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기술 유출도 진화?…중국에 ‘기업이 통째로’

입력 2022.05.27 (07:00) 수정 2022.05.27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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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나날이 진화하는 중국의 기술유출 수법
기술유출, 개인의 도덕적 해이에서 집단의 문제로
미-중 패권 다툼, 기술유출 부추길 수 있다?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선 S사 엔지니어 A 씨와 B 씨. 2019년 이전에는 삼성전자 자회사 '세메스'에서 각각 반도체 웨이퍼 세정 장비의 이송 로봇과 전기장치 관련 연구·개발을 맡던 연구원이었습니다.

검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세메스에서 일하면서 기술을 빼냈고, S사로 이직한 뒤엔 세메스와 똑같은 세정 장비를 만드는데 손을 보탰습니다. A 씨는 이송로봇에 들어가는 부품 목록을 취득해 로봇을 만드는 협력업체에 넘겼고, B 씨는 차세대 세정 장비의 히터 세팅 값과 잠금장치 정보 등을 빼내 전기장치 제작 협력업체에 넘겼습니다.

■ 검찰 "삼성 반도체 세정 기술, 중국 손으로"

수원지검 방위사업‧산업기술범죄형사부(부장검사 이춘)가 어제(25일)까지 세메스 기술유출 혐의로 재판에 넘긴 사람은 모두 9명(구속 7명·불구속 2명). 세메스 출신으로 S사로 옮겨간 7명과 세메스 협력업체 임직원 2명입니다.

이들은 세메스 세정 장비의 설계도면, 부품 목록, 소프트웨어, 작업표준서 등 '한 조각'의 기술자료를 갖고 나왔고, 주범 C 씨가 설립한 S사에서 세메스와 똑같은 세정 장비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비와 기술자료는 결국 중국의 장비업체 '즈춘커지'와 국영 반도체 연구소인 상하이집적회로혁신센터, ICRD로 넘어갔다는 게 검찰의 결론입니다. 연구원 1~2명을 데려가는 수준이 아니라, 반도체 주요 공정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대로 넘어간 셈입니다.

■진화하는 중국의 기술유출 수법

이런 기술유출 수법도 진화한 걸까요? 지난해 서울중앙지검은 SK하이닉스에 세정 장비를 공급하던 M전자가 최신 D램 공정과 세정 레시피를 중국에 유출했다며 M전자 임직원 등 16명을 재판에 넘겼습니다.

이들은 SK하이닉스와 협업 과정에서 알게 된 핵심기술 정보를 중국에 유출했고, 중국 수출용으로 만든 세정 장비에 빼돌린 기술을 그대로 활용했습니다.

과거에도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등 우리 기업들이 앞서고 있는 분야의 기술은 뒤늦게 따라오려는 중국 기업들의 먹잇감이었습니다. 다만, 국내업체 기술 인력을 이른바 모셔 가거나 국내 업체 내부에 스파이를 확보해 기술 자료를 빼가는 방식이 주를 이뤘습니다.

지난해 초 2차전지 양극재 생산업체 퇴직 연구원 2명이 해외업체 이직을 목적으로 기술자료를 빼돌리다가 적발되거나, 2020년 국내기업과 반도체 장비를 공동으로 연구한 한 대학 교수가 연구 성과물을 다른 업체에 넘긴 사건 등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런데 기업들이 ‘동종업계 이직금지 제도'를 도입하고 법원에 전직 금지 신청을 내는 식으로 이직에 대응하자, 중국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국정원은 2년 전, 자동차 강판 도금량 제어기술 자료를 빼내고 같은 설비를 만들어 해외 경쟁사에 판매한 전 철강업체 직원을 적발했습니다. 세메스 기술을 유출한 S사, SK하이닉스 협력업체였던 M전자와 마찬가지로 특정 공정에 관련된 장비를 판매하는 식으로 기술을 넘긴 사례입니다.

■기술유출, 조직화·기업화

자연스럽게 기술유출의 주체도 연구 인력 개인에서 이제는 회사 단위로 커지고 있습니다.

이번 세메스 기술유출 사건에서도 기술을 빼낸 것은 전직 연구원들이었지만, 중국에 넘긴 주체는 검찰이 범행을 주도한 것으로 파악한 C 씨가 설립한 S사였습니다. 거래 구조는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기술력을 확보한 중소기업이 해외시장 개척에 성공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의 거래는 연구 인력이 해외업체로 바로 이직하면서 가질 수 있는 윤리적 부담을 덜어줍니다. 또 기술유출 이후에 '토사구팽'을 당하더라도 회사 자산은 그대로 남습니다. 무엇보다 기존 협력업체 네트워크까지 고스란히 넘겨받을 수 있습니다. 피해업체 입장에선 인력 유출보다 훨씬 치명적인 대목입니다.

이번에 세메스의 협력업체인 E사도 세메스 기술이 반영된 세정 장비 회전판 부품(스핀척)을 제작해 S사에 판매하다 적발됐습니다. 또, 이송로봇 전자장비 등의 기술도 각각 다른 협력업체로 넘어간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습니다.

미-중 패권 다툼이 기술유출로…

이번 사건을 취재하는 동안 업계와 수사기관은 입을 모았습니다. 적발된 기술 유출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 다툼을 하고, 자국 우선주의 색채가 짙은 세계 정세도 기술유출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습니다. 중국이 미국의 제재로 수년 전부터 미국은 물론 다른 국가로부터 반도체 장비를 아예 수입해올 수 없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이번에 세메스 기술의 세정 장비를 가져간 중국 ICRD가 2년 전에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장비업체인 네덜란드 ASML과 글로벌 트레이닝 센터를 세우고 협력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중국 반도체 업체들은 미세 공정의 핵심이라는 ASML의 노광 장비를 사 올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이병인 한중시스템IC연구원장은 "우리 반도체 업계는 글로벌 분업체계를 통해 모든 분야에 투자하는 대신 '파운드리' 등 일부에 투자를 집중할 수 있다"며 "중국은 지금 미국의 규제로 반도체 장비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8대 공정의 모든 장비 개발에 투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의 반도체 공정은 여전히 우리보다 5년가량 뒤처진 상황. '굴기(우뚝 섬)'와는 거리가 먼 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선 언제든 기술을 빼가려고 시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 번 빠져나간 기술은 되찾아올 방법이 없습니다. 나날이 고도화되는 기술 유출을 잡아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수십 년간 인력과 예산을 들여 개발한 첨단 기술을 지켜내려면 기업, 또 정부가 나서 자구책을 마련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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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기술 유출도 진화?…중국에 ‘기업이 통째로’
    • 입력 2022-05-27 07:00:21
    • 수정2022-05-27 07:01:17
    취재후·사건후
나날이 진화하는 중국의 기술유출 수법<br />기술유출, 개인의 도덕적 해이에서 집단의 문제로<br />미-중 패권 다툼, 기술유출 부추길 수 있다?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선 S사 엔지니어 A 씨와 B 씨. 2019년 이전에는 삼성전자 자회사 '세메스'에서 각각 반도체 웨이퍼 세정 장비의 이송 로봇과 전기장치 관련 연구·개발을 맡던 연구원이었습니다.

검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세메스에서 일하면서 기술을 빼냈고, S사로 이직한 뒤엔 세메스와 똑같은 세정 장비를 만드는데 손을 보탰습니다. A 씨는 이송로봇에 들어가는 부품 목록을 취득해 로봇을 만드는 협력업체에 넘겼고, B 씨는 차세대 세정 장비의 히터 세팅 값과 잠금장치 정보 등을 빼내 전기장치 제작 협력업체에 넘겼습니다.

■ 검찰 "삼성 반도체 세정 기술, 중국 손으로"

수원지검 방위사업‧산업기술범죄형사부(부장검사 이춘)가 어제(25일)까지 세메스 기술유출 혐의로 재판에 넘긴 사람은 모두 9명(구속 7명·불구속 2명). 세메스 출신으로 S사로 옮겨간 7명과 세메스 협력업체 임직원 2명입니다.

이들은 세메스 세정 장비의 설계도면, 부품 목록, 소프트웨어, 작업표준서 등 '한 조각'의 기술자료를 갖고 나왔고, 주범 C 씨가 설립한 S사에서 세메스와 똑같은 세정 장비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비와 기술자료는 결국 중국의 장비업체 '즈춘커지'와 국영 반도체 연구소인 상하이집적회로혁신센터, ICRD로 넘어갔다는 게 검찰의 결론입니다. 연구원 1~2명을 데려가는 수준이 아니라, 반도체 주요 공정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대로 넘어간 셈입니다.

■진화하는 중국의 기술유출 수법

이런 기술유출 수법도 진화한 걸까요? 지난해 서울중앙지검은 SK하이닉스에 세정 장비를 공급하던 M전자가 최신 D램 공정과 세정 레시피를 중국에 유출했다며 M전자 임직원 등 16명을 재판에 넘겼습니다.

이들은 SK하이닉스와 협업 과정에서 알게 된 핵심기술 정보를 중국에 유출했고, 중국 수출용으로 만든 세정 장비에 빼돌린 기술을 그대로 활용했습니다.

과거에도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등 우리 기업들이 앞서고 있는 분야의 기술은 뒤늦게 따라오려는 중국 기업들의 먹잇감이었습니다. 다만, 국내업체 기술 인력을 이른바 모셔 가거나 국내 업체 내부에 스파이를 확보해 기술 자료를 빼가는 방식이 주를 이뤘습니다.

지난해 초 2차전지 양극재 생산업체 퇴직 연구원 2명이 해외업체 이직을 목적으로 기술자료를 빼돌리다가 적발되거나, 2020년 국내기업과 반도체 장비를 공동으로 연구한 한 대학 교수가 연구 성과물을 다른 업체에 넘긴 사건 등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런데 기업들이 ‘동종업계 이직금지 제도'를 도입하고 법원에 전직 금지 신청을 내는 식으로 이직에 대응하자, 중국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국정원은 2년 전, 자동차 강판 도금량 제어기술 자료를 빼내고 같은 설비를 만들어 해외 경쟁사에 판매한 전 철강업체 직원을 적발했습니다. 세메스 기술을 유출한 S사, SK하이닉스 협력업체였던 M전자와 마찬가지로 특정 공정에 관련된 장비를 판매하는 식으로 기술을 넘긴 사례입니다.

■기술유출, 조직화·기업화

자연스럽게 기술유출의 주체도 연구 인력 개인에서 이제는 회사 단위로 커지고 있습니다.

이번 세메스 기술유출 사건에서도 기술을 빼낸 것은 전직 연구원들이었지만, 중국에 넘긴 주체는 검찰이 범행을 주도한 것으로 파악한 C 씨가 설립한 S사였습니다. 거래 구조는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기술력을 확보한 중소기업이 해외시장 개척에 성공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의 거래는 연구 인력이 해외업체로 바로 이직하면서 가질 수 있는 윤리적 부담을 덜어줍니다. 또 기술유출 이후에 '토사구팽'을 당하더라도 회사 자산은 그대로 남습니다. 무엇보다 기존 협력업체 네트워크까지 고스란히 넘겨받을 수 있습니다. 피해업체 입장에선 인력 유출보다 훨씬 치명적인 대목입니다.

이번에 세메스의 협력업체인 E사도 세메스 기술이 반영된 세정 장비 회전판 부품(스핀척)을 제작해 S사에 판매하다 적발됐습니다. 또, 이송로봇 전자장비 등의 기술도 각각 다른 협력업체로 넘어간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습니다.

미-중 패권 다툼이 기술유출로…

이번 사건을 취재하는 동안 업계와 수사기관은 입을 모았습니다. 적발된 기술 유출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 다툼을 하고, 자국 우선주의 색채가 짙은 세계 정세도 기술유출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습니다. 중국이 미국의 제재로 수년 전부터 미국은 물론 다른 국가로부터 반도체 장비를 아예 수입해올 수 없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이번에 세메스 기술의 세정 장비를 가져간 중국 ICRD가 2년 전에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장비업체인 네덜란드 ASML과 글로벌 트레이닝 센터를 세우고 협력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중국 반도체 업체들은 미세 공정의 핵심이라는 ASML의 노광 장비를 사 올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이병인 한중시스템IC연구원장은 "우리 반도체 업계는 글로벌 분업체계를 통해 모든 분야에 투자하는 대신 '파운드리' 등 일부에 투자를 집중할 수 있다"며 "중국은 지금 미국의 규제로 반도체 장비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8대 공정의 모든 장비 개발에 투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의 반도체 공정은 여전히 우리보다 5년가량 뒤처진 상황. '굴기(우뚝 섬)'와는 거리가 먼 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선 언제든 기술을 빼가려고 시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 번 빠져나간 기술은 되찾아올 방법이 없습니다. 나날이 고도화되는 기술 유출을 잡아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수십 년간 인력과 예산을 들여 개발한 첨단 기술을 지켜내려면 기업, 또 정부가 나서 자구책을 마련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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