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법원’ 사형 판결문 나왔으니 재조사?…“진실 왜곡 우려”

입력 2024.09.3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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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규명 대상자 백락용은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 사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고, 진실 규명 대상자 백락정은 국민보도연맹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1950년 7월 1일부터 7월 17일 사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충남 남부 지역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67차 전체위 의결 (2023년 11월)

고 백락용 씨 형제에게 한국전쟁 시기 민간의 희생자 사건 중 하나인 '충남 남부 지역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의 희생자로 진실 규명 결정이 내려진 건 지난해 11월입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고 백락용 씨의 아들 백남식 씨의 신청에 따라 조사에 착수해 67차 전체위원회를 열고 위와 같이 의결했습니다.

그런데, 1년도 안 돼 진화위는 이 사건에 대해 사상 초유의 '재조사' 결정을 내렸습니다. 새로운 문서가 발견돼 추가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취지입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이유는 뭐였을까? 이번 재조사 결정의 맥락을 살펴봤습니다.

■ 아버지 찾으러 간 작은 아버지도 '실종'…"사망 통보조차 없어"

충남 서천 출신인 백남식 씨는 올해로 75살입니다. 백 씨는 2살 무렵이던 1950년에 아버지와 이별했습니다.

아버지 백락용 씨는 1934년 7월부터 동아일보 서천지국장으로 근무한 언론인이었고, 동시에 서천군 국민보도연맹 지부장을 맡았습니다.

아버지가 끌려가던 날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당시 열다섯 살이던 큰형에게 자초지종을 들었습니다.

1950년 6월 27일, 집에서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던 아버지는 사복경찰 두 명에 의해 시초지서로 연행됐습니다. 작은아버지 백락정 씨와 큰형도 경찰서로 같이 연행됐지만, 둘은 연행 당일 석방됐습니다.

3일이 지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작은아버지 백락정 씨가 아버지를 찾으러 경찰지서로 갔지만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작은어머니와 그 딸이 백락정 씨를 면회하러 갔더니, 작은아버지가 '전신이 밧줄로 결박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구타로 생긴 새파란 피멍이 들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 백남식 씨는 아버지 백락용과 작은아버지 백락정의 소식을 영영 들을 수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백남식 씨는 진화위에 재조사를 해달라고 신청했습니다. 3년의 시간이 흐른 지난해 진화위가 이들에 대해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린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 백락용과 백락정의 사망 사실이 신원조사서에서 확인되고
▲ 백락용의 사망 사실이 제적등본에서 확인되고, 연행 및 희생 장소에 대한 신청인, 참고인의 진술과 일관성이 있다는 점
▲ 백락정의 구금 장면을 백락정의 아내와 딸이 목격했고, 연행된 백락용을 찾으러 나갔다가 희생되었다는 진술에 구체성이 있다는 점
▲ 백락용, 백락정의 과거 사회 활동 및 형사사건부의 포고 2호 위반 혐의 등으로 징역 선고 결정이 예비검속 대상자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충남 남부지역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67차 전체위 의결 (2023년 11월)

'과거 사회 활동'은 1947년 충남 서천군 지역에서 개최된 집회 등이라고 명시했습니다.

농민이었던 작은아버지 백락정은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아버지 백락용은 집회를 취재해 동아일보에 보도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돼 이듬해 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대전지법 홍성지원의 형사사건부 기록에 따르면, '미군정 포고령' 위반 혐의로 백락용은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을, 백락정은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그 집회의 주요 이슈가 양곡 공출 반대, 토지 개혁 반대, 38선 분단 반대, 친일파 척결이었습니다. 농민들한테는 가장 소중한 게 양곡 공출 문제였을 겁니다. (…) 제가 볼 때는 이걸 가지고 부역했다고 그러는 것 같아요."

-백남식 씨 / 진실규명 신청인 / 2024.9.27 차담회 중

■ 사형 판결문으로 재조사 결정…'판결 이유'는 기록 없어

그런데 지난 8월, 작은아버지 백락정 씨의 '국방경비법' 사형 선고 판결문이 발견되며 위 결정에 대한 재조사가 결정됐습니다.

판결문에는 1951년 1월 6일 군사 회의(당시 군사법원)에서 백락정 씨가 '이적행위'로 사형이 선고됐다고 적혀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저질렀는지 적는 '판결이유'란은 텅 비어있습니다.

고 백락정 씨에 대한 1951.1.6 군사회의 사형 판결문.  판결이유를 적는 란이 텅 비어있다. / 유족 측 제공자료고 백락정 씨에 대한 1951.1.6 군사회의 사형 판결문. 판결이유를 적는 란이 텅 비어있다. / 유족 측 제공자료

이 문서가 재조사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걸까?

김광동 위원장은 지난 27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백락정 씨가) 이적행위를 했다는 것은 당시 군법회의, 아마 군과 경찰의 조사 결과로 드러난 거로 보인다"며, " 현재까지 나온 경찰과 재판부 기록을 보면 무고한 양민에 대한 공권력에 의한 희생이 아니라 한국전쟁 중에 침략 세력과 함께 대한민국을 공격한 적대행위 때문에 처형된 것"이라 밝혔습니다.

김 위원장이 언급한 '경찰 기록'은 진실 규명 결정서에 언급된 '경찰청 신원조사서'를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실규명결정서는 이 신원조사서가 백 씨 형제가 숨진지 10여 년 뒤인 1968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습니다. 이 신원조사서엔 '백락용은 노동당원으로 활약하다가 처형됨', '백락정은 악질부역자 처형됨'이라고 기재됐다고 당시 진실규명결정서는 언급했습니다.

이에 대해 백남식 씨는 "해당 문서는 6·25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 유족을 겨냥한 일종의 사찰기록"이라며, 이러한 내용을 진실규명결정서에 담은 것은 고인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며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지난 2월 김 위원장을 고소한 바 있습니다.

진화위 측은 "판결문이 나오며 진실 규명 대상자의 사망 날짜가 달라졌기 때문에, 당사자의 사정이 달라져 의결을 통해 재조사가 가능한 것"이라 밝혔습니다.

■ "1기 진화위 조사 소홀" vs "진실 왜곡 우려"

'민간인에 대해 군사법원이 단심제 사형 선고를 내린 것 자체가 중대한 인권침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 위원장은 "계엄령의 전쟁 발생에 따라 정상 사법절차가 진행될 수 없다"며 "국방경비법에 따르면 민간인에 대해서도 적대 행위를 했다면 군이 관할하게 돼 있다"고 답했습니다.

판결문에 백 씨에 대한 사형선고 이유가 적혀있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김 위원장은 "당시 군법회의는 그 어떤 근거 자료를 남기지 않아도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1기 진화위에서는 빨치산 활동 기록이 있는 사람 8명을 민간인 희생자로 인정하기도 했다"며 "조사를 대충 해왔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어 김 위원장은 "재조사해야겠지만, 경찰과 법원의 기록과 상충하는 어떤 근거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공적 기록을 근거로 해서 판단해야 한다"면서 "그건 뒤집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정당한 진실 규명"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재조사 가능성이 있는 사건이 10여 건 더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군사 회의 재판 기록 2만 2천 건을 지난달 입수했다"며 "그걸 바탕으로 지난 결정들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2024.9.27 야당 추천 위원 주최 차담회 / 왼쪽부터 이상희 비상임위원, 전미경 대전 산내사건 피학살자 유족회장, 백남식 진실규명 신청인, 이상훈 상임위원 / 배지현 기자2024.9.27 야당 추천 위원 주최 차담회 / 왼쪽부터 이상희 비상임위원, 전미경 대전 산내사건 피학살자 유족회장, 백남식 진실규명 신청인, 이상훈 상임위원 / 배지현 기자

이같은 재조사 결정에 우려의 시각도 분명합니다.

한국전쟁 시기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이 남용된 경우가 많은데, 판결문의 신뢰성을 따지지 않은 채 기존 진실 규명 결정을 취소하는 건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처사란 겁니다.

야당 추천 위원 중 한 명인 이상훈 상임위원은 "국방경비법으로 그 당시 민간인이 재판받은 게 2만 명"이라며 "7천 3백 명의 민간인이 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사형 이유도 모른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 국방경비법 판결이 추후 재심을 통해 무죄로 뒤집히는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상희 비상임위원은 "(이번 사건에 대해) 당시 권력에 의해서 적법하게 판결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면, 집단 희생의 본질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라며 "과거 나치 때도 법령에 의해 학살이 이뤄졌다. 정당화와 다를 바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백 씨도 차담회에 참석해 진화위의 결정에 의문을 표했습니다.

"충남 서천에 인민군이 진입한 게 1950년 7월 17일입니다. (…) 적대세력에게 이적행위를 할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 작은아버지가 (경찰에 끌려가) 사라진 1950년 6월부터 (사형 선고가 난) 6개월 뒤까지 뭘 했다는 걸까요. 교도소에 가 있었으면 수감기록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근데 왜 수감 기록이 안 나옵니까. 또 (국가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 시신이라도 집으로 가져가라고 통보라도 해줬을 것 아닙니까."

-백남식 씨 / 진실규명 신청인 / 2024.9.27 차담회 중

재조사를 결정한 진실화해위원회, 과연 어떤 판단을 다시 내리게될까요?

진화위 누리집에 있는 '위원장 인사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역사사건에 대한 조사를 통해 역사적 정의를 재정립하고, 희생자의 명예 회복과 피해 구제 방안을 강구해 국민통합을 지향하는 과제를 부여받은 기관입니다. 성공의 대한민국 역사가 걸어온 뒤안길에 남겨진 그늘을 재조명하고, 잘못된 부정의를 바로 잡아감으로써, 화해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방향에서 진상규명을 다하고자 합니다."

-진화위 김광동 위원장 인사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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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사 법원’ 사형 판결문 나왔으니 재조사?…“진실 왜곡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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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규명 대상자 백락용은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 사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고, 진실 규명 대상자 백락정은 국민보도연맹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1950년 7월 1일부터 7월 17일 사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충남 남부 지역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67차 전체위 의결 (2023년 11월)

고 백락용 씨 형제에게 한국전쟁 시기 민간의 희생자 사건 중 하나인 '충남 남부 지역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의 희생자로 진실 규명 결정이 내려진 건 지난해 11월입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고 백락용 씨의 아들 백남식 씨의 신청에 따라 조사에 착수해 67차 전체위원회를 열고 위와 같이 의결했습니다.

그런데, 1년도 안 돼 진화위는 이 사건에 대해 사상 초유의 '재조사' 결정을 내렸습니다. 새로운 문서가 발견돼 추가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취지입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이유는 뭐였을까? 이번 재조사 결정의 맥락을 살펴봤습니다.

■ 아버지 찾으러 간 작은 아버지도 '실종'…"사망 통보조차 없어"

충남 서천 출신인 백남식 씨는 올해로 75살입니다. 백 씨는 2살 무렵이던 1950년에 아버지와 이별했습니다.

아버지 백락용 씨는 1934년 7월부터 동아일보 서천지국장으로 근무한 언론인이었고, 동시에 서천군 국민보도연맹 지부장을 맡았습니다.

아버지가 끌려가던 날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당시 열다섯 살이던 큰형에게 자초지종을 들었습니다.

1950년 6월 27일, 집에서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던 아버지는 사복경찰 두 명에 의해 시초지서로 연행됐습니다. 작은아버지 백락정 씨와 큰형도 경찰서로 같이 연행됐지만, 둘은 연행 당일 석방됐습니다.

3일이 지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작은아버지 백락정 씨가 아버지를 찾으러 경찰지서로 갔지만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작은어머니와 그 딸이 백락정 씨를 면회하러 갔더니, 작은아버지가 '전신이 밧줄로 결박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구타로 생긴 새파란 피멍이 들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 백남식 씨는 아버지 백락용과 작은아버지 백락정의 소식을 영영 들을 수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백남식 씨는 진화위에 재조사를 해달라고 신청했습니다. 3년의 시간이 흐른 지난해 진화위가 이들에 대해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린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 백락용과 백락정의 사망 사실이 신원조사서에서 확인되고
▲ 백락용의 사망 사실이 제적등본에서 확인되고, 연행 및 희생 장소에 대한 신청인, 참고인의 진술과 일관성이 있다는 점
▲ 백락정의 구금 장면을 백락정의 아내와 딸이 목격했고, 연행된 백락용을 찾으러 나갔다가 희생되었다는 진술에 구체성이 있다는 점
▲ 백락용, 백락정의 과거 사회 활동 및 형사사건부의 포고 2호 위반 혐의 등으로 징역 선고 결정이 예비검속 대상자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충남 남부지역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67차 전체위 의결 (2023년 11월)

'과거 사회 활동'은 1947년 충남 서천군 지역에서 개최된 집회 등이라고 명시했습니다.

농민이었던 작은아버지 백락정은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아버지 백락용은 집회를 취재해 동아일보에 보도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돼 이듬해 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대전지법 홍성지원의 형사사건부 기록에 따르면, '미군정 포고령' 위반 혐의로 백락용은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을, 백락정은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그 집회의 주요 이슈가 양곡 공출 반대, 토지 개혁 반대, 38선 분단 반대, 친일파 척결이었습니다. 농민들한테는 가장 소중한 게 양곡 공출 문제였을 겁니다. (…) 제가 볼 때는 이걸 가지고 부역했다고 그러는 것 같아요."

-백남식 씨 / 진실규명 신청인 / 2024.9.27 차담회 중

■ 사형 판결문으로 재조사 결정…'판결 이유'는 기록 없어

그런데 지난 8월, 작은아버지 백락정 씨의 '국방경비법' 사형 선고 판결문이 발견되며 위 결정에 대한 재조사가 결정됐습니다.

판결문에는 1951년 1월 6일 군사 회의(당시 군사법원)에서 백락정 씨가 '이적행위'로 사형이 선고됐다고 적혀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저질렀는지 적는 '판결이유'란은 텅 비어있습니다.

고 백락정 씨에 대한 1951.1.6 군사회의 사형 판결문.  판결이유를 적는 란이 텅 비어있다. / 유족 측 제공자료
이 문서가 재조사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걸까?

김광동 위원장은 지난 27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백락정 씨가) 이적행위를 했다는 것은 당시 군법회의, 아마 군과 경찰의 조사 결과로 드러난 거로 보인다"며, " 현재까지 나온 경찰과 재판부 기록을 보면 무고한 양민에 대한 공권력에 의한 희생이 아니라 한국전쟁 중에 침략 세력과 함께 대한민국을 공격한 적대행위 때문에 처형된 것"이라 밝혔습니다.

김 위원장이 언급한 '경찰 기록'은 진실 규명 결정서에 언급된 '경찰청 신원조사서'를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실규명결정서는 이 신원조사서가 백 씨 형제가 숨진지 10여 년 뒤인 1968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습니다. 이 신원조사서엔 '백락용은 노동당원으로 활약하다가 처형됨', '백락정은 악질부역자 처형됨'이라고 기재됐다고 당시 진실규명결정서는 언급했습니다.

이에 대해 백남식 씨는 "해당 문서는 6·25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 유족을 겨냥한 일종의 사찰기록"이라며, 이러한 내용을 진실규명결정서에 담은 것은 고인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며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지난 2월 김 위원장을 고소한 바 있습니다.

진화위 측은 "판결문이 나오며 진실 규명 대상자의 사망 날짜가 달라졌기 때문에, 당사자의 사정이 달라져 의결을 통해 재조사가 가능한 것"이라 밝혔습니다.

■ "1기 진화위 조사 소홀" vs "진실 왜곡 우려"

'민간인에 대해 군사법원이 단심제 사형 선고를 내린 것 자체가 중대한 인권침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 위원장은 "계엄령의 전쟁 발생에 따라 정상 사법절차가 진행될 수 없다"며 "국방경비법에 따르면 민간인에 대해서도 적대 행위를 했다면 군이 관할하게 돼 있다"고 답했습니다.

판결문에 백 씨에 대한 사형선고 이유가 적혀있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김 위원장은 "당시 군법회의는 그 어떤 근거 자료를 남기지 않아도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1기 진화위에서는 빨치산 활동 기록이 있는 사람 8명을 민간인 희생자로 인정하기도 했다"며 "조사를 대충 해왔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어 김 위원장은 "재조사해야겠지만, 경찰과 법원의 기록과 상충하는 어떤 근거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공적 기록을 근거로 해서 판단해야 한다"면서 "그건 뒤집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정당한 진실 규명"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재조사 가능성이 있는 사건이 10여 건 더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군사 회의 재판 기록 2만 2천 건을 지난달 입수했다"며 "그걸 바탕으로 지난 결정들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2024.9.27 야당 추천 위원 주최 차담회 / 왼쪽부터 이상희 비상임위원, 전미경 대전 산내사건 피학살자 유족회장, 백남식 진실규명 신청인, 이상훈 상임위원 / 배지현 기자
이같은 재조사 결정에 우려의 시각도 분명합니다.

한국전쟁 시기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이 남용된 경우가 많은데, 판결문의 신뢰성을 따지지 않은 채 기존 진실 규명 결정을 취소하는 건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처사란 겁니다.

야당 추천 위원 중 한 명인 이상훈 상임위원은 "국방경비법으로 그 당시 민간인이 재판받은 게 2만 명"이라며 "7천 3백 명의 민간인이 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사형 이유도 모른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 국방경비법 판결이 추후 재심을 통해 무죄로 뒤집히는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상희 비상임위원은 "(이번 사건에 대해) 당시 권력에 의해서 적법하게 판결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면, 집단 희생의 본질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라며 "과거 나치 때도 법령에 의해 학살이 이뤄졌다. 정당화와 다를 바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백 씨도 차담회에 참석해 진화위의 결정에 의문을 표했습니다.

"충남 서천에 인민군이 진입한 게 1950년 7월 17일입니다. (…) 적대세력에게 이적행위를 할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 작은아버지가 (경찰에 끌려가) 사라진 1950년 6월부터 (사형 선고가 난) 6개월 뒤까지 뭘 했다는 걸까요. 교도소에 가 있었으면 수감기록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근데 왜 수감 기록이 안 나옵니까. 또 (국가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 시신이라도 집으로 가져가라고 통보라도 해줬을 것 아닙니까."

-백남식 씨 / 진실규명 신청인 / 2024.9.27 차담회 중

재조사를 결정한 진실화해위원회, 과연 어떤 판단을 다시 내리게될까요?

진화위 누리집에 있는 '위원장 인사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역사사건에 대한 조사를 통해 역사적 정의를 재정립하고, 희생자의 명예 회복과 피해 구제 방안을 강구해 국민통합을 지향하는 과제를 부여받은 기관입니다. 성공의 대한민국 역사가 걸어온 뒤안길에 남겨진 그늘을 재조명하고, 잘못된 부정의를 바로 잡아감으로써, 화해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방향에서 진상규명을 다하고자 합니다."

-진화위 김광동 위원장 인사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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