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으로 오월 영령 위로하고 위로받는다”…시민 군 기획실장의 딸 김연우 [영상채록 5·18]

입력 2023.05.31 (06:00) 수정 2023.06.01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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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시민군 기획실장 故 김영철(광주시 5·18자유공원 들불열사기념탑)1980년 5·18 시민군 기획실장 故 김영철(광주시 5·18자유공원 들불열사기념탑)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지도부 기획실장 故 김영철.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진압으로 체포됩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1998년 사망했습니다. 박기순·윤상원·박용준·박관현·신영일·박효선과 함께 들불야학 출신으로 5·18 전후에 세상을 떠난 이른바 '들불열사'로 불립니다.

故 김영철 열사의 막내딸 김연우 씨는 올해 43살, 1980년에 태어난 5·18둥이입니다.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인터뷰하는 김연우 씨(시민군 기획실장 故 김영철의 딸)국립5·18민주묘지에서 인터뷰하는 김연우 씨(시민군 기획실장 故 김영철의 딸)

어렸을 때는 단순히 어린 마음에 5·18 그때 아빠는 내가 태어날 건데, 엄마 배 속에 막내딸이 있는데 나는 생각 안 했나? 도청 마지막 그때 그냥 집으로 돌아오시지...어린 마음에는 그래서 조금 서운했어요.

1980년 5월 최후 항쟁 시민군 지도부 기획실장, 故 김영철 열사의 딸 김연우 씨를 KBS광주「영상채록 5·18 」취재진이 만났습니다.

■5·18 그해 여름 광천시민아파트

김연우 씨는 1980년 5·18이 끝난 그해 여름 광주시 광천시민아파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광천시민아파트는 당시 들불야학 교실이 있던 곳입니다. 들불야학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노동야학으로 출발했고, 5·18 전후 투쟁의 구심 역할을 한 단체 중 하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옛날 피난민들의 빈민촌이었다가 시민아파트로 되었던 곳이라서 많이 열악한 환경이었더라고요.
아버지가 빈민운동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열악한 상황들을 보고 또 다른 사명의식을 가졌던 것 같아요. 함께 이렇게 잘 살아보고자 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광천시민아파트에서 거주하면서 저도 태어나고 그랬다고...

아버지는 5·18이 끝난 이후에도 딸(김연우)에게 윤상원 열사·박용준 열사 등 들불야학 강사였던 동지들을 삼촌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김연우 씨는 인터뷰 내내 '삼촌'이란 단어를 자연스레 사용했습니다. 어린 시절 실제 자신의 삼촌이 여러 명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후에 살아 계신 들불야학의 삼촌들이 오고 가는 중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나는 뵙지도 못했지만 돌아가신 상원이 삼촌·용준이 삼촌·영일이 삼촌·관현이 삼촌 등이 너무 친숙해요. 아빠도 생전에 "우리 관현이·용준이·상원이·영일이 죽지 않았다. 아직 살아서 지금 저 하늘에서 일하고 있다." 이렇게 자주 말씀하셨거든요.

■시민군 기획실장 김영철

故 김영철 열사의 들불야학 활동 시절(김연우 제공)故 김영철 열사의 들불야학 활동 시절(김연우 제공)

김연우 씨의 아버지 김영철은 5·18이 일어나자 시위에 동참했고, 시민군 기획실장으로 전남도청 항쟁 지도부의 중책을 맡았습니다.
못 배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함께 성장하고자 하는 뜻에서 뭉친 분들이라서 5.18이 일어났을 때 당연히 그걸 지나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투사회보도 같이 만드시고 궐기대회 때 연설문 작성하고 연설문을 낭독하시고, 연설문 내용도 '시민들이 무력 진압에 자연 발생적으로 민중들이 이렇게 항쟁하는 것이지 폭도가 아니다.'라고 썼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리본도 달고 도청에 태극기도 직접 달기도 하시고...

■만신창이가 된 아버지

김연우와 투병 시절 아버지(김연우 제공)김연우와 투병 시절 아버지(김연우 제공)

김영철은 5월 27일 체포돼 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합니다. 후유증으로 사회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부인이 가정의 경제활동을 책임졌습니다.
김연우 씨의 오빠와 언니는 학교에 가고 어린 시절 유독 아버지와 둘만 지낸 시간이 많았습니다. 물론 아버지 상태가 악화 되기 전, 병원에 입원하기 전입니다.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았고, 십여 년을 병원에서 지냈습니다.

아빠가 막내 딸을 알아보실 때는 정말 저랑 많이 놀아주셨어요. 노래와 춤을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삼촌들이나 엄마가 과거를 이야기했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가 흥이 너무 넘쳐서, 저하고 놀 때도 노래 부르고 춤추고 율동도 가르쳐주셨어요. 너무 밝게...

■끝내 정신병원에서 숨진, 아버지 김영철

김연우 씨는 아버지가 입원한 정신병원에 자주 면회를 갔습니다, 병원에만 있는 아빠가 "밉다"며 못 박는 소리를 내 뱉었던 사춘기를 지나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아버지는 막내딸 은영이(김연우의 어린 시절 이름)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딸이 고3이 된 1998년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빠 면회 갈 때는 아빠가 보고 싶어서 너무나도 소풍 가듯이 좋게 갔다가 면회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잘 때는 집에서 이불을 둘러쓰고 너무 많이 울었어요.

아빠에게 5·18은 5월 18일부터 27일까지가 아니에요. 저희 아빠는, 제가 태어나 고3이 될 때까지 십몇 년 간 육체적 아픔도 아픔이고 정신적으로도...그래도 아빠는 5·18에 대해 어느 누구도 원망을 하려고 하진 않았어요.

■5·18을 춤으로 승화시킨 무용가 김연우

5·18 42주년 전야제 무대에 선 김연우5·18 42주년 전야제 무대에 선 김연우

노래와 춤을 좋아했던 아버지를 닮은 것일까요? 김연우 씨는 무용가의 길을 택했습니다.
아버지와 단둘이 간 마지막 소풍에서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했던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그. "춤 잘 춘다. 나중에 춤 선생님 되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계기로 5·18과 아버지를 가슴에 품었다고 할까, 더 되뇌이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아픈 기억을 최대한 누르고 이제 제 인생에만 집중하면서 살았고요.

거창하게 5·18을 위해서 춤을 추고 아버지를 위해서 춤의 길을 가진 않았어요. 그런데 다시 내가 좋아하는 춤을 추고 내 인생에 집중하면서 살아가다 보니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됐어요. 또, 아버지가 무엇을 이루고자 해서 그렇게 삼촌들과 함께 싸웠는지를 알게 됐죠.

'내가 춤으로 그런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5·18에 관한 춤도 추게 되고, 이렇게 지내오게 된 것 같아요.

■희생자를 위로하고 위로받는 춤사위

김연우 씨는 5·18민주화운동 43주년인 올해 5월 18일에는 제주도 관덕정 앞 무대에 섰습니다. 제주의 한 단체가 마련한 5·18 행사입니다. 5·18 희생 영령과 제주4·3 영령, 모든 희생자를 위한 위로를 온몸에 담아 춤사위로 표현한 겁니다.

5·18이나 4·3, 또는 세월호 관련 희생된 영령들의 춤을 추면서 내가 죽은 자들을 위로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분들을 통해서 내가 더 단단해지고 자세를 바로잡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부분을 재정비하게 되고, 서로에게 위로를 주고받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월의 열사들 또는 그 가족들을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보고 그걸 마음에 담아서 몸짓으로 춤으로 위로하고 힘이 되고 싶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찾는 국립5·18민주묘지

김연우 씨가 아버지 묘비에 올린 콜라.김연우 씨가 아버지 묘비에 올린 콜라.

인터뷰 마지막 질문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김연우 씨는 자신이 아버지를 지켜주고 위로해주고 싶다면서 "다음 생이 있다면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김연우 씨는 인터뷰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자주 찾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찾아간 1묘역 4-4 묘비. 그는 아버지가 투병 생활 중에 속이 답답하다면서 자주 찾았다는 콜라를 올리며 아버지를 위로했습니다.

어려워도 긍정적으로 열심히 일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에 대해서도 아빠한테 감사해. 부끄럽지 않게 아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맙고...

그런데 아빠는 참 외로웠겠다.

젊었을 때는 더 배우고 싶어도 이런저런 일 하느라 못 했고, 나중에 엄마 만나서 사랑하면서 잘 사나 했는데 5·18 만나고. 병원에서 그 많은 날들 너무 외롭고 힘들었겠다. 아빠가 못한 일들 내가 지켜주고 내가 힘이 돼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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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시민군 기획실장 故 김영철(광주시 5·18자유공원 들불열사기념탑)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지도부 기획실장 故 김영철.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진압으로 체포됩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1998년 사망했습니다. 박기순·윤상원·박용준·박관현·신영일·박효선과 함께 들불야학 출신으로 5·18 전후에 세상을 떠난 이른바 '들불열사'로 불립니다.

故 김영철 열사의 막내딸 김연우 씨는 올해 43살, 1980년에 태어난 5·18둥이입니다.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인터뷰하는 김연우 씨(시민군 기획실장 故 김영철의 딸)
어렸을 때는 단순히 어린 마음에 5·18 그때 아빠는 내가 태어날 건데, 엄마 배 속에 막내딸이 있는데 나는 생각 안 했나? 도청 마지막 그때 그냥 집으로 돌아오시지...어린 마음에는 그래서 조금 서운했어요.

1980년 5월 최후 항쟁 시민군 지도부 기획실장, 故 김영철 열사의 딸 김연우 씨를 KBS광주「영상채록 5·18 」취재진이 만났습니다.

■5·18 그해 여름 광천시민아파트

김연우 씨는 1980년 5·18이 끝난 그해 여름 광주시 광천시민아파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광천시민아파트는 당시 들불야학 교실이 있던 곳입니다. 들불야학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노동야학으로 출발했고, 5·18 전후 투쟁의 구심 역할을 한 단체 중 하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옛날 피난민들의 빈민촌이었다가 시민아파트로 되었던 곳이라서 많이 열악한 환경이었더라고요.
아버지가 빈민운동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열악한 상황들을 보고 또 다른 사명의식을 가졌던 것 같아요. 함께 이렇게 잘 살아보고자 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광천시민아파트에서 거주하면서 저도 태어나고 그랬다고...

아버지는 5·18이 끝난 이후에도 딸(김연우)에게 윤상원 열사·박용준 열사 등 들불야학 강사였던 동지들을 삼촌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김연우 씨는 인터뷰 내내 '삼촌'이란 단어를 자연스레 사용했습니다. 어린 시절 실제 자신의 삼촌이 여러 명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후에 살아 계신 들불야학의 삼촌들이 오고 가는 중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나는 뵙지도 못했지만 돌아가신 상원이 삼촌·용준이 삼촌·영일이 삼촌·관현이 삼촌 등이 너무 친숙해요. 아빠도 생전에 "우리 관현이·용준이·상원이·영일이 죽지 않았다. 아직 살아서 지금 저 하늘에서 일하고 있다." 이렇게 자주 말씀하셨거든요.

■시민군 기획실장 김영철

故 김영철 열사의 들불야학 활동 시절(김연우 제공)
김연우 씨의 아버지 김영철은 5·18이 일어나자 시위에 동참했고, 시민군 기획실장으로 전남도청 항쟁 지도부의 중책을 맡았습니다.
못 배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함께 성장하고자 하는 뜻에서 뭉친 분들이라서 5.18이 일어났을 때 당연히 그걸 지나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투사회보도 같이 만드시고 궐기대회 때 연설문 작성하고 연설문을 낭독하시고, 연설문 내용도 '시민들이 무력 진압에 자연 발생적으로 민중들이 이렇게 항쟁하는 것이지 폭도가 아니다.'라고 썼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리본도 달고 도청에 태극기도 직접 달기도 하시고...

■만신창이가 된 아버지

김연우와 투병 시절 아버지(김연우 제공)
김영철은 5월 27일 체포돼 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합니다. 후유증으로 사회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부인이 가정의 경제활동을 책임졌습니다.
김연우 씨의 오빠와 언니는 학교에 가고 어린 시절 유독 아버지와 둘만 지낸 시간이 많았습니다. 물론 아버지 상태가 악화 되기 전, 병원에 입원하기 전입니다.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았고, 십여 년을 병원에서 지냈습니다.

아빠가 막내 딸을 알아보실 때는 정말 저랑 많이 놀아주셨어요. 노래와 춤을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삼촌들이나 엄마가 과거를 이야기했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가 흥이 너무 넘쳐서, 저하고 놀 때도 노래 부르고 춤추고 율동도 가르쳐주셨어요. 너무 밝게...

■끝내 정신병원에서 숨진, 아버지 김영철

김연우 씨는 아버지가 입원한 정신병원에 자주 면회를 갔습니다, 병원에만 있는 아빠가 "밉다"며 못 박는 소리를 내 뱉었던 사춘기를 지나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아버지는 막내딸 은영이(김연우의 어린 시절 이름)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딸이 고3이 된 1998년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빠 면회 갈 때는 아빠가 보고 싶어서 너무나도 소풍 가듯이 좋게 갔다가 면회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잘 때는 집에서 이불을 둘러쓰고 너무 많이 울었어요.

아빠에게 5·18은 5월 18일부터 27일까지가 아니에요. 저희 아빠는, 제가 태어나 고3이 될 때까지 십몇 년 간 육체적 아픔도 아픔이고 정신적으로도...그래도 아빠는 5·18에 대해 어느 누구도 원망을 하려고 하진 않았어요.

■5·18을 춤으로 승화시킨 무용가 김연우

5·18 42주년 전야제 무대에 선 김연우
노래와 춤을 좋아했던 아버지를 닮은 것일까요? 김연우 씨는 무용가의 길을 택했습니다.
아버지와 단둘이 간 마지막 소풍에서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했던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그. "춤 잘 춘다. 나중에 춤 선생님 되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계기로 5·18과 아버지를 가슴에 품었다고 할까, 더 되뇌이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아픈 기억을 최대한 누르고 이제 제 인생에만 집중하면서 살았고요.

거창하게 5·18을 위해서 춤을 추고 아버지를 위해서 춤의 길을 가진 않았어요. 그런데 다시 내가 좋아하는 춤을 추고 내 인생에 집중하면서 살아가다 보니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됐어요. 또, 아버지가 무엇을 이루고자 해서 그렇게 삼촌들과 함께 싸웠는지를 알게 됐죠.

'내가 춤으로 그런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5·18에 관한 춤도 추게 되고, 이렇게 지내오게 된 것 같아요.

■희생자를 위로하고 위로받는 춤사위

김연우 씨는 5·18민주화운동 43주년인 올해 5월 18일에는 제주도 관덕정 앞 무대에 섰습니다. 제주의 한 단체가 마련한 5·18 행사입니다. 5·18 희생 영령과 제주4·3 영령, 모든 희생자를 위한 위로를 온몸에 담아 춤사위로 표현한 겁니다.

5·18이나 4·3, 또는 세월호 관련 희생된 영령들의 춤을 추면서 내가 죽은 자들을 위로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분들을 통해서 내가 더 단단해지고 자세를 바로잡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부분을 재정비하게 되고, 서로에게 위로를 주고받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월의 열사들 또는 그 가족들을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보고 그걸 마음에 담아서 몸짓으로 춤으로 위로하고 힘이 되고 싶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찾는 국립5·18민주묘지

김연우 씨가 아버지 묘비에 올린 콜라.
인터뷰 마지막 질문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김연우 씨는 자신이 아버지를 지켜주고 위로해주고 싶다면서 "다음 생이 있다면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김연우 씨는 인터뷰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자주 찾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찾아간 1묘역 4-4 묘비. 그는 아버지가 투병 생활 중에 속이 답답하다면서 자주 찾았다는 콜라를 올리며 아버지를 위로했습니다.

어려워도 긍정적으로 열심히 일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에 대해서도 아빠한테 감사해. 부끄럽지 않게 아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맙고...

그런데 아빠는 참 외로웠겠다.

젊었을 때는 더 배우고 싶어도 이런저런 일 하느라 못 했고, 나중에 엄마 만나서 사랑하면서 잘 사나 했는데 5·18 만나고. 병원에서 그 많은 날들 너무 외롭고 힘들었겠다. 아빠가 못한 일들 내가 지켜주고 내가 힘이 돼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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