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삼한칠미’ 시대에 사과와 명태로 기후위기를 체감할까?

입력 2021.03.03 (16:01) 수정 2021.03.08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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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삼한사미가 아니라 삼한칠미!!"

전북 무주 푸른꿈 고등학교에서 환경 과목을 가르치는 고성원 선생님은 아이들이 건넨 말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2019년 봄이었습니다. 3월 개학을 한 뒤 고농도 미세먼지가 밀려와 1주일 내내 대기가 뿌옇게 흐려 있었습니다.

개학의 설렘을 앗아가 버린 미세먼지. 당시에는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이었지만, 아이들은 마스크를 벗을 수 없었는데요. '3일 춥고 4일은 미세먼지'라는 신조어 '삼한사미' 대신 '삼한칠미'라는 말까지 아이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고성원 전북 무주 푸른꿈고 환경 교사는 아이들이 기후위기를 체감하는 정도가 나날이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 고성원 전북 무주 푸른꿈고 환경 교사는 아이들이 기후위기를 체감하는 정도가 나날이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무척 심각하구나, 정말 위기구나 이렇게 느낀 것 같았어요. 지난해의 경우 장마가 최장 54일이나 길게 이어졌잖아요. 그런 일들이 점차 가시화되면서 아이들도 위기를 체감하는 정도가 커지고 있습니다."

고성원 선생님은 학생들이 닥쳐온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알려 주고, 자꾸 고민할 수 있게 질문을 던져주는 일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했는데요.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선생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체계적인 교과 과정 속에서 내실 있는 교실 안팎의 경험이 더해져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연관기사][교과서 점검] 수십 년째 온돌에 대청마루…‘시대착오’ 교과서?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28406

■인류가 바꾼 교과서, 이산화탄소 비율 0.03에서 0.04%로

2010년대 중반에 개정된 교과서에 이산화탄소 비율이 0.04%로 표시돼있다.2010년대 중반에 개정된 교과서에 이산화탄소 비율이 0.04%로 표시돼있다.

이번 '교과서 기획'은 우연히 시작됐습니다. 저는 대기과학을 전공했지만 사실 전공 수업 시간에도 기후위기나 온난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를 보다가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비율이 0.04%, 그러니까 400ppm으로 표시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분명 0.03%(300ppm)로 외웠는데 말이죠.


1990년대 교과서에는 이산화탄소 비율이 0.03%라고 표시돼있다.1990년대 교과서에는 이산화탄소 비율이 0.03%라고 표시돼있다.

불과 20년 만에 0.01%, 즉 100ppm 이상 이산화탄소 농도가 상승하고 교과서까지 바뀐 건데, 수치는 작아 보이지만 결과는 상상하지 못한 수준입니다. 과거 수십만 년 전 기후 데이터를 들춰봐도,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300ppm 안팎을 일정하게 오르내렸고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급격한 변화는 없었으니까요.

앞으로가 더 걱정입니다.

지금 이산화탄소 배출을 '0'으로 줄여도 이미 수백 년 전에 배출한 양이 대기 중에 쌓여있기 때문에 농도는 당분간 올라갈 게 뻔한데요. 언젠가 인류 멸종을 의미하는 450ppm(0.045%)이란 수치가 등장하지 않을까요? 해마다 기상이변이 속출하는 것도 모자라, 앞으로는 코로나19 같은 신종 바이러스까지 인류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힐지 모릅니다.

교과서를 보던 중 지금보다 더 불확실하고 위험 부담이 높은 미래를 살아갈 학생들은 과연 현실을 알고 있는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사과와 명태, 벚꽃만으로 "기후위기 체감 어렵다"


그래서 KBS는 현직 초중고 교사들과 함께 교과서 자문단을 꾸렸습니다.

[KBS 교과서 자문단 명단]
장소영/울산 옥서초 신경준/서울 숭문중 이수종/서울 신연중
고성원/전북 무주 푸른꿈고 김추령/서울 신도고 윤신원/서울 성남고

교육현장 일선에 있는 현직 교사들과 함께 사회와 과학, 도덕, 기술가정 등 초중고 교과서를 분석해 봤는데요. 현재 학생들이 공부하는 2015년 개정 교과서 가운데 가장 채택률이 높은 3종을 정해 기후 관련 개념이 어떻게 기술돼 있는지, 또 내용은 적절한지 들여다봤습니다. '기후 변화'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하던 1990년대부터 지난 30년 동안의 교과서를 살펴보면서 기후 관련 내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살펴봤습니다.

[연관기사]‘기후 위기’ 시대 우리 교과서는?…자문단 심층 분석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29742

선생님들이 공통으로 지적한 점은 교과서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현실의 재난이나 위기 상황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채 지나치게 과거의 이야기에만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교과서 개정에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2020년대의 학생들이 체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한국지리 교과서에 기후변화로 과일 재배지가 북상하고 있는 그림이 실려있다. 한국지리 교과서에 기후변화로 과일 재배지가 북상하고 있는 그림이 실려있다.

기후 변화의 사례로 늘 등장하는 것은 사과와 한라봉의 재배지역이 북상한다거나 명태, 오징어 등 어종의 변화, 아니면 벚꽃의 개화 시기였습니다. 물론 농·수산물, 꽃의 개화 시기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연 현상을 주로 다루다 보니 학생들이 기후 변화의 심각성이나 시급성을 느끼기 힘들다고 현직 교사들은 입을 모아 지적했습니다.

기후위기로 인해 학생들이 가까운 미래에 겪게 될 노동 현장이나 주거 환경의 변화 관련 내용을 지금보다 훨씬 더 늘려야 한다는 겁니다. 또 직접적인 재난, 재해 피해 등을 미리 알려주고 어떻게 대비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학교에서 꼭 가르쳐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성장과 개발 위주의 시각…. 기후위기의 '책임'은 어디에?

특히 세계의 다양한 기후를 소개하는 중학교 사회 교과서는 지나치게 '개발'과 '성장'에만 초점을 맞췄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윤신원 선생님은 "툰드라 기후와 관련해서는 송유관 건설, 건조 기후에서는 석유 개발과 댐 건설 등이 기후 조건을 극복한 성공 사례로 다뤄지는데 적응과 개발에만 무게를 두고 있어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수종 선생님은 "교육과정 자체가 유기적으로 통합돼있지 않다."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아래의 중학교 교육과정을 보면 기후변화의 개념이 등장하는 과학 교과는 3학년 1학기에 배치돼있습니다. 또 기후변화 대응을 다루는 사회 교과는 1학년이나 2학년, 실천을 강조하는 도덕은 2학년이나 학교에 따라서 3학년에 가르치기도 하는데요.


이 선생님은 개념을 먼저 배운 뒤 대응과 실천으로 이어져야 할 교과 과정이 현실에서는 거꾸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내년에 개정을 앞둔 차기 교육 과정에서는 이런 점을 고려해 기후위기 대응 교육을 체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교과서 자문단의 일원인 윤신원 선생님은 여기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환경은 지식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천적 영역으로 넘어가려면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학생들이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공감하고 토의하는 과정에서 고민도 하고 삶의 습관과 행동이 바뀌는 영역까지 나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교육은 입시에 얽매여있는 데다가 분량 자체가 너무 적기 때문에 앞으로 기후위기와 환경에 대한 교육을 양과 질의 면에서 늘려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후위기의 시대, 현행 교과서를 심층 분석한 [취재후] 다음 편에선 '30년째 북극곰에만 집착하는' 교과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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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삼한칠미’ 시대에 사과와 명태로 기후위기를 체감할까?
    • 입력 2021-03-03 16:01:38
    • 수정2021-03-08 15:27:47
    취재후·사건후

■"이제 삼한사미가 아니라 삼한칠미!!"

전북 무주 푸른꿈 고등학교에서 환경 과목을 가르치는 고성원 선생님은 아이들이 건넨 말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2019년 봄이었습니다. 3월 개학을 한 뒤 고농도 미세먼지가 밀려와 1주일 내내 대기가 뿌옇게 흐려 있었습니다.

개학의 설렘을 앗아가 버린 미세먼지. 당시에는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이었지만, 아이들은 마스크를 벗을 수 없었는데요. '3일 춥고 4일은 미세먼지'라는 신조어 '삼한사미' 대신 '삼한칠미'라는 말까지 아이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고성원 전북 무주 푸른꿈고 환경 교사는 아이들이 기후위기를 체감하는 정도가 나날이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무척 심각하구나, 정말 위기구나 이렇게 느낀 것 같았어요. 지난해의 경우 장마가 최장 54일이나 길게 이어졌잖아요. 그런 일들이 점차 가시화되면서 아이들도 위기를 체감하는 정도가 커지고 있습니다."

고성원 선생님은 학생들이 닥쳐온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알려 주고, 자꾸 고민할 수 있게 질문을 던져주는 일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했는데요.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선생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체계적인 교과 과정 속에서 내실 있는 교실 안팎의 경험이 더해져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연관기사][교과서 점검] 수십 년째 온돌에 대청마루…‘시대착오’ 교과서?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28406

■인류가 바꾼 교과서, 이산화탄소 비율 0.03에서 0.04%로

2010년대 중반에 개정된 교과서에 이산화탄소 비율이 0.04%로 표시돼있다.
이번 '교과서 기획'은 우연히 시작됐습니다. 저는 대기과학을 전공했지만 사실 전공 수업 시간에도 기후위기나 온난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를 보다가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비율이 0.04%, 그러니까 400ppm으로 표시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분명 0.03%(300ppm)로 외웠는데 말이죠.


1990년대 교과서에는 이산화탄소 비율이 0.03%라고 표시돼있다.
불과 20년 만에 0.01%, 즉 100ppm 이상 이산화탄소 농도가 상승하고 교과서까지 바뀐 건데, 수치는 작아 보이지만 결과는 상상하지 못한 수준입니다. 과거 수십만 년 전 기후 데이터를 들춰봐도,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300ppm 안팎을 일정하게 오르내렸고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급격한 변화는 없었으니까요.

앞으로가 더 걱정입니다.

지금 이산화탄소 배출을 '0'으로 줄여도 이미 수백 년 전에 배출한 양이 대기 중에 쌓여있기 때문에 농도는 당분간 올라갈 게 뻔한데요. 언젠가 인류 멸종을 의미하는 450ppm(0.045%)이란 수치가 등장하지 않을까요? 해마다 기상이변이 속출하는 것도 모자라, 앞으로는 코로나19 같은 신종 바이러스까지 인류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힐지 모릅니다.

교과서를 보던 중 지금보다 더 불확실하고 위험 부담이 높은 미래를 살아갈 학생들은 과연 현실을 알고 있는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사과와 명태, 벚꽃만으로 "기후위기 체감 어렵다"


그래서 KBS는 현직 초중고 교사들과 함께 교과서 자문단을 꾸렸습니다.

[KBS 교과서 자문단 명단]
장소영/울산 옥서초 신경준/서울 숭문중 이수종/서울 신연중
고성원/전북 무주 푸른꿈고 김추령/서울 신도고 윤신원/서울 성남고

교육현장 일선에 있는 현직 교사들과 함께 사회와 과학, 도덕, 기술가정 등 초중고 교과서를 분석해 봤는데요. 현재 학생들이 공부하는 2015년 개정 교과서 가운데 가장 채택률이 높은 3종을 정해 기후 관련 개념이 어떻게 기술돼 있는지, 또 내용은 적절한지 들여다봤습니다. '기후 변화'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하던 1990년대부터 지난 30년 동안의 교과서를 살펴보면서 기후 관련 내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살펴봤습니다.

[연관기사]‘기후 위기’ 시대 우리 교과서는?…자문단 심층 분석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29742

선생님들이 공통으로 지적한 점은 교과서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현실의 재난이나 위기 상황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채 지나치게 과거의 이야기에만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교과서 개정에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2020년대의 학생들이 체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한국지리 교과서에 기후변화로 과일 재배지가 북상하고 있는 그림이 실려있다.
기후 변화의 사례로 늘 등장하는 것은 사과와 한라봉의 재배지역이 북상한다거나 명태, 오징어 등 어종의 변화, 아니면 벚꽃의 개화 시기였습니다. 물론 농·수산물, 꽃의 개화 시기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연 현상을 주로 다루다 보니 학생들이 기후 변화의 심각성이나 시급성을 느끼기 힘들다고 현직 교사들은 입을 모아 지적했습니다.

기후위기로 인해 학생들이 가까운 미래에 겪게 될 노동 현장이나 주거 환경의 변화 관련 내용을 지금보다 훨씬 더 늘려야 한다는 겁니다. 또 직접적인 재난, 재해 피해 등을 미리 알려주고 어떻게 대비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학교에서 꼭 가르쳐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성장과 개발 위주의 시각…. 기후위기의 '책임'은 어디에?

특히 세계의 다양한 기후를 소개하는 중학교 사회 교과서는 지나치게 '개발'과 '성장'에만 초점을 맞췄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윤신원 선생님은 "툰드라 기후와 관련해서는 송유관 건설, 건조 기후에서는 석유 개발과 댐 건설 등이 기후 조건을 극복한 성공 사례로 다뤄지는데 적응과 개발에만 무게를 두고 있어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수종 선생님은 "교육과정 자체가 유기적으로 통합돼있지 않다."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아래의 중학교 교육과정을 보면 기후변화의 개념이 등장하는 과학 교과는 3학년 1학기에 배치돼있습니다. 또 기후변화 대응을 다루는 사회 교과는 1학년이나 2학년, 실천을 강조하는 도덕은 2학년이나 학교에 따라서 3학년에 가르치기도 하는데요.


이 선생님은 개념을 먼저 배운 뒤 대응과 실천으로 이어져야 할 교과 과정이 현실에서는 거꾸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내년에 개정을 앞둔 차기 교육 과정에서는 이런 점을 고려해 기후위기 대응 교육을 체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교과서 자문단의 일원인 윤신원 선생님은 여기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환경은 지식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천적 영역으로 넘어가려면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학생들이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공감하고 토의하는 과정에서 고민도 하고 삶의 습관과 행동이 바뀌는 영역까지 나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교육은 입시에 얽매여있는 데다가 분량 자체가 너무 적기 때문에 앞으로 기후위기와 환경에 대한 교육을 양과 질의 면에서 늘려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후위기의 시대, 현행 교과서를 심층 분석한 [취재후] 다음 편에선 '30년째 북극곰에만 집착하는' 교과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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