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 죽지 않게]② “사장님, 감형해 드립니다. 이유는요…” ‘산안법’ 1심 판결 전수분석

입력 2020.07.09 (11:42) 수정 2020.07.23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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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 이민호 군의 꿈은 '공장장'이었다. 친구들이 교실로 향할 때, 민호 군은 현장에 나갔다. 현장실습생 자격으로 일하던 제주의 한 음료 제조업체도 그 중 한 곳이었다. 일한 지 넉 달째 되던 2017년 11월, 제대로 된 안전 교육도 받지 않은 채 민호 군은 혼자 설비를 점검하다가 몸이 끼어 숨졌다.

일터에서 아들을 잃은 유가족들은 다시는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업체 대표를 엄벌해 달라고 법원에 호소했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 대표가 실형을 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1심에서 업체 대표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벌금 5백만 원이 내려졌다. 항소했지만 2심에서도 역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 사람 죽어도 '벌금 458만 원'…2018~2019년 판결문 전수 분석

일터에서 노동자가 죽거나 다치면 회사 대표, 안전관리 책임자 등이 처벌을 받는다.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안전과 보건 관리에 대한 최종 책임을 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법원은 노동자가 죽은 일터의 책임자들에게 어느 정도 책임을 묻고 있을까. KBS는 2018년과 2019년에 나온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1심 판결문 가운데, 법원 홈페이지에 공개된 671건을 '노동건강연대'와 함께 전수 분석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업체 대표, 현장 소장 등 법인을 제외한 피고인 1,065명 가운데 21명만 집행유예 없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비율로 따지면 전체의 1.9%, 평균 형량은 9.3개월에 그쳤다.

피고인의 절반가량인 49.5%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평균 벌금 액수는 458만 원이다. 숨진 노동자가 1명인 사건의 벌금 액수는 평균 513만 원, 2명이 숨진 사건의 벌금 액수는 717만 원으로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다.

■ "사단법인 이사장이라서", "낮은 층에서 떨어져 숨졌으니" 감형

산업안전보건법은 안전조치 소홀 등으로 노동자가 사망한 경우 사업주에게 7년 이하 징역이나 1억 원 이하 벌금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선고는 왜 이렇게 낮은 수준일까. 법은 센데 양형 기준이 약하기 때문이다. 법관이 선고에 참고하는 산안법의 양형기준 형량은 6월에서 1년 6월 사이에 불과하다.


이에 더해 법원이 다양한 사유를 들어 사업주들에게 관대한 처벌을 내려온 점이 판결문 분석 결과 드러났다. 노동자가 숨졌어도 피고인이 '반성을 한다'(38%), 유족과 '합의를 했다'(8%)는 이유 등으로 감형을 했다. 고용주가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산업재해보험 가입'(10%)을 이유로 감형된 경우도 상당했다.

황당한 감형 사유도 종종 등장했다. 2018년 10월 노동자 A 씨는 화물차의 적재함 위에서 양곡을 내리는 작업을 하다가 추락해 숨졌다. 사업주는 A 씨에게 안전모를 지급하지 않았고, 추락 위험이 있는 작업을 시키면서 사고 예방을 위한 작업계획서 작업을 생략했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인의 업무상과실로 근로자가 사망하는 중한 결과가 발생"했고 "피고인에게 동종전력이 수회 있다"고 언급하면서도 사업주에게 벌금형을 선고했다. 선고 이유로 "최근 피고인이 사단법인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이사장직의 원활한 수행이 필요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5월 경기도 이천 신축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추락 사고. 49살 노동자 B 씨는 2.5m 높이의 스카이차량 작업대에서 신축 건물 창호 설치를 하다가 떨어져 숨졌다. 숨진 B 씨에게 안전모와 안전벨트는 지급되지 않았고, 스카이차량 작업대는 전면과 측면 난간이 없는 불량한 상태였다. 추락 사고에 대비해 마땅히 설치됐어야 하는 안전망과 덮개 등도 없었다.

법원은 "안전조치를 취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고였다"면서도 원청과 하청 업체 사업주에게 각각 벌금 350만 원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감형 사유로는 피고인이 반성하고 유족과 합의했다는 점, 그리고 피해자가 "1층에서 작업하다 추락했다"는 점을 들었다.

■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해 처벌 하한선 마련해야"

판결문 전수 분석 작업에 참석한 노동건강연대 유성규 노무사는 "산재 사고를 발생시킨 업주를 중대한 범죄자로 보지 않고 (법원이) 어쩔 수 없는 일, 마치 자연재해의 결과 정도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법원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범죄에 대해 의도하지 않은 '과실범'이자 무언가를 해서 죽였다기보다는 무언가를 하지 않아서 죽게 한 '부작위범'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동안 노동계와 시민단체는 이런 인식을 바꾸기 위해 산재 사고를 '중죄'로 인식해달라고 호소해왔다.

KBS·노동건강연대는 2018-2019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1심 판결문 전수 분석했다.KBS·노동건강연대는 2018-2019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1심 판결문 전수 분석했다.

그러는 사이에 노동자들은 계속 죽었다. 지난해 일터에서 숨진 노동자는 855명, 올해 들어서도 지난 3월까지 253명이 숨졌다. 하루에 3명 가까운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어 나간 것이다. 그러나 일터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사장님들은 반성하고 합의했다는 이유 등으로 벌금 400여만 원만 내고 만다.

계속되는 솜방망이 처벌에 노동계는 이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마련해 처벌의 하한선을 두자고 주장한다. 유성규 노무사는 이 같은 주장이 나온 상황에 대해 무엇보다 법원이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는 법원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미 산업안전보건법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형량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법원이 산재 사건이 발생해도 사업주에게 미약한 책임만 물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하한선을 정해서라도 범죄에 적합한 처벌을 내려 달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연관기사] [일하다 죽지 않게]① 죽은 곳에서 또 죽는 일터는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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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하다 죽지 않게]② “사장님, 감형해 드립니다. 이유는요…” ‘산안법’ 1심 판결 전수분석
    • 입력 2020-07-09 11:42:52
    • 수정2020-07-23 13:16:33
    취재K

17살 이민호 군의 꿈은 '공장장'이었다. 친구들이 교실로 향할 때, 민호 군은 현장에 나갔다. 현장실습생 자격으로 일하던 제주의 한 음료 제조업체도 그 중 한 곳이었다. 일한 지 넉 달째 되던 2017년 11월, 제대로 된 안전 교육도 받지 않은 채 민호 군은 혼자 설비를 점검하다가 몸이 끼어 숨졌다.

일터에서 아들을 잃은 유가족들은 다시는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업체 대표를 엄벌해 달라고 법원에 호소했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 대표가 실형을 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1심에서 업체 대표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벌금 5백만 원이 내려졌다. 항소했지만 2심에서도 역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 사람 죽어도 '벌금 458만 원'…2018~2019년 판결문 전수 분석

일터에서 노동자가 죽거나 다치면 회사 대표, 안전관리 책임자 등이 처벌을 받는다.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안전과 보건 관리에 대한 최종 책임을 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법원은 노동자가 죽은 일터의 책임자들에게 어느 정도 책임을 묻고 있을까. KBS는 2018년과 2019년에 나온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1심 판결문 가운데, 법원 홈페이지에 공개된 671건을 '노동건강연대'와 함께 전수 분석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업체 대표, 현장 소장 등 법인을 제외한 피고인 1,065명 가운데 21명만 집행유예 없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비율로 따지면 전체의 1.9%, 평균 형량은 9.3개월에 그쳤다.

피고인의 절반가량인 49.5%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평균 벌금 액수는 458만 원이다. 숨진 노동자가 1명인 사건의 벌금 액수는 평균 513만 원, 2명이 숨진 사건의 벌금 액수는 717만 원으로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다.

■ "사단법인 이사장이라서", "낮은 층에서 떨어져 숨졌으니" 감형

산업안전보건법은 안전조치 소홀 등으로 노동자가 사망한 경우 사업주에게 7년 이하 징역이나 1억 원 이하 벌금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선고는 왜 이렇게 낮은 수준일까. 법은 센데 양형 기준이 약하기 때문이다. 법관이 선고에 참고하는 산안법의 양형기준 형량은 6월에서 1년 6월 사이에 불과하다.


이에 더해 법원이 다양한 사유를 들어 사업주들에게 관대한 처벌을 내려온 점이 판결문 분석 결과 드러났다. 노동자가 숨졌어도 피고인이 '반성을 한다'(38%), 유족과 '합의를 했다'(8%)는 이유 등으로 감형을 했다. 고용주가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산업재해보험 가입'(10%)을 이유로 감형된 경우도 상당했다.

황당한 감형 사유도 종종 등장했다. 2018년 10월 노동자 A 씨는 화물차의 적재함 위에서 양곡을 내리는 작업을 하다가 추락해 숨졌다. 사업주는 A 씨에게 안전모를 지급하지 않았고, 추락 위험이 있는 작업을 시키면서 사고 예방을 위한 작업계획서 작업을 생략했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인의 업무상과실로 근로자가 사망하는 중한 결과가 발생"했고 "피고인에게 동종전력이 수회 있다"고 언급하면서도 사업주에게 벌금형을 선고했다. 선고 이유로 "최근 피고인이 사단법인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이사장직의 원활한 수행이 필요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5월 경기도 이천 신축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추락 사고. 49살 노동자 B 씨는 2.5m 높이의 스카이차량 작업대에서 신축 건물 창호 설치를 하다가 떨어져 숨졌다. 숨진 B 씨에게 안전모와 안전벨트는 지급되지 않았고, 스카이차량 작업대는 전면과 측면 난간이 없는 불량한 상태였다. 추락 사고에 대비해 마땅히 설치됐어야 하는 안전망과 덮개 등도 없었다.

법원은 "안전조치를 취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고였다"면서도 원청과 하청 업체 사업주에게 각각 벌금 350만 원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감형 사유로는 피고인이 반성하고 유족과 합의했다는 점, 그리고 피해자가 "1층에서 작업하다 추락했다"는 점을 들었다.

■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해 처벌 하한선 마련해야"

판결문 전수 분석 작업에 참석한 노동건강연대 유성규 노무사는 "산재 사고를 발생시킨 업주를 중대한 범죄자로 보지 않고 (법원이) 어쩔 수 없는 일, 마치 자연재해의 결과 정도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법원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범죄에 대해 의도하지 않은 '과실범'이자 무언가를 해서 죽였다기보다는 무언가를 하지 않아서 죽게 한 '부작위범'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동안 노동계와 시민단체는 이런 인식을 바꾸기 위해 산재 사고를 '중죄'로 인식해달라고 호소해왔다.

KBS·노동건강연대는 2018-2019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1심 판결문 전수 분석했다.
그러는 사이에 노동자들은 계속 죽었다. 지난해 일터에서 숨진 노동자는 855명, 올해 들어서도 지난 3월까지 253명이 숨졌다. 하루에 3명 가까운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어 나간 것이다. 그러나 일터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사장님들은 반성하고 합의했다는 이유 등으로 벌금 400여만 원만 내고 만다.

계속되는 솜방망이 처벌에 노동계는 이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마련해 처벌의 하한선을 두자고 주장한다. 유성규 노무사는 이 같은 주장이 나온 상황에 대해 무엇보다 법원이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는 법원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미 산업안전보건법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형량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법원이 산재 사건이 발생해도 사업주에게 미약한 책임만 물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하한선을 정해서라도 범죄에 적합한 처벌을 내려 달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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