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격차 확대]⑥ 하도급 기업 후려치기, 알면서도 대기업에 당한다

입력 2019.04.14 (09:02) 수정 2019.05.2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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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용 보일러 제조업체인 한일중공업은 하청업체에 줘야 할 대금 4억 2천여만 원을 제때 주지 않았다. 늦게 지급하는 데 따른 이자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한일중공업이 이런 하도급 갑질로 최근 3년간 받은 벌점은 11.25점.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3월 하도급법 위반 벌점제가 도입된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이 업체에 대해 영업정지를 요청했다.

부산에 있던 한일중공업은 공정위가 영업정지 절차를 밟자 지난해 슬그머니 폐업해버렸지만, 공정위는 같은 대표가 운영하는 창원의 같은 이름의 법인을 찾아내 함께 입찰참가자격제한을 요청했다. 이 사례처럼 그나마 드러난 원청업체의 갑질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원청업체의 하청업체에 대한 불공정거래는 하도급업체를 숨 못 쉬게 하는 가장 큰 폐단이다.

지난해 10월 한 유명 물걸레 청소기 업체는 청소기 핵심 부품 기술을 하청업체에서 빼돌려 경쟁업체에 건넨 뒤 제품 단가를 낮춘 혐의로 공정위에 적발됐다. 하청업체는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부품 가격을 20%나 깎였고, 손해가 커진 업체가 결국 납품을 중단하면서 회사도 적자로 돌아섰다.

[연관기사] 유명 청소기 업체, 하청기술 빼돌려 납품가 20% ‘후려치기’

공정위는 기술 탈취 사건 과징금으로는 최대 규모인 5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지만, 업체는 이미 큰 타격을 입은 뒤였다. 피해 하도급업체 대표는 "물건이 재고가 있는 상태에서 (납품 가격) 인하를 안 하면 부품을 안 가져간다고 하는 바람에 가격 인하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라며 원청업체의 요구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아픈 현실을 토로했다.

■ 하도급 기업이 가장 자주 경험하는 불공정 행위는 '단가 후려치기'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중소제조업체의 하도급거래 실태를 조사한 결과 전체 조사대상 507개 업체 가운데 36개 불공정 피해사례를 접수했다. 물론 여기엔 보복이 두려워 피해 상황을 접수하지 않은 중소기업이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불공정거래 유형을 물었더니(복수응답) 원청업체의 부당감액 요구가 66.7%로 가장 많았고, 부당한 대금 결정도 47.2%를 차지했다. 이른바 단가 후려치기로 인한 피해가 가장 많다는 얘기다.


피해를 입은 물걸레 청소기 하청업체 대표가 말했듯이 납품단가를 내리지 않으면 납품을 못 하기 때문에 하도급업체는 울며겨자먹기식으로 가격을 낮춰서 납품하곤 한다. 원청기업 숫자는 적은 반면 납품을 하거나 납품을 원하는 중소기업들 숫자는 많아 하도급 업체들은 사활을 걸고 계약에 매달리고, 원청기업은 쉽게 하도급 업체를 바꿀 수 있다.

앞서 썼던 기사 ‘[소득격차 확대]⑤ 중소기업 임금 적은 이유는 따로 있다’에서 말했듯이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하도급기업에게 갖은 이유로 납품단가를 내리도록 압박하고 단가를 후려치게 되면 중소기업은 적정이윤을 확보할 수 없고 이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적은 임금으로 돌아가게 된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도 불가능해진다. 이른바 '갑질 '로 통하는 불공정 행위를 개선하지 않으면 전체 노동자의 85%가 일하는 중소기업은 계속 경쟁력을 쌓을 수 없게 되고 적은 임금의 악순환에 갇히게 된다. 아니 이미 중소기업들은 1990년대 이후 악순환에 갇혀 있다.

단가 후려치기만큼은 아니지만 부당하게 기술 자료를 빼가려는 원청기업들 때문에 하도급기업은 힘들어한다. 조사대상 507개 중소기업 가운데 3.7%가 부당하게 기술자료를 요구 받았던 경험을 토로했다. 이들 기업 가운데 36.8%는 "유지 보수 같은 관리 차원이니 기술 자료를 내놓으라"는 원청업체의 요구가 있었다고 한다. 알고봤더니 납품단가를 내리려고 기술자료를 내놓으라고 했다는 응답도 31.6%를 차지했다.


■ 박영선·김상조, 쌍두마차는 불공정 거래를 잡을 수 있을까?

신임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도 이 같은 대·중·소 기업 간 하도급 거래에서 발생하는 불공정 거래의 폐단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박 장관은 8일 취임식에서 "중소벤처기업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대기업과 중소벤처기업, 소상공인, 자영업자가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자발적 상생협력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특히, 공정경제를 위해 기술탈취 문제, 수위탁거래 불공정 행위는 반드시 개선해야 할 과제이다"라며 대기업의 기술탈취와 단가후려치기 같은 불공정 거래 행위를 뿌리 뽑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지난 6일 '2019년 공정거래위원회 업무계획'을 발표하면서 "순환출자 구조 개선, 일감 몰아주기, 불공정 하도급 거래 중 재벌 개혁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은 불공정 하도급 거래"라며 "우리 사회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핵심적인 과제"라고 말했다. 김상조 위원장이 남은 기간 재벌개혁의 핵심 과제로 꼽히는 불공정 하도급 거래 개선에 더욱 집중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역대 정부들도 불공정 거래에 대한 의지는 있었지만 강력한 실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아 아쉬움을 줬던 만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는 7월 공정위와 중소기업벤처부,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등 관계부처가 합동으로 내놓을 '범정부 하도급 종합대책'은 그래서 더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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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득격차 확대]⑥ 하도급 기업 후려치기, 알면서도 대기업에 당한다
    • 입력 2019-04-14 09:02:52
    • 수정2019-05-29 17:53:20
    취재K
산업용 보일러 제조업체인 한일중공업은 하청업체에 줘야 할 대금 4억 2천여만 원을 제때 주지 않았다. 늦게 지급하는 데 따른 이자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한일중공업이 이런 하도급 갑질로 최근 3년간 받은 벌점은 11.25점.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3월 하도급법 위반 벌점제가 도입된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이 업체에 대해 영업정지를 요청했다.

부산에 있던 한일중공업은 공정위가 영업정지 절차를 밟자 지난해 슬그머니 폐업해버렸지만, 공정위는 같은 대표가 운영하는 창원의 같은 이름의 법인을 찾아내 함께 입찰참가자격제한을 요청했다. 이 사례처럼 그나마 드러난 원청업체의 갑질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원청업체의 하청업체에 대한 불공정거래는 하도급업체를 숨 못 쉬게 하는 가장 큰 폐단이다.

지난해 10월 한 유명 물걸레 청소기 업체는 청소기 핵심 부품 기술을 하청업체에서 빼돌려 경쟁업체에 건넨 뒤 제품 단가를 낮춘 혐의로 공정위에 적발됐다. 하청업체는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부품 가격을 20%나 깎였고, 손해가 커진 업체가 결국 납품을 중단하면서 회사도 적자로 돌아섰다.

[연관기사] 유명 청소기 업체, 하청기술 빼돌려 납품가 20% ‘후려치기’

공정위는 기술 탈취 사건 과징금으로는 최대 규모인 5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지만, 업체는 이미 큰 타격을 입은 뒤였다. 피해 하도급업체 대표는 "물건이 재고가 있는 상태에서 (납품 가격) 인하를 안 하면 부품을 안 가져간다고 하는 바람에 가격 인하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라며 원청업체의 요구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아픈 현실을 토로했다.

■ 하도급 기업이 가장 자주 경험하는 불공정 행위는 '단가 후려치기'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중소제조업체의 하도급거래 실태를 조사한 결과 전체 조사대상 507개 업체 가운데 36개 불공정 피해사례를 접수했다. 물론 여기엔 보복이 두려워 피해 상황을 접수하지 않은 중소기업이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불공정거래 유형을 물었더니(복수응답) 원청업체의 부당감액 요구가 66.7%로 가장 많았고, 부당한 대금 결정도 47.2%를 차지했다. 이른바 단가 후려치기로 인한 피해가 가장 많다는 얘기다.


피해를 입은 물걸레 청소기 하청업체 대표가 말했듯이 납품단가를 내리지 않으면 납품을 못 하기 때문에 하도급업체는 울며겨자먹기식으로 가격을 낮춰서 납품하곤 한다. 원청기업 숫자는 적은 반면 납품을 하거나 납품을 원하는 중소기업들 숫자는 많아 하도급 업체들은 사활을 걸고 계약에 매달리고, 원청기업은 쉽게 하도급 업체를 바꿀 수 있다.

앞서 썼던 기사 ‘[소득격차 확대]⑤ 중소기업 임금 적은 이유는 따로 있다’에서 말했듯이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하도급기업에게 갖은 이유로 납품단가를 내리도록 압박하고 단가를 후려치게 되면 중소기업은 적정이윤을 확보할 수 없고 이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적은 임금으로 돌아가게 된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도 불가능해진다. 이른바 '갑질 '로 통하는 불공정 행위를 개선하지 않으면 전체 노동자의 85%가 일하는 중소기업은 계속 경쟁력을 쌓을 수 없게 되고 적은 임금의 악순환에 갇히게 된다. 아니 이미 중소기업들은 1990년대 이후 악순환에 갇혀 있다.

단가 후려치기만큼은 아니지만 부당하게 기술 자료를 빼가려는 원청기업들 때문에 하도급기업은 힘들어한다. 조사대상 507개 중소기업 가운데 3.7%가 부당하게 기술자료를 요구 받았던 경험을 토로했다. 이들 기업 가운데 36.8%는 "유지 보수 같은 관리 차원이니 기술 자료를 내놓으라"는 원청업체의 요구가 있었다고 한다. 알고봤더니 납품단가를 내리려고 기술자료를 내놓으라고 했다는 응답도 31.6%를 차지했다.


■ 박영선·김상조, 쌍두마차는 불공정 거래를 잡을 수 있을까?

신임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도 이 같은 대·중·소 기업 간 하도급 거래에서 발생하는 불공정 거래의 폐단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박 장관은 8일 취임식에서 "중소벤처기업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대기업과 중소벤처기업, 소상공인, 자영업자가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자발적 상생협력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특히, 공정경제를 위해 기술탈취 문제, 수위탁거래 불공정 행위는 반드시 개선해야 할 과제이다"라며 대기업의 기술탈취와 단가후려치기 같은 불공정 거래 행위를 뿌리 뽑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지난 6일 '2019년 공정거래위원회 업무계획'을 발표하면서 "순환출자 구조 개선, 일감 몰아주기, 불공정 하도급 거래 중 재벌 개혁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은 불공정 하도급 거래"라며 "우리 사회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핵심적인 과제"라고 말했다. 김상조 위원장이 남은 기간 재벌개혁의 핵심 과제로 꼽히는 불공정 하도급 거래 개선에 더욱 집중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역대 정부들도 불공정 거래에 대한 의지는 있었지만 강력한 실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아 아쉬움을 줬던 만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는 7월 공정위와 중소기업벤처부,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등 관계부처가 합동으로 내놓을 '범정부 하도급 종합대책'은 그래서 더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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