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를 감싸던 빛이 하나 둘 스러지고 옛것은 새것에 밀려납니다.
<인터뷰>안세권(사진작가) : "하나의 침묵의 공간이 된 거죠. 그러니까 일상이 멈춰버린."
작가는 허물어지는 콘크리트 속에 사람들의 추억까지 묻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인터뷰>안세권 : "제가 뉴타운이라든지 청계천이라든지 그런 장소를 보면서, 이게 너무 서울에서 집단적으로 사라지고 그래서, 이런 거를 기록을 해놔야 되겠다."
도시의 기억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대체됩니다.
거대자본은 전국 어느 거리나 개성없이 똑같은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밀려드는 상업화에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앵커 멘트>
도시가 빠른 속도로 변하는 만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추억도 빨리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는 동네가 변해가는 모습을 꼼꼼히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동네만의 가치에 새롭게 눈뜨게 해주는 '동네 소식지 만드는 사람들'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경복궁 서쪽 마을 서촌.
효자동, 옥인동 등 조선시대 중인 계급이 주로 모여 살았고 근대 이후 문인, 화가 등 예술인들이 많이 거주해온 곳입니다.
이곳에 사는 젊은 직장인들이 지난 3월부터 동네 소식지 '서촌 라이프'를 발행해오다 현재 '시옷'이라는 이름으로 재창간을 준비중입니다.
<인터뷰>최용훈(서촌 소식지 '시옷' 편집장) : "예전의 인사동과 예전의 삼청동이 상업화된 동네의 전형적인 예로 (서촌도) 점점 변해가고 있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정체성이 전혀 없어지는 쪽으로 변해간다든지 이런 것들을 많이 봐오다보니까.."
서촌의 명물 통인시장에 '시옷' 취재진이 나섰습니다.
통인시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기름 떡볶이 할머니를 찾았습니다.
<녹취> "(이거 방앗간에서 뽑아오시는 거예요 아침에?) 응 아침에 떡을 빼오는 거예요. 이거 하나씩 드릴게 잡숴봐~"
마을이 간직한 옛 이야기들, 대형 마트에서는 들을 수 없는 재미있는 기삿거리가 술술 나옵니다.
<녹취>정월선(통인시장 상인) : "할머니들이 여기 몇군데서 이렇게 연탄불에서 둥그런 프라이팬 하나 놓고 볶아가지고 10원에 4개, 이렇게 세서 팔았어. 그런 할머니들이 원조야."
무엇보다 큰 자랑거리는 수십년 째 이 자리를 지켜온 넉넉한 인심입니다.
<인터뷰>정월선 : "먹는 집에 와서는 많이 먹고 가는 게 좋은 거지. 안먹고 가봐, 얼마나 속상한데. 먹고 '더 주세요' 그러는 게 진짜 좋은 거예요. 이 시장을 위해서 (소식지) 해주니까 진짜 고맙죠."
동네 곳곳에 산재해있는 문화 유산을 기록에 담는 것도 이들의 중요한 취재 업무입니다.
<인터뷰>윤성웅('시옷' 기획자) : "서촌이 갖고 있는 그 느낌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되게 느린 편이거든요. 상업이 이제 막 밀려온다고들 하더라고요 이쪽으로도. 그런 것을 순간순간 놓치지 않고 담아두자는 게 저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목적이거든요."
서촌 곳곳의 한옥 신축 현장을 둘러보는 일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서촌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겐 소식지의 의미가 남다릅니다.
<인터뷰>황인범(한옥 도편수) : "중앙일간지에 나오는 것보다 이 서촌 지역신문에 나오는 게 나한테 영광이고 더 자랑스럽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동네에서)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들이라 그런 분들한테 인정받고 그런 분들한테 제가 알려진다는 게 훨씬 더 자랑스러웠다는 거죠."
농산물 직거래장터가 열리는 동네 행사에서도 취재는 계속됩니다.
<녹취> "그럼 이거 다 산지에서 나온 거예요?"
시간의 속도가 달리 느껴지는 골목길에서도. 천천히 바라보면 동네 구석구석의 가치는 매번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기록하고 알리면 지역의 값진 것들이 다른 곳처럼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인터뷰>최용훈 : "어렸을 때 소풍 가서 그 보물찾기하는 그런 느낌 있잖아요. 그러니까 동네를 담아가는 과정에서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기도 하고, 동네 곳곳에 숨어있는 보물 같은 것들을 찾아내는 그런 과정들이 굉장히 재미있기도 하고요."
변화를 막을 수는 없지만, 대기업이나 부자들이 상권을 점령하는 여느 지역과는 다르게 변하는 것이 이들의 바람입니다.
한블록 건너 한곳씩 공사라고 할 만큼 개업과 폐업이 수없이 교차하는 홍익대 주변.
거리 소식지 '스트리트H'는 각자의 개성이나 문화적 지향을 갖고 운영하는 동네 상점이나 단체를 알리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장성환 대표가 사재를 털어 소식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인터뷰>장성환('스트리트H' 발행인) :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기도 하고 또 재미있는 곳도 많이 있는데 자꾸 사라지고 없어지고 변해가더라고요. 사람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가 공간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그 공간이 이제 지역을 만드는 거고 지역 색깔을 만드는 건데..."
장 대표가 '스트리트H' 10월호에 담은 이야기는 홍대 거리의 또다른 특색으로 자리잡은 반지하 카페 거리의 등장입니다.
<인터뷰>장성환 : "폐쇄적이었던 공간이, 오히려 음지의 공간이 양지의 공간이 되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한테도 눈요기도 되지만 여러가지 재미있는, 그리고 동네가 훨씬 밝아지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됐어요."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틈바구니에서 젊은 자영업자들의 '동네 생존법'을 재발견하는 겁니다.
거대자본의 범람 속에서 가난한 예술인이나 영세 업소들이 일할 권리를 보장받도록 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스트리트H' 29호가 인쇄돼 나온 지난 20일.
새 소식지를 놓고 동네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9개월 동안 빠짐없이 홍대 문화지도를 만들어온 것도 적잖은 보람으로 쌓여갑니다.
<인터뷰>이기섭(동네 서점 운영) : "새로운 명소들, 그리고 기존에 있는 가게들도 그 가게의 취지들을 다시 재조명해주시고 이런 역할들을 꾸준히 해주시기 때문에, 홍대가 문화적으로 풍부하고 다양하게 되는데 진짜 큰 힘이 됐던 것 같아요."
'이태원 주민일기'에는 이태원에 살고 있는 사진가와 화가 등 젊은 예술가 9명의 작업이 빼곡히 담겼습니다.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출발하니 급변하는 마을의 풍경을 기억하면서 각자의 활동 기반도 지속시킬 수 있게 됐습니다.
<인터뷰>사이이다(사진작가) :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기록해서 이 시간을 잘 남기고 우리에게는 기록이 돼서 남을 수 있는 기억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우리들의 이런 모습들이 또 좋은 환경이 돼서 좀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길을 걷다 눈에 띤 풀 한포기를 그냥 지나치지 못해 시작한 화가의 작업도 같은 뜻입니다.
예쁠 것 없을 듯한 잡초에 집을 마련해주는 젊은 예술가의 동네 사랑입니다.
<인터뷰>나난(화가) : "(작업 이후에) 만날 바쁜 일상에 회사를 가고 지하철을 타고 이러느라 바빴던 사람들도 하늘을 보고 땅을 보게 되고 주변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얘기를 들을 때도 저도 더 작업 열심히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뿌듯합니다."
골목길 구석 사물 하나하나에 쏟는 애정이 경제적인 잣대로는 따질 수 없는 이 동네만의 표정을 만듭니다.
최근들어 새롭게 관심을 끌고 있는 동네 소식지의 주인공은 결국 그 속에 살고 있는 주민 한사람 한사람일 것입니다.
<인터뷰>이택광(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 "그 속에 있는 다양한 스토리들을 전달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고 거기에서 오랫동안 상권을 형성해왔던 그런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런 분들을 단순하게 상인이라든가 장사꾼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이런 문화를 담고 있는 중요한 매개로 볼 필요성이 있죠."
주민들은 동네 잡지가 공공 기관에서는 하지 못하는, 사회의 모세혈관에 피를 돌게 하는 일을 해준다고 말합니다.
많은 이들은 이를 통해 젊은 문화예술인들과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각자의 터전에서 걱정없이 살 수 있는 토양이 닦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인터뷰>장성환('스트리트H' 발행인) : "이 기록이 1, 2년이 아니라 10년이 된다고 한다면 참 많은 의미를 우리가 축적해놓을 수 있겠구나..."
초고속으로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그만큼 빨리 잊혀지는 '스마트' 시대,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주변을 한번 더 돌아보게 하며 조금은 느리고 긴 호흡을 안겨주는 것이 종이 잡지가 전하는 가장 기쁜 소식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