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체류자 전락한 입양아동…‘입양기관 배상’ 판결 “세계가 주목” [취재후]

입력 2023.05.18 (14:00) 수정 2023.05.18 (14:2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해외 입양인 한분영(왼쪽) 씨와 피터 뮐러(가운데) 씨. 신송혁 씨의 손해배상 판결 방청 직후해외 입양인 한분영(왼쪽) 씨와 피터 뮐러(가운데) 씨. 신송혁 씨의 손해배상 판결 방청 직후

"이건 정말 시작에 불과합니다."

44년 전 미국으로 입양됐지만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추방됐던 신송혁 씨(46·미국명 애덤 크랩서)에게 입양기관이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던 지난 16일.

덴마크로 입양됐던 피터 뮐러 씨와 한분영 씨는 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에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특히, 피터 뮐러 씨는 이번 소송을 제기한 신 씨와 같은 입양기관(홀트아동복지회)을 통해 해외로 보내졌습니다.

■해외 입양인 "중요한 의미, 소송 원하는 사람 있어"

그들은 판결문을 정확히 보고 더 논의해야겠지만, 이 판결이 대단히 중요하고 유사한 피해자들이 소송을 준비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세계 최대 한인 입양인 커뮤니티인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DKRG)'을 설립하고 현재 활동하고 있으며, 정부 산하 진실화해위원회의 해외 입양 관련 조사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피터 뮐러 / 해외 입양인. DKRG 공동 대표
"지난주 홀트아동복지회는 외국 언론에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했지만, 이 판결은 홀트가 잘못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그들의 책임에 대해 법의 심판을 받게 한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판결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 문제는 이미 국제적인 이슈입니다. 현재 스웨덴과 노르웨이,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전국적으로 조사하고 있습니다."

한분영 / 해외 입양인. DKRG 공동설립자
"많은 해외 입양인들이 오늘 판결도 환영하는 거 같아요. 소송하고 싶은 해외 입양인들이 많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입양기관과 국가 모두 사실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판결이 많이 어렵고 힘들게 산 친구들에게 좋은 소식인 거 같습니다."

■해외 입양인 김유리 씨 "소송 준비 중"

실제 국가와 입양기관을 상대로 추가 소송을 진행하는 입양인도 있습니다.

1984년 열한 살 나이로 프랑스에 보내진 김유리 씨입니다.

11살 때 남동생과 함께 프랑스로 입양된 김유리 씨.11살 때 남동생과 함께 프랑스로 입양된 김유리 씨.

유년 시절 내내 양부의 성적 학대에 시달리다 도망친 유리 씨는 한국으로 돌아와 친부모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입양의 진실을 알게 됐습니다.

홀트 직원은 가정형편 때문에 보육시설에 맡겨진 유리 씨 남매를 입양 보내면서 "네 부모가 너희를 버렸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입양 절차를 수월하게 하려고 친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남매를 '고아 호적'으로 꾸며 보냈던 겁니다.

김유리 씨의 1984년 프랑스 입양 당시 서류. 부모 신원 칸에 ‘inconnu’(알 수 없음)이라고 기재돼 있다.김유리 씨의 1984년 프랑스 입양 당시 서류. 부모 신원 칸에 ‘inconnu’(알 수 없음)이라고 기재돼 있다.

주문서 한 장 쓰고 남매를 데려간 양부모가 지불한 수수료는 총 8천 달러, 비행깃값을 빼면 아동 한 명이 400만 원에 해외로 '팔려간' 셈입니다.

유리 씨는 한국과 프랑스 정부와 입양기관에 각각 부실한 절차와 사후관리의 책임을 묻기로 했습니다.

김유리 / 해외 입양인
"프랑스는 신분증 없이 여행증명서만 들고 온 한국 아동들에게 비자를 내줬어요. 프랑스 조사관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아무것도 몰랐다'면서 '부끄럽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이 가장 쉬운 나라였어요. 인도, 필리핀, 과테말라 기준과 비교하면 은행 계좌 잔고도 필요 없고 집이나 직업도 필요 없었어요. 누구나 입양수수료만 낼 수 있으면 한국 아동을 데려갈 수 있었던 거죠. (아이들로선) 양부모 얼굴도 모르고 가서, 로또 맞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먼저 올 초 프랑스 법원에 프랑스 정부와 입양기관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습니다. 그 결과가 나오면 한국 법원에서도 소송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왜 한국이 아닌 프랑스가 먼저였냐고 묻자, 유리 씨는 "작은 물고기부터 잡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책임을 인정받기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그녀는 내다봤습니다.

■입양 후 학대와 파양 그리고 추방…우여곡절 겪은 신송혁 씨

충북 제천의 한 아동보호시설에 맡겨진 신송혁 씨는 1979년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 가정으로 입양됐습니다.

하지만 신 씨는 1986년과 1991년, 미국 가정에서 두 번의 파양 끝에 노숙생활도 했습니다. 두 양부모 밑에서 신 씨는 학대를 당했습니다.

학대뿐만 아니라 입양 아동에게 가장 중요한 시민권 취득도 안 됐습니다.

당시 신 씨가 받은 비자(IR-4)는 입국한 지 2년 후에 미국에서 입양재판을 마쳐야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는데, 양부모는 이 과정을 밟지 않았고 입양을 주관했던 홀트아동복지회는 이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시민권이 없던 신 씨는 영주권 재발급 과정에서 과거 경범죄 사실로 인해 입양된 지 37년 만인 2016년 한국으로 추방당했습니다.

이에 신 씨는 2019년 입양기관과 정부가 보호 의무 등을 다하지 않았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법원, 입양기관·국가에 대한 다른 판단

그래픽 : 김유빈그래픽 : 김유빈

5년의 소송 끝에 법원은 신 씨에 대해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우선 입양기관이 보호 의무를 위반했다고 봤습니다.

재판부는 "신 씨가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거로 보인다"면서 "홀트아동복지회가 신 씨의 국적취득을 확인하고 보고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홀트아동복지회가 적극적으로 확인했다면 강제추방되는 결과는 초래되지 않았을 것이다"면서 "수십 년간 살아온 삶의 터전을 상실한 신 씨가 겪을 정신적 고통은 매우 크다"고 1억 원을 손해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국가는 아동 입양의 요건과 절차를 정하는 등 아동 권익과 복지 증진 등 일반적인 의무를 부담한다고 봐야 한다"면서 "국가가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입양기관에 대한 관리 감독에 대해서 재판부는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국가 공무원들이 고의 또는 과실로 감독 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국가배상에 대해선 기각했습니다.

이밖에 '친부모가 있지만, 서류를 조작해 고아로 만들었다'는 신 씨 측의 주장에 대해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판결 결과에 홀트아동복지회는 "판결문이 아직 안 나왔다. 입장 정리는 그 이후에 하기로 했다"면서 항소 여부도 논의해서 결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해외 입양 송출국·수령국 모두의 문제...이번 판결, 세계에서 주목"

입양 문제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이 해외 입양의 정당성을 따지는 '첫 걸음'이라고 말합니다.

오랜 시간 입양인들이 주장한 입양 기관의 문제점을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니까요.

현재 한국의 진실화해위원회와 더불어 세계 5개국(노르웨이·스위스·스웨덴·덴마크·프랑스)에서 진행 중인 한인 불법 입양 관련 조사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KBS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는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KBS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는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노혜련 /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해외 입양은 입양 송출국과 수령국, 각 국가와 기관이 다 관여되는 문제예요. (수령국 입장에선) 이번 재판을 통해서 함께 일한 한국의 협력기관에 문제가 있다는 게 확실히 인정된 거잖아요. 그렇다면 자국의 입양기관도 이런 문제를 인식했는지, 그런데도 눈 감아 준 건지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겠죠."

국내외 조사 결과가 나오면 그 자료를 근거로 국가의 책임을 따지기 더 쉬워집니다.

무엇보다 아직도 한국 아동이 해외로 입양되고 있는 만큼, 근본적인 제도 개선을 위한 논의도 불붙고 있습니다. 헤이그 국제아동협약 비준이나 입양특례법 개정을 통해 입양의 공공성을 높여야 한다는 겁니다.

최근 10년간 한국의 입양아 열 명 중 네 명은 고국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갔습니다. 지난해 기준 142명의 아이가 해외로 입양됐습니다.

노혜련 /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왜 우리나라같이 잘 살고, 아이도 없는 나라에서 해외로 입양을 보내냐. 국내 입양 부모만으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숫자거든요."

"입양은 아이의 삶을 180도 바꾸는 일이에요. 한국의 김 씨로 태어나서 덴마크의 안더슨 씨가 될 수도 있고 미국의 스미스 씨가 될 수도 있어요. 이런 엄청난 일을 민간에만 맡겨둔 게 너무 무모한 일이었죠. 헤이그 국제아동 협약을 아직도 비준 못 하고 있는 건 지금 민간기관에서 너무 많은 걸 감당하기 때문이에요. 최소한 공공에서 해외 입양을 맡게 되면 경제적 이익 때문에 아이를 보내는 일은 없어질 겁니다."

이제는 '해외 입양 중단'을 선언하고 '아동 수출국' 오명을 벗어야 할 때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1년에 많게는 8,837명이 해외 입양을 갔던 1980년대와 비교하면 출산율 저하로 입양 건수 자체가 급격히 줄었고, 국내 입양 수요도 꾸준히 있기 때문입니다.

1953년 한국전쟁 이후 해외 입양이 시작된 지 올해로 70년을 맞았습니다. 지금까지 해외로 입양된 아동은 서류상 남아있는 인원만 최소 18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불법체류자 전락한 입양아동…‘입양기관 배상’ 판결 “세계가 주목” [취재후]
    • 입력 2023-05-18 14:00:24
    • 수정2023-05-18 14:21:53
    취재후·사건후
해외 입양인 한분영(왼쪽) 씨와 피터 뮐러(가운데) 씨. 신송혁 씨의 손해배상 판결 방청 직후
"이건 정말 시작에 불과합니다."

44년 전 미국으로 입양됐지만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추방됐던 신송혁 씨(46·미국명 애덤 크랩서)에게 입양기관이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던 지난 16일.

덴마크로 입양됐던 피터 뮐러 씨와 한분영 씨는 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에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특히, 피터 뮐러 씨는 이번 소송을 제기한 신 씨와 같은 입양기관(홀트아동복지회)을 통해 해외로 보내졌습니다.

■해외 입양인 "중요한 의미, 소송 원하는 사람 있어"

그들은 판결문을 정확히 보고 더 논의해야겠지만, 이 판결이 대단히 중요하고 유사한 피해자들이 소송을 준비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세계 최대 한인 입양인 커뮤니티인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DKRG)'을 설립하고 현재 활동하고 있으며, 정부 산하 진실화해위원회의 해외 입양 관련 조사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피터 뮐러 / 해외 입양인. DKRG 공동 대표
"지난주 홀트아동복지회는 외국 언론에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했지만, 이 판결은 홀트가 잘못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그들의 책임에 대해 법의 심판을 받게 한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판결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 문제는 이미 국제적인 이슈입니다. 현재 스웨덴과 노르웨이,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전국적으로 조사하고 있습니다."

한분영 / 해외 입양인. DKRG 공동설립자
"많은 해외 입양인들이 오늘 판결도 환영하는 거 같아요. 소송하고 싶은 해외 입양인들이 많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입양기관과 국가 모두 사실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판결이 많이 어렵고 힘들게 산 친구들에게 좋은 소식인 거 같습니다."

■해외 입양인 김유리 씨 "소송 준비 중"

실제 국가와 입양기관을 상대로 추가 소송을 진행하는 입양인도 있습니다.

1984년 열한 살 나이로 프랑스에 보내진 김유리 씨입니다.

11살 때 남동생과 함께 프랑스로 입양된 김유리 씨.
유년 시절 내내 양부의 성적 학대에 시달리다 도망친 유리 씨는 한국으로 돌아와 친부모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입양의 진실을 알게 됐습니다.

홀트 직원은 가정형편 때문에 보육시설에 맡겨진 유리 씨 남매를 입양 보내면서 "네 부모가 너희를 버렸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입양 절차를 수월하게 하려고 친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남매를 '고아 호적'으로 꾸며 보냈던 겁니다.

김유리 씨의 1984년 프랑스 입양 당시 서류. 부모 신원 칸에 ‘inconnu’(알 수 없음)이라고 기재돼 있다.
주문서 한 장 쓰고 남매를 데려간 양부모가 지불한 수수료는 총 8천 달러, 비행깃값을 빼면 아동 한 명이 400만 원에 해외로 '팔려간' 셈입니다.

유리 씨는 한국과 프랑스 정부와 입양기관에 각각 부실한 절차와 사후관리의 책임을 묻기로 했습니다.

김유리 / 해외 입양인
"프랑스는 신분증 없이 여행증명서만 들고 온 한국 아동들에게 비자를 내줬어요. 프랑스 조사관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아무것도 몰랐다'면서 '부끄럽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이 가장 쉬운 나라였어요. 인도, 필리핀, 과테말라 기준과 비교하면 은행 계좌 잔고도 필요 없고 집이나 직업도 필요 없었어요. 누구나 입양수수료만 낼 수 있으면 한국 아동을 데려갈 수 있었던 거죠. (아이들로선) 양부모 얼굴도 모르고 가서, 로또 맞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먼저 올 초 프랑스 법원에 프랑스 정부와 입양기관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습니다. 그 결과가 나오면 한국 법원에서도 소송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왜 한국이 아닌 프랑스가 먼저였냐고 묻자, 유리 씨는 "작은 물고기부터 잡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책임을 인정받기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그녀는 내다봤습니다.

■입양 후 학대와 파양 그리고 추방…우여곡절 겪은 신송혁 씨

충북 제천의 한 아동보호시설에 맡겨진 신송혁 씨는 1979년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 가정으로 입양됐습니다.

하지만 신 씨는 1986년과 1991년, 미국 가정에서 두 번의 파양 끝에 노숙생활도 했습니다. 두 양부모 밑에서 신 씨는 학대를 당했습니다.

학대뿐만 아니라 입양 아동에게 가장 중요한 시민권 취득도 안 됐습니다.

당시 신 씨가 받은 비자(IR-4)는 입국한 지 2년 후에 미국에서 입양재판을 마쳐야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는데, 양부모는 이 과정을 밟지 않았고 입양을 주관했던 홀트아동복지회는 이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시민권이 없던 신 씨는 영주권 재발급 과정에서 과거 경범죄 사실로 인해 입양된 지 37년 만인 2016년 한국으로 추방당했습니다.

이에 신 씨는 2019년 입양기관과 정부가 보호 의무 등을 다하지 않았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법원, 입양기관·국가에 대한 다른 판단

그래픽 : 김유빈
5년의 소송 끝에 법원은 신 씨에 대해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우선 입양기관이 보호 의무를 위반했다고 봤습니다.

재판부는 "신 씨가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거로 보인다"면서 "홀트아동복지회가 신 씨의 국적취득을 확인하고 보고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홀트아동복지회가 적극적으로 확인했다면 강제추방되는 결과는 초래되지 않았을 것이다"면서 "수십 년간 살아온 삶의 터전을 상실한 신 씨가 겪을 정신적 고통은 매우 크다"고 1억 원을 손해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국가는 아동 입양의 요건과 절차를 정하는 등 아동 권익과 복지 증진 등 일반적인 의무를 부담한다고 봐야 한다"면서 "국가가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입양기관에 대한 관리 감독에 대해서 재판부는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국가 공무원들이 고의 또는 과실로 감독 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국가배상에 대해선 기각했습니다.

이밖에 '친부모가 있지만, 서류를 조작해 고아로 만들었다'는 신 씨 측의 주장에 대해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판결 결과에 홀트아동복지회는 "판결문이 아직 안 나왔다. 입장 정리는 그 이후에 하기로 했다"면서 항소 여부도 논의해서 결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해외 입양 송출국·수령국 모두의 문제...이번 판결, 세계에서 주목"

입양 문제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이 해외 입양의 정당성을 따지는 '첫 걸음'이라고 말합니다.

오랜 시간 입양인들이 주장한 입양 기관의 문제점을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니까요.

현재 한국의 진실화해위원회와 더불어 세계 5개국(노르웨이·스위스·스웨덴·덴마크·프랑스)에서 진행 중인 한인 불법 입양 관련 조사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KBS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는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노혜련 /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해외 입양은 입양 송출국과 수령국, 각 국가와 기관이 다 관여되는 문제예요. (수령국 입장에선) 이번 재판을 통해서 함께 일한 한국의 협력기관에 문제가 있다는 게 확실히 인정된 거잖아요. 그렇다면 자국의 입양기관도 이런 문제를 인식했는지, 그런데도 눈 감아 준 건지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겠죠."

국내외 조사 결과가 나오면 그 자료를 근거로 국가의 책임을 따지기 더 쉬워집니다.

무엇보다 아직도 한국 아동이 해외로 입양되고 있는 만큼, 근본적인 제도 개선을 위한 논의도 불붙고 있습니다. 헤이그 국제아동협약 비준이나 입양특례법 개정을 통해 입양의 공공성을 높여야 한다는 겁니다.

최근 10년간 한국의 입양아 열 명 중 네 명은 고국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갔습니다. 지난해 기준 142명의 아이가 해외로 입양됐습니다.

노혜련 /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왜 우리나라같이 잘 살고, 아이도 없는 나라에서 해외로 입양을 보내냐. 국내 입양 부모만으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숫자거든요."

"입양은 아이의 삶을 180도 바꾸는 일이에요. 한국의 김 씨로 태어나서 덴마크의 안더슨 씨가 될 수도 있고 미국의 스미스 씨가 될 수도 있어요. 이런 엄청난 일을 민간에만 맡겨둔 게 너무 무모한 일이었죠. 헤이그 국제아동 협약을 아직도 비준 못 하고 있는 건 지금 민간기관에서 너무 많은 걸 감당하기 때문이에요. 최소한 공공에서 해외 입양을 맡게 되면 경제적 이익 때문에 아이를 보내는 일은 없어질 겁니다."

이제는 '해외 입양 중단'을 선언하고 '아동 수출국' 오명을 벗어야 할 때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1년에 많게는 8,837명이 해외 입양을 갔던 1980년대와 비교하면 출산율 저하로 입양 건수 자체가 급격히 줄었고, 국내 입양 수요도 꾸준히 있기 때문입니다.

1953년 한국전쟁 이후 해외 입양이 시작된 지 올해로 70년을 맞았습니다. 지금까지 해외로 입양된 아동은 서류상 남아있는 인원만 최소 18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