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가라오케에 민폐 끼칠 수 없어”…日의 ‘코로나 복병’

입력 2020.04.01 (07:00) 수정 2020.04.01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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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산 이후 일본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는 배지입니다. 왼쪽은 꽃가루 알레르기를 뜻하는 '화분증'(花粉症), 오른쪽은 기침을 동반한 호흡장애 증상인 '천식'(喘息)이라 쓰여 있습니다. 마스크를 쓴 고양이가 얼굴을 붉힌 채 미안한 표정으로 "이해해 주세요"라고 머리를 긁적입니다. 일본 지하철이나 버스 등 공공장소에서 이 배지를 옷깃이나 가방에 단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배지는 주변 사람에게 "코로나19 바이러스와는 관계없이 재채기나 기침을 했다"고 알리는 용도입니다. 인기를 끌자 일본의 최대 전자 상거래 업체인 '라쿠텐'(楽天)에 진출했습니다. 'ASTHMA'(천식)', 'HAY FEVER'(화분증)이라고 쓰인 영문판 배지가 새롭게 더해졌고, 이어 "(코로나19) 예방 중입니다", "기관지염입니다" 등이 적힌 '마스크 버전'까지 출시됐습니다.

고이케 도쿄도지사가 ‘재택 근무’를 촉구한 직후인 지난달 26일 도쿄에서 마스크를 쓴 직장인들이 출근하고 있다. 〈교도=연합〉고이케 도쿄도지사가 ‘재택 근무’를 촉구한 직후인 지난달 26일 도쿄에서 마스크를 쓴 직장인들이 출근하고 있다. 〈교도=연합〉

■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

배지는 일본 특유의 '메이와쿠(迷惑·민폐) 기피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메이와쿠'는 '남에게 끼치는 신세나 괴로움'을 뜻합니다. 실제로 일본인은 어릴 때부터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 말을 듣습니다. 한국 엄마들은 자녀에게 "남에게 지면 안 된다"고 주입하고, 일본 엄마들은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고 다그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죠.

실제로 일본인에게 이 문화는 일상 깊숙이 녹아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성가시게 하거나, '누'(累)가 될 만한 행동을 극도로 꺼립니다. 예컨대 일본인들은 대중교통 안에선 휴대전화를 좀처럼 받지 않습니다. 우리로선 답답할 노릇이죠.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기 전에 남의 일에 나서는 것조차 금기시합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서로의 영역에 허가 없이 들락이는 걸 달갑지 않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NHK가 종합한 일본 47개 도도부현의 코로나19 확진자 수. 도쿄도가 지난달 30일 현재 443명으로 1위를 달리고 있다. 〈출처=NHK〉 NHK가 종합한 일본 47개 도도부현의 코로나19 확진자 수. 도쿄도가 지난달 30일 현재 443명으로 1위를 달리고 있다. 〈출처=NHK〉

■ "소극적 검사는 의도된 것"

코로나19 사태 초기, 일본의 확진자 수는 한국 등 대유행을 겪는 주변국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습니다. 해외 감염증 전문가들과 언론들은 이런 일본을 두고 "도쿄올림픽 정상 개최를 위해 의도적으로 코로나19 검사를 소극적으로 벌인다"는 의구심을 보였죠. 실제로 일본 인구의 절반도 안 되는 한국이 36만 5천여 명을 검사하는 동안, 일본은 지금까지 단 2만 5천 명을 검사하는 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일본 보건당국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사이토 도모야(齋藤智也) 국립보건의료과학원 수석주임연구관은 지난달 26일 미국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현 보건정책상 양성 환자는 병원에 입원시켜야 하지만, 덜 아픈 환자들 때문에 보건의료 자원이 바닥나는 일을 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의료 붕괴'를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제한적 검사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난달 29일 일본 도쿄 소재 사찰인 센소지 인근 상점가에 눈이 내리는 가운데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이동하고 있다. 〈교도=연합〉 지난달 29일 일본 도쿄 소재 사찰인 센소지 인근 상점가에 눈이 내리는 가운데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이동하고 있다. 〈교도=연합〉

■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효자

실제로 취재를 하다 보면 이런 정부 방침에 공감하는 일본인을 많이 만납니다. 단적인 예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좌절된' 선행입니다. 그는 코로나19 진단키트 100만 개를 공짜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가 철회했습니다. 많은 누리꾼들이 "그러다 의료 체계가 붕괴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정부 방침을 거스르는 손 회장의 '튀는' 행동을 공공 이익을 해치는 일종의 '메이와쿠'로 본 겁니다.

대신 개인의 책임이 강조됩니다. 예컨대 코로나19는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등으로 막으면 된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그래서 결코 '잘했다' 보기 어려운 정부 대응에 대해서도 '의외다' 싶을 정도로 비판을 삼갑니다. 일본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을 묻는 설문 조사에서 '긍정 평가'는 41%(아사히 3월 15~16일), 48%(교도통신 3월 14~16일), 47%(니혼게이자이, 3월 27~29일) 등으로 엇비슷했습니다.

지난달 26일 저녁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의 유흥가인 가부키초가 행인들로 붐비고 있다. 〈도쿄=연합〉지난달 26일 저녁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의 유흥가인 가부키초가 행인들로 붐비고 있다. 〈도쿄=연합〉

■ '사생활'…입 다문 확진자들

문제는 정작 효자로만 여겨지던 '메이와쿠 기피 문화'가 갈수록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확진자가 폭증하는 일본의 수도, 도쿄도(東京都)가 그렇습니다.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는 지난달 30일 긴급 회견에서 "젊은이들은 번화가의 나이트클럽, 카바쿠라(카바레+클럽), 가라오케(노래방), 라이브하우스 등에 제발 가지 말아 달라"고 촉구했습니다.

도쿄도 내 확진자는 31일 현재 521명. NHK에 따르면 이 가운데 약 40%는 감염 경로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이케 지사가 "감염 경로를 모르는 사람 중 약 30%인 38명은 야밤에 긴자(銀座)나 롯폰기(六本木) 등 유흥가에서 감염된 걸로 본다"고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일뿐입니다. 확진자 수와 비례해 감염 경로를 알 수 있는 사례들도 갈수록 쌓이고 있습니다.

지난달 30일자 산케이신문. '밤의 번화가, 프라이버시의 벽'을 이유로 방역당국이 감염 경로를 추적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출처=산케이신문〉지난달 30일자 산케이신문. '밤의 번화가, 프라이버시의 벽'을 이유로 방역당국이 감염 경로를 추적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출처=산케이신문〉

이와 관련해 산케이(産經)신문은 지난달 30일, 확진자 상당수가 "상대에게 폐가 될 수 있다"며 가게 이름이나 동석자에 관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방역당국이 어렵게 의심 장소를 찾아내더라도 이번엔 업소 측이 "증상이 있는 사람은 없다", "손님들에게 폐가 되니 오지 않으면 좋겠다"며 협조하지 않는 사례가 다수 있다고 했습니다.

확진자들은 지인이 방역 당국의 연락을 받는 등 번거로운 일을 겪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일본에서 확진자 행적 파악은 임의 조사라 강제력이 없습니다. 도쿄도 간부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저런 수단을 써서 몇 번이고 설득하지만, 감염자도 가게도 소극적인 예가 눈에 띈다. 부탁을 기반으로 한 조사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은 코로나19 확산 방지가 '눈썹의 불'입니다. 전문가들은 '도쿄 봉쇄', '긴급 사태 선언' 등 연일 강력한 조치를 요구합니다. 자칫 주변에 작은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메이와쿠 기피 문화'가 사회 전체에 큰 폐를 끼치는 복병이 될 거란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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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가라오케에 민폐 끼칠 수 없어”…日의 ‘코로나 복병’
    • 입력 2020-04-01 07:00:43
    • 수정2020-04-01 07:27:32
    특파원 리포트
코로나19 확산 이후 일본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는 배지입니다. 왼쪽은 꽃가루 알레르기를 뜻하는 '화분증'(花粉症), 오른쪽은 기침을 동반한 호흡장애 증상인 '천식'(喘息)이라 쓰여 있습니다. 마스크를 쓴 고양이가 얼굴을 붉힌 채 미안한 표정으로 "이해해 주세요"라고 머리를 긁적입니다. 일본 지하철이나 버스 등 공공장소에서 이 배지를 옷깃이나 가방에 단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배지는 주변 사람에게 "코로나19 바이러스와는 관계없이 재채기나 기침을 했다"고 알리는 용도입니다. 인기를 끌자 일본의 최대 전자 상거래 업체인 '라쿠텐'(楽天)에 진출했습니다. 'ASTHMA'(천식)', 'HAY FEVER'(화분증)이라고 쓰인 영문판 배지가 새롭게 더해졌고, 이어 "(코로나19) 예방 중입니다", "기관지염입니다" 등이 적힌 '마스크 버전'까지 출시됐습니다.

고이케 도쿄도지사가 ‘재택 근무’를 촉구한 직후인 지난달 26일 도쿄에서 마스크를 쓴 직장인들이 출근하고 있다. 〈교도=연합〉
■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

배지는 일본 특유의 '메이와쿠(迷惑·민폐) 기피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메이와쿠'는 '남에게 끼치는 신세나 괴로움'을 뜻합니다. 실제로 일본인은 어릴 때부터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 말을 듣습니다. 한국 엄마들은 자녀에게 "남에게 지면 안 된다"고 주입하고, 일본 엄마들은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고 다그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죠.

실제로 일본인에게 이 문화는 일상 깊숙이 녹아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성가시게 하거나, '누'(累)가 될 만한 행동을 극도로 꺼립니다. 예컨대 일본인들은 대중교통 안에선 휴대전화를 좀처럼 받지 않습니다. 우리로선 답답할 노릇이죠.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기 전에 남의 일에 나서는 것조차 금기시합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서로의 영역에 허가 없이 들락이는 걸 달갑지 않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NHK가 종합한 일본 47개 도도부현의 코로나19 확진자 수. 도쿄도가 지난달 30일 현재 443명으로 1위를 달리고 있다. 〈출처=NHK〉
■ "소극적 검사는 의도된 것"

코로나19 사태 초기, 일본의 확진자 수는 한국 등 대유행을 겪는 주변국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습니다. 해외 감염증 전문가들과 언론들은 이런 일본을 두고 "도쿄올림픽 정상 개최를 위해 의도적으로 코로나19 검사를 소극적으로 벌인다"는 의구심을 보였죠. 실제로 일본 인구의 절반도 안 되는 한국이 36만 5천여 명을 검사하는 동안, 일본은 지금까지 단 2만 5천 명을 검사하는 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일본 보건당국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사이토 도모야(齋藤智也) 국립보건의료과학원 수석주임연구관은 지난달 26일 미국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현 보건정책상 양성 환자는 병원에 입원시켜야 하지만, 덜 아픈 환자들 때문에 보건의료 자원이 바닥나는 일을 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의료 붕괴'를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제한적 검사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난달 29일 일본 도쿄 소재 사찰인 센소지 인근 상점가에 눈이 내리는 가운데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이동하고 있다. 〈교도=연합〉
■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효자

실제로 취재를 하다 보면 이런 정부 방침에 공감하는 일본인을 많이 만납니다. 단적인 예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좌절된' 선행입니다. 그는 코로나19 진단키트 100만 개를 공짜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가 철회했습니다. 많은 누리꾼들이 "그러다 의료 체계가 붕괴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정부 방침을 거스르는 손 회장의 '튀는' 행동을 공공 이익을 해치는 일종의 '메이와쿠'로 본 겁니다.

대신 개인의 책임이 강조됩니다. 예컨대 코로나19는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등으로 막으면 된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그래서 결코 '잘했다' 보기 어려운 정부 대응에 대해서도 '의외다' 싶을 정도로 비판을 삼갑니다. 일본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을 묻는 설문 조사에서 '긍정 평가'는 41%(아사히 3월 15~16일), 48%(교도통신 3월 14~16일), 47%(니혼게이자이, 3월 27~29일) 등으로 엇비슷했습니다.

지난달 26일 저녁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의 유흥가인 가부키초가 행인들로 붐비고 있다. 〈도쿄=연합〉
■ '사생활'…입 다문 확진자들

문제는 정작 효자로만 여겨지던 '메이와쿠 기피 문화'가 갈수록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확진자가 폭증하는 일본의 수도, 도쿄도(東京都)가 그렇습니다.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는 지난달 30일 긴급 회견에서 "젊은이들은 번화가의 나이트클럽, 카바쿠라(카바레+클럽), 가라오케(노래방), 라이브하우스 등에 제발 가지 말아 달라"고 촉구했습니다.

도쿄도 내 확진자는 31일 현재 521명. NHK에 따르면 이 가운데 약 40%는 감염 경로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이케 지사가 "감염 경로를 모르는 사람 중 약 30%인 38명은 야밤에 긴자(銀座)나 롯폰기(六本木) 등 유흥가에서 감염된 걸로 본다"고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일뿐입니다. 확진자 수와 비례해 감염 경로를 알 수 있는 사례들도 갈수록 쌓이고 있습니다.

지난달 30일자 산케이신문. '밤의 번화가, 프라이버시의 벽'을 이유로 방역당국이 감염 경로를 추적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출처=산케이신문〉
이와 관련해 산케이(産經)신문은 지난달 30일, 확진자 상당수가 "상대에게 폐가 될 수 있다"며 가게 이름이나 동석자에 관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방역당국이 어렵게 의심 장소를 찾아내더라도 이번엔 업소 측이 "증상이 있는 사람은 없다", "손님들에게 폐가 되니 오지 않으면 좋겠다"며 협조하지 않는 사례가 다수 있다고 했습니다.

확진자들은 지인이 방역 당국의 연락을 받는 등 번거로운 일을 겪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일본에서 확진자 행적 파악은 임의 조사라 강제력이 없습니다. 도쿄도 간부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저런 수단을 써서 몇 번이고 설득하지만, 감염자도 가게도 소극적인 예가 눈에 띈다. 부탁을 기반으로 한 조사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은 코로나19 확산 방지가 '눈썹의 불'입니다. 전문가들은 '도쿄 봉쇄', '긴급 사태 선언' 등 연일 강력한 조치를 요구합니다. 자칫 주변에 작은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메이와쿠 기피 문화'가 사회 전체에 큰 폐를 끼치는 복병이 될 거란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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