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리포트] 독립군 산실 신흥학교, 버려진 옛터

입력 2015.08.22 (08:25) 수정 2015.08.22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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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1910년대 서슬퍼런 일제 치하에서 중국 만주로 망명한 우국지사들이 설립한 학교가 있었습니다.

해외 최초로 독립군을 양성하던 '신흥무관학교'인데요.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주요 항일 무장투쟁 주역들이 바로 이 학교 출신이었습니다.

백년 넘게 흐르면서 세 군데 옛 학교 터는 논밭으로 변해버렸고, 한국인 답사단의 출입마저 제한되고 있는 실정인데요.

김명주 특파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독립군 양성소'를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차량 달리샷! 중국 지린성 류허현의 한적한 시골 마을...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자 기왓장 등 건축 자재를 만드는 허름한 공장 건물이 나옵니다.

백여 년 전 만주로 망명한 우당 이회영, 석주 이상룡 선생 등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처음으로 학교 터를 잡은 곳입니다.

지금 있는 건물은 해방 이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학교 설립 당시에는 외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운영됐습니다.

토지 매입도 허용되지 않는 등 중국인들의 심한 견제까지 받았습니다.

<녹취> 김재운(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기획팀장) :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훈련을 하긴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당시 조선인들이 만주로 많이 넘어오니까 자기네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넘어오는 게 아니냐는 경계심을 가졌던거죠."

학교 설립지 주변은 거대한 옥수수밭으로 변했습니다.

항일투쟁의 성지이지만, 백년 넘는 세월 동안 그 흔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마을 노인들만 부모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 신흥무관학교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

<녹취> 왕웨이밍(마을 주민) : "나중에 주민들이 이 곳에 다른 학교를 세우고 밭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무관학교 건물에 쓰였던 벽돌이랑 기왓장도 나왔어요."

신흥무관학교 첫 설립지에서 50여 킬로미터..

두번 째 옛 학교 터로 가는 길..

'하니허'라 불리는 강 옆으로 험준한 산 자락이 이어집니다.

이회영 선생 등은 1912년 봄 이 곳에 정착지를 확보해 교실과 식당, 내무반 등을 짓고 학교를 이전했습니다.

소 먹이를 주고 있는 60대 중국인 농부..

신흥무관학교에 대해 물어보자, 취재진을 옥수수밭 안으로 안내합니다.

옥수수밭 들어가고..

한참을 들어가더니 학교가 있던 자리를 가리킵니다.

<녹취> 중국인 농부 : "저 자리에 학교가 있었는데 학생 수가 해마다 40여 명 됐고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으로 모두 투입됐다고 들었어요."

실제로 학교를 이전한 뒤 대한제국무관학교 출신 인사들이 대거 교관을 맡으면서 체계적인 군사 교육이 이뤄졌습니다.

당시 마을 주민들 사이에선 '고려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녹취> 중국인 농부 :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고려학교'가 여기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인재를 양성하다가 나중에 학교가 없어졌다고 들었어요."

이 일대에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신흥무관학교 옛터임을 알리는 표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조선족 동포 등 지역 주민들이 한중 수교 이후에 설치한 것인데요.

현지 지방정부 측이 표지를 철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현지 공안 당국은 최근 몇년 동안 한국인 단체 답사단의 방문마저 사실상 제한하고 있습니다.

답사단 가이드를 맡았던 현지 조선족 동포들은 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기 일쑤였습니다.

<녹취> 김재운(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기획팀장) : "중국 공안이 와서 조사를 했었어요. 관광객들이 오는 곳이 아닌데 여기에 왜 왔냐고 물어보고 진짜 답사단이 맞는지 여권 기록을 일일히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신흥무관학교는 세 번째 교사인 류허현 대두자로 다시 자리를 옮깁니다.

3.1운동 이후 독립군을 지망하는 애국 청년들이 몰려들면서 기존의 교사가 수용 한계에 다다른 겁니다.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옥수수밭 진입!

어른 키보다 훨씬 큰 옥수수밭을 헤치며 한참을 가로질러 들어가 봤습니다.

세 번째 학교 옛터인 이 곳 대두자는 원래 광활한 대지였습니다.

하지만, 백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이렇게 옥수수밭으로 변하면서 학교와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지청천 장군 등 일본사관학교 출신 조선인들은 최신 병서와 지도를 활용해 이 곳에서 선진 군사 기술을 전수했습니다.

1920년 일제 탄압으로 폐교될 때까지 신흥무관학교는 3천5백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녹취> 김춘선(옌벤대 민족역사연구소장) : "한인들의 생계를 위한 경제 생활, 또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정치 권리, 독립 운동을 위한 인재 배양과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데 신흥무관학교가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폐교 이후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를 치렀고,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청산리 전투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지린성 메이허커우시에 있는 혁명열사기념관..

전시관 한켠엔 간략하나마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학교 설립자인 이회영 선생 흉상도 세워져 있습니다.

촬영 날짜를 알 순 없지만, 옛 학교 터에서 항일 선열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는 사진도 눈에 띕니다.

비록 옛 학교 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역사의 기록은 일부라도 남아있는 셈입니다.

<녹취> 장중칭(혁명열사기념관 주임) :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이후 항일투쟁에 많은 인재들을 투입시켰습니다. 항일투쟁사에서 대표성이 있기 때문에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최근 국내에서도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올해 최고 흥행을 기록중인 한국 영화 '암살'...

일제 강점기 친일파 암살 작전을 소재로 한 이 영화에서 의열단 요원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이제는 옛 학교 터 복원을 위해 정부 당국이 적극 나서야 할 시점입니다.

<녹취> 김춘선(옌벤대 민족역사연구소장) : "한국 대통령이 방문해서 광복군 총사령부 복원은 잘 되고 있잖아요? 그런데 왜 (신흥무관학교 터 복원은) 교섭을 안하나요? 이 쪽도 교섭을 했으면 잘될텐데요. 안중근기념관도 교섭을 해서 들어섰지 않습니까?

<녹취> 신흥무관학교 교가(관현악단 연주) :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좔좔 결치며 돈다"

일제 강점기 신흥무관학교를 거쳐간 수많은 항일 투사들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광복 70주년, 조국 독립을 위한 투쟁의 현장은 신흥무관학교처럼 사라져 가는 곳이 많습니다.

잊혀진 영웅들의 희생을 분명히 기억하고 새롭게 조명하는데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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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드 리포트] 독립군 산실 신흥학교, 버려진 옛터
    • 입력 2015-08-22 08:36:20
    • 수정2015-08-22 08:54:57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1910년대 서슬퍼런 일제 치하에서 중국 만주로 망명한 우국지사들이 설립한 학교가 있었습니다.

해외 최초로 독립군을 양성하던 '신흥무관학교'인데요.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주요 항일 무장투쟁 주역들이 바로 이 학교 출신이었습니다.

백년 넘게 흐르면서 세 군데 옛 학교 터는 논밭으로 변해버렸고, 한국인 답사단의 출입마저 제한되고 있는 실정인데요.

김명주 특파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독립군 양성소'를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차량 달리샷! 중국 지린성 류허현의 한적한 시골 마을...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자 기왓장 등 건축 자재를 만드는 허름한 공장 건물이 나옵니다.

백여 년 전 만주로 망명한 우당 이회영, 석주 이상룡 선생 등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처음으로 학교 터를 잡은 곳입니다.

지금 있는 건물은 해방 이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학교 설립 당시에는 외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운영됐습니다.

토지 매입도 허용되지 않는 등 중국인들의 심한 견제까지 받았습니다.

<녹취> 김재운(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기획팀장) :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훈련을 하긴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당시 조선인들이 만주로 많이 넘어오니까 자기네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넘어오는 게 아니냐는 경계심을 가졌던거죠."

학교 설립지 주변은 거대한 옥수수밭으로 변했습니다.

항일투쟁의 성지이지만, 백년 넘는 세월 동안 그 흔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마을 노인들만 부모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 신흥무관학교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

<녹취> 왕웨이밍(마을 주민) : "나중에 주민들이 이 곳에 다른 학교를 세우고 밭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무관학교 건물에 쓰였던 벽돌이랑 기왓장도 나왔어요."

신흥무관학교 첫 설립지에서 50여 킬로미터..

두번 째 옛 학교 터로 가는 길..

'하니허'라 불리는 강 옆으로 험준한 산 자락이 이어집니다.

이회영 선생 등은 1912년 봄 이 곳에 정착지를 확보해 교실과 식당, 내무반 등을 짓고 학교를 이전했습니다.

소 먹이를 주고 있는 60대 중국인 농부..

신흥무관학교에 대해 물어보자, 취재진을 옥수수밭 안으로 안내합니다.

옥수수밭 들어가고..

한참을 들어가더니 학교가 있던 자리를 가리킵니다.

<녹취> 중국인 농부 : "저 자리에 학교가 있었는데 학생 수가 해마다 40여 명 됐고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으로 모두 투입됐다고 들었어요."

실제로 학교를 이전한 뒤 대한제국무관학교 출신 인사들이 대거 교관을 맡으면서 체계적인 군사 교육이 이뤄졌습니다.

당시 마을 주민들 사이에선 '고려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녹취> 중국인 농부 :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고려학교'가 여기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인재를 양성하다가 나중에 학교가 없어졌다고 들었어요."

이 일대에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신흥무관학교 옛터임을 알리는 표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조선족 동포 등 지역 주민들이 한중 수교 이후에 설치한 것인데요.

현지 지방정부 측이 표지를 철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현지 공안 당국은 최근 몇년 동안 한국인 단체 답사단의 방문마저 사실상 제한하고 있습니다.

답사단 가이드를 맡았던 현지 조선족 동포들은 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기 일쑤였습니다.

<녹취> 김재운(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기획팀장) : "중국 공안이 와서 조사를 했었어요. 관광객들이 오는 곳이 아닌데 여기에 왜 왔냐고 물어보고 진짜 답사단이 맞는지 여권 기록을 일일히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신흥무관학교는 세 번째 교사인 류허현 대두자로 다시 자리를 옮깁니다.

3.1운동 이후 독립군을 지망하는 애국 청년들이 몰려들면서 기존의 교사가 수용 한계에 다다른 겁니다.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옥수수밭 진입!

어른 키보다 훨씬 큰 옥수수밭을 헤치며 한참을 가로질러 들어가 봤습니다.

세 번째 학교 옛터인 이 곳 대두자는 원래 광활한 대지였습니다.

하지만, 백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이렇게 옥수수밭으로 변하면서 학교와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지청천 장군 등 일본사관학교 출신 조선인들은 최신 병서와 지도를 활용해 이 곳에서 선진 군사 기술을 전수했습니다.

1920년 일제 탄압으로 폐교될 때까지 신흥무관학교는 3천5백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녹취> 김춘선(옌벤대 민족역사연구소장) : "한인들의 생계를 위한 경제 생활, 또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정치 권리, 독립 운동을 위한 인재 배양과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데 신흥무관학교가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폐교 이후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를 치렀고,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청산리 전투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지린성 메이허커우시에 있는 혁명열사기념관..

전시관 한켠엔 간략하나마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학교 설립자인 이회영 선생 흉상도 세워져 있습니다.

촬영 날짜를 알 순 없지만, 옛 학교 터에서 항일 선열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는 사진도 눈에 띕니다.

비록 옛 학교 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역사의 기록은 일부라도 남아있는 셈입니다.

<녹취> 장중칭(혁명열사기념관 주임) :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이후 항일투쟁에 많은 인재들을 투입시켰습니다. 항일투쟁사에서 대표성이 있기 때문에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최근 국내에서도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올해 최고 흥행을 기록중인 한국 영화 '암살'...

일제 강점기 친일파 암살 작전을 소재로 한 이 영화에서 의열단 요원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이제는 옛 학교 터 복원을 위해 정부 당국이 적극 나서야 할 시점입니다.

<녹취> 김춘선(옌벤대 민족역사연구소장) : "한국 대통령이 방문해서 광복군 총사령부 복원은 잘 되고 있잖아요? 그런데 왜 (신흥무관학교 터 복원은) 교섭을 안하나요? 이 쪽도 교섭을 했으면 잘될텐데요. 안중근기념관도 교섭을 해서 들어섰지 않습니까?

<녹취> 신흥무관학교 교가(관현악단 연주) :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좔좔 결치며 돈다"

일제 강점기 신흥무관학교를 거쳐간 수많은 항일 투사들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광복 70주년, 조국 독립을 위한 투쟁의 현장은 신흥무관학교처럼 사라져 가는 곳이 많습니다.

잊혀진 영웅들의 희생을 분명히 기억하고 새롭게 조명하는데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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