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이스라엘 방역의 고민 “초정통파를 어찌할꼬”

입력 2020.04.03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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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국민 남녀가 모두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 <원더우먼>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배우 갤 가돗이 이스라엘 여군 출신이라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녀가 이스라엘 출신인 만큼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에서도 군대에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레디(Haredi)라고도 불리는 초정통파 유대교(ultra-orthodox Jews)들입니다.

검은 옷과 모자를 쓰고 구레나룻을 기른 초정통파 유대교인들검은 옷과 모자를 쓰고 구레나룻을 기른 초정통파 유대교인들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지 주변에 가면 이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을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일단 복장과 머리모양이 독특합니다. 남자의 경우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상하의를 입고 검은색 모자를 씁니다. 이 모자는 중절모 형태이기도 하고, 마술사들이 쓰는 긴 원통형, 또는 털모자일 때도 있습니다.

특히 구레나룻을 기르거나 양쪽으로 딴 모습이 특이합니다, 구레나룻을 밀어서는 안 된다는 구약성경 레위기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쿠란과 함께 구약성경도 믿는 이슬람 신자들이 수염을 자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초정통파 유대교인의 모습을 언뜻 보면,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서 봤던 19세기 남성들 복장 같기도 하고(실제로 당시 뉴욕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검은색 두루마기에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현대 문명과 세속적인 삶을 거부하고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한 종교 생활을 하기 때문에 초정통파 유대교라고 불리지만, 유대교 축제 때는 흡연과 음주를 즐길 때도 있습니다.

이런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이 군대에 가지 않는 건 우리나라의 '병역 거부'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후 유대교의 가르침과 전통을 지키기 위해 유대교 경전을 연구하는 학생들의 병역의무를 면제해 줬는데, 그 전통이 아직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이 초정통파 유대교인의 인구가 이스라엘 전체 인구 840만 명 가운데 거의 12%에 이른다는 점입니다. 세금도 안 내고 정부 보조금을 받는 데다가 군대에도 안 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니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고, 그래서 이스라엘 국민들 중에는 이 초정통파를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초정통파 유대교 회당을 단속하는 이스라엘 방역 요원초정통파 유대교 회당을 단속하는 이스라엘 방역 요원

그런데 코로나19 확산으로 전 세계가 방역에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이 초정통파 유대교인들 때문에 고민이 깊습니다. 이들이 정부의 방역 지침을 잘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코로나19 발병 초기부터 강경한 대책을 시행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온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일부 확진 판정을 받자 예고도 없이 한국행 여객기 운항을 중단시켜 외교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었고, 이어 모든 외국인에 대한 입국 금지 방침도 다른 나라보다 빨리 시작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10명 이상이 모이는 집회를 아예 금지했고, 주민들에게 집에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집에서 100미터 이상 나가지 말라며 통행도 제한했습니다. 해외에서 진단키트를 들여오기 위해서는 해외 정보기관 모사드를 투입하겠다고 공언하고, 이스라엘 내 확진자들의 동선을 조사하기 위해 국내 정보기관 신베트를 동원하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은 네타냐후 총리의 연임 정국과 맞물리며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은 이런 지침을 잘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막겠다며 유대교 회당을 폐쇄했는데, 초정통파 교인들이 율법에 어긋난다며 이에 항의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전투경찰을 투입해 초정통파들을 제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초정통파들은 당국의 단속을 피해 단체 기도 등을 이어가고 있는데, 문제는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의 거주 지역에서 코로나19 감염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점입니다. 텔아비브 인근에 있는 '브네이브라크'라는 도시는 초정통파 유대교인 20만 명이 모여 사는 곳인데, 이곳에서만 900여 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초정통파 유대교 거주지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시신이 옮겨지고 있다초정통파 유대교 거주지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시신이 옮겨지고 있다

게다가 이곳에서 의료단체를 운영하는 란 사르 박사는 이스라엘 의회에 출석해 "브네이브라크 거주자 38%가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스라엘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이 수치대로라면 인구 20만 명이 모여 사는 곳에서 7만 5천여 명이 감염됐다는 뜻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지역 초정통파들은 오는 8일부터 시작될 유대교 기념일 행사에 참석하려면 격리를 피해야 한다며 검사를 꺼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이스라엘 정부로서는 정말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급기야 이스라엘 정부는 이 지역에서 검사를 강화하고 의료품 등을 공급하기 위해 이스라엘 방위군 12,000명을 을 투입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검사 받는 초정통파 유대교인, 차량이 없어 드라이브스루 검사장까지 앰뷸런스를 타고 이동했다검사 받는 초정통파 유대교인, 차량이 없어 드라이브스루 검사장까지 앰뷸런스를 타고 이동했다

이런 가운데 이스라엘 내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어느덧 7천 명 선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인구가 840만 명에 불과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거주하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대해서는 확진자 통계를 따로 집계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입니다.

물론 발병 초기 우리나라 상황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역시 적극적으로 진단검사를 하기 때문에 확진자 수가 빨리 늘어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각국과 같은 선진국조차 의료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보며, 이스라엘 주민들은 급증하는 확진자 숫자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을 지킨다는 초정통파 하레디는 이럴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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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이스라엘 방역의 고민 “초정통파를 어찌할꼬”
    • 입력 2020-04-03 15:36:27
    특파원 리포트
이스라엘은 국민 남녀가 모두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 <원더우먼>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배우 갤 가돗이 이스라엘 여군 출신이라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녀가 이스라엘 출신인 만큼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에서도 군대에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레디(Haredi)라고도 불리는 초정통파 유대교(ultra-orthodox Jews)들입니다.

검은 옷과 모자를 쓰고 구레나룻을 기른 초정통파 유대교인들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지 주변에 가면 이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을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일단 복장과 머리모양이 독특합니다. 남자의 경우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상하의를 입고 검은색 모자를 씁니다. 이 모자는 중절모 형태이기도 하고, 마술사들이 쓰는 긴 원통형, 또는 털모자일 때도 있습니다.

특히 구레나룻을 기르거나 양쪽으로 딴 모습이 특이합니다, 구레나룻을 밀어서는 안 된다는 구약성경 레위기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쿠란과 함께 구약성경도 믿는 이슬람 신자들이 수염을 자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초정통파 유대교인의 모습을 언뜻 보면,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서 봤던 19세기 남성들 복장 같기도 하고(실제로 당시 뉴욕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검은색 두루마기에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현대 문명과 세속적인 삶을 거부하고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한 종교 생활을 하기 때문에 초정통파 유대교라고 불리지만, 유대교 축제 때는 흡연과 음주를 즐길 때도 있습니다.

이런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이 군대에 가지 않는 건 우리나라의 '병역 거부'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후 유대교의 가르침과 전통을 지키기 위해 유대교 경전을 연구하는 학생들의 병역의무를 면제해 줬는데, 그 전통이 아직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이 초정통파 유대교인의 인구가 이스라엘 전체 인구 840만 명 가운데 거의 12%에 이른다는 점입니다. 세금도 안 내고 정부 보조금을 받는 데다가 군대에도 안 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니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고, 그래서 이스라엘 국민들 중에는 이 초정통파를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초정통파 유대교 회당을 단속하는 이스라엘 방역 요원
그런데 코로나19 확산으로 전 세계가 방역에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이 초정통파 유대교인들 때문에 고민이 깊습니다. 이들이 정부의 방역 지침을 잘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코로나19 발병 초기부터 강경한 대책을 시행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온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일부 확진 판정을 받자 예고도 없이 한국행 여객기 운항을 중단시켜 외교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었고, 이어 모든 외국인에 대한 입국 금지 방침도 다른 나라보다 빨리 시작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10명 이상이 모이는 집회를 아예 금지했고, 주민들에게 집에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집에서 100미터 이상 나가지 말라며 통행도 제한했습니다. 해외에서 진단키트를 들여오기 위해서는 해외 정보기관 모사드를 투입하겠다고 공언하고, 이스라엘 내 확진자들의 동선을 조사하기 위해 국내 정보기관 신베트를 동원하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은 네타냐후 총리의 연임 정국과 맞물리며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은 이런 지침을 잘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막겠다며 유대교 회당을 폐쇄했는데, 초정통파 교인들이 율법에 어긋난다며 이에 항의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전투경찰을 투입해 초정통파들을 제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초정통파들은 당국의 단속을 피해 단체 기도 등을 이어가고 있는데, 문제는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의 거주 지역에서 코로나19 감염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점입니다. 텔아비브 인근에 있는 '브네이브라크'라는 도시는 초정통파 유대교인 20만 명이 모여 사는 곳인데, 이곳에서만 900여 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초정통파 유대교 거주지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시신이 옮겨지고 있다
게다가 이곳에서 의료단체를 운영하는 란 사르 박사는 이스라엘 의회에 출석해 "브네이브라크 거주자 38%가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스라엘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이 수치대로라면 인구 20만 명이 모여 사는 곳에서 7만 5천여 명이 감염됐다는 뜻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지역 초정통파들은 오는 8일부터 시작될 유대교 기념일 행사에 참석하려면 격리를 피해야 한다며 검사를 꺼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이스라엘 정부로서는 정말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급기야 이스라엘 정부는 이 지역에서 검사를 강화하고 의료품 등을 공급하기 위해 이스라엘 방위군 12,000명을 을 투입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검사 받는 초정통파 유대교인, 차량이 없어 드라이브스루 검사장까지 앰뷸런스를 타고 이동했다
이런 가운데 이스라엘 내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어느덧 7천 명 선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인구가 840만 명에 불과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거주하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대해서는 확진자 통계를 따로 집계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입니다.

물론 발병 초기 우리나라 상황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역시 적극적으로 진단검사를 하기 때문에 확진자 수가 빨리 늘어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각국과 같은 선진국조차 의료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보며, 이스라엘 주민들은 급증하는 확진자 숫자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을 지킨다는 초정통파 하레디는 이럴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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