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와인 곁들인 윤여정의 현지 기자회견…그리고 그녀가 말한 ‘진심’

입력 2021.04.28 (08:43) 수정 2021.04.2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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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배우 사상 처음으로 미국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 씨가 한국 특파원단과 기자회견을 가졌는데요.

이 자리에서 백포도주 한 잔을 마시며 솔직한 입담을 풀어놓은 윤여정 씨의 회견 생중계를 보며 ‘오늘의 장면’으로 꼽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한국 배우 최초, 아시아 여배우로는 역대 두번째라는 오스카상을 받은 직후 윤여정 씨가 기자회견을 이끌어가는 분위기를 자유분방하게 만들어 준 것도 역시 와인 한 잔을 곁들인 편안한 모습이었는데요.

LA 현장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특파원으로서 제가 듣고 본 이야기를 좀 풀어볼까 합니다.


■ 포도주 한 잔 걸친 윤여정의 인간미

현장 기자회견에 참석한 특파원들도 윤여정 씨가 포도주를 요청했는 지 여부에 대해 처음엔 잘 몰랐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마치자 마자 바로 기자회견이 열리는 LA 총영사관저로 이동했고, 자리에 앉아서 “한 잔 하시는 모습”이 곧바로 방송사 생중계로 전해졌습니다.

영화 전문기자들도 아니고 워싱턴 D.C.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는 각 사 기자들이 내놓은 질문들은 어쩌면 너무나 딱딱하고 근엄한 것들이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윤여정 씨는 특유의 유쾌함으로 간담회를 이끌어갔고, 중간중간 돌직구를 던지면서 “어머, 내가 취했나봐”라고 가식없는 면모를 보였습니다.

30여 분 간 진행된 간담회을 관통한 윤여정 씨의 철학이 드러나는 모습을 몇 가지 소개합니다.


■ ‘진정성’ 이라는 단어 쓰기 싫다

몇 번이나 윤여정 씨가 되뇌인 말은 “진정성.. 아, 나 이 말 정말 쓰기 싫은데... 진정성은 아니고” 라는 말이었습니다.

왜 ‘미나리’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에도, 정이삭 감독은 어땠냐는 질문에도 윤여정 씨는 “너무 순수하고 너무 진지하고... 진정성.. 진정성 단어 하기가 싫어서 그래” 라며 진정성보다는 ‘진심’이라고 일부러 단어를 골랐습니다.

진정성이라는 말이 사실은 진정성이 없는 사람들이 보여주기 위해 쓰는 말처럼 되긴 했습니다.

‘진정’ 이나 ‘진심’이라는 건 오롯이 존재하는 마음이지만 그 뒤에 성(性)이 붙으면 ‘그러하고자 하는 마음’이 되잖아요. 진심으로 하면 되는데 진심으로 ‘보여지려는 마음’ 처럼 느껴지는 단어인 동시에 진심을 평가하려는 단어처럼 느껴지는 진정성이라는 말을 굳이 회피한 것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심이 통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요즘 세상은 진심이 안통하는 세상이잖아요”라고 뼈 있는 말을 던졌는데요.

“배신을 많이 당해봤다”, “진심이 안통하는 세상이다”라고 세상을 믿지 않는 쓴소리를 하면서도 “진심이 통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수상에) “진심이 통했다”는 말을 통해 현실주의자처럼 보이려는 실은 따뜻한 이상주의자의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 한국 사람의 종자로 미국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세련된 정이삭 감독에게 희망을 보았다

어찌보면 갑질에 대한, 꼰대에 대한 경종일까요?

“내가 뒷담화를 안한 감독은 정이삭이 처음이래요”며 윤여정 씨는 “얘는 나보다 어린 애인데. 어떻게 이렇게 뭐라 그래야할까. 차분하고. 현장에서는 다 미치거든요. 그걸 너무 차분하게. 컨트롤하는데. 아무도 누구를 모욕주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고 다 존중하면서 해요.”라고 설명했습니다.

“한국 사람의 종자로다가 미국 교육을 받아서 굉장히 세련된 한국인이 나온거구나. 너무너무 희망적이었어요. 우리 한국 사람들 살면서 흉보는게 아니고. 너무 좋았었어요. 그 세련됨을 보는 거가. 걔라고 화 안나겠어요? 그런데 그걸 다 컨트롤 하는거가. 그래서 마흔세살 먹은 애인데 내가 존경한다고 그랬어요.”

그 누구도 모욕주지 않고 존중하며 현장을 컨트롤한다는 말은 대한민국 사람 누구라도 와닿았을 겁니다.

책임자의 위치에서 꼰대와 갑이 되지 않고 일하는 감독에게 희망을 보았다는 윤여정 씨의 말은 팩트폭격인 동시에 경전의 문구와 같은 구절이었습니다.


■ 우리 ‘최고’ 말고 ‘최중’해요.

‘지금 인생 최고의 순간이냐’는 질문에 윤여정 씨는 딱 잘라서 “일등, 최고, 이런 거 싫다”고 답했습니다.

아카데미가 전부인 것도 아니고, 최고의 순간인지도 모르겠다며 “우리 모두 최고가 되려고 그러지 맙시다. 최중만 되면 되잖아. 다 동등하게 살면 안되나요?”라고 하는 말에 쿵!하고 머리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올림픽 선수도 아니고, 스포츠 경쟁도 아니고 그 사람들 얼마나 힘들었겠냐며 “우리 모두 최중”해요.. 라는 윤여정 씨의 말은 경쟁에 내몰려 지쳐있으면서도 누군가 경쟁에서 이기면 또 그렇게 난리치는 우리 삶에(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다독다독 쉼을 주는 언어로 들렸습니다.


■ 내 이름은 여정 윤이다


수상 소감으로 많이 회자된 “내 이름은 여정 윤이다, 유정, 이렇게 발음하는 사람들 오늘은 다 용서하겠다”고 했는데요. 상당히 날카로운 수상소감이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아시아계 증오범죄와 관련된 언어기도 했습니다. 우리와도 관련있어 많이 전해졌던 뉴스죠. 애틀랜타에서 한인여성 4명을 포함해 아시아 여성들이 연쇄총격으로 사망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 미 전역에 #Stop_Asian_Hate(아시아인에 대한 증오범죄를 멈춰라) 집회가 크게 벌어졌는데요.


이 집회와 함께 이뤄진 운동이 바로 아시아인들 이름 제대로 발음하기 운동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이 애틀랜타 총격 사망자의 이름을 번번히 잘못 발음하자 AAPI(아시아계 미국인 태평양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페이스북, 트위터 등에 전파되기도 했는데요. #그들의이름을불러보세요 #saytheirname.




윤여정 씨의 관련 발언은 그간 아카데미에서 이뤄져왔던 어떤 사회적 발언보다 날카롭게 미국 내 인종차별에 경종을 울리는발언이었던 셈입니다. 비록 브래드 피트에 가려져서 우리 언론에는 크게 다뤄지지 않았지만요.

아, 그리고 회견장에 곁들여진 와인 한 잔은 LA 총영사 관저에서 미리 준비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LA 총영사가 평소 화이트 와인을 좋아하고 즐겨마신다는 윤여정 씨의 취향을 기사에서 보고 백포도주를 미리 준비했고, 도착하면 목이라도 축일 수 있게 관저 입구에 와인을 여러 잔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윤여정 씨가 현장에 도착해서 한 모금 마시고, 바로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했는데 자리에 앉으면서 아까 마시던 잔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윤여정 씨의 수상 그 자체보다 이 노장 배우가 할리우드에 전하는 메시지와 태도에 현지 언론은 더 집중했습니다. 당당하면서도 품위있게 돌직구를 던졌던 윤여정의 오스카는 두고두고 명장면으로 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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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와인 곁들인 윤여정의 현지 기자회견…그리고 그녀가 말한 ‘진심’
    • 입력 2021-04-28 08:43:30
    • 수정2021-04-28 10:49:12
    취재후·사건후

한국 배우 사상 처음으로 미국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 씨가 한국 특파원단과 기자회견을 가졌는데요.

이 자리에서 백포도주 한 잔을 마시며 솔직한 입담을 풀어놓은 윤여정 씨의 회견 생중계를 보며 ‘오늘의 장면’으로 꼽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한국 배우 최초, 아시아 여배우로는 역대 두번째라는 오스카상을 받은 직후 윤여정 씨가 기자회견을 이끌어가는 분위기를 자유분방하게 만들어 준 것도 역시 와인 한 잔을 곁들인 편안한 모습이었는데요.

LA 현장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특파원으로서 제가 듣고 본 이야기를 좀 풀어볼까 합니다.


■ 포도주 한 잔 걸친 윤여정의 인간미

현장 기자회견에 참석한 특파원들도 윤여정 씨가 포도주를 요청했는 지 여부에 대해 처음엔 잘 몰랐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마치자 마자 바로 기자회견이 열리는 LA 총영사관저로 이동했고, 자리에 앉아서 “한 잔 하시는 모습”이 곧바로 방송사 생중계로 전해졌습니다.

영화 전문기자들도 아니고 워싱턴 D.C.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는 각 사 기자들이 내놓은 질문들은 어쩌면 너무나 딱딱하고 근엄한 것들이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윤여정 씨는 특유의 유쾌함으로 간담회를 이끌어갔고, 중간중간 돌직구를 던지면서 “어머, 내가 취했나봐”라고 가식없는 면모를 보였습니다.

30여 분 간 진행된 간담회을 관통한 윤여정 씨의 철학이 드러나는 모습을 몇 가지 소개합니다.


■ ‘진정성’ 이라는 단어 쓰기 싫다

몇 번이나 윤여정 씨가 되뇌인 말은 “진정성.. 아, 나 이 말 정말 쓰기 싫은데... 진정성은 아니고” 라는 말이었습니다.

왜 ‘미나리’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에도, 정이삭 감독은 어땠냐는 질문에도 윤여정 씨는 “너무 순수하고 너무 진지하고... 진정성.. 진정성 단어 하기가 싫어서 그래” 라며 진정성보다는 ‘진심’이라고 일부러 단어를 골랐습니다.

진정성이라는 말이 사실은 진정성이 없는 사람들이 보여주기 위해 쓰는 말처럼 되긴 했습니다.

‘진정’ 이나 ‘진심’이라는 건 오롯이 존재하는 마음이지만 그 뒤에 성(性)이 붙으면 ‘그러하고자 하는 마음’이 되잖아요. 진심으로 하면 되는데 진심으로 ‘보여지려는 마음’ 처럼 느껴지는 단어인 동시에 진심을 평가하려는 단어처럼 느껴지는 진정성이라는 말을 굳이 회피한 것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심이 통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요즘 세상은 진심이 안통하는 세상이잖아요”라고 뼈 있는 말을 던졌는데요.

“배신을 많이 당해봤다”, “진심이 안통하는 세상이다”라고 세상을 믿지 않는 쓴소리를 하면서도 “진심이 통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수상에) “진심이 통했다”는 말을 통해 현실주의자처럼 보이려는 실은 따뜻한 이상주의자의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 한국 사람의 종자로 미국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세련된 정이삭 감독에게 희망을 보았다

어찌보면 갑질에 대한, 꼰대에 대한 경종일까요?

“내가 뒷담화를 안한 감독은 정이삭이 처음이래요”며 윤여정 씨는 “얘는 나보다 어린 애인데. 어떻게 이렇게 뭐라 그래야할까. 차분하고. 현장에서는 다 미치거든요. 그걸 너무 차분하게. 컨트롤하는데. 아무도 누구를 모욕주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고 다 존중하면서 해요.”라고 설명했습니다.

“한국 사람의 종자로다가 미국 교육을 받아서 굉장히 세련된 한국인이 나온거구나. 너무너무 희망적이었어요. 우리 한국 사람들 살면서 흉보는게 아니고. 너무 좋았었어요. 그 세련됨을 보는 거가. 걔라고 화 안나겠어요? 그런데 그걸 다 컨트롤 하는거가. 그래서 마흔세살 먹은 애인데 내가 존경한다고 그랬어요.”

그 누구도 모욕주지 않고 존중하며 현장을 컨트롤한다는 말은 대한민국 사람 누구라도 와닿았을 겁니다.

책임자의 위치에서 꼰대와 갑이 되지 않고 일하는 감독에게 희망을 보았다는 윤여정 씨의 말은 팩트폭격인 동시에 경전의 문구와 같은 구절이었습니다.


■ 우리 ‘최고’ 말고 ‘최중’해요.

‘지금 인생 최고의 순간이냐’는 질문에 윤여정 씨는 딱 잘라서 “일등, 최고, 이런 거 싫다”고 답했습니다.

아카데미가 전부인 것도 아니고, 최고의 순간인지도 모르겠다며 “우리 모두 최고가 되려고 그러지 맙시다. 최중만 되면 되잖아. 다 동등하게 살면 안되나요?”라고 하는 말에 쿵!하고 머리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올림픽 선수도 아니고, 스포츠 경쟁도 아니고 그 사람들 얼마나 힘들었겠냐며 “우리 모두 최중”해요.. 라는 윤여정 씨의 말은 경쟁에 내몰려 지쳐있으면서도 누군가 경쟁에서 이기면 또 그렇게 난리치는 우리 삶에(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다독다독 쉼을 주는 언어로 들렸습니다.


■ 내 이름은 여정 윤이다


수상 소감으로 많이 회자된 “내 이름은 여정 윤이다, 유정, 이렇게 발음하는 사람들 오늘은 다 용서하겠다”고 했는데요. 상당히 날카로운 수상소감이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아시아계 증오범죄와 관련된 언어기도 했습니다. 우리와도 관련있어 많이 전해졌던 뉴스죠. 애틀랜타에서 한인여성 4명을 포함해 아시아 여성들이 연쇄총격으로 사망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 미 전역에 #Stop_Asian_Hate(아시아인에 대한 증오범죄를 멈춰라) 집회가 크게 벌어졌는데요.


이 집회와 함께 이뤄진 운동이 바로 아시아인들 이름 제대로 발음하기 운동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이 애틀랜타 총격 사망자의 이름을 번번히 잘못 발음하자 AAPI(아시아계 미국인 태평양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페이스북, 트위터 등에 전파되기도 했는데요. #그들의이름을불러보세요 #saytheirname.




윤여정 씨의 관련 발언은 그간 아카데미에서 이뤄져왔던 어떤 사회적 발언보다 날카롭게 미국 내 인종차별에 경종을 울리는발언이었던 셈입니다. 비록 브래드 피트에 가려져서 우리 언론에는 크게 다뤄지지 않았지만요.

아, 그리고 회견장에 곁들여진 와인 한 잔은 LA 총영사 관저에서 미리 준비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LA 총영사가 평소 화이트 와인을 좋아하고 즐겨마신다는 윤여정 씨의 취향을 기사에서 보고 백포도주를 미리 준비했고, 도착하면 목이라도 축일 수 있게 관저 입구에 와인을 여러 잔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윤여정 씨가 현장에 도착해서 한 모금 마시고, 바로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했는데 자리에 앉으면서 아까 마시던 잔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윤여정 씨의 수상 그 자체보다 이 노장 배우가 할리우드에 전하는 메시지와 태도에 현지 언론은 더 집중했습니다. 당당하면서도 품위있게 돌직구를 던졌던 윤여정의 오스카는 두고두고 명장면으로 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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