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뉴스] 6·25 전쟁 60년, 돌아오지 못한 용사들

입력 2010.06.24 (22:03) 수정 2010.06.24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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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민족의 비극, 6.25가 발발한지 어느덧 60년이 지났습니다.



나라를 위해 꽃다운 목숨을 바쳤지만 지금도 비석조차 없이 묻혀 있거나, 북으로 끌려간 용사들이 많은데요.



이슈앤 뉴스, 오늘은 돌아오지 못한 대한의 아들들을 집중 조명합니다.



먼저 이영현 기자가 전사자와 실종자 현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리포트>



625 전쟁에는 국군과 유엔군을 합쳐 77만 6천명이 참전했습니다.



이 가운데 국군은 62만명으로 집계됩니다.



이 전쟁에서 국군 사망자는 13만 7천명 실종자는 2만 4천명에 달합니다.



이분들 가운데 현충원에 안장된 사람들은 고작 2만 9천명 가량입니다.



이에 따라 13만 명 가량이 이름 모를 곳에서 유해로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70% 가량인 9만에서 9만 5천 명의 유해가 남한 지역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20%-25%는 북한지역에 또 5-10%는 비무장 지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사자의 유해는 초기 전투 지역과 후퇴지역 그리고 낙동강 전투를 비롯해 중공군이 개입해 후퇴할 당시 지역에 집중된 것으로 조사돼 있습니다.



<앵커 멘트>



참전당시만 해도 꽃다운 나이의 청년들이었을텐데, 그 시신조차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취재 기자 나와있습니다.



<질문>



이영현 기자, 국가 차원에서 유해를 발굴하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진척됐습니까.



<답변>



전사자 유해 발굴은 10년 전인 2000년부터 시작됐는데 본격적인 발굴은 국가 영구 사업으로 지정된 2005년부터입니다.



지난해까지 4천 9백 여구를 발굴했는데 이 가운데 국군은 3천 3백 여구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신원을 확인한 유해는 56구에 불과합니다.



정부는 올해도 발굴을 계속하고 있는데 전국에서 55곳 지금 보시는 이 지역이 대상입니다.



김기현 기자가 이 가운데 중부 전선 비무장지대 부근에 있는 최북단 발굴 현장을 가 봤습니다.



<리포트>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달려, 구불구불한 산 등성이를 걸어 올라갑니다.



도착한 곳은 중부전선 735 고지.



6.25 당시, 네 차례 전투에서 천 2백여 명이 숨진 격전지입니다.



치열했던 교전 흔적을 더듬어 가면 전사자 유해나 소지품을 찾습니다.



<현장음> "아래 턱 뼈 우측이 나왔다"



흙더미를 조심스레 걷어내자 뼈조각이 나옵니다.



<인터뷰> 이용석(중령/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 : "두개골이 나오면 시신 1구로 봅니다. 그 사람을 대표하니까 ..."



바닥까지 닳고 닳은 군화와 파편에 뚫린 채 녹이 슨 철모, 총알에 관통된 수저까지...



조국을 위해 싸운 젊은이들의 넋이 깃든 유품입니다.



여기서 유해 11구가 수습됐습니다.



<인터뷰> 박신한(대령/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장) : "9월에 2차로 한 달 동안 좀 더 많은 병력이 집중해 본격적으로 발굴해 나갈 계획입니다."



군은 두 번째 발굴에서는 중장비를 투입해 탐색지역을 넓히면 더 많은 유해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KBS 뉴스 김기현입니다.



<질문>



사실 유해발굴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미국’이죠.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답변>



미국의 유해 발굴 사령부는 2차 대전과 베트남전, 6.25전쟁 등에서 실종된 7만 여명의 미군을 찾는 것이 임무입니다.



지금까지 500여구의 유해를 찾아 신원을 확인하고 가족 품으로 돌려보냈는데 정연욱 기자가 미국의 유해 발굴 사업을 소개합니다.



<리포트>



6.25 전쟁 때 미군기 추락 지점에서 미군들이 일주일 째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60년 전 전사한 미군의 유해를 찾고 있는 겁니다.



<인터뷰>스티브 바살롭 :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치아나 뼈는 아주 작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들은 미군 유해 발굴부대 JPAC의 요원들입니다.



세계 최초로 구성돼 사령부급으로까지 커진 JPAC은 관련 박사급 연구인력 50명이 함께 하는 전문가 집단입니다.



<인터뷰>짐 포킨스(JPAC 연구원) : "뼈는 5개인데 주인은 4명인 경우도 있지만, 작은 뼛조각만으로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년 5차례 한국의 방방곡곡을 뒤지고 주민들과 면담한 정보는 2천여 미군유해를 찾기 위한 분석자료로 집적됩니다.



<인터뷰>딜로이 미챔(6.25 조사팀장) : "5-600명의 사람들 만나도 겨우 한가지 단서만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같은 끈질긴 노력으로 해마다 세계 각지에서 70여구의 유해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돌아올 때까지’란 구호 아래 JPAC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전 세계 흩어진 모든 유해들을 찾을 때까지 이들의 노력은 계속될 겁니다.



하와이에서 KBS 뉴스 정연욱입니다.



<질문>



미국과 비교하면 우리의 유해발굴 사업은 걸음마 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겠죠?



<답변>



미국이 유해발굴에 투입하는 인력과 재원은 그리고 전자사의 예우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국가와 국민의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우리의 가장 큰 어려움은 유해를 발굴해도 유가족을 찾을 길이 막막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해 발굴 감식단측은 유전자 확보를 위해 유가족들 대상으로 보건소 무료 건강검진도 제공하며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질문>



네, 정말 시신을 찾아서 이제라도 그 한을 풀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기자, 그런데 전사자도 중요하지만 아직 북한에 있는 국군포로들도 상당하죠.



이분들 송환문제가 거론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상황입니까.



<답변>



유엔군 사령부가 북한에 억류돼 있다고 추정한 국군 포로는 8만 2천명입니다.



이 가운데 8천 3백명만이 돌아왔는데요.



소현정 기자가 국군 포로 문제를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돌아오지 못한 국군 포로들의 이름입니다.



가족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지난 2000년, 극적으로 귀환한 국군포로 유영철씨.



유씨는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이 얼마나 어렵게 사는지 회고록을 써 그 실상을 고발했습니다.



<인터뷰>유영철(2000년 귀환 국군포로) : "국군 포로라는 딱지가 붙어있었기 때문에 어딜 가나 천대받고 멸시받고 그랬고 또 아들, 딸까지 천대받잖아."



94년 조창호 소위를 시작으로 16년 동안 귀환한 국군포로는 모두 79명.



유골로 돌아온 국군 포로 5구를 포함해 이들 모두 정부의 도움 없이 제 3국을 통해 자력으로 돌아왔습니다.



또 북한에는 여전히 500명이 넘는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06년 18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합의된 국군포로 문제는 아직까지 전혀 진척되지 않고 있습니다.



더우기 7만 4천명에 이르는 미귀환 국군포로의 소재 파악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KBS 뉴스 소현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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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슈&뉴스] 6·25 전쟁 60년, 돌아오지 못한 용사들
    • 입력 2010-06-24 22:03:45
    • 수정2010-06-24 22:16:27
    뉴스 9
<앵커 멘트>

민족의 비극, 6.25가 발발한지 어느덧 60년이 지났습니다.

나라를 위해 꽃다운 목숨을 바쳤지만 지금도 비석조차 없이 묻혀 있거나, 북으로 끌려간 용사들이 많은데요.

이슈앤 뉴스, 오늘은 돌아오지 못한 대한의 아들들을 집중 조명합니다.

먼저 이영현 기자가 전사자와 실종자 현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리포트>

625 전쟁에는 국군과 유엔군을 합쳐 77만 6천명이 참전했습니다.

이 가운데 국군은 62만명으로 집계됩니다.

이 전쟁에서 국군 사망자는 13만 7천명 실종자는 2만 4천명에 달합니다.

이분들 가운데 현충원에 안장된 사람들은 고작 2만 9천명 가량입니다.

이에 따라 13만 명 가량이 이름 모를 곳에서 유해로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70% 가량인 9만에서 9만 5천 명의 유해가 남한 지역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20%-25%는 북한지역에 또 5-10%는 비무장 지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사자의 유해는 초기 전투 지역과 후퇴지역 그리고 낙동강 전투를 비롯해 중공군이 개입해 후퇴할 당시 지역에 집중된 것으로 조사돼 있습니다.

<앵커 멘트>

참전당시만 해도 꽃다운 나이의 청년들이었을텐데, 그 시신조차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취재 기자 나와있습니다.

<질문>

이영현 기자, 국가 차원에서 유해를 발굴하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진척됐습니까.

<답변>

전사자 유해 발굴은 10년 전인 2000년부터 시작됐는데 본격적인 발굴은 국가 영구 사업으로 지정된 2005년부터입니다.

지난해까지 4천 9백 여구를 발굴했는데 이 가운데 국군은 3천 3백 여구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신원을 확인한 유해는 56구에 불과합니다.

정부는 올해도 발굴을 계속하고 있는데 전국에서 55곳 지금 보시는 이 지역이 대상입니다.

김기현 기자가 이 가운데 중부 전선 비무장지대 부근에 있는 최북단 발굴 현장을 가 봤습니다.

<리포트>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달려, 구불구불한 산 등성이를 걸어 올라갑니다.

도착한 곳은 중부전선 735 고지.

6.25 당시, 네 차례 전투에서 천 2백여 명이 숨진 격전지입니다.

치열했던 교전 흔적을 더듬어 가면 전사자 유해나 소지품을 찾습니다.

<현장음> "아래 턱 뼈 우측이 나왔다"

흙더미를 조심스레 걷어내자 뼈조각이 나옵니다.

<인터뷰> 이용석(중령/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 : "두개골이 나오면 시신 1구로 봅니다. 그 사람을 대표하니까 ..."

바닥까지 닳고 닳은 군화와 파편에 뚫린 채 녹이 슨 철모, 총알에 관통된 수저까지...

조국을 위해 싸운 젊은이들의 넋이 깃든 유품입니다.

여기서 유해 11구가 수습됐습니다.

<인터뷰> 박신한(대령/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장) : "9월에 2차로 한 달 동안 좀 더 많은 병력이 집중해 본격적으로 발굴해 나갈 계획입니다."

군은 두 번째 발굴에서는 중장비를 투입해 탐색지역을 넓히면 더 많은 유해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KBS 뉴스 김기현입니다.

<질문>

사실 유해발굴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미국’이죠.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답변>

미국의 유해 발굴 사령부는 2차 대전과 베트남전, 6.25전쟁 등에서 실종된 7만 여명의 미군을 찾는 것이 임무입니다.

지금까지 500여구의 유해를 찾아 신원을 확인하고 가족 품으로 돌려보냈는데 정연욱 기자가 미국의 유해 발굴 사업을 소개합니다.

<리포트>

6.25 전쟁 때 미군기 추락 지점에서 미군들이 일주일 째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60년 전 전사한 미군의 유해를 찾고 있는 겁니다.

<인터뷰>스티브 바살롭 :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치아나 뼈는 아주 작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들은 미군 유해 발굴부대 JPAC의 요원들입니다.

세계 최초로 구성돼 사령부급으로까지 커진 JPAC은 관련 박사급 연구인력 50명이 함께 하는 전문가 집단입니다.

<인터뷰>짐 포킨스(JPAC 연구원) : "뼈는 5개인데 주인은 4명인 경우도 있지만, 작은 뼛조각만으로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년 5차례 한국의 방방곡곡을 뒤지고 주민들과 면담한 정보는 2천여 미군유해를 찾기 위한 분석자료로 집적됩니다.

<인터뷰>딜로이 미챔(6.25 조사팀장) : "5-600명의 사람들 만나도 겨우 한가지 단서만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같은 끈질긴 노력으로 해마다 세계 각지에서 70여구의 유해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돌아올 때까지’란 구호 아래 JPAC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전 세계 흩어진 모든 유해들을 찾을 때까지 이들의 노력은 계속될 겁니다.

하와이에서 KBS 뉴스 정연욱입니다.

<질문>

미국과 비교하면 우리의 유해발굴 사업은 걸음마 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겠죠?

<답변>

미국이 유해발굴에 투입하는 인력과 재원은 그리고 전자사의 예우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국가와 국민의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우리의 가장 큰 어려움은 유해를 발굴해도 유가족을 찾을 길이 막막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해 발굴 감식단측은 유전자 확보를 위해 유가족들 대상으로 보건소 무료 건강검진도 제공하며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질문>

네, 정말 시신을 찾아서 이제라도 그 한을 풀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기자, 그런데 전사자도 중요하지만 아직 북한에 있는 국군포로들도 상당하죠.

이분들 송환문제가 거론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상황입니까.

<답변>

유엔군 사령부가 북한에 억류돼 있다고 추정한 국군 포로는 8만 2천명입니다.

이 가운데 8천 3백명만이 돌아왔는데요.

소현정 기자가 국군 포로 문제를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돌아오지 못한 국군 포로들의 이름입니다.

가족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지난 2000년, 극적으로 귀환한 국군포로 유영철씨.

유씨는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이 얼마나 어렵게 사는지 회고록을 써 그 실상을 고발했습니다.

<인터뷰>유영철(2000년 귀환 국군포로) : "국군 포로라는 딱지가 붙어있었기 때문에 어딜 가나 천대받고 멸시받고 그랬고 또 아들, 딸까지 천대받잖아."

94년 조창호 소위를 시작으로 16년 동안 귀환한 국군포로는 모두 79명.

유골로 돌아온 국군 포로 5구를 포함해 이들 모두 정부의 도움 없이 제 3국을 통해 자력으로 돌아왔습니다.

또 북한에는 여전히 500명이 넘는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06년 18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합의된 국군포로 문제는 아직까지 전혀 진척되지 않고 있습니다.

더우기 7만 4천명에 이르는 미귀환 국군포로의 소재 파악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KBS 뉴스 소현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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