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우리는 매일 매연을 마십니다”

입력 2019.05.08 (16:18) 수정 2019.05.0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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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하루 두 차례 시동점검..디젤 배기가스에 속수무책
디젤 배기가스 노출 소방관 암 발병..연관성 주목
배연 설비 갖춰진 소방서는 10곳 가운데 1곳 뿐..건강권 절실

"매연을 많이 마시다보니까 기관지도 안 좋고, 차고지가 좁은 환경에 있기 때문에 "

서울의 한 소방서에 근무하는 소방관의 이야기입니다. '자연인'이 아니고서야 매연을 안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어딨냐고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폐쇄적인 공간에서 장시간 노출되고, 화재 현장에서 유독가스를 직간접적으로 맡을 수밖에 없다면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왜 소방관들은 매일 매연을 맡아야 할까요?

지난 2일, 저녁 교대시간을 조금 앞두고 서울의 한 소방서를 찾았습니다. 차고지는 매케한 매연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구급차, 펌프차 등 각종 차량에서 뿜어져 나오는 배기가스 때문이었습니다. 시동이 켜진 소방차량들 사이에선 소방대원들이 장비점검에 한창이었습니다.


하루 두 차례 시동점검..디젤 배기가스에 속수무책

전국의 소방서는 오전과 오후 1시간씩 하루 두차례 이같은 '시동점검'을 진행합니다. 여름엔 비교적 괜찮지만, 기온이 떨어지는 겨울철엔 시동이 갑자기 걸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문에 시동을 걸어 소방차량 상태를 점검하고, 예열을 해놓는 겁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차량에서 '배기가스'가 배출된다는 점입니다. 소방관들이 출동 대기하는 소방서나 119안전센터는 대부분 전면부에 셔터문이 설치돼 있고, 나머지 공간은 막혀 있습니다. 즉 'ㄷ'자 형태에서 전면부만 개방하는데, 겨울철이나 밤엔 닫아 놓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상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폐쇄적인 구조입니다.

소방차량들은 신속한 출동을 위해 보통 후면 주차를 합니다. 이 때문에 시동 점검과정에서 발생한 '배기가스'는 빠져나가지 못하고 실내로 스며듭니다. 이 공간과 가까운 곳엔 사무실이나 세면장, 화장실 등 소방대원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결국 소방대원들은 스며든 배기가스를 무방비로 흡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디젤 배기가스 노출 소방관 암 발병..연관성 주목

현재 소방차량은 대부분 디젤차량입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디젤 배기가스'는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암연구국제기구(IARC)가 지정한 '1군 발암물질'입니다. 이 가스는 기관지를 통해 흡수되고, 오랜 시간 노출되면 폐암이나 심혈관 질환 등의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실제로 부산에서 근무하던 故 김영환 소방관이 지난 1월 폐암으로 숨졌습니다. 부산소방재난본부는 김 소방관에 대해 공무상 재해요청을 준비하면서 '디젤 배기가스' 흡입을 그 이유 중에 하나로 들었습니다.

김 소방관이 근무했던 옛 망미119안전센터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지난해 말 폐쇄됐지만, 열악했던 당시 환경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부산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안전센터가 좁은 골목에 위치한 탓에, 차량을 센터 앞까지 빼내지못하고 시동점검을 매일 진행했다고 말했습니다.


환기 시설이라고는 센터 뒷편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유일했습니다. 시동검검 과정에서 발생한 배기가스는 사무실과 복도와 연결된 대기공간으로 그대로 스며들었을겁니다.

부산소방재난본부는 이 센터에서 근무했던 김 소방관을 포함해 모두 5명의 암환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부산소방재난본부는 디젤 배기가스와 암 발병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해 센터 내 유해물질을 측정했습니다.

그 결과 디젤 배출가스 주 성분인 질소산화물(NOX)은 기준치 0.1PPM 보다 63배 높은 6.3PPM(1시간 기준)이 검출됐습니다. 이 밖에도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에틸벤젠, 총휘발성유기화합물 등 유해물질이 관련 기준치보다 높게 나왔습니다. 부산소방재난본부는 이를 바탕으로 디젤 배기가스와 암 발병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한다는 계획입니다.

배연 설비 갖춰진 소방서는 10곳 가운데 1곳 뿐..건강권 절실

소방대원들이 배기가스를 흡입하지 않도록 해줄 시설이 없는 건 아닙니다. 지난 2013년 소방당국은 기존 청사뿐만 아니라 새로 지어지는 청사에 차고배연시스템을 설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현재 모두 4종류의 시스템이 마련돼 있습니다. 송풍기 배출방식과 덕트 흡입방식, 천장 레일형 흡입호스 방식, 바닥 매립형 자동승강방식 등 시설 종류도 다양합니다.


'덕트 흡입방식' 배연 시스템이 설치된 서울 영등포소방서를 찾았습니다. 소방대원들이 시동검검에 나서자, 천장에 연결된 배연설비가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차량에서 배출된 디젤 배기가스는 호스를 통해 빨려 들어갔습니다. 배기가스 냄새가 완전히 차단된 건 아니었지만, 먼저 찾았던 소방서보다는 훨씬 쾌적했습니다.


실제로 소방당국이 연구기관과 함께 장비 설치 이전과 이후를 비교한 결과 실내 대기 오염 물질은 총휘발성유기화합물이 79%, 일산화탄소는 97%나 감소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방서에는 이같은 시스템이 설치돼 있지 않습니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 1,055개 소방서 가운데 115곳 뿐입니다. 소방서 10곳 중 1곳에만 설치돼 있는 수준입니다. 서울에도 영등포소방서를 비롯해 모두 3곳에만 이같은 시설이 설치돼있습니다.


시도별 격차가 나는 이유는 소방공무원이 국가직이 아닌 지방직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지역 언론이 공론화하고,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투입한 부산과 대구의 경우 설치율이 비교적 높습니다.

서울소방재난본부도 앞으로 3년 동안 예산 80억을 투입해, 배연시설을 서울 전체 소방서에 설치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서울시와 협의를 거쳐 시의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기까지 넘어야할 산이 많습니다. 재정여건이 열악한 광역자치단체에선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가 시급히 해결돼야 하는 이유는 소방관들의 '건강권'과 직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화마와 싸우는 소방관들이 대기하는 공간에서라도 발암물질에 노출되지 않도록, 대책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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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우리는 매일 매연을 마십니다”
    • 입력 2019-05-08 16:18:04
    • 수정2019-05-08 17:10:40
    취재후·사건후
하루 두 차례 시동점검..디젤 배기가스에 속수무책<br />디젤 배기가스 노출 소방관 암 발병..연관성 주목<br />배연 설비 갖춰진 소방서는 10곳 가운데 1곳 뿐..건강권 절실
"매연을 많이 마시다보니까 기관지도 안 좋고, 차고지가 좁은 환경에 있기 때문에 "

서울의 한 소방서에 근무하는 소방관의 이야기입니다. '자연인'이 아니고서야 매연을 안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어딨냐고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폐쇄적인 공간에서 장시간 노출되고, 화재 현장에서 유독가스를 직간접적으로 맡을 수밖에 없다면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왜 소방관들은 매일 매연을 맡아야 할까요?

지난 2일, 저녁 교대시간을 조금 앞두고 서울의 한 소방서를 찾았습니다. 차고지는 매케한 매연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구급차, 펌프차 등 각종 차량에서 뿜어져 나오는 배기가스 때문이었습니다. 시동이 켜진 소방차량들 사이에선 소방대원들이 장비점검에 한창이었습니다.


하루 두 차례 시동점검..디젤 배기가스에 속수무책

전국의 소방서는 오전과 오후 1시간씩 하루 두차례 이같은 '시동점검'을 진행합니다. 여름엔 비교적 괜찮지만, 기온이 떨어지는 겨울철엔 시동이 갑자기 걸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문에 시동을 걸어 소방차량 상태를 점검하고, 예열을 해놓는 겁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차량에서 '배기가스'가 배출된다는 점입니다. 소방관들이 출동 대기하는 소방서나 119안전센터는 대부분 전면부에 셔터문이 설치돼 있고, 나머지 공간은 막혀 있습니다. 즉 'ㄷ'자 형태에서 전면부만 개방하는데, 겨울철이나 밤엔 닫아 놓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상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폐쇄적인 구조입니다.

소방차량들은 신속한 출동을 위해 보통 후면 주차를 합니다. 이 때문에 시동 점검과정에서 발생한 '배기가스'는 빠져나가지 못하고 실내로 스며듭니다. 이 공간과 가까운 곳엔 사무실이나 세면장, 화장실 등 소방대원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결국 소방대원들은 스며든 배기가스를 무방비로 흡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디젤 배기가스 노출 소방관 암 발병..연관성 주목

현재 소방차량은 대부분 디젤차량입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디젤 배기가스'는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암연구국제기구(IARC)가 지정한 '1군 발암물질'입니다. 이 가스는 기관지를 통해 흡수되고, 오랜 시간 노출되면 폐암이나 심혈관 질환 등의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실제로 부산에서 근무하던 故 김영환 소방관이 지난 1월 폐암으로 숨졌습니다. 부산소방재난본부는 김 소방관에 대해 공무상 재해요청을 준비하면서 '디젤 배기가스' 흡입을 그 이유 중에 하나로 들었습니다.

김 소방관이 근무했던 옛 망미119안전센터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지난해 말 폐쇄됐지만, 열악했던 당시 환경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부산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안전센터가 좁은 골목에 위치한 탓에, 차량을 센터 앞까지 빼내지못하고 시동점검을 매일 진행했다고 말했습니다.


환기 시설이라고는 센터 뒷편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유일했습니다. 시동검검 과정에서 발생한 배기가스는 사무실과 복도와 연결된 대기공간으로 그대로 스며들었을겁니다.

부산소방재난본부는 이 센터에서 근무했던 김 소방관을 포함해 모두 5명의 암환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부산소방재난본부는 디젤 배기가스와 암 발병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해 센터 내 유해물질을 측정했습니다.

그 결과 디젤 배출가스 주 성분인 질소산화물(NOX)은 기준치 0.1PPM 보다 63배 높은 6.3PPM(1시간 기준)이 검출됐습니다. 이 밖에도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에틸벤젠, 총휘발성유기화합물 등 유해물질이 관련 기준치보다 높게 나왔습니다. 부산소방재난본부는 이를 바탕으로 디젤 배기가스와 암 발병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한다는 계획입니다.

배연 설비 갖춰진 소방서는 10곳 가운데 1곳 뿐..건강권 절실

소방대원들이 배기가스를 흡입하지 않도록 해줄 시설이 없는 건 아닙니다. 지난 2013년 소방당국은 기존 청사뿐만 아니라 새로 지어지는 청사에 차고배연시스템을 설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현재 모두 4종류의 시스템이 마련돼 있습니다. 송풍기 배출방식과 덕트 흡입방식, 천장 레일형 흡입호스 방식, 바닥 매립형 자동승강방식 등 시설 종류도 다양합니다.


'덕트 흡입방식' 배연 시스템이 설치된 서울 영등포소방서를 찾았습니다. 소방대원들이 시동검검에 나서자, 천장에 연결된 배연설비가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차량에서 배출된 디젤 배기가스는 호스를 통해 빨려 들어갔습니다. 배기가스 냄새가 완전히 차단된 건 아니었지만, 먼저 찾았던 소방서보다는 훨씬 쾌적했습니다.


실제로 소방당국이 연구기관과 함께 장비 설치 이전과 이후를 비교한 결과 실내 대기 오염 물질은 총휘발성유기화합물이 79%, 일산화탄소는 97%나 감소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방서에는 이같은 시스템이 설치돼 있지 않습니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 1,055개 소방서 가운데 115곳 뿐입니다. 소방서 10곳 중 1곳에만 설치돼 있는 수준입니다. 서울에도 영등포소방서를 비롯해 모두 3곳에만 이같은 시설이 설치돼있습니다.


시도별 격차가 나는 이유는 소방공무원이 국가직이 아닌 지방직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지역 언론이 공론화하고,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투입한 부산과 대구의 경우 설치율이 비교적 높습니다.

서울소방재난본부도 앞으로 3년 동안 예산 80억을 투입해, 배연시설을 서울 전체 소방서에 설치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서울시와 협의를 거쳐 시의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기까지 넘어야할 산이 많습니다. 재정여건이 열악한 광역자치단체에선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가 시급히 해결돼야 하는 이유는 소방관들의 '건강권'과 직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화마와 싸우는 소방관들이 대기하는 공간에서라도 발암물질에 노출되지 않도록, 대책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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