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만삭 위안부’ 영상, 어떻게 세상으로 나왔나?

입력 2020.05.30 (08:05) 수정 2020.05.30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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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영상, 가지고 와 보세요. 지금."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수화기 너머 반응은 미지근했습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 관련 입장을 묻는 전화로 이해했을까요? 제가 '영상이 있다'고 했을 때도 반응은 비슷했습니다. 다소 기가 죽었지만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군인들이 여성들을 한 명씩 끌고 가는 모습이 보여요. 화질도 좋고, 얼굴이 크게 찍힌 장면도 있고요."

그 순간, 반응이 달라졌습니다.

"그 영상, 갖고 와 보세요. 지금." 

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습니다.

KBS 다큐인사이트 제작팀은 최근 미국 국립기록관리청(NARA)에서 '만삭의 위안부' 박영심 할머니 영상을 단독으로 발굴했습니다. 이 영상에는 1944년 9월 중국 윈난성 쑹산에서 박 할머니와 다른 여성들이 미·중 연합군에게 구출되는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습니다. 만삭의 박 할머니를 기록한 유일한 영상이기도 합니다. 앞서 박 할머니는 지난 2000년 일본 여성 국제전범 법정에서 당시 찍힌 사진을 가리키며 '이게 바로 나'라고 증언했고, 전 세계에 '조선인 위안부'의 존재를 알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 바로 가기 : [뉴스9/단독] ‘만삭의 위안부’ 영상 첫 발굴…구출되자 “만세, 만세”)

■ 영상 속 인물 확인되던 순간..."기자님, 한 건 하셨네요"

고도의 보안(?)을 유지하며 '위안부' 연구자들을 접촉하는 동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박 할머니가 맞다'는 확인이었습니다. 수 초간 화면을 응시하는 앳된 얼굴의 여성.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이 여성이 박영심 할머니가 맞을까? 여러 차례 영상을 돌려보며 확신이 들었지만, 전문가들 눈에도 그럴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연구실에 나란히 앉아 영상을 돌려보길 수차례. "기자님, 한 건 하셨네요." 강 교수의 말이 들려왔습니다. 웃고 있는 병사와 왼팔을 다친 여성 등 사진 속 4명의 인물에 먼저 '맞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뒤이어 옷차림과 머리 모양, 배의 모습 등 여러 단서를 통해 박 할머니까지 확인됐습니다. KBS가 의견을 구한 복수의 전문가들은 옛 다큐멘터리와 출간 서적, 일본 논문까지 뒤져 가며 '박 할머니가 맞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취재팀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영상을 보도하기로 결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 '위안부' 연구자들이 당부한 '본질'…"후손에게 남길 사회 모습 고민해야"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방송이 나가고 여러 학자에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런 게 단독이고 이런 게 연구자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보도다. 눈물 날 것 같았다'는 응원부터 '위안부 관련 연구자들이 최근 우울했는데 자료 발굴 소식에 근본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등 다양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과 연구는 분명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정의연의 회계 부정 의혹에만 그치지 않고, 안팎으로 진정성을 의심받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쇄신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는 물론 학계와 정부, 그리고 일반 시민들까지 그동안 피해자인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대했는지 다시금 성찰해야 할 때이기도 합니다. 언론의 고민과 반성이 깊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전문가들은 취재팀에 여러 번 '본질에 집중해 달라'는 당부를 전했습니다. 지금 진행 중인 논란이 전쟁과 평화, 여성 인권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도 했습니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말입니다.

"영상에는 '위안부'들이 겪었던 삶의 한 단면이 담겨 있어요. 삶과 죽음이 정말 밀착돼 있거든요. 이런 전쟁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죠. 많은 말이 떠돌지만, '위안부'라는 역사를 딛고서 오늘날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지, 앞으로 어떤 사회를 아이들에게 남겨야 할지 생각하면서 얘기했으면 합니다."

환한 얼굴에 묻어나는 역설적인 비극..."앞으로도 기억하겠습니다"

첫 보도가 나간 28일 저녁, 9시 뉴스 시작을 기다리며 KBS 취재팀도 짧은 소회를 나눴습니다. 자꾸 영상을 보니까 덩달아 기분이 이상해 지더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는 말들이 오갔습니다. 쑥스러워서 말하진 못했지만, 저 역시 밤새 22살 박영심을 생각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중국 병사의 얼굴을 바라보다, 당장 살았다는 생각에 '만세'를 부르는 앳된 여성. 앞으로 어떤 앞날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티 없이 밝아지는 표정에 자꾸만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전쟁의 비극성은 바로 이런 역설적인 순간을 통해 생생히 전달되는 게 아닐까요?

KBS는 28일과 29일, 이틀 연속 해당 영상과 함께 '위안부' 기록 발굴의 어려움과 연구의 필요성 등 관련 쟁점을 보도했습니다. 다음 달 1일에는 취재팀 기자가 직접 12시 뉴스에 출연해 영상의 의미를 다시 한번 짚어보고 이런저런 취재 뒷얘기를 전합니다. '본질'을 놓치지 않는 취재, 앞으로도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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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만삭 위안부’ 영상, 어떻게 세상으로 나왔나?
    • 입력 2020-05-30 08:05:13
    • 수정2020-05-30 08:13:10
    취재후·사건후
■ "그 영상, 가지고 와 보세요. 지금."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수화기 너머 반응은 미지근했습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 관련 입장을 묻는 전화로 이해했을까요? 제가 '영상이 있다'고 했을 때도 반응은 비슷했습니다. 다소 기가 죽었지만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군인들이 여성들을 한 명씩 끌고 가는 모습이 보여요. 화질도 좋고, 얼굴이 크게 찍힌 장면도 있고요."

그 순간, 반응이 달라졌습니다.

"그 영상, 갖고 와 보세요. 지금." 

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습니다.

KBS 다큐인사이트 제작팀은 최근 미국 국립기록관리청(NARA)에서 '만삭의 위안부' 박영심 할머니 영상을 단독으로 발굴했습니다. 이 영상에는 1944년 9월 중국 윈난성 쑹산에서 박 할머니와 다른 여성들이 미·중 연합군에게 구출되는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습니다. 만삭의 박 할머니를 기록한 유일한 영상이기도 합니다. 앞서 박 할머니는 지난 2000년 일본 여성 국제전범 법정에서 당시 찍힌 사진을 가리키며 '이게 바로 나'라고 증언했고, 전 세계에 '조선인 위안부'의 존재를 알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 바로 가기 : [뉴스9/단독] ‘만삭의 위안부’ 영상 첫 발굴…구출되자 “만세, 만세”)

■ 영상 속 인물 확인되던 순간..."기자님, 한 건 하셨네요"

고도의 보안(?)을 유지하며 '위안부' 연구자들을 접촉하는 동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박 할머니가 맞다'는 확인이었습니다. 수 초간 화면을 응시하는 앳된 얼굴의 여성.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이 여성이 박영심 할머니가 맞을까? 여러 차례 영상을 돌려보며 확신이 들었지만, 전문가들 눈에도 그럴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연구실에 나란히 앉아 영상을 돌려보길 수차례. "기자님, 한 건 하셨네요." 강 교수의 말이 들려왔습니다. 웃고 있는 병사와 왼팔을 다친 여성 등 사진 속 4명의 인물에 먼저 '맞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뒤이어 옷차림과 머리 모양, 배의 모습 등 여러 단서를 통해 박 할머니까지 확인됐습니다. KBS가 의견을 구한 복수의 전문가들은 옛 다큐멘터리와 출간 서적, 일본 논문까지 뒤져 가며 '박 할머니가 맞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취재팀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영상을 보도하기로 결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 '위안부' 연구자들이 당부한 '본질'…"후손에게 남길 사회 모습 고민해야"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방송이 나가고 여러 학자에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런 게 단독이고 이런 게 연구자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보도다. 눈물 날 것 같았다'는 응원부터 '위안부 관련 연구자들이 최근 우울했는데 자료 발굴 소식에 근본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등 다양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과 연구는 분명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정의연의 회계 부정 의혹에만 그치지 않고, 안팎으로 진정성을 의심받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쇄신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는 물론 학계와 정부, 그리고 일반 시민들까지 그동안 피해자인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대했는지 다시금 성찰해야 할 때이기도 합니다. 언론의 고민과 반성이 깊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전문가들은 취재팀에 여러 번 '본질에 집중해 달라'는 당부를 전했습니다. 지금 진행 중인 논란이 전쟁과 평화, 여성 인권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도 했습니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말입니다.

"영상에는 '위안부'들이 겪었던 삶의 한 단면이 담겨 있어요. 삶과 죽음이 정말 밀착돼 있거든요. 이런 전쟁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죠. 많은 말이 떠돌지만, '위안부'라는 역사를 딛고서 오늘날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지, 앞으로 어떤 사회를 아이들에게 남겨야 할지 생각하면서 얘기했으면 합니다."

환한 얼굴에 묻어나는 역설적인 비극..."앞으로도 기억하겠습니다"

첫 보도가 나간 28일 저녁, 9시 뉴스 시작을 기다리며 KBS 취재팀도 짧은 소회를 나눴습니다. 자꾸 영상을 보니까 덩달아 기분이 이상해 지더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는 말들이 오갔습니다. 쑥스러워서 말하진 못했지만, 저 역시 밤새 22살 박영심을 생각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중국 병사의 얼굴을 바라보다, 당장 살았다는 생각에 '만세'를 부르는 앳된 여성. 앞으로 어떤 앞날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티 없이 밝아지는 표정에 자꾸만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전쟁의 비극성은 바로 이런 역설적인 순간을 통해 생생히 전달되는 게 아닐까요?

KBS는 28일과 29일, 이틀 연속 해당 영상과 함께 '위안부' 기록 발굴의 어려움과 연구의 필요성 등 관련 쟁점을 보도했습니다. 다음 달 1일에는 취재팀 기자가 직접 12시 뉴스에 출연해 영상의 의미를 다시 한번 짚어보고 이런저런 취재 뒷얘기를 전합니다. '본질'을 놓치지 않는 취재, 앞으로도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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