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위선과 싸워야’…해리로 돌아온 ‘발언하는 작가’ 공지영

입력 2018.07.3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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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의 작가 공지영이 새 소설을 냈습니다. 1988년 단편 「동트는 새벽」으로 데뷔한 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가니』 등을 내놓은 작가 생활 30년 만에 나온 12번째 장편 소설입니다.

공지영 작가는 오늘(3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신작 장편소설 '해리 1·2'(출판사 해냄) 출간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 책을 "어떤 악녀에 관한 보고서" 라고 소개했습니다. 지난 5년간 취재를 통해 완성한 이야기가 원고지 1,600매에 이르는 방대한 '보고서'입니다.


■ 12번째 장편 소설... '진보의 탈을 쓴 위선 고발'

소설은 겉으로는 선하고 정의로운 모습으로 포장된 악인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천주교 신부 '백진우'는 입으로는 부유한 종교 권력을 질타하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지만, '성령의 뜻'이라며 어린 소녀와 젊은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하고 종교와 장애인 보호를 내세워 돈을 모아 빼돌리는 인물입니다. 그의 애인이자 장애인 봉사단체를 운영하는 여성 '이해리'는 가녀린 모습과 불우한 개인사를 내세워 동정심을 일으키지만, 남성의 은밀한 부위에 '봉침'을 놓는 수법으로 약점을 잡아 갈취하고 여럿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마녀 같은 인물입니다.

배경은 다시 무진. 도가니의 배경이 됐던, 짙은 안개가 태양을 가리던 그 도시입니다. 인터넷 언론사 기자인 주인공 '한이나'는 암에 걸린 어머니 곁에 머물기 위해 고향인 무진에 내려왔다가 백진우와 이해리가 얽혀있는 사건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고 그 배후를 캐는 과정에서 추악한 악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10년 전 소설 『도가니』에서 장애인 학교의 성폭력 실태를 파헤치던 인권운동가 서유진은 이제 40대가 되었고, 장 경사도 단역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작가 공지영은 다시 등장한 '무진'에 대해 "대한민국의 모순이 압축된 장소"라고 설명합니다. 이 도시는 전라도 어디일 수도 있고 경상도 어디일 수도 있습니다. 지방도시에서 끈끈하게 이어지며 수많은 약자를 옥죄고 있는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무진입니다.

■ '지금의 악은 예전처럼 단순하지 않아... 이제는 위선과 싸워야'

하지만 싸움은 『도가니』때보다 훨씬 복잡해졌습니다. 실상은 '나쁜 신부'인 백진우는 자신의 부정이 밝혀지자 진보의 이름을 내세우며 '보수적인 교단의 탄압'이라 목소리를 높이고, '숨 쉬는 것조차 거짓'인 이해리는 성폭력의 피해자, 장애인의 보호자라는 허울을 쓰고 약자인 척하며 동정을 삽니다.

공 작가는 이를 두고 "지금의 악은 그 이전의 단순함과는 굉장히 달라졌단 것을 감지"했다고 말합니다.

"간단한 말로 얼마든지 진보와 민주주의의 탈을 쓸 수 있고, 그런 탈을 쓰는 것이 예전과 다르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일찌감치 체득한 사기꾼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어요. 앞으로 몇십 년간 싸워야 할 악은 아마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진보의 탈을 쓰고 엄청난 위선을 행하는 그런 무리가 될 거라는 작가로서의 감지를 이 소설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번 소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페이스북과 대화방 등 SNS 화면을 갈무리한 듯한 소설 구성입니다. 소설 군데군데 백진우와 이해리의 페이스북이 등장하고, 주인공 한이나와 서유진의 대화가 SNS 대화방 형식으로 소개됩니다.

작가 공지영은 페이스북에 비치는 모습과 실체의 괴리, 그리고 페이스북을 통해 일어나는 허구의 여론과 비난을 얘기하려는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해리'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름이기도 하고, 인물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해리성(解離性) 인격 장애'를 암시하기도 하고, 또한 사이버 공간과 실제 사이의 크나큰 간극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쉽게 술술 읽히는 '재미난 소설'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인공들이 저지르는 악행은 참으로 낯익고, 어쩜 저렇게 악마 같을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것이 사람이 한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뉴스에서 접했던 많은 사건이 소설 속에 잇따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SNS에서 보아왔던 행태들, 사이버 여론몰이도 낯익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탓에, 현실은 더 악마 같다는 점을 알기에 소설을 그저 소설로 읽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 '누군가 울고 있는데 침묵할 수 없어'

이날 간담회에서는 작품에 대한 질문뿐 아니라 이재명 경기도지사나 최영미 시인 등에 관련된 질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작품을 내는 시기를 잘못 잡은 게 아니냐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민감한 사안도 피하지 않고 꾸준히 목소리를 내온 '행동하는 작가' 공지영을 의식한 질문들입니다.
공 작가는 이에 대해 '자신은 벌거벗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벌거벗었네 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답했습니다. "제가 워낙 생각도 없고 앞뒤도 잘 못 가려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 같다"면서 "한 사람이 울고 있는데, 부당한 피해를 보고 있는데, 새 작품을 내기 얼마 전이라고 해서, 나에 대한 독자들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신중하게 생각하고 그럴 수는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쓰는 대신, 읽으면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내내 불편한 소설을 써야 했던 작가의 마음을 함께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작가는 또 말합니다. 의외로 악은 지루하고 단조로운 것이라고. 악마는 진부한 것을 만들어낸다고.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선한 것, 그것은 선하신 신의 몫이라고 말입니다. (『해리1』247쪽 중) 그래서 오히려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늘 좋은 쪽으로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악의 토양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누군가 나서서 '저 사람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치지 않으면 악은 계속 지루하고 단조롭게 스스로를 복제해낸다고 말입니다.

책에 등장하는 이 부분은 공지영 작가가 기자간담회에서 본인의 예술관을 설명하면서 한 말이기도 합니다. 공 작가는 또 "내가 살았음으로 해서 지구가 1cm라도 좋아지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발언하는 작가'로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고 논란을 피하지 않을 것임을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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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는 위선과 싸워야’…해리로 돌아온 ‘발언하는 작가’ 공지영
    • 입력 2018-07-30 18:35:20
    문화
『도가니』의 작가 공지영이 새 소설을 냈습니다. 1988년 단편 「동트는 새벽」으로 데뷔한 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가니』 등을 내놓은 작가 생활 30년 만에 나온 12번째 장편 소설입니다.

공지영 작가는 오늘(3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신작 장편소설 '해리 1·2'(출판사 해냄) 출간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 책을 "어떤 악녀에 관한 보고서" 라고 소개했습니다. 지난 5년간 취재를 통해 완성한 이야기가 원고지 1,600매에 이르는 방대한 '보고서'입니다.


■ 12번째 장편 소설... '진보의 탈을 쓴 위선 고발'

소설은 겉으로는 선하고 정의로운 모습으로 포장된 악인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천주교 신부 '백진우'는 입으로는 부유한 종교 권력을 질타하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지만, '성령의 뜻'이라며 어린 소녀와 젊은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하고 종교와 장애인 보호를 내세워 돈을 모아 빼돌리는 인물입니다. 그의 애인이자 장애인 봉사단체를 운영하는 여성 '이해리'는 가녀린 모습과 불우한 개인사를 내세워 동정심을 일으키지만, 남성의 은밀한 부위에 '봉침'을 놓는 수법으로 약점을 잡아 갈취하고 여럿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마녀 같은 인물입니다.

배경은 다시 무진. 도가니의 배경이 됐던, 짙은 안개가 태양을 가리던 그 도시입니다. 인터넷 언론사 기자인 주인공 '한이나'는 암에 걸린 어머니 곁에 머물기 위해 고향인 무진에 내려왔다가 백진우와 이해리가 얽혀있는 사건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고 그 배후를 캐는 과정에서 추악한 악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10년 전 소설 『도가니』에서 장애인 학교의 성폭력 실태를 파헤치던 인권운동가 서유진은 이제 40대가 되었고, 장 경사도 단역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작가 공지영은 다시 등장한 '무진'에 대해 "대한민국의 모순이 압축된 장소"라고 설명합니다. 이 도시는 전라도 어디일 수도 있고 경상도 어디일 수도 있습니다. 지방도시에서 끈끈하게 이어지며 수많은 약자를 옥죄고 있는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무진입니다.

■ '지금의 악은 예전처럼 단순하지 않아... 이제는 위선과 싸워야'

하지만 싸움은 『도가니』때보다 훨씬 복잡해졌습니다. 실상은 '나쁜 신부'인 백진우는 자신의 부정이 밝혀지자 진보의 이름을 내세우며 '보수적인 교단의 탄압'이라 목소리를 높이고, '숨 쉬는 것조차 거짓'인 이해리는 성폭력의 피해자, 장애인의 보호자라는 허울을 쓰고 약자인 척하며 동정을 삽니다.

공 작가는 이를 두고 "지금의 악은 그 이전의 단순함과는 굉장히 달라졌단 것을 감지"했다고 말합니다.

"간단한 말로 얼마든지 진보와 민주주의의 탈을 쓸 수 있고, 그런 탈을 쓰는 것이 예전과 다르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일찌감치 체득한 사기꾼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어요. 앞으로 몇십 년간 싸워야 할 악은 아마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진보의 탈을 쓰고 엄청난 위선을 행하는 그런 무리가 될 거라는 작가로서의 감지를 이 소설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번 소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페이스북과 대화방 등 SNS 화면을 갈무리한 듯한 소설 구성입니다. 소설 군데군데 백진우와 이해리의 페이스북이 등장하고, 주인공 한이나와 서유진의 대화가 SNS 대화방 형식으로 소개됩니다.

작가 공지영은 페이스북에 비치는 모습과 실체의 괴리, 그리고 페이스북을 통해 일어나는 허구의 여론과 비난을 얘기하려는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해리'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름이기도 하고, 인물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해리성(解離性) 인격 장애'를 암시하기도 하고, 또한 사이버 공간과 실제 사이의 크나큰 간극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쉽게 술술 읽히는 '재미난 소설'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인공들이 저지르는 악행은 참으로 낯익고, 어쩜 저렇게 악마 같을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것이 사람이 한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뉴스에서 접했던 많은 사건이 소설 속에 잇따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SNS에서 보아왔던 행태들, 사이버 여론몰이도 낯익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탓에, 현실은 더 악마 같다는 점을 알기에 소설을 그저 소설로 읽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 '누군가 울고 있는데 침묵할 수 없어'

이날 간담회에서는 작품에 대한 질문뿐 아니라 이재명 경기도지사나 최영미 시인 등에 관련된 질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작품을 내는 시기를 잘못 잡은 게 아니냐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민감한 사안도 피하지 않고 꾸준히 목소리를 내온 '행동하는 작가' 공지영을 의식한 질문들입니다.
공 작가는 이에 대해 '자신은 벌거벗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벌거벗었네 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답했습니다. "제가 워낙 생각도 없고 앞뒤도 잘 못 가려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 같다"면서 "한 사람이 울고 있는데, 부당한 피해를 보고 있는데, 새 작품을 내기 얼마 전이라고 해서, 나에 대한 독자들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신중하게 생각하고 그럴 수는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쓰는 대신, 읽으면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내내 불편한 소설을 써야 했던 작가의 마음을 함께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작가는 또 말합니다. 의외로 악은 지루하고 단조로운 것이라고. 악마는 진부한 것을 만들어낸다고.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선한 것, 그것은 선하신 신의 몫이라고 말입니다. (『해리1』247쪽 중) 그래서 오히려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늘 좋은 쪽으로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악의 토양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누군가 나서서 '저 사람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치지 않으면 악은 계속 지루하고 단조롭게 스스로를 복제해낸다고 말입니다.

책에 등장하는 이 부분은 공지영 작가가 기자간담회에서 본인의 예술관을 설명하면서 한 말이기도 합니다. 공 작가는 또 "내가 살았음으로 해서 지구가 1cm라도 좋아지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발언하는 작가'로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고 논란을 피하지 않을 것임을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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