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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 조선에 온 코끼리의 파란만장
입력 2020.07.13 (07:00) 취재K
바다 건너 조선에 온 코끼리의 파란만장
지금이야 동물원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코끼리라지만, 그 우람하고 요상하게 생긴 짐승을 난생처음 목격한 옛사람들이 받은 충격과 공포는 얼마나 컸을까요.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그러니까 조선의 세 번째 임금 태종이 즉위한 지 11년째 되는 1411년 2월, 코끼리가 수도 한양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일찍이 조선에 없었던 이 특이한 동물의 출현은 당연히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됐죠.

일본 국왕(日本國王) 원의지(源義持)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명하여 이것을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하니, 날마다 콩 4·5두(斗)씩을 소비하였다.

당시 일본의 최고 실권자였던 쇼군이 사신을 보내 조선의 왕에게 코끼리를 바칩니다. 뜻밖의 선물이었으니, 대가가 없진 않았겠죠. 얼마 전에 나온 책 《재밌어서 끝까지 읽는 한중일 동물 오디세이》를 읽어보면, 저자가 이 코끼리의 출신지를 추적한 내용이 나옵니다. 문제의 코끼리는 1408년에 인도네시아 국왕이 일본의 쇼군에게 보낸 것이었고, 3년 뒤에 일본이 다시 조선에 선물했다는 겁니다. 그 대가로 일본이 얻어가려 했던 건 귀하디귀한 《대장경(大藏經)》이었다고 하죠. 실제로 일본에 대장경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교환이 성사됐다는 걸 전제로 하면 이 거래는 '참담한 실패'였음이 곧 드러납니다.


아무튼, 진기한 동물을 선물로 받은 태종은 당시 말을 먹이고 기르던 사복시(司僕寺)에서 코끼리를 돌보게 합니다. 미처 몰랐던 건 코끼리가 엄청난 먹성을 자랑한다는 사실. 날마다 콩 네다섯 말을 소비했다고 실록은 기록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코끼리는 지구 상에서 가장 큰 육상 동물이죠. 매일 300kg가량을 먹어치우는 먹보 중의 먹보라서, 하루 18~20시간을 먹는 데 보낼 정도입니다. 코끼리 먹이 문제는 당시에도 두고두고 골칫거리였습니다.

전 공조 전서(工曹典書) 이우(李瑀)가 죽었다. 처음에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길들인 코끼리(馴象)를 바치므로 3군부(三軍府)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가보고, 그 꼴이 추함을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였다.

이듬해 12월에 결국 사달이 납니다. 당시 정3품으로 고위 공무원이었던 이우라는 사람이 코끼리를 놀려먹다가 그만 성난 코끼리의 발에 밟혀 죽는 사건이 일어나죠. 졸지에 살인마가 된 코끼리를 그냥 놔둘 수 없었던바, 1년 가까이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조정에선 코끼리를 멀리 전라도 섬에 귀양 보내기로 합니다.

코끼리[象]를 전라도의 해도(海島)에 두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 유정현(柳廷顯)이 진언(進言)하였다. "일본 나라에서 바친바, 길들인 코끼리는 이미 성상의 완호(玩好)하는 물건도 아니요, 또한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두 사람을 다쳤는데, 만약 법으로 논한다면 사람을 죽인 것은 죽이는 것으로 마땅합니다. 또 일 년에 먹이는 꼴은 콩이 거의 수백 석에 이르니, 청컨대, 주공(周公)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고사(故事)를 본받아 전라도의 해도(海島)에 두소서." 임금이 웃으면서 그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살인 코끼리'는 저 전라도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해도(海島)라는 섬에 유배됩니다. 해도(海島)는 노루를 닮았다 해서 장도(獐島, 노루섬)라고도 불리는, 오늘날 전라남도 보성군 장도리에 지금도 있는 섬입니다. 이미 두 사람을 해쳤고, 하는 일도 없이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짐승이니 유배하는 것이 마땅한 줄 아뢰오. 탕 탕 탕.


병조판서가 직접 나서서 간청했을 정도로 나름 심각한 사안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왕도 어이가 없었는지 '임금이 웃으면서 그대로 따랐다'고 실록은 전합니다. 그렇다면 귀양 간 코끼리는 섬에서 과연 어찌 지냈을까. 이어지는 기록입니다.

길들인 코끼리[象]를 육지(陸地)로 내보내라고 명하였다.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길들인 코끼리를 순천부(順天府) 장도(獐島)에 방목(放牧)하는데, 수초(水草)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瘦瘠)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서 불쌍히 여겼던 까닭에 육지에 내보내어 처음과 같이 기르게 하였다.

귀양살이 고달픈 건 사람이고 동물이고 예외가 없었습니다. 남해의 절해고도에는 코끼리가 먹을 만한 풀이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먹고 먹고 또 먹어도 배가 고픈 코끼리에게 섬은 최악의 거주지였던 셈이죠. 오죽했으면 사람을 볼 때마다 눈물을 다 흘렸다고 했을까요. 결국, 왕은 이 불쌍한 코끼리를 섬에서 꺼내 육지에서 기르도록 명합니다. 섬에 유배된 지 여섯 달쯤 지난 시점이었죠.


이렇게 태종이 선물 받은 코끼리가 《태종실록》에 1년에 한 번씩은 등장한 까닭에 6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당시 코끼리의 거취를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동물이 이렇게나 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죠. 이제 코끼리에 관한 과업은 아들 세종에게 넘어갑니다. 세종이 왕에 오른 이듬해인 1420년 겨울, 문제의 코끼리는 또 다시 실록에 존재를 드러냅니다.

전라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코끼리[象]란 것이 쓸 데에 유익 되는 점이 없거늘, 지금 도내 네 곳의 변방 지방관에게 명하여 돌려 가면서 먹여 기르라 하였으니, 폐해가 적지 않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게 되니, 청컨대, 충청(忠淸)·경상도까지 아울러 명하여 돌아가면서 기르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상왕이라 했으니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줬어도 코끼리 문제는 여전히 아버지 태종의 의향을 물었던 것 같습니다. 코끼리가 너무 많이 먹어치우는 바람에 백성들이 너무나도 괴롭다, 그러니 코끼리를 돌보는 부담을 충청도와 경상도까지 나눠서 지게 해달라, 이렇게 간청한 겁니다. 그래서 부담을 나눠서 지게 된 충청도에서 이듬해 또다시 참사가 일어납니다.

충청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공주(公州)에 코끼리를 기르는 종이 코끼리에 채여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나라에 유익한 것이 없고,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이나 되어, 하루에 쌀 2말, 콩 1말씩이온즉,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입니다. 화를 내면 사람을 해치니,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니, 바다 섬 가운데 있는 목장에 내놓으소서." 하였다. 선지(宣旨)하기를,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이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 하였다.

9년 전 자기를 해코지하던 고위 공무원에 이어, 이번에는 자기를 돌봐주던 노비를 밟아 죽게 한 겁니다. 기록만 봐서는 어떤 곡절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화를 내면 사람을 해치니'라는 구절이 실마리를 제공해주죠. 충청도 관찰사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데다 양식만 축내는 코끼리를 다시 섬으로 유배 보내달라고 청합니다. 살인의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죠. 왕은 허락합니다. 결국, 코끼리는 또다시 섬으로 귀양 살러 갑니다.

조선시대 제사 때 술을 담는 용도로 쓴 코끼리 모양의 항아리 상준(象樽)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조선시대 제사 때 술을 담는 용도로 쓴 코끼리 모양의 항아리 상준(象樽)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 기록을 끝으로 코끼리가 그 뒤에 어디서 어떻게 살다가 언제 돌아갔는지 알려주는 내용은 실록에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한참 세월이 흘러 선조 22년인 1589년에 다른 나라에서 선물로 받은 다른 동물을 처리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코끼리가 한 번 더 언급됩니다.

영락 7년(1409년)에 일본이 코끼리 두 마리를 보내자 태종이 받았고,

앞선 기록과 비교하면 코끼리가 조선에 온 해도 그렇고,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라고 한 점도 다릅니다. 정확한 사실이 뭔지 기록만으론 확인할 길이 없죠. 아무튼, 머나먼 뱃길로 바다 건너 일본에 갔다가, 또다시 바다 건너 조선까지 온 코끼리는 서울에서 전라도 최남단 섬으로, 다시 육지로, 충청도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끝내 두 번째로 섬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파란만장도 이런 파란만장이 또 있을까요.
  • 바다 건너 조선에 온 코끼리의 파란만장
    • 입력 2020.07.13 (07:00)
    취재K
바다 건너 조선에 온 코끼리의 파란만장
지금이야 동물원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코끼리라지만, 그 우람하고 요상하게 생긴 짐승을 난생처음 목격한 옛사람들이 받은 충격과 공포는 얼마나 컸을까요.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그러니까 조선의 세 번째 임금 태종이 즉위한 지 11년째 되는 1411년 2월, 코끼리가 수도 한양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일찍이 조선에 없었던 이 특이한 동물의 출현은 당연히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됐죠.

일본 국왕(日本國王) 원의지(源義持)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명하여 이것을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하니, 날마다 콩 4·5두(斗)씩을 소비하였다.

당시 일본의 최고 실권자였던 쇼군이 사신을 보내 조선의 왕에게 코끼리를 바칩니다. 뜻밖의 선물이었으니, 대가가 없진 않았겠죠. 얼마 전에 나온 책 《재밌어서 끝까지 읽는 한중일 동물 오디세이》를 읽어보면, 저자가 이 코끼리의 출신지를 추적한 내용이 나옵니다. 문제의 코끼리는 1408년에 인도네시아 국왕이 일본의 쇼군에게 보낸 것이었고, 3년 뒤에 일본이 다시 조선에 선물했다는 겁니다. 그 대가로 일본이 얻어가려 했던 건 귀하디귀한 《대장경(大藏經)》이었다고 하죠. 실제로 일본에 대장경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교환이 성사됐다는 걸 전제로 하면 이 거래는 '참담한 실패'였음이 곧 드러납니다.


아무튼, 진기한 동물을 선물로 받은 태종은 당시 말을 먹이고 기르던 사복시(司僕寺)에서 코끼리를 돌보게 합니다. 미처 몰랐던 건 코끼리가 엄청난 먹성을 자랑한다는 사실. 날마다 콩 네다섯 말을 소비했다고 실록은 기록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코끼리는 지구 상에서 가장 큰 육상 동물이죠. 매일 300kg가량을 먹어치우는 먹보 중의 먹보라서, 하루 18~20시간을 먹는 데 보낼 정도입니다. 코끼리 먹이 문제는 당시에도 두고두고 골칫거리였습니다.

전 공조 전서(工曹典書) 이우(李瑀)가 죽었다. 처음에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길들인 코끼리(馴象)를 바치므로 3군부(三軍府)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가보고, 그 꼴이 추함을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였다.

이듬해 12월에 결국 사달이 납니다. 당시 정3품으로 고위 공무원이었던 이우라는 사람이 코끼리를 놀려먹다가 그만 성난 코끼리의 발에 밟혀 죽는 사건이 일어나죠. 졸지에 살인마가 된 코끼리를 그냥 놔둘 수 없었던바, 1년 가까이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조정에선 코끼리를 멀리 전라도 섬에 귀양 보내기로 합니다.

코끼리[象]를 전라도의 해도(海島)에 두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 유정현(柳廷顯)이 진언(進言)하였다. "일본 나라에서 바친바, 길들인 코끼리는 이미 성상의 완호(玩好)하는 물건도 아니요, 또한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두 사람을 다쳤는데, 만약 법으로 논한다면 사람을 죽인 것은 죽이는 것으로 마땅합니다. 또 일 년에 먹이는 꼴은 콩이 거의 수백 석에 이르니, 청컨대, 주공(周公)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고사(故事)를 본받아 전라도의 해도(海島)에 두소서." 임금이 웃으면서 그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살인 코끼리'는 저 전라도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해도(海島)라는 섬에 유배됩니다. 해도(海島)는 노루를 닮았다 해서 장도(獐島, 노루섬)라고도 불리는, 오늘날 전라남도 보성군 장도리에 지금도 있는 섬입니다. 이미 두 사람을 해쳤고, 하는 일도 없이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짐승이니 유배하는 것이 마땅한 줄 아뢰오. 탕 탕 탕.


병조판서가 직접 나서서 간청했을 정도로 나름 심각한 사안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왕도 어이가 없었는지 '임금이 웃으면서 그대로 따랐다'고 실록은 전합니다. 그렇다면 귀양 간 코끼리는 섬에서 과연 어찌 지냈을까. 이어지는 기록입니다.

길들인 코끼리[象]를 육지(陸地)로 내보내라고 명하였다.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길들인 코끼리를 순천부(順天府) 장도(獐島)에 방목(放牧)하는데, 수초(水草)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瘦瘠)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서 불쌍히 여겼던 까닭에 육지에 내보내어 처음과 같이 기르게 하였다.

귀양살이 고달픈 건 사람이고 동물이고 예외가 없었습니다. 남해의 절해고도에는 코끼리가 먹을 만한 풀이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먹고 먹고 또 먹어도 배가 고픈 코끼리에게 섬은 최악의 거주지였던 셈이죠. 오죽했으면 사람을 볼 때마다 눈물을 다 흘렸다고 했을까요. 결국, 왕은 이 불쌍한 코끼리를 섬에서 꺼내 육지에서 기르도록 명합니다. 섬에 유배된 지 여섯 달쯤 지난 시점이었죠.


이렇게 태종이 선물 받은 코끼리가 《태종실록》에 1년에 한 번씩은 등장한 까닭에 6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당시 코끼리의 거취를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동물이 이렇게나 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죠. 이제 코끼리에 관한 과업은 아들 세종에게 넘어갑니다. 세종이 왕에 오른 이듬해인 1420년 겨울, 문제의 코끼리는 또 다시 실록에 존재를 드러냅니다.

전라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코끼리[象]란 것이 쓸 데에 유익 되는 점이 없거늘, 지금 도내 네 곳의 변방 지방관에게 명하여 돌려 가면서 먹여 기르라 하였으니, 폐해가 적지 않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게 되니, 청컨대, 충청(忠淸)·경상도까지 아울러 명하여 돌아가면서 기르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상왕이라 했으니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줬어도 코끼리 문제는 여전히 아버지 태종의 의향을 물었던 것 같습니다. 코끼리가 너무 많이 먹어치우는 바람에 백성들이 너무나도 괴롭다, 그러니 코끼리를 돌보는 부담을 충청도와 경상도까지 나눠서 지게 해달라, 이렇게 간청한 겁니다. 그래서 부담을 나눠서 지게 된 충청도에서 이듬해 또다시 참사가 일어납니다.

충청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공주(公州)에 코끼리를 기르는 종이 코끼리에 채여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나라에 유익한 것이 없고,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이나 되어, 하루에 쌀 2말, 콩 1말씩이온즉,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입니다. 화를 내면 사람을 해치니,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니, 바다 섬 가운데 있는 목장에 내놓으소서." 하였다. 선지(宣旨)하기를,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이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 하였다.

9년 전 자기를 해코지하던 고위 공무원에 이어, 이번에는 자기를 돌봐주던 노비를 밟아 죽게 한 겁니다. 기록만 봐서는 어떤 곡절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화를 내면 사람을 해치니'라는 구절이 실마리를 제공해주죠. 충청도 관찰사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데다 양식만 축내는 코끼리를 다시 섬으로 유배 보내달라고 청합니다. 살인의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죠. 왕은 허락합니다. 결국, 코끼리는 또다시 섬으로 귀양 살러 갑니다.

조선시대 제사 때 술을 담는 용도로 쓴 코끼리 모양의 항아리 상준(象樽)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조선시대 제사 때 술을 담는 용도로 쓴 코끼리 모양의 항아리 상준(象樽)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 기록을 끝으로 코끼리가 그 뒤에 어디서 어떻게 살다가 언제 돌아갔는지 알려주는 내용은 실록에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한참 세월이 흘러 선조 22년인 1589년에 다른 나라에서 선물로 받은 다른 동물을 처리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코끼리가 한 번 더 언급됩니다.

영락 7년(1409년)에 일본이 코끼리 두 마리를 보내자 태종이 받았고,

앞선 기록과 비교하면 코끼리가 조선에 온 해도 그렇고,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라고 한 점도 다릅니다. 정확한 사실이 뭔지 기록만으론 확인할 길이 없죠. 아무튼, 머나먼 뱃길로 바다 건너 일본에 갔다가, 또다시 바다 건너 조선까지 온 코끼리는 서울에서 전라도 최남단 섬으로, 다시 육지로, 충청도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끝내 두 번째로 섬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파란만장도 이런 파란만장이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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