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심야심] 역주행 히트 ‘○○의 시간’ 저작권자는 누구?

입력 2019.09.1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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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 시간, 대통령의 시간…그리고 검찰과 조국의 시간

"조국 법무부 장관에게 주어진 시간이 됐다."

오늘(10일) 아침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한 말입니다.

이번 '조국 정국'에 주목을 받은 '국회의 시간', '대통령의 시간'이란 표현에 빗댄 말입니다. 치열한 여론전 속에 여권이 주로 사용한 이 표현은 기사나 칼럼 제목으로도 자주 오르내렸고,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조국 정국이 낳은 유행어인 셈입니다.

이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게 언제인지, 검색해봤습니다. 8월 30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교섭단체 3당이 9월 2일과 3일, 이틀간 조국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개최에 합의했지만, 검찰의 압수수색으로 일정 합의가 어그러진 시점이었습니다. 야당이 9월 10일 이후로 청문회를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오자 이인영 원내대표가 기자들과 만난 자리, 이른바 '백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기자 질문 :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가 청와대에서 열흘로 기간을 정해 인사청문보고서 재송부 요청을 하면 물리적으로 9월 12일까지 청문회 일정 순연이 가능하다고 하는데요"
이인영 원내대표 : "그건 국회의 시간이 아닙니다. 9월 3일부터는 대통령의 시간입니다."


인사청문회법에 따라 국회는 9월 2일까지 인사청문보고서를 채택해야 하고, 채택하지 못하면 대통령이 3일부터 재송부 요청을 할 수 있으니 3일부터는 국회가 감 뇌라 배 놔라, 할 수 없는 '대통령의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이 처음 쓰였을 때는 사실 큰 파장은 없었습니다. 인사청문보고서 채택과 재송부 기한은 현실 정치에서는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고, 정치 협상으로 조정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굳이 여기까지는 국회의 시간, 여기서부터는 대통령의 시간이라고 선을 긋는 건 추석까지 청문회 정국을 끌고 가려는 한국당에 대한 다소 옹색한(?) 방어 논리 정도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인영 원내대표가 공개회의에서, 기자 브리핑에서 이 표현을 거듭 사용하고 회자되면서 '파생 용어'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조국 후보자 대국민 간담회를 추진하면서는 '국민의 시간'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검찰이 조국 후보자 부인을 기소할 때는 '검찰의 시간'이란 표현이 나왔습니다.

"조국 청문회가 끝나자마자 국회의 시간에서 대통령의 시간으로. 정경심 교수의 자정 전 검찰의 전격 기소로 검찰의 시간으로 넘어갔습니다. 대통령의 시간과 검찰의 시간이 충돌합니다."(청문회 종료 직후 박지원 법사위원의 페이스북)

청문회 종료 직후인 9월 7일 새벽, 무소속 박지원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청문회 종료 직후인 9월 7일 새벽, 무소속 박지원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

국회의 시간, 대통령의 시간, 검찰의 시간, 조국의 시간…그 의미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정치권에서 즐겨 쓰는 '프레이밍' 용어로 보입니다. '국회의 시간'을 지키지 않는 야당은 약속을 어기는 것이라고 여기고, '대통령의 시간'은 관여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라고 믿고, '조국의 시간'은 만신창이가 된 법무부 장관이 과연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궁금하도록 '이미지'를 각인합니다. 하지만 선전선동의 표현이 아닌 문학적 표현이어서인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여론전에 스며들었고, 의도했던 프레이밍 효과도 톡톡히 거뒀습니다.

■ 'OO의 시간', 저작권자는 이인영 원내대표

그렇다면 저작권자가 누군지 궁금해 이인영 원내대표의 메시지국에 문의해봤습니다. 따로 준비한 메시지가 아니라 이 원내대표가 직접 만든 표현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평소에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인영 원내대표의 블로그에서 과거 메시지들을 검색해봤습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시간'이 쏟아집니다.

"6월 항쟁에 이어 정의의 시간이며 행동의 시간입니다." (2016.11.19. 제4차 촛불집회)
"오늘도 광화문입니다. 광장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2016.12.14. 제9차 촛불집회)
"눈부시게 찬란한 국민의 시간,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2017.03.10.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블로그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블로그

지난해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이 마무리된 후에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평창에서 평화의 시간. 이것은 온전한 의미에서 통일부의 시간이었다"고 말했고, 두 달 뒤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는 개헌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개헌의 시간"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올해 4월 원내대표 선거에 나서면서는 "혁신의 시간이 왔다"고 했고, 지난 7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선 "20대 국회의 시간이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이쯤 되면 '말버릇'에 가까운데도 어쩐지 그동안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수년에 걸쳐 꾸준히 사용한 끝에 뒤늦게 빛을 본 셈입니다.

■ 현란한 '언어'의 전쟁…성공작은 극소수

국회는 하루에도 수많은 말이 쏟아지고 현란한 언어의 전쟁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당 지도부가 되면 별도 메시지 팀이 구성돼 '조어'를 생산하는 데도 전력투구합니다. 정치인의 수사는 통상 성격을 규정하고, 비판하고, 촉구하는 순서로 구성되기 때문에 성격을 규정하는 '조어'의 성공 여부는 전체 메시지의 성공 여부를 좌우합니다.

'방탄 국회'라는 용어를 직접 만든 장수 대변인, 김재두 대안정치연대 대변인은 "복잡다단한 정치적 상황에서 핵심과 맥락을 정확하게 짚어서 한 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조어"라고 말합니다. 본질을 명쾌하게 정리하면서, 화제성을 담고, 나아가 파생 효과까지 낳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합니다.

김 대변인이 대표적으로 꼽는 '성공한 조어'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만들었다는 '내로남불'입니다. 1996년 6월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이 여당의 의원 빼가기를 비판하자,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냐'고 따지면서 나온 말입니다. 이중잣대라는 핵심을 정확하게 짚으면서 화제를 모아 '내가 땅 사면 투자, 남이 땅 사면 투기', '내가 하면 오락, 남이 하면 도박' 등 수많은 파생어를 낳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조국 법무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모습문재인 대통령이 9일 조국 법무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모습

'조국 정국'에 뜬 '국회의 시간', '대통령의 시간'도 파생 효과에서만큼은 '내로남불' 못지않다는 게 여의도의 평가입니다.

다만, '○○의 시간'이라는 용어는 성공적인 프레이밍일지는 몰라도, 그 말에 담긴 의미는 근본적 한계를 내포하기도 합니다. 여기까지는 국회, 여기서부터는 대통령, 또 여기서부터는 검찰, 여기서부터는 조국의 시간이라는 '프레이밍'은 구분짓기에서 유래합니다. 국회와 대통령은 시간의 경계를 넘지 않고 검찰과 조국의 시간은 융화되지 않습니다. 경계를 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그 사이, 정치권이 심심하면 찾는 '국민'의 시간은 스쳐 지나가듯 잠시 나왔다가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조국 정국을 좌우한 건 국민의 여론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국민의 시간이었지만, 국회와 대통령, 대통령과 검찰, 다시 검찰과 조국의 강 대 강 대치 속에 국민은 뒷전으로 밀려 제 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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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심야심] 역주행 히트 ‘○○의 시간’ 저작권자는 누구?
    • 입력 2019-09-10 18:30:13
    여심야심
■ 국회의 시간, 대통령의 시간…그리고 검찰과 조국의 시간

"조국 법무부 장관에게 주어진 시간이 됐다."

오늘(10일) 아침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한 말입니다.

이번 '조국 정국'에 주목을 받은 '국회의 시간', '대통령의 시간'이란 표현에 빗댄 말입니다. 치열한 여론전 속에 여권이 주로 사용한 이 표현은 기사나 칼럼 제목으로도 자주 오르내렸고,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조국 정국이 낳은 유행어인 셈입니다.

이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게 언제인지, 검색해봤습니다. 8월 30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교섭단체 3당이 9월 2일과 3일, 이틀간 조국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개최에 합의했지만, 검찰의 압수수색으로 일정 합의가 어그러진 시점이었습니다. 야당이 9월 10일 이후로 청문회를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오자 이인영 원내대표가 기자들과 만난 자리, 이른바 '백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기자 질문 :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가 청와대에서 열흘로 기간을 정해 인사청문보고서 재송부 요청을 하면 물리적으로 9월 12일까지 청문회 일정 순연이 가능하다고 하는데요"
이인영 원내대표 : "그건 국회의 시간이 아닙니다. 9월 3일부터는 대통령의 시간입니다."


인사청문회법에 따라 국회는 9월 2일까지 인사청문보고서를 채택해야 하고, 채택하지 못하면 대통령이 3일부터 재송부 요청을 할 수 있으니 3일부터는 국회가 감 뇌라 배 놔라, 할 수 없는 '대통령의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이 처음 쓰였을 때는 사실 큰 파장은 없었습니다. 인사청문보고서 채택과 재송부 기한은 현실 정치에서는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고, 정치 협상으로 조정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굳이 여기까지는 국회의 시간, 여기서부터는 대통령의 시간이라고 선을 긋는 건 추석까지 청문회 정국을 끌고 가려는 한국당에 대한 다소 옹색한(?) 방어 논리 정도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인영 원내대표가 공개회의에서, 기자 브리핑에서 이 표현을 거듭 사용하고 회자되면서 '파생 용어'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조국 후보자 대국민 간담회를 추진하면서는 '국민의 시간'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검찰이 조국 후보자 부인을 기소할 때는 '검찰의 시간'이란 표현이 나왔습니다.

"조국 청문회가 끝나자마자 국회의 시간에서 대통령의 시간으로. 정경심 교수의 자정 전 검찰의 전격 기소로 검찰의 시간으로 넘어갔습니다. 대통령의 시간과 검찰의 시간이 충돌합니다."(청문회 종료 직후 박지원 법사위원의 페이스북)

청문회 종료 직후인 9월 7일 새벽, 무소속 박지원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
국회의 시간, 대통령의 시간, 검찰의 시간, 조국의 시간…그 의미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정치권에서 즐겨 쓰는 '프레이밍' 용어로 보입니다. '국회의 시간'을 지키지 않는 야당은 약속을 어기는 것이라고 여기고, '대통령의 시간'은 관여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라고 믿고, '조국의 시간'은 만신창이가 된 법무부 장관이 과연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궁금하도록 '이미지'를 각인합니다. 하지만 선전선동의 표현이 아닌 문학적 표현이어서인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여론전에 스며들었고, 의도했던 프레이밍 효과도 톡톡히 거뒀습니다.

■ 'OO의 시간', 저작권자는 이인영 원내대표

그렇다면 저작권자가 누군지 궁금해 이인영 원내대표의 메시지국에 문의해봤습니다. 따로 준비한 메시지가 아니라 이 원내대표가 직접 만든 표현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평소에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인영 원내대표의 블로그에서 과거 메시지들을 검색해봤습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시간'이 쏟아집니다.

"6월 항쟁에 이어 정의의 시간이며 행동의 시간입니다." (2016.11.19. 제4차 촛불집회)
"오늘도 광화문입니다. 광장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2016.12.14. 제9차 촛불집회)
"눈부시게 찬란한 국민의 시간,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2017.03.10.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블로그
지난해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이 마무리된 후에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평창에서 평화의 시간. 이것은 온전한 의미에서 통일부의 시간이었다"고 말했고, 두 달 뒤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는 개헌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개헌의 시간"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올해 4월 원내대표 선거에 나서면서는 "혁신의 시간이 왔다"고 했고, 지난 7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선 "20대 국회의 시간이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이쯤 되면 '말버릇'에 가까운데도 어쩐지 그동안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수년에 걸쳐 꾸준히 사용한 끝에 뒤늦게 빛을 본 셈입니다.

■ 현란한 '언어'의 전쟁…성공작은 극소수

국회는 하루에도 수많은 말이 쏟아지고 현란한 언어의 전쟁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당 지도부가 되면 별도 메시지 팀이 구성돼 '조어'를 생산하는 데도 전력투구합니다. 정치인의 수사는 통상 성격을 규정하고, 비판하고, 촉구하는 순서로 구성되기 때문에 성격을 규정하는 '조어'의 성공 여부는 전체 메시지의 성공 여부를 좌우합니다.

'방탄 국회'라는 용어를 직접 만든 장수 대변인, 김재두 대안정치연대 대변인은 "복잡다단한 정치적 상황에서 핵심과 맥락을 정확하게 짚어서 한 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조어"라고 말합니다. 본질을 명쾌하게 정리하면서, 화제성을 담고, 나아가 파생 효과까지 낳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합니다.

김 대변인이 대표적으로 꼽는 '성공한 조어'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만들었다는 '내로남불'입니다. 1996년 6월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이 여당의 의원 빼가기를 비판하자,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냐'고 따지면서 나온 말입니다. 이중잣대라는 핵심을 정확하게 짚으면서 화제를 모아 '내가 땅 사면 투자, 남이 땅 사면 투기', '내가 하면 오락, 남이 하면 도박' 등 수많은 파생어를 낳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조국 법무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모습
'조국 정국'에 뜬 '국회의 시간', '대통령의 시간'도 파생 효과에서만큼은 '내로남불' 못지않다는 게 여의도의 평가입니다.

다만, '○○의 시간'이라는 용어는 성공적인 프레이밍일지는 몰라도, 그 말에 담긴 의미는 근본적 한계를 내포하기도 합니다. 여기까지는 국회, 여기서부터는 대통령, 또 여기서부터는 검찰, 여기서부터는 조국의 시간이라는 '프레이밍'은 구분짓기에서 유래합니다. 국회와 대통령은 시간의 경계를 넘지 않고 검찰과 조국의 시간은 융화되지 않습니다. 경계를 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그 사이, 정치권이 심심하면 찾는 '국민'의 시간은 스쳐 지나가듯 잠시 나왔다가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조국 정국을 좌우한 건 국민의 여론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국민의 시간이었지만, 국회와 대통령, 대통령과 검찰, 다시 검찰과 조국의 강 대 강 대치 속에 국민은 뒷전으로 밀려 제 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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