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위안부 쉼터를 내려다 보는가…취재 경쟁의 뒷모습

입력 2020.06.08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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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살고 있다

길원옥 할머니는 1928년에 태어나 13살 무렵에 일본군 위안부로 중국에 끌려갑니다. 해방 뒤 귀국한 할머니는 평범하고도,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내다 1998년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인권운동가로서 수요집회에 열정적으로 참여해왔습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위안부 피해자 쉼터 '우리집'을 마련한 2003년부터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지내기 시작해, 쉼터가 현재 위치로 옮긴 뒤에도 여전히 이곳에서 살고 계십니다.

지난해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수요집회에 참석한 인권운동가 길원옥 할머니. [출처: 연합뉴스]지난해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수요집회에 참석한 인권운동가 길원옥 할머니. [출처: 연합뉴스]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의원이 기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지난달부터 상당수의 기자와 취재진이 할머니가 사는 '평화의 우리집'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넓지 않은 주택가 골목길에 면한 쉼터 주변에는 수시로 취재진이 찾아와 카메라를 비췄고, 일부는 쉼터 초인종을 눌러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올해 만으로 92살인 길원옥 할머니는 현재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익명을 요청한 정의기억연대 관계자는 "취재진의 카메라가 할머니 눈에 보일까 봐 커튼을 항상 닫고 지내고 있으며, 수시로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할머니께서 놀라실까 24시간 긴장 상태로 지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KBS를 포함한 방송사 취재진이 촬영한 ‘평화의 우리집’ 모습KBS를 포함한 방송사 취재진이 촬영한 ‘평화의 우리집’ 모습

할머니의 쉼터를 내려다보는 카메라

쉼터 소장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진 어제(7일)는 어느 때보다 많은 취재진이 마포 쉼터에 나타났습니다. 정의연 관계자는 "방송사와 신문사는 물론, 개인 유튜버들까지 몰려들어 골목이 가득 찰 정도였고, 카메라만 해도 수십 대는 돼 보였다."면서 "여러 차례 촬영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윤미향 의원이 쉼터를 방문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순간부터는 그 모습을 촬영하려는 취재진이 쉼터 맞은편 건물 옥상에 올라가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어제 언론에 전해진 윤미향 의원의 모습은 이렇게 촬영된 장면입니다.

정의기억연대 이나영 이사장이 옥상의 취재진에게 촬영 자제를 요청하고 있는 모습정의기억연대 이나영 이사장이 옥상의 취재진에게 촬영 자제를 요청하고 있는 모습

쉼터 소장의 부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문밖을 나와 취재진 앞에선 정의기억연대 이나영 이사장은 건너편 옥상의 취재진을 가리키며 "파파라치처럼 그렇게 위에서 찍고, 사람 들락날락하는 것 찍고, 그렇게 구멍으로 사진 안 찍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먼저 꺼냈습니다. 이나영 이사장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옥상에서 내려보고, 문살 틈으로 들여다보는 그 순간에도 쉼터 안에는 길원옥 할머님이 계셨습니다. 수십 명은 족히 넘었을 취재진의 말소리와 카메라 셔터는 물론, 윤미향 의원의 사퇴를 요구하며 쉼터 앞에서 시위하는 이들의 구호 소리도 아마 담을 넘었을 것입니다.

윤미향을 찍어라…KBS도 동참했던 취재 경쟁

쉼터 앞 취재 경쟁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현장에 있었던 KBS 취재진은 "윤미향 의원이 마당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위에서 찍은 한 매체의 사진 기사가 게재된 뒤 너도나도 맞은편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평소처럼 KBS를 포함한 방송사 5곳이 위치를 나눠 촬영된 화면을 공유하는 이른바 '공동 취재'를 진행했다고 했습니다. 이나영 이사장의 요청이 있기 전에도 쉼터 관계자들이 몇 차례 촬영자제를 요청했지만, 현장 취재진 중 누구도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서로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타사의 사진기사가 먼저 나간 상황에서 주요 취재원인 윤미향 의원의 모습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촬영을 중단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서 현장 취재진 대부분이 비슷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정의연의 문제 제기를 뒤늦게 접한 KBS 통합 뉴스룸은 어제 옥상 등에서 촬영된 쉼터 화면을 더 이상 방송에 활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정의연 측은 쉼터 소장의 장례 절차가 시작된 오늘(8일)은 쉼터 앞에 취재진이 없다고 전했습니다. 취재진은 현재 장례식에 몰려가 있습니다. 정의연은 장례 절차 전부를 취재진에게 공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정의연 관계자가 익명인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쉼터 소장님의 마지막 길은 취재 경쟁 없이 조용히 진행될 수 있을까요? 정의연 관계자는 한가지 당부를 전했습니다. 어제 쉼터를 방문했던 소장님의 유가족이 주차해뒀던 차에서 전화번호를 알아낸 기자들이 쉴 새 없이 전화하고 있다며 유족이 전화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자제해달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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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위안부 쉼터를 내려다 보는가…취재 경쟁의 뒷모습
    • 입력 2020-06-08 17:01:49
    취재K
여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살고 있다

길원옥 할머니는 1928년에 태어나 13살 무렵에 일본군 위안부로 중국에 끌려갑니다. 해방 뒤 귀국한 할머니는 평범하고도,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내다 1998년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인권운동가로서 수요집회에 열정적으로 참여해왔습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위안부 피해자 쉼터 '우리집'을 마련한 2003년부터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지내기 시작해, 쉼터가 현재 위치로 옮긴 뒤에도 여전히 이곳에서 살고 계십니다.

지난해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수요집회에 참석한 인권운동가 길원옥 할머니. [출처: 연합뉴스]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의원이 기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지난달부터 상당수의 기자와 취재진이 할머니가 사는 '평화의 우리집'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넓지 않은 주택가 골목길에 면한 쉼터 주변에는 수시로 취재진이 찾아와 카메라를 비췄고, 일부는 쉼터 초인종을 눌러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올해 만으로 92살인 길원옥 할머니는 현재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익명을 요청한 정의기억연대 관계자는 "취재진의 카메라가 할머니 눈에 보일까 봐 커튼을 항상 닫고 지내고 있으며, 수시로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할머니께서 놀라실까 24시간 긴장 상태로 지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KBS를 포함한 방송사 취재진이 촬영한 ‘평화의 우리집’ 모습
할머니의 쉼터를 내려다보는 카메라

쉼터 소장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진 어제(7일)는 어느 때보다 많은 취재진이 마포 쉼터에 나타났습니다. 정의연 관계자는 "방송사와 신문사는 물론, 개인 유튜버들까지 몰려들어 골목이 가득 찰 정도였고, 카메라만 해도 수십 대는 돼 보였다."면서 "여러 차례 촬영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윤미향 의원이 쉼터를 방문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순간부터는 그 모습을 촬영하려는 취재진이 쉼터 맞은편 건물 옥상에 올라가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어제 언론에 전해진 윤미향 의원의 모습은 이렇게 촬영된 장면입니다.

정의기억연대 이나영 이사장이 옥상의 취재진에게 촬영 자제를 요청하고 있는 모습
쉼터 소장의 부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문밖을 나와 취재진 앞에선 정의기억연대 이나영 이사장은 건너편 옥상의 취재진을 가리키며 "파파라치처럼 그렇게 위에서 찍고, 사람 들락날락하는 것 찍고, 그렇게 구멍으로 사진 안 찍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먼저 꺼냈습니다. 이나영 이사장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옥상에서 내려보고, 문살 틈으로 들여다보는 그 순간에도 쉼터 안에는 길원옥 할머님이 계셨습니다. 수십 명은 족히 넘었을 취재진의 말소리와 카메라 셔터는 물론, 윤미향 의원의 사퇴를 요구하며 쉼터 앞에서 시위하는 이들의 구호 소리도 아마 담을 넘었을 것입니다.

윤미향을 찍어라…KBS도 동참했던 취재 경쟁

쉼터 앞 취재 경쟁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현장에 있었던 KBS 취재진은 "윤미향 의원이 마당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위에서 찍은 한 매체의 사진 기사가 게재된 뒤 너도나도 맞은편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평소처럼 KBS를 포함한 방송사 5곳이 위치를 나눠 촬영된 화면을 공유하는 이른바 '공동 취재'를 진행했다고 했습니다. 이나영 이사장의 요청이 있기 전에도 쉼터 관계자들이 몇 차례 촬영자제를 요청했지만, 현장 취재진 중 누구도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서로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타사의 사진기사가 먼저 나간 상황에서 주요 취재원인 윤미향 의원의 모습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촬영을 중단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서 현장 취재진 대부분이 비슷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정의연의 문제 제기를 뒤늦게 접한 KBS 통합 뉴스룸은 어제 옥상 등에서 촬영된 쉼터 화면을 더 이상 방송에 활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정의연 측은 쉼터 소장의 장례 절차가 시작된 오늘(8일)은 쉼터 앞에 취재진이 없다고 전했습니다. 취재진은 현재 장례식에 몰려가 있습니다. 정의연은 장례 절차 전부를 취재진에게 공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정의연 관계자가 익명인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쉼터 소장님의 마지막 길은 취재 경쟁 없이 조용히 진행될 수 있을까요? 정의연 관계자는 한가지 당부를 전했습니다. 어제 쉼터를 방문했던 소장님의 유가족이 주차해뒀던 차에서 전화번호를 알아낸 기자들이 쉴 새 없이 전화하고 있다며 유족이 전화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자제해달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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