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20층이라도 굴러 내려갈 수 밖엔…”

입력 2019.04.23 (09:02) 수정 2019.04.2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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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상시 신속히 대피' 우리에겐 꿈 같은 말"

"여기가 20층인데,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몸으로 구를 수밖에 없어요."

20층 비상구 계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배재현 씨가 힘없이 입을 열었습니다. 서울 중구의 프레스센터 20층, 불이 났다고 가정해 빌딩에서 탈출을 요청한 상황이었습니다.

올해 마흔 한 살인 배 씨는 태어난 지 100일이 지났을 즈음, 뇌병변장애 1급판정을 받았습니다. 두 발로 걸을 수 없는 배 씨에게 전동 휠체어가 필수품이 된 건 오래,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는 곳'으로 활동이 제약되는 건 익숙한 일상입니다.

고층 빌딩의 경우, 화재시 정전 등으로 승강기가 멈출 수 있다며 아예 승강기를 쓰지 않고 계단을 통해 건물 밖으로 대피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장애인들조차 오르내리기 쉽지않은 경사의 계단을 휠체어를 타고 내려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런 배 씨에게 최근 들려오는 지진, 화재 뉴스는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각종 재난 상황에서 대피를 해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하기 때문입니다. 그 흔한 '신속히 대피하세요'라는 말이 배 씨에겐 불가능한 주문과도 같습니다.

[관련 기사] 대피요령·교육서도 소외…‘재난 무방비’ 장애인들

(※ 기사 속 가상 대피상황은 배 씨가 보호자와 함께 비상구와 계단 위치 등을 충분히 인지한 뒤 이들의 동의 하에 이뤄졌습니다.) 

■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 어디서 찾나요


취재의 시작은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행정부가 제작·배포한 '비상시 국민행동요령'에는 지진이나 화재 시 '엘리베이터를 절대 이용하지 않고 계단을 통해 안전하게 대피하라'고 적혀있습니다. 이외에도 비상시 대피 요령 대부분이 비장애인 위주로 돼 있어 장애인은 따라할 수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에게 적절한 비상시 행동요령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걸까요?

우선, 정부의 재난안전정보 통합 앱 '안전디딤돌'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가장 손쉽게 재난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앱인데도, 장애인과 관련한 항목을 찾기 어렵습니다.

'강풍 발생 시 행동요령'에서는 "장애인이 거주하는 가정의 경우 비상시 대피 방법과 연락방법을 가족 또는 이웃과 사전에 의논합니다"라고 적혀있지만, 이마저도 장애인이 주체적으로 대피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닙니다.

비상대비 체험관 비상대비 체험관

국민행동요령을 직접 가르쳐준다는 곳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시 용산구의 비상대비체험관. 이곳에서는 비상시 대피소를 찾는 법, 화생방 공격시 방독면을 착용하는 법, 심폐소생술을 하는 방법 등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상시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대피소나 장애인이 탈출할 수 있는 법에 대해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사전에 '발'로 직접 확인하고 찾아보면 더욱 좋습니다"는 안내문부터 장애인에게는 멀게만 느껴집니다.

비상대비 체험관 벽면에는 비상시 행동요령이 활자물로 게시돼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방문할 경우, 해당 내용을 들려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지 체험관 직원에게 문의해 보았더니 "논의해본 적이 없는 문제"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곳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체험관이 맞냐"고 묻자,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는 확신에 찬 답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합니다."

■행정부, "예산 이유로 장애인 매뉴얼 콘텐츠화 어려워"

비장애인이 포털 사이트나 공식기관을 통해 재난시 대피요령을 찾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서 보듯, 장애인은 재난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찾기 어렵습니다. 비장애인에 비해 장애인의 재난 정보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겁니다.

이같은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자 정부는 2017년 9월 관계부처 합동 회의를 열고 <장애인 안전 종합대책>을 내놨습니다. 당시 '장애인이 재난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라는 목표 아래 여러가지 구체적인 정책 개선 방안이 제시됐습니다.


장애인 안전 종합대책장애인 안전 종합대책

먼저 장애인을 위한 국민행동요령을 안전디딤돌 등에 게시하고,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춘 대피시설 위치와 시설을 홍보하겠다는 계획이 눈에 띕니다. 전국 안전체험관에 장애인 재난안전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겠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앞서 문제로 지적했던 점들에 대한 해답이 이미 2년 전 제시돼있던 셈입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현재, 당시 촘촘하게 제시됐던 계획들이 무색하게도 현실은 갈 길이 멀어보입니다.

제자리걸음만 걸었던 건 아닙니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은 지난해 12월, 미국과 일본의 장애인 재난대응 매뉴얼을 각각 분석하고, 자체적인 장애 유형별 재난대응 매뉴얼을 제작했습니다. 해당 매뉴얼에는 장애 유형별로 재난 발생 전, 재난 발생 시, 재난 발생 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단계별로 제시돼있습니다. 매뉴얼에는 장애인 당사자와 조력자의 행동요령이 구분돼 있어 장애인이 주체적으로 재난에 대응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습니다.

1년 여의 연구 기간을 거쳐 나온 이 매뉴얼은 지금껏 국내에서 제작된 장애인 관련 매뉴얼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편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당 매뉴얼이 책자나 영상 등의 형태로 제작되지 않아 배포는 물론 홍보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한국여성장애인연합 김혜영 사무처장은 "장애 유형별로 매뉴얼이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장애인들에게 적합한 형태의 콘텐츠로 제작되지 않아 매뉴얼이 현실에서 적용되지 않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행정안전부는 이같은 지적에 "예산 문제 등으로 아직 매뉴얼을 콘텐츠화 하지 못한 상태"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 살고자 하는 욕구는 누구나 같다


배 씨는 취재가 끝난 후 "휠체어가 내려갈 수 있는 경사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게 계단에 비상벨이라도 설치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재난이라는 급박한 상황에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배 씨를 더 두렵게 만드는 겁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김성연 사무국장은 취재가 끝날 무렵 "장애인도 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체계가 상시적으로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2018년 기준 우리나라 등록장애인은 258만 명, 전체 인구의 5% 정도입니다. 5%의 국민이 원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비상시 어떤 방식으로 탈출하고, 어떤 장소로 대피해야 하는 지와 같은 지극히 필수적인 정보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에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다르지 않듯, '살기 위한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제공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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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20층이라도 굴러 내려갈 수 밖엔…”
    • 입력 2019-04-23 09:02:49
    • 수정2019-04-23 09:06:21
    취재후·사건후
■ "'비상시 신속히 대피' 우리에겐 꿈 같은 말"

"여기가 20층인데,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몸으로 구를 수밖에 없어요."

20층 비상구 계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배재현 씨가 힘없이 입을 열었습니다. 서울 중구의 프레스센터 20층, 불이 났다고 가정해 빌딩에서 탈출을 요청한 상황이었습니다.

올해 마흔 한 살인 배 씨는 태어난 지 100일이 지났을 즈음, 뇌병변장애 1급판정을 받았습니다. 두 발로 걸을 수 없는 배 씨에게 전동 휠체어가 필수품이 된 건 오래,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는 곳'으로 활동이 제약되는 건 익숙한 일상입니다.

고층 빌딩의 경우, 화재시 정전 등으로 승강기가 멈출 수 있다며 아예 승강기를 쓰지 않고 계단을 통해 건물 밖으로 대피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장애인들조차 오르내리기 쉽지않은 경사의 계단을 휠체어를 타고 내려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런 배 씨에게 최근 들려오는 지진, 화재 뉴스는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각종 재난 상황에서 대피를 해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하기 때문입니다. 그 흔한 '신속히 대피하세요'라는 말이 배 씨에겐 불가능한 주문과도 같습니다.

[관련 기사] 대피요령·교육서도 소외…‘재난 무방비’ 장애인들

(※ 기사 속 가상 대피상황은 배 씨가 보호자와 함께 비상구와 계단 위치 등을 충분히 인지한 뒤 이들의 동의 하에 이뤄졌습니다.) 

■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 어디서 찾나요


취재의 시작은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행정부가 제작·배포한 '비상시 국민행동요령'에는 지진이나 화재 시 '엘리베이터를 절대 이용하지 않고 계단을 통해 안전하게 대피하라'고 적혀있습니다. 이외에도 비상시 대피 요령 대부분이 비장애인 위주로 돼 있어 장애인은 따라할 수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에게 적절한 비상시 행동요령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걸까요?

우선, 정부의 재난안전정보 통합 앱 '안전디딤돌'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가장 손쉽게 재난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앱인데도, 장애인과 관련한 항목을 찾기 어렵습니다.

'강풍 발생 시 행동요령'에서는 "장애인이 거주하는 가정의 경우 비상시 대피 방법과 연락방법을 가족 또는 이웃과 사전에 의논합니다"라고 적혀있지만, 이마저도 장애인이 주체적으로 대피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닙니다.

비상대비 체험관
국민행동요령을 직접 가르쳐준다는 곳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시 용산구의 비상대비체험관. 이곳에서는 비상시 대피소를 찾는 법, 화생방 공격시 방독면을 착용하는 법, 심폐소생술을 하는 방법 등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상시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대피소나 장애인이 탈출할 수 있는 법에 대해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사전에 '발'로 직접 확인하고 찾아보면 더욱 좋습니다"는 안내문부터 장애인에게는 멀게만 느껴집니다.

비상대비 체험관 벽면에는 비상시 행동요령이 활자물로 게시돼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방문할 경우, 해당 내용을 들려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지 체험관 직원에게 문의해 보았더니 "논의해본 적이 없는 문제"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곳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체험관이 맞냐"고 묻자,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는 확신에 찬 답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합니다."

■행정부, "예산 이유로 장애인 매뉴얼 콘텐츠화 어려워"

비장애인이 포털 사이트나 공식기관을 통해 재난시 대피요령을 찾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서 보듯, 장애인은 재난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찾기 어렵습니다. 비장애인에 비해 장애인의 재난 정보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겁니다.

이같은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자 정부는 2017년 9월 관계부처 합동 회의를 열고 <장애인 안전 종합대책>을 내놨습니다. 당시 '장애인이 재난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라는 목표 아래 여러가지 구체적인 정책 개선 방안이 제시됐습니다.


장애인 안전 종합대책
먼저 장애인을 위한 국민행동요령을 안전디딤돌 등에 게시하고,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춘 대피시설 위치와 시설을 홍보하겠다는 계획이 눈에 띕니다. 전국 안전체험관에 장애인 재난안전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겠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앞서 문제로 지적했던 점들에 대한 해답이 이미 2년 전 제시돼있던 셈입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현재, 당시 촘촘하게 제시됐던 계획들이 무색하게도 현실은 갈 길이 멀어보입니다.

제자리걸음만 걸었던 건 아닙니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은 지난해 12월, 미국과 일본의 장애인 재난대응 매뉴얼을 각각 분석하고, 자체적인 장애 유형별 재난대응 매뉴얼을 제작했습니다. 해당 매뉴얼에는 장애 유형별로 재난 발생 전, 재난 발생 시, 재난 발생 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단계별로 제시돼있습니다. 매뉴얼에는 장애인 당사자와 조력자의 행동요령이 구분돼 있어 장애인이 주체적으로 재난에 대응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습니다.

1년 여의 연구 기간을 거쳐 나온 이 매뉴얼은 지금껏 국내에서 제작된 장애인 관련 매뉴얼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편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당 매뉴얼이 책자나 영상 등의 형태로 제작되지 않아 배포는 물론 홍보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한국여성장애인연합 김혜영 사무처장은 "장애 유형별로 매뉴얼이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장애인들에게 적합한 형태의 콘텐츠로 제작되지 않아 매뉴얼이 현실에서 적용되지 않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행정안전부는 이같은 지적에 "예산 문제 등으로 아직 매뉴얼을 콘텐츠화 하지 못한 상태"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 살고자 하는 욕구는 누구나 같다


배 씨는 취재가 끝난 후 "휠체어가 내려갈 수 있는 경사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게 계단에 비상벨이라도 설치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재난이라는 급박한 상황에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배 씨를 더 두렵게 만드는 겁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김성연 사무국장은 취재가 끝날 무렵 "장애인도 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체계가 상시적으로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2018년 기준 우리나라 등록장애인은 258만 명, 전체 인구의 5% 정도입니다. 5%의 국민이 원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비상시 어떤 방식으로 탈출하고, 어떤 장소로 대피해야 하는 지와 같은 지극히 필수적인 정보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에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다르지 않듯, '살기 위한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제공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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