559일로 정해졌습니다. 각각 법이 정한 하한인 300일, 500일보다 조금 상회했는데, 눈에 띄는 건 벌금이 많을수록 하한에 가까워진다는 겁니다.

벌금 50억 이상으로 가면 이 같은 경향은 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이 구간 조세 포탈범 16명의 평균 유치기간은 1000일로, 법 기준의 하한에 정확히 맞춘 걸 알 수 있습니다. 법에서 1000일 이상으로 정하라고 했는데, 16명 모두 확인해보니 딱 1000일로 정했습니다. 벌금이 50억 나온 사람도 1000일, 279억 나온 사람도 1000일이었습니다.


벌금이 많이 나온 건 그만큼 포탈한 세금이 많아서인데요. 정작 더 많이 세금을 포탈할수록 유치기간은 하한 쪽으로 너그럽게 잡아주고 있습니다.

알고보니 상한 있는 유치기간…'3년 넘기진 마라?'

더구나 벌금 50억 이상 포탈범의 유치 기간은 1000일 이상이라고 돼 있지만, 사실 상한에 제한이 있습니다. 형법의 또 다른 조항인 제69조 제2항에서는 노역장 유치 기간을 1일 이상~3년 이하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노역장 유치가 3년, 즉 1095일을 넘어가면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따라 벌금 50억 이상인 경우, 유치 기간은 사실상 1000일 이상~1095일 이하로 그 폭이 대폭 좁아지게 됩니다. 벌금이 50억 이상이든 수백억이 나오든 유치 기간은 1000일 남짓으로 별 차이가 없어지는 겁니다.


벌금 많을수록 오르는 일당…"형평성 어긋나"

벌금이 크게 차이가 나는데, 유치 기간이 비슷한 건 어째서일까요? 노역 일당에서 차이가 크게 나는 겁니다. 벌금이 많을수록 일당을 많이 책정하면 노역 기간에 큰 차이가 나지 않게 됩니다. 실제로 분석 결과, 벌금이 많은 포탈범의 일당을 더 높게 책정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벌금 1억~5억 구간에 해당하는 사람의 평균 일당은 백만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벌금 5~50억 구간은 326만 원, 벌금 50억 이상은 1068만 원으로 일당이 급증했습니다. 벌금이 50억이 넘는 사람의 일당을 벌금 5억 미만인 사람보다 열 배나 많이 쳐주는 겁니다.


이에 대해 박용대 변호사(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부소장)는 "1일 탕감 금액이 피고인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지적합니다. 박 변호사는 특히 "그것도 더 많은 벌금을 선고받은 피고인이 더 유리해지는 제도는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최저시급 일당의 천 배까지…'허탈한 성실 납세자들'

나아가 성실히 일해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납세자들 입장에서 보면, 포탈범들의 노역 일당을 수백, 수천만 원까지 쳐주는 현실은 상대적 박탈감까지 불러일으킵니다.

올해 최저시급 8590원으로, 하루 8시간 일하면 일당으로 6만 8720원을 받습니다. 조세 포탈범 가운데는 노역 일당이 7천만 원으로 책정된 경우도 있는데요. 이 사람은 320억 원이 넘는 조세를 포탈했는데도, 일당은 최저 시급을 받는 사람보다 1018배나 많은 셈입니다.


"노역 일당 법으로 정해야"…"유치기간 늘리는 것도 방법"


이와 관련해 박용대 변호사는 "하루 탕감 금액을 법률에서 일정한 범위로 정해야 형평성의 문제를 방지할 수 있다고"고 주장합니다. 이와 함께 "상한 기간까지 노역장 유치를 하고도 남은 벌금액은 탕감하지 말고, 국가가 시효 제한 없이 벌금을 징수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또 박훈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조세범에 한정해서 노역장 유치기간의 제한을 푸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유치기간 제한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조세범에 대해선 숨겨놓은 재산을 확보하기 위해 예외 조치는 가능하도록 법령 개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노역 일당을 일정 금액, 예컨대 수십~수백만 원을 넘기지 못하도록 하자는 법률 개정안들이 나왔지만,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는 못했습니다. 또 2018년 법제처는 유치기간을 최대 3년보다 늘리도록 법 개정을 권고했지만, 법무부는 기간을 늘리면 노역이 추가 징역형이 된다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법을 바꾸자는 논의는 있어도 실제 개정으로는 이어지지 않게 되면서 수십억의 벌금형을 받은 대다수의 고액 조세포탈범들은 변함없이 스스로 ‘황제노역’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게 됐습니다.

데이터 수집·분석: 정한진, 윤지희, 이지연
데이터 시각화: 임유나

[연관기사]
[조세포탈 보고서]① 그들은 법을 두려워할까?…‘포탈세액 평균 29억, 열에 여섯은 집행유예’
[조세포탈 보고서]② 거액 조세포탈 어떻게?…‘무자료·폭탄업체·차명 거래’
[조세포탈 보고서]③ 그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나?…‘5년형 권고에 3년형 선고?’
[조세포탈 보고서]④ ‘반성합니다’로 감옥행 면했는데…‘지금도 체납이 수십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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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세포탈 보고서]⑤ ‘일당 7천만 원’…황제노역이 가능한 이유는?
    • 입력 2020-03-13 07:03:38
    • 수정2020-03-24 17:39:16
    데이터룸
2백억 세금 포탈했지만…'벌금 많이 부과했다'며 집행유예

고물상에게서 고철이나 비철을 사다 제련공장 등에 판매한 김 모 씨가 있습니다. 물건을 살 때 가격의 10%가 붙는 부가가치세를 내지 않으려고 현금 거래를 했습니다. 하지만 세금을 내고 산 것처럼 허위 세금계산서를 작성해 부가세 206억 원 상당을 포탈했습니다.

김 씨는 최종심에서 1심과 거의 같은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벌금 595억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부는 1심 '선고형의 결정'에서 "김 씨의 가담 정도가 아주 중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다액의 벌금이 병과되는 점 등을 참작해 양형기준 권고형의 하한보다 낮은 형을 선고한다"고 밝혔습니다.

김 씨에 대한 권고형의 범위는 4년~9년이었는데요. 형법상 집행유예를 받으려면 3년 이하로 선고받아야 가능한데, 김 씨는 권고형의 하한이 4년이어서 당초에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하한보다 낮은 2년 6개월을 선고해 집행유예를 받게 해줬습니다. 그리고 판결을 내릴 때 벌금이 6백억 원 가까이 선고되는 점 등을 고려했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입니다.


벌금 6백억, 하루 6천만 원 씩 탕감…'황제노역' 논란

조세 포탈범들은 포탈세액이 클수록 벌금형을 같이 내릴 수 있도록 규정이 정해져 있습니다. 일반 조세 포탈범들은 징역형 또는 포탈세액의 2~3배에 상당하는 벌금형, 혹은 둘을 함께 내릴 수 있고요. 연간 포탈세액이 5억 원 이상으로 특가법 적용 대상이 되면, 징역형과 함께 2~5배 이하에 상당하는 벌금형을 부과해야 합니다. 고액의 조세를 포탈할수록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김 씨의 경우 포탈세액이 2백억 원이 넘으니 특가법 적용대상이고, 벌금이 함께 부과됩니다. 벌금은 규정상 포탈세액의 2~5배 사이에서 정해야 하는데, 김 씨의 경우는 3배인 6백억 원가량으로 정해진 겁니다.

하지만 형법상 벌금을 안 내면 일정 기간 노역장에 유치해 일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해줍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 씨가 벌금으로 노역을 대신하면, 하루에 벌금을 5900만 원씩 깎아주겠다고 밝혔습니다. 하루 일당을 6천만 원 정도로 쳐주는 셈입니다.

김 씨는 벌금이 6백억 원 가까이 나왔지만, 1009일, 약 2년 9개월 동안 노역장에서 일하면 벌금을 모두 탕감받게 됩니다. 이처럼 고액의 벌금이 나와도 짧은 기간 노역으로 대신하는 걸 두고 '황제노역'이라고 부릅니다.


1인당 평균 벌금 58억…하루 노역 일당 770만 원

그렇다면 벌금형을 받은 조세 포탈범들은 벌금을 다 제대로 냈을까요? 아니면 노역으로 대신했을까요?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최근 5년간 조세 포탈범 166명 가운데 벌금이 부과된 경우는 128명이었는데요. 1인당 평균 벌금은 58억 원에 달했습니다.

이를 노역으로 탕감해 줄 경우, 하루 일당은 평균 767만 원으로 책정됐습니다. 벌금이 많이 나와도 하루 8백만 원 가까이 깎아주는 겁니다. 일당이 고액이다 보니 노역 일수는 적게 산출됐습니다. 평균 644일, 약 1년 9개월만 노역을 하면 벌금이 없어지는 겁니다.


벌금 7400억 걷혔을까?…집행금액 96% 노역으로 대체

KBS 데이터저널리즘팀은 대검찰청에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자료를 분석해서 128명에 대한 벌금형 집행 현황을 살펴봤습니다. 대검찰청은 이들에 대한 벌금 확정액은 약 7367억 원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가운데 1월 1일 기준으로 벌금형이 집행된 건 모두 120명, 5568억 원 상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금액은 모두 걷힌 게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벌금을 납부한 건 4.5%인 252억 원에 그쳤습니다. 나머지 95.5%에 달하는 벌금 5316억 원 어치는 어떻게 집행된 걸까요? 검찰은 이 금액은 노역장 유치로 차감됐다고 밝혔습니다. 집행된 벌금의 95.5%, 거의 전체가 실제로 낸 것이 아니라 노역으로 대체됐다는 뜻입니다.

검찰은 개인별 납부, 노역 내역에 대해서는 개인 정보상의 이유를 들어 자료 제공을 거부했습니다.


유치기간 하한에 가깝게…'고액 포탈범 봐주기?'

'황제노역'에 대한 비판은 2014년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하루 5억 원 일당의 노역을 살면서 정점에 달했는데요. 벌금 254억 원을 50일 노역으로 탕감받게 되자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노역장 유치에 관한 세부 기준이 신설됐는데요. 벌금 액수에 따라 유치기간을 어느 이상으로 정하라고 구간을 나눴습니다. 벌금이 1억 원 이상~5억 원 미만이면 300일 이상 노역을 살게 하고, 벌금 5억 원 이상~50억 원 미만이면 500일 이상, 벌금 50억 이상이면 1000일 이상 유치하도록 했습니다.


이 제도가 시행돼 적용이 된 사례는 51명이었는데요. 각 구간별로 유치 기간이 얼마로 결정됐나 분석해봤습니다. 벌금 1억~5억 구간에 해당되는 건 3명으로, 노역 기간은 평균 388일이었습니다. 벌금 5억~50억 나온 사람은 32명이었는데, 노역 기간은 평균 559일로 정해졌습니다. 각각 법이 정한 하한인 300일, 500일보다 조금 상회했는데, 눈에 띄는 건 벌금이 많을수록 하한에 가까워진다는 겁니다.

벌금 50억 이상으로 가면 이 같은 경향은 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이 구간 조세 포탈범 16명의 평균 유치기간은 1000일로, 법 기준의 하한에 정확히 맞춘 걸 알 수 있습니다. 법에서 1000일 이상으로 정하라고 했는데, 16명 모두 확인해보니 딱 1000일로 정했습니다. 벌금이 50억 나온 사람도 1000일, 279억 나온 사람도 1000일이었습니다.


벌금이 많이 나온 건 그만큼 포탈한 세금이 많아서인데요. 정작 더 많이 세금을 포탈할수록 유치기간은 하한 쪽으로 너그럽게 잡아주고 있습니다.

알고보니 상한 있는 유치기간…'3년 넘기진 마라?'

더구나 벌금 50억 이상 포탈범의 유치 기간은 1000일 이상이라고 돼 있지만, 사실 상한에 제한이 있습니다. 형법의 또 다른 조항인 제69조 제2항에서는 노역장 유치 기간을 1일 이상~3년 이하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노역장 유치가 3년, 즉 1095일을 넘어가면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따라 벌금 50억 이상인 경우, 유치 기간은 사실상 1000일 이상~1095일 이하로 그 폭이 대폭 좁아지게 됩니다. 벌금이 50억 이상이든 수백억이 나오든 유치 기간은 1000일 남짓으로 별 차이가 없어지는 겁니다.


벌금 많을수록 오르는 일당…"형평성 어긋나"

벌금이 크게 차이가 나는데, 유치 기간이 비슷한 건 어째서일까요? 노역 일당에서 차이가 크게 나는 겁니다. 벌금이 많을수록 일당을 많이 책정하면 노역 기간에 큰 차이가 나지 않게 됩니다. 실제로 분석 결과, 벌금이 많은 포탈범의 일당을 더 높게 책정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벌금 1억~5억 구간에 해당하는 사람의 평균 일당은 백만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벌금 5~50억 구간은 326만 원, 벌금 50억 이상은 1068만 원으로 일당이 급증했습니다. 벌금이 50억이 넘는 사람의 일당을 벌금 5억 미만인 사람보다 열 배나 많이 쳐주는 겁니다.


이에 대해 박용대 변호사(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부소장)는 "1일 탕감 금액이 피고인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지적합니다. 박 변호사는 특히 "그것도 더 많은 벌금을 선고받은 피고인이 더 유리해지는 제도는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최저시급 일당의 천 배까지…'허탈한 성실 납세자들'

나아가 성실히 일해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납세자들 입장에서 보면, 포탈범들의 노역 일당을 수백, 수천만 원까지 쳐주는 현실은 상대적 박탈감까지 불러일으킵니다.

올해 최저시급 8590원으로, 하루 8시간 일하면 일당으로 6만 8720원을 받습니다. 조세 포탈범 가운데는 노역 일당이 7천만 원으로 책정된 경우도 있는데요. 이 사람은 320억 원이 넘는 조세를 포탈했는데도, 일당은 최저 시급을 받는 사람보다 1018배나 많은 셈입니다.


"노역 일당 법으로 정해야"…"유치기간 늘리는 것도 방법"


이와 관련해 박용대 변호사는 "하루 탕감 금액을 법률에서 일정한 범위로 정해야 형평성의 문제를 방지할 수 있다고"고 주장합니다. 이와 함께 "상한 기간까지 노역장 유치를 하고도 남은 벌금액은 탕감하지 말고, 국가가 시효 제한 없이 벌금을 징수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또 박훈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조세범에 한정해서 노역장 유치기간의 제한을 푸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유치기간 제한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조세범에 대해선 숨겨놓은 재산을 확보하기 위해 예외 조치는 가능하도록 법령 개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노역 일당을 일정 금액, 예컨대 수십~수백만 원을 넘기지 못하도록 하자는 법률 개정안들이 나왔지만,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는 못했습니다. 또 2018년 법제처는 유치기간을 최대 3년보다 늘리도록 법 개정을 권고했지만, 법무부는 기간을 늘리면 노역이 추가 징역형이 된다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법을 바꾸자는 논의는 있어도 실제 개정으로는 이어지지 않게 되면서 수십억의 벌금형을 받은 대다수의 고액 조세포탈범들은 변함없이 스스로 ‘황제노역’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게 됐습니다.

데이터 수집·분석: 정한진, 윤지희, 이지연
데이터 시각화: 임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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