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속 또 하나의 전쟁…가자지구 ‘끼니 전쟁’ [지금 중동은]

입력 2025.01.06 (06:00) 수정 2025.01.06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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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급식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칸유니스 2025년 1월 2일무료 급식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칸유니스 2025년 1월 2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전쟁 속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국제구호단체 트럭의 가자 지구 출입을 통제하면서 ‘끼니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가자지구에 사는 피난민들은 배고픔을 등에 업고 살아갑니다. 무료 배급을 위해 대여섯 시간 줄서기는 다반사입니다.

피난길에 간신히 챙겨 나온 냄비, 프라이팬, 통조림 깡통, 세숫대야로 쓰였을 법한 플라스틱 용기를 든 손을 간절히 뻗어 보지만, 구호 음식을 담은 솥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냅니다.

배곯는 자식들이 씹어 넘길 수 있는 무엇이라도 얻어가고 싶었던 엄마는 절규하고, 어린 누이 손을 잡고 배급줄에 서 있던 사내아이는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합니다.

무료 급식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칸유니스 2025년 1월 2일무료 급식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칸유니스 2025년 1월 2일

“배를 곯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애들이 열 명이에요. 무료 급식소가 열릴 때는 아이들을 먹일 수 있지만 이마저도 열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잠에 드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밀가루가 있다면 무료 급식소에 올 필요가 없는데... 어서 국경이 열려서 구호품이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 파와즈 살레, 가자 주민-

“밀가루, 설탕, 담요, 매트리스 같은 생필품이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물건이 비싸서, 춥고 배고파도 참고 견디는 것 외에 방법이 없어요.
음식을 구하려고 새벽부터 나와서 여섯 시간째 줄을 서고 있는데, 오늘 음식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전쟁이 끝나서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 타만 사난(62세), 가자 주민-

국제구호단체들은 이스라엘군이 구호물자 전달을 방해해, 가자지구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당국은 구호 트럭 수천 대의 가자지구 출입을 허용했다고 반박했습니다.

■ "어린이 3,500명 영양실조로 사망 위험"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운영하는 중앙통계국은 2024년 말 기준, 가자지구에서 약 3,500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와 식량 부족으로 인한 사망 위험에 처해 있다고 지난 2일 밝혔습니다.

가자지구 인구 약 22%는 심각한 식량 불안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영양 실조 진단 받은 미스크,  2025년 지난 1월 1일 가자지구 데이르 알발라영양 실조 진단 받은 미스크, 2025년 지난 1월 1일 가자지구 데이르 알발라

“하루는 아이가 심하게 열이 났었어요, 해열제를 구해 열만 겨우 내렸는데 아이가 계속 시름시름 앓았어요. 그런데 어미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전쟁 이후 남편이 일자리를 잃으며 제대로 먹이지 못했는데...아이가 아픈 게 다 피난 생활 때문인 것 같아 너무 슬픕니다”
- 영양실조를 겪고 있는 미스크의 엄마-

가자전쟁 이후 중부 지역 데이르 알발라 근처 난민 캠프에서 살고 있는 미스크는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미스크의 다리는 어른 손가락 두마디 굵기에 불과합니다.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와 초점 없이 움푹 꺼진 눈이 전쟁의 잔혹함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앞서 유엔 인도지원조정실은 2024년 8월 말까지 가자지구에서 15,000명 이상의 어린이가 영양실조를 겪고 있으며, 이 중 2,288명은 ‘심각한 급성 영양실조’ 상태라고 전했습니다.

급성 영양실조는 일반 영양실조보다 영양 결핍이 심각한 상태로, 제때 영양 공급을 비롯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사망에 이를 위험이 높습니다.

가자지구의 굶주림 문제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인데, 이달 말부터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UNRWA 구호 활동, 2024년 11월 4일 가자지구 데이르 알발라UNRWA 구호 활동, 2024년 11월 4일 가자지구 데이르 알발라

■이스라엘 의회,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 활동 금지법 시행

지난해 10월 28일 이스라엘 의회가 자국 내 UNRWA(UN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 활동을 사실상 금지하는 내용의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UNRWA 직원 가운데 12명이 하마스 대원 신분으로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UNRWA(UN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는 이스라엘이 지목한 직원 12명 가운데 9명을 해고했지만, 법 시행까지 90일의 유예기간이 설정됐을 뿐입니다.

1949년 팔레스타인 난민 지원을 위해 설립된 UNRWA는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삶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가자지구에서는 구호 활동을 위해 고용한 인력이 13,000명에 달할 정도로 전방위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폭격 당한 UNRWA 학교, 2024년 7월 15일 가자지구 누세이라트폭격 당한 UNRWA 학교, 2024년 7월 15일 가자지구 누세이라트

UNRWA는 소득이 하루 미화 1달러 50센트 이하인 극빈층을 선별해 우선적으로 식량을 제공했고, 무료 또는 저비용 의료 서비스를 지원했습니다. 또 공교육 부재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UNRWA는 가자지구 주민 210만 명 중 약 120만 명, 전체 인구의 60%가량의 식량 구호를 책임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가자지구 사람들 절반 이상이 UNRWA가 분기별로 배급하는 밀가루, 쌀 등 주식이 되는 곡물과 콩류, 설탕, 식용유 등이 포함된 식량 키트로 연명해 온 셈입니다.

그러나 이달 말, 법 시행 유예 기간이 만료되면 UNRWA가 더 이상 가자에서 구호 활동을 펼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UNRWA도 활동 중단을 준비하고 있다고 지난 3일 밝혔습니다.

■ UNRWA 금지법 "집단 처벌의 한 형태"

구호단체의 활동 중단은 가자지구 주민에게는 어쩌면 전쟁보다 더한 재난입니다.

UNRWA의 활동이 중단되면 가자지구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인도주의 위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어떤 다른 구호단체도 UNRWA의 빈자리를 메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필립 라자리니 UNRWA집행위원장도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엔 기관들은 이스라엘의 결정이 시행되면 더 많은 어린이가 사망할 수 있으며, 가자지구 주민들에 대한 집단 처벌의 한 형태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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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 속 또 하나의 전쟁…가자지구 ‘끼니 전쟁’ [지금 중동은]
    • 입력 2025-01-06 06:00:05
    • 수정2025-01-06 06:04:16
    국제
무료 급식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칸유니스 2025년 1월 2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전쟁 속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국제구호단체 트럭의 가자 지구 출입을 통제하면서 ‘끼니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가자지구에 사는 피난민들은 배고픔을 등에 업고 살아갑니다. 무료 배급을 위해 대여섯 시간 줄서기는 다반사입니다.

피난길에 간신히 챙겨 나온 냄비, 프라이팬, 통조림 깡통, 세숫대야로 쓰였을 법한 플라스틱 용기를 든 손을 간절히 뻗어 보지만, 구호 음식을 담은 솥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냅니다.

배곯는 자식들이 씹어 넘길 수 있는 무엇이라도 얻어가고 싶었던 엄마는 절규하고, 어린 누이 손을 잡고 배급줄에 서 있던 사내아이는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합니다.

무료 급식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칸유니스 2025년 1월 2일
“배를 곯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애들이 열 명이에요. 무료 급식소가 열릴 때는 아이들을 먹일 수 있지만 이마저도 열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잠에 드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밀가루가 있다면 무료 급식소에 올 필요가 없는데... 어서 국경이 열려서 구호품이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 파와즈 살레, 가자 주민-

“밀가루, 설탕, 담요, 매트리스 같은 생필품이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물건이 비싸서, 춥고 배고파도 참고 견디는 것 외에 방법이 없어요.
음식을 구하려고 새벽부터 나와서 여섯 시간째 줄을 서고 있는데, 오늘 음식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전쟁이 끝나서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 타만 사난(62세), 가자 주민-

국제구호단체들은 이스라엘군이 구호물자 전달을 방해해, 가자지구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당국은 구호 트럭 수천 대의 가자지구 출입을 허용했다고 반박했습니다.

■ "어린이 3,500명 영양실조로 사망 위험"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운영하는 중앙통계국은 2024년 말 기준, 가자지구에서 약 3,500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와 식량 부족으로 인한 사망 위험에 처해 있다고 지난 2일 밝혔습니다.

가자지구 인구 약 22%는 심각한 식량 불안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영양 실조 진단 받은 미스크,  2025년 지난 1월 1일 가자지구 데이르 알발라
“하루는 아이가 심하게 열이 났었어요, 해열제를 구해 열만 겨우 내렸는데 아이가 계속 시름시름 앓았어요. 그런데 어미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전쟁 이후 남편이 일자리를 잃으며 제대로 먹이지 못했는데...아이가 아픈 게 다 피난 생활 때문인 것 같아 너무 슬픕니다”
- 영양실조를 겪고 있는 미스크의 엄마-

가자전쟁 이후 중부 지역 데이르 알발라 근처 난민 캠프에서 살고 있는 미스크는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미스크의 다리는 어른 손가락 두마디 굵기에 불과합니다.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와 초점 없이 움푹 꺼진 눈이 전쟁의 잔혹함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앞서 유엔 인도지원조정실은 2024년 8월 말까지 가자지구에서 15,000명 이상의 어린이가 영양실조를 겪고 있으며, 이 중 2,288명은 ‘심각한 급성 영양실조’ 상태라고 전했습니다.

급성 영양실조는 일반 영양실조보다 영양 결핍이 심각한 상태로, 제때 영양 공급을 비롯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사망에 이를 위험이 높습니다.

가자지구의 굶주림 문제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인데, 이달 말부터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UNRWA 구호 활동, 2024년 11월 4일 가자지구 데이르 알발라
■이스라엘 의회,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 활동 금지법 시행

지난해 10월 28일 이스라엘 의회가 자국 내 UNRWA(UN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 활동을 사실상 금지하는 내용의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UNRWA 직원 가운데 12명이 하마스 대원 신분으로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UNRWA(UN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는 이스라엘이 지목한 직원 12명 가운데 9명을 해고했지만, 법 시행까지 90일의 유예기간이 설정됐을 뿐입니다.

1949년 팔레스타인 난민 지원을 위해 설립된 UNRWA는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삶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가자지구에서는 구호 활동을 위해 고용한 인력이 13,000명에 달할 정도로 전방위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폭격 당한 UNRWA 학교, 2024년 7월 15일 가자지구 누세이라트
UNRWA는 소득이 하루 미화 1달러 50센트 이하인 극빈층을 선별해 우선적으로 식량을 제공했고, 무료 또는 저비용 의료 서비스를 지원했습니다. 또 공교육 부재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UNRWA는 가자지구 주민 210만 명 중 약 120만 명, 전체 인구의 60%가량의 식량 구호를 책임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가자지구 사람들 절반 이상이 UNRWA가 분기별로 배급하는 밀가루, 쌀 등 주식이 되는 곡물과 콩류, 설탕, 식용유 등이 포함된 식량 키트로 연명해 온 셈입니다.

그러나 이달 말, 법 시행 유예 기간이 만료되면 UNRWA가 더 이상 가자에서 구호 활동을 펼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UNRWA도 활동 중단을 준비하고 있다고 지난 3일 밝혔습니다.

■ UNRWA 금지법 "집단 처벌의 한 형태"

구호단체의 활동 중단은 가자지구 주민에게는 어쩌면 전쟁보다 더한 재난입니다.

UNRWA의 활동이 중단되면 가자지구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인도주의 위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어떤 다른 구호단체도 UNRWA의 빈자리를 메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필립 라자리니 UNRWA집행위원장도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엔 기관들은 이스라엘의 결정이 시행되면 더 많은 어린이가 사망할 수 있으며, 가자지구 주민들에 대한 집단 처벌의 한 형태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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