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650억 과징금에 억울하다던 ‘파리바게트’ SPC, 내부자료에선…

입력 2020.07.30 (10:05) 수정 2020.07.30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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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제빵왕 김탁구'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큰 제빵회사 총수의 서자인 김탁구가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제빵업계 일인자로 성장한다는 내용입니다.

 방영 당시 가정사나 성장 과정이 다르긴 하지만 김탁구를 두고 허영인 SPC그룹 회장을 연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국내 제빵계 1위인 삼립식품의 차남으로 회사를 물려받지 못했지만, 빵에 대한 열정 하나로 '현실 제빵왕'에 오른 이야기 때문입니다.

허영인 회장은 한국 제빵업계의 판도를 바꾼 사람입니다. 삼립식품에 비해 초라하던 양산빵 브랜드 '샤니'로 시작해 1988년 처음 '파리바게뜨' 문을 열어 갓 구운 빵을 팔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동네 빵집'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97년 친형이 경영하던 삼립식품이 부도를 내자 회사를 인수해 지금의 SPC그룹으로 키워낸 것도 그의 공입니다.

그런데 이 제빵왕 형사처벌을 당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어제(29일) 계열사를 지원하기 위해 부당한 내부거래를 했다며 허 회장을 검찰에 고발하면서입니다. 특히, 빵의 원재료 등을 그룹 내부에서 생산하는 수직계열화 과정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회사가 중간에 끼어 이윤을 올리는 '통행세' 거래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밀가루부터 완제품까지 그룹 차원의 통행세 구조 설계

세종시 소재 밀다원 공장세종시 소재 밀다원 공장
2011년 4월 1일. 샤니는 판매망과 연구개발(R&D) 부문의 무형자산을 삼립(現 SPC삼립)에 양도하고 '샤니' 상표권도 8년간 무상으로 쓸 수 있도록 계약합니다. 허영인 회장과 경영진 주도로 이뤄진 '샤니-삼립 통합' 작업입니다.

이와 동시에 파리크라상, SPL, 비알코리아 등 제빵 계열사들은 삼립을 거쳐 밀다원의 밀가루를 공급받는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밀다원은 SPC그룹이 2008년 인수한 제분업체인데, 구매하는 계열사가 직접 사지 않고 삼립을 거치는 식으로 구조를 바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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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3일 SPC그룹이 작성한 내부검토자료. '세무·회계 고려사항'이라는 항목에 "계열사 간 통과매출을 총액 인식하는 경우 증여세 회피 목적으로 간주할 가능성 존재"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전까지 삼립은 밀다원에서 사 온 가격 그대로 계열사에 밀가루를 넘겼는데 국세청에서 이를 증여세 회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이 보고가 올라간 뒤 삼립은 그해 9월부터 매입·매출 구조로 밀가루 통행방식을 바꿨습니다. 공정위 관계자는 "이전에는 단순히 삼립의 매출을 높이기 위한 거래였다면 9월부터는 삼립이 중간에서 수수료를 붙여 이윤을 남기기 시작했다"라며 "이때부터 통행세 거래가 시작됐다고 판단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삼립은 밀다원에서 사 온 밀가룻값에 약 5%의 이윤을 붙여 파리크라상, SPL, 비알코리아 등 제빵 계열사에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정위 조사 결과 2018년 6월까지 2천83억 원어치의 밀가루가 이런 식으로 거래됐습니다.


SPC그룹은 2015년부터는 다른 7개사의 제품에 대해서도 삼립을 거쳐 계열사 납품이 이뤄지도록 비슷한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계열사들은 2천812억 원어치의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적게는 3%, 많게는 44%의 통행세를 삼립에 냈습니다. 공정위는 삼립이 해당 기간 총 210개 품목에 평균 9%의 통행세를 물렸다고 밝혔습니다.

■SPC "삼립, 중간에서 경영상 역할 있었다"‥내부 문서에선 "역할 미미해"

SPC그룹은 통행세 혐의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삼립이 자회사들을 위해 연구개발(R&D), 마케팅, 생산계획, 영업, 주문관리, 물류 등의 업무를 했고, 실제로 이 업무를 위해 200억 원 이상의 비용을 지출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공정위의 판단은 다릅니다. 통행세 거래를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잣대가 바로 중간단계에서 어떠한 경영상 역할이 있었냐는 것인데 삼립이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있지만 이를 입증할 자료는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SPC그룹 측이 입증한 인건비와 주문시스템 개발비용 등은 약 30억 원에 그쳤는데, 공정위는 이를 심사단계에서 부당지원 금액에서 제외했다고 밝혔습니다.

SPC그룹 측은 지난 6월 17일 이번 제재 건에 대한 전원회의에서 삼립의 역할에 대한 비용분석 자료를 추가로 제시했습니다. 전원회의 현장에서 법 위반 판단의 핵심이 될 자료를 낸 것은 꽤 이례적인 일입니다. 기업은 공소장에 해당하는 심사보고서를 받아본 뒤 의견서를 쓰고, 전원회의에 앞서 사건을 심의할 상임위원들과 의견청취 절차도 갖는데 보통은 이런 단계에서 주장과 입증자료를 다 제출하는 게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공정위 전원회의는 이에 해당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라고 2주간의 기한을 줬습니다. 공정위에 따르면 SPC 측은 해당 기간 판단을 뒤집거나 과징금을 줄일 만한 자료를 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SPC그룹이 이 통행세 거래를 문제 될 것이라고 미리 인식했다는 방증은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2015년 11월 12일 삼립식품과 밀다원은 회의를 열어 "계열사와 외부의 동일 품목·사양 출하 시 단가 차이로 인한 공정거래 이슈가 발생할 수 있다"며 품목과 사양을 시중에서 거래하는 제품과 다르게 해야 한다"고 논의합니다.


2017년 7월에는 파리바게뜨 가맹점에 공급하는 완제품 56개 품목은 통행세 문제가 제기될 것을 우려해 직거래 방식으로 전환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2017년 11월 27일 SPC그룹에서 회계법인에 그룹 내 거래의 적정성에 대한 검토를 의뢰해 받은 보고서에는 "삼립 수행기능의 실질이 미미하다"며 "제3자 거래가격을 시가로 보면 관계사 간 거래가격 적정성에 대한 리스크가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공정위가 부당지원 주체인 파리크라상, SPL, 비알코리아, 샤니 등 4개사와 지원을 받은 삼립에 물린 총 647억 원의 과징금은 부당지원 혐의에 대한 역대 최대 수준입니다. 허영인 회장은 이를 주도한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했습니다.

■통행세 거래 만든 건 승계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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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그룹이 법 위반 가능성을 인식하면서 장기간 대규모 통행세 거래를 이어온 까닭은 무엇일까? 공정위는 승계를 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015년 4월 파리크라상 대표이사의 직인이 찍힌 '지분구조 개편방안'을 통해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SPC그룹의 지배구조 최정점은 파리크라상입니다. 허영인 회장이 지분의 63.4%, 아들인 진수, 희수 씨가 각각 20.2%, 12.7%, 배우자인 이미향 씨가 3.6%를 보유한 총수일가 지분 100% 회사입니다. 삼립을 비롯해 대부분의 계열사를 이 파리크라상이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아들 2명의 지분이 너무 적어 승계 과정이 순탄치 않다는 점입니다. 내부문건에도 이를 지적한 대목이 나옵니다. 또 현재 SPC그룹의 전체 자산은 4조 3천억 원 수준인데 5조 원을 넘는 순간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돼 내부거래와 특수관계인 지분에 대해 더 강력한 규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개편안은 우선 파리크라상을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물적분할한 다음, 허 회장과 아들 간 주식을 바꾸거나 현물출자 참가비율을 달리하는 식으로 2세의 지주회사 지분율을 높이는 전략을 꾀하고 있습니다. 비상장 상태인 지주회사 지분을 증여하는 방법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삼립이 상대적으로 2세 지분이 많고, 상장사로 주가 측면에서도 유리한 점을 이용하겠다는 겁니다. 물론, 이 계획에도 허점은 있습니다. 삼립의 대주주는 40.66%를 보유한 파리크라상인데, 삼립 주가가 상승하면 파리크라상의 지분가치도 상승해 주식교환 때 둘 사이의 가격 차이가 좁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삼립의 주가는 2015년 8월 41만 원을 넘기도 했습니다.

정진욱 국장은 "실제 회사 내부에서 회계법인에 의뢰해 승계작업을 검토했다는 자료를 확보했고, 삼립의 주가를 높이는 게 SPC 입장에서는 중요했다는 얘기"라며 "(삼립의) 주가가 낮으면 낮은 대로 증여를 해서 승계하는 방안도 검토했는데 실제 장남에 40만 주를 그대로 증여한 사실도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번 제재와 승계에 활용하려 했다는 의혹은 큰 관련성이 없습니다. 공정거래법에서 부당한 내부거래에 관한 조항(23조 1항 7)은 총수일가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23조의 2)와 달라 거래에 따른 이익이 총수일가의 주머니로 들어갔는지, 계열사로 들어갔는지는 제재를 판단하는 데 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서 SPC는 지분 승계 이전 경영권 승계로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습니다. 2018년 허희수 전 부사장이 액상 대마를 밀수하다 걸려 실형을 받은 것입니다. 당시 SPC그룹은 허 전 부사장을 "경영에서 영구히 배제한다"고 했는데 최근 허 전 부사장이 본사 경영과 관련한 회의를 주재한다는 의혹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현장K] ‘마약’ SPC 3세, 경영 영구 배제한다더니?…“빵 사러 왔다”(2020년 3월 25일)

허영인 SPC그룹 회장(SPC 공식 유튜브)허영인 SPC그룹 회장(SPC 공식 유튜브)

■이번에도 소비자만 피해…'고객' 대신 '후계' 택하나?

5천억 원에 이르는 통행세 거래의 피해자는 파리바게뜨 가맹점주와 소비자입니다. 예컨대 2017년 삼립은 파리크라상에 강력분을 단위당 779원, 액상 달걀을 8천399원에 공급했는데 각각 매입가격에 5%, 7%의 수수료(통행세)를 붙인 가격입니다.

정진욱 국장은 "납품받는 가격 자체가 저렴해질 것이고 제조원가가 줄어들기 때문에 판매가도 낮출 수 있다"며 "(통행세 거래를 안 했더라면)상식에 입각할 때 당연히 소비자 가격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SPC는 2017년 파리바게뜨 가맹점에 대한 일부 완제품 공급을 직거래방식으로 바꾸면서 본사 매입가격을 3만 원에서 2만 2천 원으로 낮췄지만, 가맹점 출하가는 그대로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직거래 전환 원인을 보고한 내부문서에서는 "거래단계 법인별 물류비가 부여돼 가맹점 출하가격이 상승했다"며 통행세를 통한 가격 인상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SPC와 허영인 회장이 걸어온 길은 '제빵왕 신화'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성장할 수 있도록 수십 년간 찾아준 소비자를 버리고, '후계자'를 택하는 순간 그 신화도 빛바랜 이야기로 전락할 수 있을 겁니다.

한편 SPC그룹 측은 "통행세를 물린 게 아니라 경영상 역할을 했고, 승계 목적이라는 건 잘못된 논리"라며 "허 회장이 직접 거래를 지시했다는 근거도 없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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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650억 과징금에 억울하다던 ‘파리바게트’ SPC, 내부자료에선…
    • 입력 2020-07-30 10:05:18
    • 수정2020-07-30 10:06:31
    취재후·사건후
undefined10년 전 '제빵왕 김탁구'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큰 제빵회사 총수의 서자인 김탁구가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제빵업계 일인자로 성장한다는 내용입니다.

 방영 당시 가정사나 성장 과정이 다르긴 하지만 김탁구를 두고 허영인 SPC그룹 회장을 연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국내 제빵계 1위인 삼립식품의 차남으로 회사를 물려받지 못했지만, 빵에 대한 열정 하나로 '현실 제빵왕'에 오른 이야기 때문입니다.

허영인 회장은 한국 제빵업계의 판도를 바꾼 사람입니다. 삼립식품에 비해 초라하던 양산빵 브랜드 '샤니'로 시작해 1988년 처음 '파리바게뜨' 문을 열어 갓 구운 빵을 팔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동네 빵집'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97년 친형이 경영하던 삼립식품이 부도를 내자 회사를 인수해 지금의 SPC그룹으로 키워낸 것도 그의 공입니다.

그런데 이 제빵왕 형사처벌을 당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어제(29일) 계열사를 지원하기 위해 부당한 내부거래를 했다며 허 회장을 검찰에 고발하면서입니다. 특히, 빵의 원재료 등을 그룹 내부에서 생산하는 수직계열화 과정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회사가 중간에 끼어 이윤을 올리는 '통행세' 거래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밀가루부터 완제품까지 그룹 차원의 통행세 구조 설계

세종시 소재 밀다원 공장2011년 4월 1일. 샤니는 판매망과 연구개발(R&D) 부문의 무형자산을 삼립(現 SPC삼립)에 양도하고 '샤니' 상표권도 8년간 무상으로 쓸 수 있도록 계약합니다. 허영인 회장과 경영진 주도로 이뤄진 '샤니-삼립 통합' 작업입니다.

이와 동시에 파리크라상, SPL, 비알코리아 등 제빵 계열사들은 삼립을 거쳐 밀다원의 밀가루를 공급받는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밀다원은 SPC그룹이 2008년 인수한 제분업체인데, 구매하는 계열사가 직접 사지 않고 삼립을 거치는 식으로 구조를 바꾼 겁니다.

undefined2013년 6월 13일 SPC그룹이 작성한 내부검토자료. '세무·회계 고려사항'이라는 항목에 "계열사 간 통과매출을 총액 인식하는 경우 증여세 회피 목적으로 간주할 가능성 존재"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전까지 삼립은 밀다원에서 사 온 가격 그대로 계열사에 밀가루를 넘겼는데 국세청에서 이를 증여세 회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이 보고가 올라간 뒤 삼립은 그해 9월부터 매입·매출 구조로 밀가루 통행방식을 바꿨습니다. 공정위 관계자는 "이전에는 단순히 삼립의 매출을 높이기 위한 거래였다면 9월부터는 삼립이 중간에서 수수료를 붙여 이윤을 남기기 시작했다"라며 "이때부터 통행세 거래가 시작됐다고 판단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삼립은 밀다원에서 사 온 밀가룻값에 약 5%의 이윤을 붙여 파리크라상, SPL, 비알코리아 등 제빵 계열사에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정위 조사 결과 2018년 6월까지 2천83억 원어치의 밀가루가 이런 식으로 거래됐습니다.


SPC그룹은 2015년부터는 다른 7개사의 제품에 대해서도 삼립을 거쳐 계열사 납품이 이뤄지도록 비슷한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계열사들은 2천812억 원어치의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적게는 3%, 많게는 44%의 통행세를 삼립에 냈습니다. 공정위는 삼립이 해당 기간 총 210개 품목에 평균 9%의 통행세를 물렸다고 밝혔습니다.

■SPC "삼립, 중간에서 경영상 역할 있었다"‥내부 문서에선 "역할 미미해"

SPC그룹은 통행세 혐의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삼립이 자회사들을 위해 연구개발(R&D), 마케팅, 생산계획, 영업, 주문관리, 물류 등의 업무를 했고, 실제로 이 업무를 위해 200억 원 이상의 비용을 지출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공정위의 판단은 다릅니다. 통행세 거래를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잣대가 바로 중간단계에서 어떠한 경영상 역할이 있었냐는 것인데 삼립이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있지만 이를 입증할 자료는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SPC그룹 측이 입증한 인건비와 주문시스템 개발비용 등은 약 30억 원에 그쳤는데, 공정위는 이를 심사단계에서 부당지원 금액에서 제외했다고 밝혔습니다.

SPC그룹 측은 지난 6월 17일 이번 제재 건에 대한 전원회의에서 삼립의 역할에 대한 비용분석 자료를 추가로 제시했습니다. 전원회의 현장에서 법 위반 판단의 핵심이 될 자료를 낸 것은 꽤 이례적인 일입니다. 기업은 공소장에 해당하는 심사보고서를 받아본 뒤 의견서를 쓰고, 전원회의에 앞서 사건을 심의할 상임위원들과 의견청취 절차도 갖는데 보통은 이런 단계에서 주장과 입증자료를 다 제출하는 게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공정위 전원회의는 이에 해당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라고 2주간의 기한을 줬습니다. 공정위에 따르면 SPC 측은 해당 기간 판단을 뒤집거나 과징금을 줄일 만한 자료를 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SPC그룹이 이 통행세 거래를 문제 될 것이라고 미리 인식했다는 방증은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2015년 11월 12일 삼립식품과 밀다원은 회의를 열어 "계열사와 외부의 동일 품목·사양 출하 시 단가 차이로 인한 공정거래 이슈가 발생할 수 있다"며 품목과 사양을 시중에서 거래하는 제품과 다르게 해야 한다"고 논의합니다.


2017년 7월에는 파리바게뜨 가맹점에 공급하는 완제품 56개 품목은 통행세 문제가 제기될 것을 우려해 직거래 방식으로 전환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2017년 11월 27일 SPC그룹에서 회계법인에 그룹 내 거래의 적정성에 대한 검토를 의뢰해 받은 보고서에는 "삼립 수행기능의 실질이 미미하다"며 "제3자 거래가격을 시가로 보면 관계사 간 거래가격 적정성에 대한 리스크가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공정위가 부당지원 주체인 파리크라상, SPL, 비알코리아, 샤니 등 4개사와 지원을 받은 삼립에 물린 총 647억 원의 과징금은 부당지원 혐의에 대한 역대 최대 수준입니다. 허영인 회장은 이를 주도한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했습니다.

■통행세 거래 만든 건 승계 때문?
undefinedSPC그룹이 법 위반 가능성을 인식하면서 장기간 대규모 통행세 거래를 이어온 까닭은 무엇일까? 공정위는 승계를 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015년 4월 파리크라상 대표이사의 직인이 찍힌 '지분구조 개편방안'을 통해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SPC그룹의 지배구조 최정점은 파리크라상입니다. 허영인 회장이 지분의 63.4%, 아들인 진수, 희수 씨가 각각 20.2%, 12.7%, 배우자인 이미향 씨가 3.6%를 보유한 총수일가 지분 100% 회사입니다. 삼립을 비롯해 대부분의 계열사를 이 파리크라상이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아들 2명의 지분이 너무 적어 승계 과정이 순탄치 않다는 점입니다. 내부문건에도 이를 지적한 대목이 나옵니다. 또 현재 SPC그룹의 전체 자산은 4조 3천억 원 수준인데 5조 원을 넘는 순간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돼 내부거래와 특수관계인 지분에 대해 더 강력한 규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개편안은 우선 파리크라상을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물적분할한 다음, 허 회장과 아들 간 주식을 바꾸거나 현물출자 참가비율을 달리하는 식으로 2세의 지주회사 지분율을 높이는 전략을 꾀하고 있습니다. 비상장 상태인 지주회사 지분을 증여하는 방법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삼립이 상대적으로 2세 지분이 많고, 상장사로 주가 측면에서도 유리한 점을 이용하겠다는 겁니다. 물론, 이 계획에도 허점은 있습니다. 삼립의 대주주는 40.66%를 보유한 파리크라상인데, 삼립 주가가 상승하면 파리크라상의 지분가치도 상승해 주식교환 때 둘 사이의 가격 차이가 좁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삼립의 주가는 2015년 8월 41만 원을 넘기도 했습니다.

정진욱 국장은 "실제 회사 내부에서 회계법인에 의뢰해 승계작업을 검토했다는 자료를 확보했고, 삼립의 주가를 높이는 게 SPC 입장에서는 중요했다는 얘기"라며 "(삼립의) 주가가 낮으면 낮은 대로 증여를 해서 승계하는 방안도 검토했는데 실제 장남에 40만 주를 그대로 증여한 사실도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번 제재와 승계에 활용하려 했다는 의혹은 큰 관련성이 없습니다. 공정거래법에서 부당한 내부거래에 관한 조항(23조 1항 7)은 총수일가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23조의 2)와 달라 거래에 따른 이익이 총수일가의 주머니로 들어갔는지, 계열사로 들어갔는지는 제재를 판단하는 데 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서 SPC는 지분 승계 이전 경영권 승계로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습니다. 2018년 허희수 전 부사장이 액상 대마를 밀수하다 걸려 실형을 받은 것입니다. 당시 SPC그룹은 허 전 부사장을 "경영에서 영구히 배제한다"고 했는데 최근 허 전 부사장이 본사 경영과 관련한 회의를 주재한다는 의혹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현장K] ‘마약’ SPC 3세, 경영 영구 배제한다더니?…“빵 사러 왔다”(2020년 3월 25일)

허영인 SPC그룹 회장(SPC 공식 유튜브)
■이번에도 소비자만 피해…'고객' 대신 '후계' 택하나?

5천억 원에 이르는 통행세 거래의 피해자는 파리바게뜨 가맹점주와 소비자입니다. 예컨대 2017년 삼립은 파리크라상에 강력분을 단위당 779원, 액상 달걀을 8천399원에 공급했는데 각각 매입가격에 5%, 7%의 수수료(통행세)를 붙인 가격입니다.

정진욱 국장은 "납품받는 가격 자체가 저렴해질 것이고 제조원가가 줄어들기 때문에 판매가도 낮출 수 있다"며 "(통행세 거래를 안 했더라면)상식에 입각할 때 당연히 소비자 가격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SPC는 2017년 파리바게뜨 가맹점에 대한 일부 완제품 공급을 직거래방식으로 바꾸면서 본사 매입가격을 3만 원에서 2만 2천 원으로 낮췄지만, 가맹점 출하가는 그대로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직거래 전환 원인을 보고한 내부문서에서는 "거래단계 법인별 물류비가 부여돼 가맹점 출하가격이 상승했다"며 통행세를 통한 가격 인상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SPC와 허영인 회장이 걸어온 길은 '제빵왕 신화'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성장할 수 있도록 수십 년간 찾아준 소비자를 버리고, '후계자'를 택하는 순간 그 신화도 빛바랜 이야기로 전락할 수 있을 겁니다.

한편 SPC그룹 측은 "통행세를 물린 게 아니라 경영상 역할을 했고, 승계 목적이라는 건 잘못된 논리"라며 "허 회장이 직접 거래를 지시했다는 근거도 없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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