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래핑의 창시자 박경훈 ②

입력 2006.08.22 (15:55) 수정 2006.08.22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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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청구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포철에 입단하기로 되어있었죠.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 약속을 어기셨습니다. 아무래도 아들이 대학교를 졸업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던 거죠. 청구고 주축이던 선수 중에 변병주는 연세대를, 백종철은 경희대에 진학하고 백치수와 저를 비롯한 4명의 선수가 한양대에 진학했습니다.”


한양대에 입학한 박경훈은 그 해 겨울, 윙백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대표팀에 발탁된다. 그의 나이 스무살. 축구를 시작한지 겨우 3년이 지난 해였다.


“12월 22일에 국가대표에 선발되고 이듬해 6월, 대통령배(코리아컵)서부터 뛰기 시작했어요. 제자리에서는 최종덕 선배랑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첫 경기를 상당히 못 뛰어서 다음 경기에는 못나가겠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다시 기용을 해주시더라구요. 그 때 저를 믿고 기용해주신 김정남 감독님과 김호곤 코치님께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그의 영원한 파트너인 변병주와 함께 소집되어 오른쪽 사이드를 접수한 박경훈. 향후 10년간 부동의 오른쪽 윙과 윙백으로 활약할 이 두 젊은이는 대통령배 활약을 말미암아 새로운 대표팀의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성공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근3년여 만에 국가대표가 될 정도로 고속 성장을 거듭한 박경훈의 이면에도 피나는 땀과 눈물이 감춰져있었다.


“겨울에 휴가를 받아서 집에 오면 늘 20kg짜리 납조끼를 입고 다녔어요. 연습을 할 때 입는건 물론이고 심지어 친구를 만날 때도 늘 두꺼운 파카 안에 납조끼를 입고 다녔죠. 하루 종일 입다가 잘 때만 벗고.


그리고 쉬는 날에는 항상 조기축구회에 나가서 동네 아저씨들과 공을 찼습니다. 제가 동부 이촌동에 살았었는데 신용산 고등학교에 나가서 눈 오는 날에는 눈치우고 축구 할 정도로 빠지지 않고 공을 찼었죠. 아무래도 아저씨들은 선수들이 아니다 보니까 항상 경기를 뛰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연습을 했어요. 이번에는 몇 명을 제쳐야겠다던가 이번에는 한 사람을 제치고 어디에 패스를 넣어줘야겠다. 혹은 오늘은 한 번도 쉬지 않고 뛰어야겠다. 이런 식으로 목표를 정해놓고 연습을 했었죠.



공을 차러 나오시는 분 중에 수영장을 운영하시는 분이 계셨어요. 제가 축구 선수고 조기회 아저씨들과 친하게 유대관계를 맺다 보니까 언제든지 와서 사우나나 수영장을 이용하라고 배려를 많이 해주셨지요. 근데 어느 날은 그 사우나에 갔다가 걸어놨던 납조끼를 떨어뜨린 거예요. 다른 분들은 그냥 조끼인줄 알았는데 그게 떨어지면서 쿵 소리를 내니까 놀라서 물어보시더라구요. 너 여태껏 그거 입고했냐고. 근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달리냐고.”


K리그의 전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납조끼. 아무래도 성공한 선수들의 키워드는 납조끼가 아닐까. 축구선수에게 있어서의 납조끼의 의미란 한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즐겨야 함은 물론이고 평일이나 휴일에나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뒷받침 되어야 함을 말해주는 것 같다.

한양대학교를 졸업한 박경훈은 1984년, 오랜 동료인 백치수와 함께 포항제철에 입단한다. 아마추어 자격으로 원년 수퍼리그에 참여했던 포철은 1985년 시즌부터 프로구단으로의 전환을 선언. 본격적으로 수퍼리그에 뛰어들었고 비록 팀은 1984년에는 중위권 성적인 5위에 머물렀지만 박경훈은 21경기에 출전하여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K리그 베스트일레븐 수비부문에 이름을 올리는 등 안정적인 활약으로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두 번째 시즌인 1985년. 소속팀과 대표팀을 바쁘게 오가던 박경훈은 장티푸스에 걸려 한동안을 신음해야 했다.


“우리 때만 해도 잘 먹지 못했을 때인데다가 대표팀과 소속팀을 오가면서 힘든 훈련으로 피곤이 누적되다 보니까 질병이 찾아오더라구요.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부터 예요. 병원에서는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했는데 마음 편히 쉴 수가 있어야죠. 내가 이렇게 쉬면 다른 동료들이 내 자리를 차고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병원에서도 운동을 한거에요. 한양대학교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바로 옆에 있는 한양 대학교 운동장에서 환자복입고서는 운동장을 10바퀴씩 뛰고 아령도 들고 그랬어요. 그래서 장티푸스가 재발률이 굉장히 낮은 병인데도 불구하고 퇴원하자마자 5일 만에 다시 재발해서 입원하게 되었죠.”


그렇게 어렵게 85 시즌을 넘긴 박경훈. 그에게 1985년은 고난의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그러나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박경훈에게 있어 여러모로 뜻 깊은 의미를 다가올 1986년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1986멕시코월드컵. 32년만의 본선진출이라는 감격의 순간에 주인공으로 함께 했던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86서울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하게 된다. 중국, 이란, 인도네시아 등을 차례로 돌려세운 한국은 결승에 올라 조광래, 변병주의 연속 골에 힘입어 사우디에 2-0 승리. 8년 만의 우승을 맛보게 된다. 그 때의 우승 이후 단 한 번도 아시안게임 결승에 올라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당시 한국 축구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었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두 개의 국제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박경훈은 곧바로 K리그에 참가해 소속팀의 선전에 1등 공신 역할을 한다. 전기리그 우승팀인 포항제철과 후기리그 우승팀인 럭키금성이 동대문 운동장에서 맞붙었던 1986년 11월 22일. 포철의 오른쪽 사이드 어태커로 출전한 박경훈의 발에서 결승골이 터진다. 전반 21분, 하프라인부터 공을 치고 올라가던 이흥실이 오른쪽으로 오버래핑해 올라오는 박경훈을 보고 스루패스를 찔러주었고 노마크 찬스를 맞은 박경훈은 김현태 골키퍼가 뛰어 나오는 것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골대로 밀어 넣어 골을 성공시킨다. 챔피언결정전 1차전의 선제골이자 결승골. 그리고 86 챔피언 결정전의 결승골이었다. 다음날 열린 2차전에서는 호샤와 이영진이 한 골씩을 주고받아 1-1 무승부를 기록. 첫 경기를 승리한 포항이 86 축구대제전의 챔피언에 오르게 된다.

다음해인 87년, 31경기에 출장해 팀을 준우승에 올려놓으며 K리그 베스트일레븐 수비부문에 이름을 올린 박경훈은 88년에 다시 한 번 그 진가를 발휘한다. 대표팀과 소속팀을 오가느라 K리그에는 12경기 밖에 출장하지 못했지만 리그 후반 대활약을 인정받아 최우수 선수에 선정 된 것.


“그 때 약간 문제가 있었어요. 그 해에 제가 대표팀에 워낙 많이 나가 있어서 많은 게임을 뛰지 못했었죠. 반면에 이기근 선수는 12골을 넣으면서 득점왕에도 올랐어요. 근데 제가 돌아와서 소속팀에서 뛸 때마다 이기고 좋은 활약을 펼치니까. 그 당시에 제가 알기로는 기자들하고 원로 축구인들이 뽑았다고 알고 있었는데 후배한테 양보를 하고 싶어서 시상식 날 참석을 안했어요.”


다음 날 신문에는 박경훈의 수상 거부 소식을 앞 다퉈 대문짝만하게 다뤘다. 축구 선수 생활을 하면서 한 번 받기 어렵다는 K리그 MVP를 거부할 선수가 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팀 내에서 가장 많은 골을 성공 시킨 이기근에게 MVP를 양보해야 한다는 박경훈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원칙적으로 양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추후에 연맹을 방문해 MVP 트로피를 받아 왔지만 후배를 생각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씨는 축구계 안팎에 두고두고 칭송 받을 일이다.


그리고 1988년에 얽힌 한 가지 황당한 사실. 현재 박경훈 감독의 프로필을 찾아보면 잘못된 경력이 한 가지 기록되어있다. 바로 1988년 박경훈이 럭키금성 소속이었다는 잘못된 프로필. 그는 데뷔 처음부터 은퇴하는 날까지 포철을 벗어나본 적이 없단다. 게다가 88년에는 포철소속으로 MVP까지 받았는데 갑자기 무슨 이적이냐고. 그는 꼭 바로 잡아달라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까지 주전으로 활약한 그는 10년 동안 활약했던 정든 국가대표팀에서 은퇴를 결심하고 소속팀에서 마지막 불꽃을 불태운다. 그리고 1992년. 선수 생활의 마지막 해였던 그 해에 당당히 팀의 세 번째 우승을 이끌고 은퇴를 결심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고 했던가. 32세의 젊은 나이였고 더더구나 늦게 축구를 시작한 그로서는 고작 15년 정도에 불과한 짧은 선수 생활이었지만 그는 미련 없이 포항의 유니폼을 벗었다.

“사실 자존심에 대한 부분이 컸죠. 이회택 감독님이 오시면서 서서히 교체 횟수도 많아지고. 여태까지 한번도 그런 생활을 안 해보다가 그렇게 되니까 이제 이정도 되면 떠나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남들이 봤을 때는 몇 년 더 선수생활을 할 줄 알았고, 저 또한 몸 관리도 잘하고 있었는데 자존심이 많이 상했죠. 그래서 우승을 한 후에 미련 없이 접고 이제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웠습니다.”


독일과 프랑스를 저울질 하던 그는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신념아래 영국으로 진로를 잡는다. 당시 영국은 한국 축구 선수들에게 미개척 분야였다. 몇몇 선수가 문을 두드렸던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에 비해 영국은 축구 선수들에게 생소했던 미지의 분야였기 때문.


“영국을 무작정 갔어요. 공항에 마중 나오는 사람도 없이 그냥 가서 영국의 세미프로에 들어갔죠.”


비록 말도 잘 통하지 않았고 인종도 달랐지만 축구는 만국 공통어라고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축구 없이는 못사는 잉글랜드에 갔으니 그에게 그 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동양인이 유학을 가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것이 현지인과 어울릴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영국에 가서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던 부분이 축구하나 잘하는 걸로 가능했었죠. 워낙 축구를 좋아하다보니까 공원잔디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공을 차고 있어요. 축구하고 있어서 제가 같이 껴달라고 하면 그냥 동양에 자그마한 애가 축구하자고 하니까 들어오라고 하죠. 근데 의외로 축구를 하면 볼을 아주 잘 차잖아요. 그래서 축구 했냐고 물어보면 축구했다고. 월드컵까지 갔다 왔다고 하면 놀래죠.

2005년 올스타전 전야제에 참석한 박경훈. 오른쪽에서 세 번째.



처음에는 다들 그래요. 월드컵 구경 갔다 온 거냐고. 그래서 아니 나 두 번이나 선수로 출전했다고 하면 집으로 막 뛰어가요. 걔네들은 집집마다 월드컵에 관련된 잡지책들이 다 있어요. 그래서 예전 잡지책 가져와서 보면 제 사진이 있거든요. 놀래서는 주위 사람들 다 불러서 얘 월드컵 두 번 나갔던 애라고, 사진 찍자고. 그렇게 축구에 관심이 많은 나라다 보니까 축구 하나로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었죠.”

“하루는 학교를 가려고 지하철을 타고 중심가를 지나가는데 옆에 미국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던 껌을 하나 꺼내서 줬더니 고마우니까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구요. 어디에서 왔느냐, 뭐 하느냐. 그래서 나 한국에서 왔는데 축구선수였다고 말하니까 자기도 클럽을 가지고 있다면서 축구 잘하냐고 물어보더라구요. 그래서 10년 동안 대표 선수를 했다니까 깜짝 놀라는 거예요. 자기네들이 일요일에 축구 시합이 있는데 오지 않겠냐고 묻더군요. 그 친구 집이랑 저희 집이랑 한 시간 정도의 거리였는데 일요일에 저희 집까지 와서 데려가서 게임을 뛰었어요. 쪼그마한 애가 빠르고 잘하니까 그 때부터 경기를 같이 뛰었죠. 근데 그 클럽이 캠브리지 법대생들 모임 축구 클럽이었어요. 제가 우승도 시켜주고 하니까 저를 초대해서 같이 어울리기도 하고 어려운 일 있을 때 도움을 받기도 하고. 축구 하나 덕분에 다방면의 친구를 사귈 수 있었습니다.”


세미프로 팀에서 잉글랜드 FA컵에 출전하는 등 축구라는 무기를 이용하여 성공적인 유학 생활을 하고 있던 박경훈에게 귀가 솔깃할 만한 제안이 날아든다. 전남을 기반으로 새롭게 창단하는 전남 드레곤즈의 수석코치 자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비록 1년 반의 짧은 유학생활을 접기에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새로운 도전은 늘 그를 흥분시켰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박경훈은 초대 사령탑인 정병탁 감독을 도와 전남을 이끌어 간다. 하지만 첫 지도자 생활이었기에 순탄지만은 않았다. 1년 만에 사령탑이 허정무 감독으로 바뀌는 등 어려움을 겪던 그는 전남의 수석코치직을 정리하고 자신의 모교인 청구고 감독으로 부임한다.


명문 청구고를 이끌어가던 박경훈. 청구고 하면 한국 축구를 이끌어갈 차세대 스트라이커 김동현과 박주영의 모교로 유명하지 않은가. 비록 박주영은 그가 부산 아이콘스 코치로 적을 옮긴 후의 선수이긴 하지만 이 두 선수와 박감독의 인연도 각별하다.


“김동현 선수랑은 동계훈련을 같이 했었고 몇 달 있다가 1년 동안 포항제철에서 보내주는 브라질 유학을 갔어요. 대단한 선수였죠. 그 신장에도 재간이 뛰어난 선수였는데. 그 선수 한 명 때문에 승패가 좌지우지 했을 때였으니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개인기량에 더 역점을 두었어야 했는데 너무 체력 위주로 갔던거 같아요.”


“박주영 선수는 그 당시에는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아니었어요. 제가 청구고 감독을 하고 있을 때 박주영은 반야월 초등학교에 있었는데 중학교에 김병익 감독이 좋은 선수가 있는데 박감독님이 어떻게 해주셔야겠다고 말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가서 부모님을 만났더니 주영이 부모님이 박감독님한테 보내고 싶다고 해서 스카우트를 해오게 되었죠. 일단 중학교에 넣었는데 주영이가 고등학교에 왔을 때는 제가 감독이 아니었죠.”


그럼 여기서 한 가지 퀴즈. 과연 박주영이 청구고에 입학했을 때 그를 담당했던 감독은 누구였을까. 놀라지 마시라. 박경훈의 오랜 동료이자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 그렇다. 변병주 감독이 박경훈 감독의 뒤를 이어 청구고 사령탑에 부임한 것이다.


그렇게 변병주에게 바통 터치를 한 박경훈은 부산 아이콘스의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K리그 4위, 아디다스컵 준우승 등을 이끈 그는 2002년, 아테네올림픽을 준비하는 올림픽대표팀의 코치로 전격 합류한다. 그리고 김호곤 감독을 도와 2004아테네 올림픽에서 한국이 8강 진출을 이룩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해 12월. U-16팀을 이끌어갈 사령탑이 발표된다. 2007년 U-17 세계 청소년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만큼 성적에 대한 부담이 큰 이 자리에는 박경훈 전 올림픽 코치가 선임되었다. 그의 도전정신. 그 승부욕만큼은 세월이 지나도 전혀 변하지 않나보다. 그는 한 치의 주저함 없이 감독 자리를 수락한다.


“부담감이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은 재미가 없는 거죠. 자극도 받고 정열적인게 있어야지 재미있고 그런 거죠. 이런 좋은 대회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고 또 조직위원회가 생겨서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그런 부담감이 없다면 거짓말이고, 또 그 부담감을 갖고 해야죠.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솔직히 외국선수들에 비해 떨어져요. 하지만 조직적이나 선수들의 하고자하는 의욕, 정신력 등이 어린선수들에게는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목표를 우승이라고 하죠. 지도자로써 그런 포부와 야망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희망적인 목표를 삼고 최선을 다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1년 넘게 남았으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수업과 병행하느라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 환경 내에서도 최선을 다해봐야죠. 자꾸만 지는 시합을 통해서 많이 배우고 싶어요. 최종 목표 시련을 겪으면서 고통을 받으면서 성장하고 싶어요.”


박경훈.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우승과 영광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1년. 다시 한 번 그는 새로운 역사 창조를 위한 스타트 라인에 서있다. 그의 승부사적 기질을 믿기에 그리고 그가 보여준 엄청난 집중력을 믿기에 우리는 내년에 치러질 대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보는 것이다.


K리그의 전설 7회를 마치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까 한다.
마치 타조와 장재근 중 누가 빠르냐와 같은 어리석은 질문일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궁금하다.


오랜 시간동안 질긴 인연을 이어왔던 변병주와 박경훈.


과연 누가 더 빠를까?

“100미터는 비슷하게 뛰었을 거예요. 200m나 400m는 걔가 더 빨랐죠. 근데 순발력만큼은 안 져요. 순발력은 자신 있습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 K-리그 명예기자 홍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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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버래핑의 창시자 박경훈 ②
    • 입력 2006-08-22 15:55:51
    • 수정2006-08-22 16:09:41
    축구
“원래는 청구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포철에 입단하기로 되어있었죠.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 약속을 어기셨습니다. 아무래도 아들이 대학교를 졸업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던 거죠. 청구고 주축이던 선수 중에 변병주는 연세대를, 백종철은 경희대에 진학하고 백치수와 저를 비롯한 4명의 선수가 한양대에 진학했습니다.” 한양대에 입학한 박경훈은 그 해 겨울, 윙백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대표팀에 발탁된다. 그의 나이 스무살. 축구를 시작한지 겨우 3년이 지난 해였다. “12월 22일에 국가대표에 선발되고 이듬해 6월, 대통령배(코리아컵)서부터 뛰기 시작했어요. 제자리에서는 최종덕 선배랑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첫 경기를 상당히 못 뛰어서 다음 경기에는 못나가겠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다시 기용을 해주시더라구요. 그 때 저를 믿고 기용해주신 김정남 감독님과 김호곤 코치님께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그의 영원한 파트너인 변병주와 함께 소집되어 오른쪽 사이드를 접수한 박경훈. 향후 10년간 부동의 오른쪽 윙과 윙백으로 활약할 이 두 젊은이는 대통령배 활약을 말미암아 새로운 대표팀의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성공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근3년여 만에 국가대표가 될 정도로 고속 성장을 거듭한 박경훈의 이면에도 피나는 땀과 눈물이 감춰져있었다. “겨울에 휴가를 받아서 집에 오면 늘 20kg짜리 납조끼를 입고 다녔어요. 연습을 할 때 입는건 물론이고 심지어 친구를 만날 때도 늘 두꺼운 파카 안에 납조끼를 입고 다녔죠. 하루 종일 입다가 잘 때만 벗고. 그리고 쉬는 날에는 항상 조기축구회에 나가서 동네 아저씨들과 공을 찼습니다. 제가 동부 이촌동에 살았었는데 신용산 고등학교에 나가서 눈 오는 날에는 눈치우고 축구 할 정도로 빠지지 않고 공을 찼었죠. 아무래도 아저씨들은 선수들이 아니다 보니까 항상 경기를 뛰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연습을 했어요. 이번에는 몇 명을 제쳐야겠다던가 이번에는 한 사람을 제치고 어디에 패스를 넣어줘야겠다. 혹은 오늘은 한 번도 쉬지 않고 뛰어야겠다. 이런 식으로 목표를 정해놓고 연습을 했었죠.
공을 차러 나오시는 분 중에 수영장을 운영하시는 분이 계셨어요. 제가 축구 선수고 조기회 아저씨들과 친하게 유대관계를 맺다 보니까 언제든지 와서 사우나나 수영장을 이용하라고 배려를 많이 해주셨지요. 근데 어느 날은 그 사우나에 갔다가 걸어놨던 납조끼를 떨어뜨린 거예요. 다른 분들은 그냥 조끼인줄 알았는데 그게 떨어지면서 쿵 소리를 내니까 놀라서 물어보시더라구요. 너 여태껏 그거 입고했냐고. 근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달리냐고.” K리그의 전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납조끼. 아무래도 성공한 선수들의 키워드는 납조끼가 아닐까. 축구선수에게 있어서의 납조끼의 의미란 한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즐겨야 함은 물론이고 평일이나 휴일에나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뒷받침 되어야 함을 말해주는 것 같다. 한양대학교를 졸업한 박경훈은 1984년, 오랜 동료인 백치수와 함께 포항제철에 입단한다. 아마추어 자격으로 원년 수퍼리그에 참여했던 포철은 1985년 시즌부터 프로구단으로의 전환을 선언. 본격적으로 수퍼리그에 뛰어들었고 비록 팀은 1984년에는 중위권 성적인 5위에 머물렀지만 박경훈은 21경기에 출전하여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K리그 베스트일레븐 수비부문에 이름을 올리는 등 안정적인 활약으로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두 번째 시즌인 1985년. 소속팀과 대표팀을 바쁘게 오가던 박경훈은 장티푸스에 걸려 한동안을 신음해야 했다. “우리 때만 해도 잘 먹지 못했을 때인데다가 대표팀과 소속팀을 오가면서 힘든 훈련으로 피곤이 누적되다 보니까 질병이 찾아오더라구요.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부터 예요. 병원에서는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했는데 마음 편히 쉴 수가 있어야죠. 내가 이렇게 쉬면 다른 동료들이 내 자리를 차고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병원에서도 운동을 한거에요. 한양대학교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바로 옆에 있는 한양 대학교 운동장에서 환자복입고서는 운동장을 10바퀴씩 뛰고 아령도 들고 그랬어요. 그래서 장티푸스가 재발률이 굉장히 낮은 병인데도 불구하고 퇴원하자마자 5일 만에 다시 재발해서 입원하게 되었죠.” 그렇게 어렵게 85 시즌을 넘긴 박경훈. 그에게 1985년은 고난의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그러나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박경훈에게 있어 여러모로 뜻 깊은 의미를 다가올 1986년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1986멕시코월드컵. 32년만의 본선진출이라는 감격의 순간에 주인공으로 함께 했던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86서울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하게 된다. 중국, 이란, 인도네시아 등을 차례로 돌려세운 한국은 결승에 올라 조광래, 변병주의 연속 골에 힘입어 사우디에 2-0 승리. 8년 만의 우승을 맛보게 된다. 그 때의 우승 이후 단 한 번도 아시안게임 결승에 올라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당시 한국 축구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었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두 개의 국제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박경훈은 곧바로 K리그에 참가해 소속팀의 선전에 1등 공신 역할을 한다. 전기리그 우승팀인 포항제철과 후기리그 우승팀인 럭키금성이 동대문 운동장에서 맞붙었던 1986년 11월 22일. 포철의 오른쪽 사이드 어태커로 출전한 박경훈의 발에서 결승골이 터진다. 전반 21분, 하프라인부터 공을 치고 올라가던 이흥실이 오른쪽으로 오버래핑해 올라오는 박경훈을 보고 스루패스를 찔러주었고 노마크 찬스를 맞은 박경훈은 김현태 골키퍼가 뛰어 나오는 것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골대로 밀어 넣어 골을 성공시킨다. 챔피언결정전 1차전의 선제골이자 결승골. 그리고 86 챔피언 결정전의 결승골이었다. 다음날 열린 2차전에서는 호샤와 이영진이 한 골씩을 주고받아 1-1 무승부를 기록. 첫 경기를 승리한 포항이 86 축구대제전의 챔피언에 오르게 된다. 다음해인 87년, 31경기에 출장해 팀을 준우승에 올려놓으며 K리그 베스트일레븐 수비부문에 이름을 올린 박경훈은 88년에 다시 한 번 그 진가를 발휘한다. 대표팀과 소속팀을 오가느라 K리그에는 12경기 밖에 출장하지 못했지만 리그 후반 대활약을 인정받아 최우수 선수에 선정 된 것. “그 때 약간 문제가 있었어요. 그 해에 제가 대표팀에 워낙 많이 나가 있어서 많은 게임을 뛰지 못했었죠. 반면에 이기근 선수는 12골을 넣으면서 득점왕에도 올랐어요. 근데 제가 돌아와서 소속팀에서 뛸 때마다 이기고 좋은 활약을 펼치니까. 그 당시에 제가 알기로는 기자들하고 원로 축구인들이 뽑았다고 알고 있었는데 후배한테 양보를 하고 싶어서 시상식 날 참석을 안했어요.” 다음 날 신문에는 박경훈의 수상 거부 소식을 앞 다퉈 대문짝만하게 다뤘다. 축구 선수 생활을 하면서 한 번 받기 어렵다는 K리그 MVP를 거부할 선수가 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팀 내에서 가장 많은 골을 성공 시킨 이기근에게 MVP를 양보해야 한다는 박경훈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원칙적으로 양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추후에 연맹을 방문해 MVP 트로피를 받아 왔지만 후배를 생각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씨는 축구계 안팎에 두고두고 칭송 받을 일이다. 그리고 1988년에 얽힌 한 가지 황당한 사실. 현재 박경훈 감독의 프로필을 찾아보면 잘못된 경력이 한 가지 기록되어있다. 바로 1988년 박경훈이 럭키금성 소속이었다는 잘못된 프로필. 그는 데뷔 처음부터 은퇴하는 날까지 포철을 벗어나본 적이 없단다. 게다가 88년에는 포철소속으로 MVP까지 받았는데 갑자기 무슨 이적이냐고. 그는 꼭 바로 잡아달라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까지 주전으로 활약한 그는 10년 동안 활약했던 정든 국가대표팀에서 은퇴를 결심하고 소속팀에서 마지막 불꽃을 불태운다. 그리고 1992년. 선수 생활의 마지막 해였던 그 해에 당당히 팀의 세 번째 우승을 이끌고 은퇴를 결심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고 했던가. 32세의 젊은 나이였고 더더구나 늦게 축구를 시작한 그로서는 고작 15년 정도에 불과한 짧은 선수 생활이었지만 그는 미련 없이 포항의 유니폼을 벗었다. “사실 자존심에 대한 부분이 컸죠. 이회택 감독님이 오시면서 서서히 교체 횟수도 많아지고. 여태까지 한번도 그런 생활을 안 해보다가 그렇게 되니까 이제 이정도 되면 떠나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남들이 봤을 때는 몇 년 더 선수생활을 할 줄 알았고, 저 또한 몸 관리도 잘하고 있었는데 자존심이 많이 상했죠. 그래서 우승을 한 후에 미련 없이 접고 이제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웠습니다.” 독일과 프랑스를 저울질 하던 그는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신념아래 영국으로 진로를 잡는다. 당시 영국은 한국 축구 선수들에게 미개척 분야였다. 몇몇 선수가 문을 두드렸던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에 비해 영국은 축구 선수들에게 생소했던 미지의 분야였기 때문. “영국을 무작정 갔어요. 공항에 마중 나오는 사람도 없이 그냥 가서 영국의 세미프로에 들어갔죠.” 비록 말도 잘 통하지 않았고 인종도 달랐지만 축구는 만국 공통어라고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축구 없이는 못사는 잉글랜드에 갔으니 그에게 그 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동양인이 유학을 가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것이 현지인과 어울릴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영국에 가서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던 부분이 축구하나 잘하는 걸로 가능했었죠. 워낙 축구를 좋아하다보니까 공원잔디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공을 차고 있어요. 축구하고 있어서 제가 같이 껴달라고 하면 그냥 동양에 자그마한 애가 축구하자고 하니까 들어오라고 하죠. 근데 의외로 축구를 하면 볼을 아주 잘 차잖아요. 그래서 축구 했냐고 물어보면 축구했다고. 월드컵까지 갔다 왔다고 하면 놀래죠.
2005년 올스타전 전야제에 참석한 박경훈. 오른쪽에서 세 번째.
처음에는 다들 그래요. 월드컵 구경 갔다 온 거냐고. 그래서 아니 나 두 번이나 선수로 출전했다고 하면 집으로 막 뛰어가요. 걔네들은 집집마다 월드컵에 관련된 잡지책들이 다 있어요. 그래서 예전 잡지책 가져와서 보면 제 사진이 있거든요. 놀래서는 주위 사람들 다 불러서 얘 월드컵 두 번 나갔던 애라고, 사진 찍자고. 그렇게 축구에 관심이 많은 나라다 보니까 축구 하나로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었죠.” “하루는 학교를 가려고 지하철을 타고 중심가를 지나가는데 옆에 미국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던 껌을 하나 꺼내서 줬더니 고마우니까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구요. 어디에서 왔느냐, 뭐 하느냐. 그래서 나 한국에서 왔는데 축구선수였다고 말하니까 자기도 클럽을 가지고 있다면서 축구 잘하냐고 물어보더라구요. 그래서 10년 동안 대표 선수를 했다니까 깜짝 놀라는 거예요. 자기네들이 일요일에 축구 시합이 있는데 오지 않겠냐고 묻더군요. 그 친구 집이랑 저희 집이랑 한 시간 정도의 거리였는데 일요일에 저희 집까지 와서 데려가서 게임을 뛰었어요. 쪼그마한 애가 빠르고 잘하니까 그 때부터 경기를 같이 뛰었죠. 근데 그 클럽이 캠브리지 법대생들 모임 축구 클럽이었어요. 제가 우승도 시켜주고 하니까 저를 초대해서 같이 어울리기도 하고 어려운 일 있을 때 도움을 받기도 하고. 축구 하나 덕분에 다방면의 친구를 사귈 수 있었습니다.” 세미프로 팀에서 잉글랜드 FA컵에 출전하는 등 축구라는 무기를 이용하여 성공적인 유학 생활을 하고 있던 박경훈에게 귀가 솔깃할 만한 제안이 날아든다. 전남을 기반으로 새롭게 창단하는 전남 드레곤즈의 수석코치 자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비록 1년 반의 짧은 유학생활을 접기에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새로운 도전은 늘 그를 흥분시켰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박경훈은 초대 사령탑인 정병탁 감독을 도와 전남을 이끌어 간다. 하지만 첫 지도자 생활이었기에 순탄지만은 않았다. 1년 만에 사령탑이 허정무 감독으로 바뀌는 등 어려움을 겪던 그는 전남의 수석코치직을 정리하고 자신의 모교인 청구고 감독으로 부임한다. 명문 청구고를 이끌어가던 박경훈. 청구고 하면 한국 축구를 이끌어갈 차세대 스트라이커 김동현과 박주영의 모교로 유명하지 않은가. 비록 박주영은 그가 부산 아이콘스 코치로 적을 옮긴 후의 선수이긴 하지만 이 두 선수와 박감독의 인연도 각별하다. “김동현 선수랑은 동계훈련을 같이 했었고 몇 달 있다가 1년 동안 포항제철에서 보내주는 브라질 유학을 갔어요. 대단한 선수였죠. 그 신장에도 재간이 뛰어난 선수였는데. 그 선수 한 명 때문에 승패가 좌지우지 했을 때였으니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개인기량에 더 역점을 두었어야 했는데 너무 체력 위주로 갔던거 같아요.” “박주영 선수는 그 당시에는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아니었어요. 제가 청구고 감독을 하고 있을 때 박주영은 반야월 초등학교에 있었는데 중학교에 김병익 감독이 좋은 선수가 있는데 박감독님이 어떻게 해주셔야겠다고 말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가서 부모님을 만났더니 주영이 부모님이 박감독님한테 보내고 싶다고 해서 스카우트를 해오게 되었죠. 일단 중학교에 넣었는데 주영이가 고등학교에 왔을 때는 제가 감독이 아니었죠.” 그럼 여기서 한 가지 퀴즈. 과연 박주영이 청구고에 입학했을 때 그를 담당했던 감독은 누구였을까. 놀라지 마시라. 박경훈의 오랜 동료이자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 그렇다. 변병주 감독이 박경훈 감독의 뒤를 이어 청구고 사령탑에 부임한 것이다. 그렇게 변병주에게 바통 터치를 한 박경훈은 부산 아이콘스의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K리그 4위, 아디다스컵 준우승 등을 이끈 그는 2002년, 아테네올림픽을 준비하는 올림픽대표팀의 코치로 전격 합류한다. 그리고 김호곤 감독을 도와 2004아테네 올림픽에서 한국이 8강 진출을 이룩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해 12월. U-16팀을 이끌어갈 사령탑이 발표된다. 2007년 U-17 세계 청소년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만큼 성적에 대한 부담이 큰 이 자리에는 박경훈 전 올림픽 코치가 선임되었다. 그의 도전정신. 그 승부욕만큼은 세월이 지나도 전혀 변하지 않나보다. 그는 한 치의 주저함 없이 감독 자리를 수락한다. “부담감이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은 재미가 없는 거죠. 자극도 받고 정열적인게 있어야지 재미있고 그런 거죠. 이런 좋은 대회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고 또 조직위원회가 생겨서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그런 부담감이 없다면 거짓말이고, 또 그 부담감을 갖고 해야죠.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솔직히 외국선수들에 비해 떨어져요. 하지만 조직적이나 선수들의 하고자하는 의욕, 정신력 등이 어린선수들에게는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목표를 우승이라고 하죠. 지도자로써 그런 포부와 야망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희망적인 목표를 삼고 최선을 다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1년 넘게 남았으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수업과 병행하느라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 환경 내에서도 최선을 다해봐야죠. 자꾸만 지는 시합을 통해서 많이 배우고 싶어요. 최종 목표 시련을 겪으면서 고통을 받으면서 성장하고 싶어요.” 박경훈.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우승과 영광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1년. 다시 한 번 그는 새로운 역사 창조를 위한 스타트 라인에 서있다. 그의 승부사적 기질을 믿기에 그리고 그가 보여준 엄청난 집중력을 믿기에 우리는 내년에 치러질 대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보는 것이다. K리그의 전설 7회를 마치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까 한다. 마치 타조와 장재근 중 누가 빠르냐와 같은 어리석은 질문일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궁금하다. 오랜 시간동안 질긴 인연을 이어왔던 변병주와 박경훈. 과연 누가 더 빠를까? “100미터는 비슷하게 뛰었을 거예요. 200m나 400m는 걔가 더 빨랐죠. 근데 순발력만큼은 안 져요. 순발력은 자신 있습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 K-리그 명예기자 홍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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