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의 수상한 법인] ② “페이퍼컴퍼니 하나 만드실래요?”

입력 2014.07.01 (15:32) 수정 2014.10.0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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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탐사보도팀의 해외 부동산 취재 상당 부분은 서류상 회사, 이른바 페이퍼컴퍼니와의 전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요 재벌과 부호 일가의 부동산 거래 내역을 검색하다보니, 고구마 줄기처럼 따라 나오는 것들이 바로 ‘페이퍼컴퍼니’였습니다. 페이퍼컴퍼니 이름으로 돼있는 부동산의 실소유주를 확인하려면 법인등기를 확인하고, 매니저로 등록된 사람의 신원을 다시 추적하는 등 겹겹의 취재가 필요합니다. 그나마 허술하게 자신의 회사 직원을 페이퍼컴퍼니 매니저로 앉힌다든가, 페이퍼컴퍼니 주소가 실소유주의 주소와 관련이 있다든가 하는 단서가 남아있는 경우에는 추적이라도 가능합니다. 조세회피처로 회사 주소가 넘어가버려 속수무책, 손을 놓아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사진1. 한국인 투자자로 가장해 고급 콘도 투자 상담을 받는 취재팀>

그런데 탐사팀은 취재 과정에 이 같은 ‘페이퍼컴퍼니’ 거래의 실체에 근접할 수 있었습니다. 한인 천지가 된 하와이 도심의 초고층 콘도촌을 취재할 당시였습니다. 한국에서 온 부유한(?) 투자자로 가장해 2008년 분양된 한 고급 콘도에 투자 상담을 요청해봤습니다. 도대체 한인 투자자들이 어떻게 부동산을 거래하는지, 좀 더 내밀하게 들여다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상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한국인이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았는데도, 영어 액센트(?)를 듣고 바로 한국인 투자 상담사를 배정해줬습니다. 그리고는 390만 달러부터 천만 달러까지, 초호화 콘도들로 안내했습니다.


<사진 2. 한인 천지가 된 하와이 고급 콘도촌>

그런데 상담사에게 “이곳에 한인들이 많냐, 한인들이 매입하기에 특별히 좋은 점이 뭐냐“ 질문을 던진 순간,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한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프라이버시’라며, 원한다면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담 변호사와 회계사를 정해 회사설립 절차를 대행해줄테니 회사 이름만 정하라는 거였죠. 이렇게 페이퍼컴퍼니로 콘도를 사들인 한인 투자자들이 ”많다“는 부연 설명도 뒤따랐습니다. 하와이에 일본인이 많이 살고, 일본에서는 해외송금 절차가 까다롭지 않기 때문에 일본에 회사를 세우는 경우도 많고, 또 홍콩이나 조세회피처에 회사를 세운 경우도 많다는 겁니다. 송금도 한국에서 직접 하기보다는 해외를 거쳐서 하는 게 안전하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습니다. 취재팀은 상담사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 콘도의 보유자 현황을 한번 분석해봤습니다. 전체 424채 가운데 페이퍼컴퍼니로 소유주 이름을 가려놓은 콘도는 198채나 됐습니다. 인근의 다른 유명 콘도 역시, 총 248채 가운데 절반이 넘는 128채가 법인 소유로 확인됐습니다.


<사진 3.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이 페이퍼컴퍼니로 사들인 부동산 서류>

탐사팀이 찾아낸 재벌과 부호 일가 부동산 거래 272건 가운데도 106건이 페이퍼컴퍼니로 사들인 부동산이었습니다. 회사 이름도 각양각색입니다. 빙그레 김호연 회장 일가가 세운 페이퍼컴퍼니의 이름은 ‘클리어워터(Clearwater: 맑은 물)’, ‘에버그린(Evergreen: 늘푸른)’ 등입니다. 왠지 제과업체의 작명 느낌이 납니다. 대한항공 조중건 전 부회장은 조카의 미국 이름, 재스퍼(Jasper)를 따와서 회사를 세웠습니다. 애경 장영신 회장은 유명 투자 자문사인 메릴린치에서 뽑아준 페이퍼컴퍼니 이름 중에 직접 낙점을 했다는데요. 고른 이름은 ‘해피 갤럭시(Happy Galaxy: 행복한 은하계?)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페이퍼컴퍼니 설립과 관리를 위탁하는 비용은 얼마쯤 들까요? 한 재벌 회장의 경우, 우리 돈 20억 원 정도 되는 부동산을 매입할 때 투자자문회사를 통해 페이퍼컴퍼니를 세웠는데요. 일체의 절차를 대행해주는 대가로 10억 원 정도를 금융자산 운용상품에 추가 위탁하고, 매년 천만 원 정도를 관리비로 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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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14-10-07 17:27:56
    사회

KBS 탐사보도팀의 해외 부동산 취재 상당 부분은 서류상 회사, 이른바 페이퍼컴퍼니와의 전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요 재벌과 부호 일가의 부동산 거래 내역을 검색하다보니, 고구마 줄기처럼 따라 나오는 것들이 바로 ‘페이퍼컴퍼니’였습니다. 페이퍼컴퍼니 이름으로 돼있는 부동산의 실소유주를 확인하려면 법인등기를 확인하고, 매니저로 등록된 사람의 신원을 다시 추적하는 등 겹겹의 취재가 필요합니다. 그나마 허술하게 자신의 회사 직원을 페이퍼컴퍼니 매니저로 앉힌다든가, 페이퍼컴퍼니 주소가 실소유주의 주소와 관련이 있다든가 하는 단서가 남아있는 경우에는 추적이라도 가능합니다. 조세회피처로 회사 주소가 넘어가버려 속수무책, 손을 놓아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사진1. 한국인 투자자로 가장해 고급 콘도 투자 상담을 받는 취재팀>

그런데 탐사팀은 취재 과정에 이 같은 ‘페이퍼컴퍼니’ 거래의 실체에 근접할 수 있었습니다. 한인 천지가 된 하와이 도심의 초고층 콘도촌을 취재할 당시였습니다. 한국에서 온 부유한(?) 투자자로 가장해 2008년 분양된 한 고급 콘도에 투자 상담을 요청해봤습니다. 도대체 한인 투자자들이 어떻게 부동산을 거래하는지, 좀 더 내밀하게 들여다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상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한국인이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았는데도, 영어 액센트(?)를 듣고 바로 한국인 투자 상담사를 배정해줬습니다. 그리고는 390만 달러부터 천만 달러까지, 초호화 콘도들로 안내했습니다.


<사진 2. 한인 천지가 된 하와이 고급 콘도촌>

그런데 상담사에게 “이곳에 한인들이 많냐, 한인들이 매입하기에 특별히 좋은 점이 뭐냐“ 질문을 던진 순간,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한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프라이버시’라며, 원한다면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담 변호사와 회계사를 정해 회사설립 절차를 대행해줄테니 회사 이름만 정하라는 거였죠. 이렇게 페이퍼컴퍼니로 콘도를 사들인 한인 투자자들이 ”많다“는 부연 설명도 뒤따랐습니다. 하와이에 일본인이 많이 살고, 일본에서는 해외송금 절차가 까다롭지 않기 때문에 일본에 회사를 세우는 경우도 많고, 또 홍콩이나 조세회피처에 회사를 세운 경우도 많다는 겁니다. 송금도 한국에서 직접 하기보다는 해외를 거쳐서 하는 게 안전하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습니다. 취재팀은 상담사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 콘도의 보유자 현황을 한번 분석해봤습니다. 전체 424채 가운데 페이퍼컴퍼니로 소유주 이름을 가려놓은 콘도는 198채나 됐습니다. 인근의 다른 유명 콘도 역시, 총 248채 가운데 절반이 넘는 128채가 법인 소유로 확인됐습니다.


<사진 3.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이 페이퍼컴퍼니로 사들인 부동산 서류>

탐사팀이 찾아낸 재벌과 부호 일가 부동산 거래 272건 가운데도 106건이 페이퍼컴퍼니로 사들인 부동산이었습니다. 회사 이름도 각양각색입니다. 빙그레 김호연 회장 일가가 세운 페이퍼컴퍼니의 이름은 ‘클리어워터(Clearwater: 맑은 물)’, ‘에버그린(Evergreen: 늘푸른)’ 등입니다. 왠지 제과업체의 작명 느낌이 납니다. 대한항공 조중건 전 부회장은 조카의 미국 이름, 재스퍼(Jasper)를 따와서 회사를 세웠습니다. 애경 장영신 회장은 유명 투자 자문사인 메릴린치에서 뽑아준 페이퍼컴퍼니 이름 중에 직접 낙점을 했다는데요. 고른 이름은 ‘해피 갤럭시(Happy Galaxy: 행복한 은하계?)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페이퍼컴퍼니 설립과 관리를 위탁하는 비용은 얼마쯤 들까요? 한 재벌 회장의 경우, 우리 돈 20억 원 정도 되는 부동산을 매입할 때 투자자문회사를 통해 페이퍼컴퍼니를 세웠는데요. 일체의 절차를 대행해주는 대가로 10억 원 정도를 금융자산 운용상품에 추가 위탁하고, 매년 천만 원 정도를 관리비로 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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