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쓰레기는 나”…3년째 쓰레기 집에 갇혀 산 여자 [주말엔]

입력 2024.04.28 (10:00) 수정 2024.04.2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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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평 방 가득 쌓인 쓰레기 더미에 갇혀 산 20대 여자가 있습니다.

3년 전, 집 수리를 위해 방문한 한 남성으로부터 성범죄 피해를 당하고 줄곧 밖을 나가지 못했다는 이여름(가명) 씨.

온 집이 쓰레기 더미로 가득 찬 뒤, 트라우마와 우울증을 이겨내고자 어렵게 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를 냈습니다.

여름 씨의 새 삶을 위한 청소 현장을 KBS 취재진이 찾았습니다.

■ "쓰레기 집에서 가장 큰 쓰레기는 저인 것 같아요."

여름 씨는 행여 그날의 기억이 다시 떠오를까, 스스로를 집 안에 가두었고 쓰레기를 버리러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됐습니다.

"가해자와 비슷한 연령대 남성들을 마주치는 게 힘들어서 집에만 있었어요."


범죄 피해 전, 깨끗했던 집의 모습범죄 피해 전, 깨끗했던 집의 모습

흰 벽지로 도배도 스스로 하고 귀여운 인형을 전시할 정도로 방 꾸미는 것을 좋아했던 여름 씨.

그녀는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오늘은 치워야지', '힘내서 나가야지'라고 몇 번이나 다짐하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범죄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찾으며 자책하는 마음이 다시 그 다짐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가치가 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집을 치우는 게 의미가 있나 싶었어요."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봐 스스로 칼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길 정도로 심각해진 여름 씨의 우울증.

그렇게 범죄 트라우마의 고통과 보낸 2년 반 동안 여름 씨의 집은 발 디딜 틈 없이 쓰레기로 뒤덮였습니다.

집에 산더미처럼 쌓여버린 쓰레기들집에 산더미처럼 쌓여버린 쓰레기들

■ "나도 다시 사람답게 살고 싶어요"

그렇게 '쓰레기 집'에 갇혀 살던 그녀는 어느 날 한 청소 업체의 '특수청소 봉사' 영상을 보게 됐습니다.

"옛날에는 나도 나를 참 좋아했는데 언제부터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한 걸까."

쓰레기 더미 옆에 누워 있는 이여름(가명) 씨쓰레기 더미 옆에 누워 있는 이여름(가명) 씨

여름 씨는 '나도 이분들의 도움이 있다면 예전처럼 다시 사람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 사연을 보냈습니다.

여름 씨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은 청소업체는 망설임 없이 두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 5평의 공간에서 나온 2.5톤의 쓰레기와 트라우마들

장장 7시간의 청소가 끝나고 2.5톤의 트럭에 한가득 쓰레기가 쌓였습니다.

2.5톤 트럭에 가득 찬 쓰레기 더미들2.5톤 트럭에 가득 찬 쓰레기 더미들

청소업체 대표 문화진 씨는 "이번 쓰레기 집은 작은 평수 중에서 가장 심각했다"라며 "그간 피해가 얼마나 심했을지 가늠이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쓰레기를 치우다 보면 이 사람이 치우려고 노력했던 흔적이 보입니다."

실제 청소 현장에서 발견된 빗자루실제 청소 현장에서 발견된 빗자루

봉투에 담아둔 쓰레기들, 빗자루, 청소 솔, 곰팡이 약 등과 같이 다양한 청소용품이 발견됐습니다.

문 대표는 "이런 청소 용품들을 보면 처음에 범죄 피해자들이 얼마만큼 노력을 했고, 잘 살아 보고 싶어 했는지 마음이 짐작이 간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피해자들이 게을러서 집이 더러워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청소 봉사를 하다 보면 그들의 처절한 노력들을 보게 되는데, 어느 순간 혼자 치울 수 있는 선을 넘어섰을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 범죄 피해자와 특수청소

5년째 특수청소 봉사를 하고 있는 문 대표에게 여름 씨와 같은 범죄 피해자들은 낯설지 않습니다.

"들어오는 사연 중에 한 달에 한두 건은 가정폭력, 사기, 성범죄와 같은 범죄 피해자분들의 사연입니다. 숨겨진 분들이 얼마나 더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청소 업체 직원들이 특수청소 봉사를 하는 모습청소 업체 직원들이 특수청소 봉사를 하는 모습

문 대표는 국가로부터 제때 도움을 받지 못하고 트라우마로 인해 갇혀 살다가 본인에게까지 닿았을 피해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마음의 짐까지 치유해 줄 수는 없으니 집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드려야겠어요."

그는 "저에게 사연을 보낸 것 자체가 그분들에게는 엄청난 용기다"라며 "범죄 피해자들의 깨끗한 집과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서 지금처럼 꾸준히 봉사를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 헌법이 보장한 '범죄 피해자 구조'

헌법 제30조 : 타인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명·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

원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법에 보장했다는 것은 범죄 피해자도 우리의 국민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헌법에 명시적으로 '범죄 피해자 보장권'에 대해 명문화된 국가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명문화된 국가 중 하나이지만 '범죄 피해자 구조'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범죄가 발생했을 때 범죄의 처벌과 가해자의 사회복귀, 재사회화에만 대부분의 비용이 쓰였던 과거.

삶이 다 망가진 피해자에게는 관심이 부족했던 우리 사회가 뒤늦게 피해자들을 돌아보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1) 범죄 피해자 지원 센터들의 예산 부족
2) 관련 정책 및 지원 제도의 홍보 부족
3) 기관 간의 상호 연계 부족
4) 범죄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

원 교수는 "가장 먼저 중요한 것은 예산 확보"라며 "법률 사각지대에 있는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 연구도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 쓰레기를 버린 것처럼, 내 트라우마도…

"쓰레기가 없어진 게 마치 몇 년간의 안 좋은 감정들이 없어진 것 같아요."

청소 후, 깨끗해진 집의 모습청소 후, 깨끗해진 집의 모습

청소가 끝나고 180도 달라진 집을 보고 여름 씨는 깨끗해진 집에서 한참 동안 울었습니다.

'깨끗해진 집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여름 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날 이후 신경이 쓰여서 거의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그냥 이제 잘 자고 싶어요."

여름 씨는 "앞으로 깨끗해진 집에서 나 자신을 잘 돌보고 치유할 수 있게끔 더 긍정적으로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여름 씨는 인터뷰가 끝나고 기자와 '깨끗한 방을 유지하며 지낼 것', '트라우마 치료를 받을 것'을 약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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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큰 쓰레기는 나”…3년째 쓰레기 집에 갇혀 산 여자 [주말엔]
    • 입력 2024-04-28 10:00:06
    • 수정2024-04-28 10:02:19
    주말엔

5평 방 가득 쌓인 쓰레기 더미에 갇혀 산 20대 여자가 있습니다.

3년 전, 집 수리를 위해 방문한 한 남성으로부터 성범죄 피해를 당하고 줄곧 밖을 나가지 못했다는 이여름(가명) 씨.

온 집이 쓰레기 더미로 가득 찬 뒤, 트라우마와 우울증을 이겨내고자 어렵게 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를 냈습니다.

여름 씨의 새 삶을 위한 청소 현장을 KBS 취재진이 찾았습니다.

■ "쓰레기 집에서 가장 큰 쓰레기는 저인 것 같아요."

여름 씨는 행여 그날의 기억이 다시 떠오를까, 스스로를 집 안에 가두었고 쓰레기를 버리러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됐습니다.

"가해자와 비슷한 연령대 남성들을 마주치는 게 힘들어서 집에만 있었어요."


범죄 피해 전, 깨끗했던 집의 모습
흰 벽지로 도배도 스스로 하고 귀여운 인형을 전시할 정도로 방 꾸미는 것을 좋아했던 여름 씨.

그녀는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오늘은 치워야지', '힘내서 나가야지'라고 몇 번이나 다짐하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범죄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찾으며 자책하는 마음이 다시 그 다짐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가치가 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집을 치우는 게 의미가 있나 싶었어요."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봐 스스로 칼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길 정도로 심각해진 여름 씨의 우울증.

그렇게 범죄 트라우마의 고통과 보낸 2년 반 동안 여름 씨의 집은 발 디딜 틈 없이 쓰레기로 뒤덮였습니다.

집에 산더미처럼 쌓여버린 쓰레기들
■ "나도 다시 사람답게 살고 싶어요"

그렇게 '쓰레기 집'에 갇혀 살던 그녀는 어느 날 한 청소 업체의 '특수청소 봉사' 영상을 보게 됐습니다.

"옛날에는 나도 나를 참 좋아했는데 언제부터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한 걸까."

쓰레기 더미 옆에 누워 있는 이여름(가명) 씨
여름 씨는 '나도 이분들의 도움이 있다면 예전처럼 다시 사람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 사연을 보냈습니다.

여름 씨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은 청소업체는 망설임 없이 두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 5평의 공간에서 나온 2.5톤의 쓰레기와 트라우마들

장장 7시간의 청소가 끝나고 2.5톤의 트럭에 한가득 쓰레기가 쌓였습니다.

2.5톤 트럭에 가득 찬 쓰레기 더미들
청소업체 대표 문화진 씨는 "이번 쓰레기 집은 작은 평수 중에서 가장 심각했다"라며 "그간 피해가 얼마나 심했을지 가늠이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쓰레기를 치우다 보면 이 사람이 치우려고 노력했던 흔적이 보입니다."

실제 청소 현장에서 발견된 빗자루
봉투에 담아둔 쓰레기들, 빗자루, 청소 솔, 곰팡이 약 등과 같이 다양한 청소용품이 발견됐습니다.

문 대표는 "이런 청소 용품들을 보면 처음에 범죄 피해자들이 얼마만큼 노력을 했고, 잘 살아 보고 싶어 했는지 마음이 짐작이 간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피해자들이 게을러서 집이 더러워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청소 봉사를 하다 보면 그들의 처절한 노력들을 보게 되는데, 어느 순간 혼자 치울 수 있는 선을 넘어섰을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 범죄 피해자와 특수청소

5년째 특수청소 봉사를 하고 있는 문 대표에게 여름 씨와 같은 범죄 피해자들은 낯설지 않습니다.

"들어오는 사연 중에 한 달에 한두 건은 가정폭력, 사기, 성범죄와 같은 범죄 피해자분들의 사연입니다. 숨겨진 분들이 얼마나 더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청소 업체 직원들이 특수청소 봉사를 하는 모습
문 대표는 국가로부터 제때 도움을 받지 못하고 트라우마로 인해 갇혀 살다가 본인에게까지 닿았을 피해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마음의 짐까지 치유해 줄 수는 없으니 집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드려야겠어요."

그는 "저에게 사연을 보낸 것 자체가 그분들에게는 엄청난 용기다"라며 "범죄 피해자들의 깨끗한 집과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서 지금처럼 꾸준히 봉사를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 헌법이 보장한 '범죄 피해자 구조'

헌법 제30조 : 타인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명·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

원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법에 보장했다는 것은 범죄 피해자도 우리의 국민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헌법에 명시적으로 '범죄 피해자 보장권'에 대해 명문화된 국가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명문화된 국가 중 하나이지만 '범죄 피해자 구조'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범죄가 발생했을 때 범죄의 처벌과 가해자의 사회복귀, 재사회화에만 대부분의 비용이 쓰였던 과거.

삶이 다 망가진 피해자에게는 관심이 부족했던 우리 사회가 뒤늦게 피해자들을 돌아보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1) 범죄 피해자 지원 센터들의 예산 부족
2) 관련 정책 및 지원 제도의 홍보 부족
3) 기관 간의 상호 연계 부족
4) 범죄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

원 교수는 "가장 먼저 중요한 것은 예산 확보"라며 "법률 사각지대에 있는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 연구도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 쓰레기를 버린 것처럼, 내 트라우마도…

"쓰레기가 없어진 게 마치 몇 년간의 안 좋은 감정들이 없어진 것 같아요."

청소 후, 깨끗해진 집의 모습
청소가 끝나고 180도 달라진 집을 보고 여름 씨는 깨끗해진 집에서 한참 동안 울었습니다.

'깨끗해진 집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여름 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날 이후 신경이 쓰여서 거의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그냥 이제 잘 자고 싶어요."

여름 씨는 "앞으로 깨끗해진 집에서 나 자신을 잘 돌보고 치유할 수 있게끔 더 긍정적으로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여름 씨는 인터뷰가 끝나고 기자와 '깨끗한 방을 유지하며 지낼 것', '트라우마 치료를 받을 것'을 약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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