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학살’ 제주·난징…“평화는 퍼뜨리고 아픔은 기억해야”

입력 2025.04.03 (18:51) 수정 2025.04.0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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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3일 3희생자·3희생자 열린 제77주년 4·3희생자 추념식2025년 4월 3일 3희생자·3희생자 열린 제77주년 4·3희생자 추념식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였어요. 거의 모든 사람이 가슴에 이번 사건의 상징인 동백꽃을 달고 있는 것을 보면서 평화와 정의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아신누어, 중국 난징외국어학교 3학년)

"매년 국가 추모일에 우리는 이렇게 돌아가신 사랑하는 동포들을 생각하며 슬퍼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평화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쉬지아치, 중국 난징외국어학교 3학년)

제주도와 중국 장쑤성 난징(南京)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930~40년대 비극적인 집단 학살이 벌어졌던 곳이라는 점입니다.

직항 노선을 통해 관광객이 서로 오가는 두 도시는 이제 아픈 역사의 '기억'도 교류하고 있습니다. 중국 난징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올해도 제주를 찾은 이유입니다.

중국 난징 학생들이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3평화공원에서·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7주년 3평화공원에서·3 추념식에 참석해 희생 영령들을 위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중국 난징 학생들이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3평화공원에서·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7주년 3평화공원에서·3 추념식에 참석해 희생 영령들을 위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 해마다 양국 오가며 '아픈 역사' 배워

중국 장쑤성 난징 외국어학교 재학생과 교사, 교육청 관계자 등 20여 명은 오늘(3일) 오전 일찍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았습니다. 학생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습니다.

제주와 중국 난징 학생들은 4·3희생자 추념일을 전후해 해마다 만납니다. 인류가 겪은 참혹한 대학살 역사를 배우고, 서로의 생각을 묻고 듣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1937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일본제국군은 중국 난징 지역을 침략했습니다.

이들은 중국군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민간인도 대량으로 학살했습니다. 피해자 숫자는 최대 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정부는 1985년 8월 15일 대학살 현장에 난징대학살기념관을 설립하고,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2024년 제주-난징 학생 평화 공감 수업 모습. 제주도교육청2024년 제주-난징 학생 평화 공감 수업 모습. 제주도교육청

추념식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으며 행사를 지켜본 중국 학생들은 저마다의 소감을 풀어놓았습니다.

쉬지아치(중국 난징외국어학교 3학년) 양은 "인터넷을 통해 본 자료로 한국의 4·3사건에 대해 알고 이번에 제주에 왔다"면서 "현장에 와서 4·3사건에 대해 더 깊고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인의 진심이 드러난 데 대해 매우 감동했다"고 말했습니다.

지아신누어(중국 난징외국어학교 3학년) 군은 "한국의 4·3사건 흔적을 따라 여기에 왔다. 두 나라 모두 고통스러운 사건을 겪었다고 생각한다"면서 "중국 난징에서도 매년 12월 13일을 모일로 정하고 있다. 추모식을 통해 역사를 더욱 깊이 기억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3평화공원에서·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7주년 3평화공원에서·3 희생자 추념식에서 참석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3평화공원에서·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7주년 3평화공원에서·3 희생자 추념식에서 참석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 제주 4·3은?…6·25전쟁 다음 인명피해 큰 현대사 비극

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입니다.

참혹한 사건이 벌어진 데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뒤섞여 있으나, 1947년 이른바 3·1절 경찰의 발포 사건이 3만 명의 희생자를 낸 도화선이라고 말합니다.

1945년 일제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38도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을 각기 통치합니다.

제주도에선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고, 미군정 아래서도 궁핍한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가뭄과 흉년, 식량 부족에 전염병까지 창궐했습니다.

1947년 3월 1일, 전국 각지에서 3·1절 기념대회가 열립니다.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으로 나뉘어 열린 서울과 달리, 제주에선 하나의 행사로 치러졌습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주도로 제주 각지에 대규모 군중이 모인 집회에선 남북 분단 반대, 통일 독립 요구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기마경찰 말발굽에 치인 어린아이를 그냥 두고 떠나는 기마대를 향해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항의했습니다. 이때 미군정 경찰이 구경꾼들을 향해 총을 쏘면서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다칩니다.

3·1절 발포에 대한 거센 항의의 뜻으로 제주도민은 학생들이 학교를 가지 않고, 시장과 가게가 문을 닫고, 공무원은 행정 업무를 중단하는 총파업을 벌입니다. 제주도민 90%가 좌익색채를 띠고 있는 '빨갱이 섬'이라는 낙인이 찍힌 배경입니다.

미군정 지시로 제주도에 내려보내진 '서북청년단'은 경찰이라는 직함을 받고, '빨갱이 섬'이라 교육받은 제주에서 약탈과 살해를 이어갔습니다.

■ 무장대-토벌대 무력 충돌 속 민간인 수만 명 집단 희생

1947년, 미·소 공동위원회가 한반도 문제 해결에 실패하자 미국은 유엔에 한국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UN은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기로 했는데, 북한은 소련의 지지 아래 이 결정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UN 결정으로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만의 단독 선거를 치르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 선거를 한 달여 앞둔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선 남북 분단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남로당 무장대가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가 습격당하고, 14명이 숨졌습니다. 본격적인 4·3의 시작입니다.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 간의 협상이 결렬되고 잦은 무력 충돌이 이어지면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됐습니다.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불러온 건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이뤄진, 이른바 '초토화작전'입니다.

진압 과정에서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되었고, 중산간 지역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관 건물에도 불을 질러 폐허가 되고, 각종 산업시설도 파괴됐습니다.

주민 대다수가 영문도 모른 채 붙잡혀 형무소로 끌려가, 불법 군사재판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제주국제공항 등 이름만 대면 아는 제주의 바닷가에서, 정방폭포 등 관광지에서 대규모 총살이 벌어졌습니다.


2018년 11월 제주4‧3 당시 제주국제공항 인근에서 억울하게 학살돼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4·제주4·3 유해 4구가 공개됐다. 3희생자평화재단2018년 11월 제주4‧3 당시 제주국제공항 인근에서 억울하게 학살돼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4·제주4·3 유해 4구가 공개됐다. 3희생자평화재단

바다로 수장된 이들의 시신은 해류를 타고 일본 대마도까지 떠내려갔습니다. 대마도 주민들은 해마다 4·3희생자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열고 있습니다.

대전 등 다른 지역 형무소로 이감된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 숨을 거뒀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행방불명인 4천 명은 아직 시신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유족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까' 한 줄기 희망으로 채혈에 응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발굴된 유골과 DNA를 대조하는 검사가 진행 중입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4·3위원회)가 확정한 희생자 수는 2024년 현재 1만 4천822명입니다. 이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수치일 뿐, 진상조사보고서는 4·3 당시 인명피해를 2만 5천 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 "빨갱이 자식"…연좌제로 직업조차 구하지 못해

제주4·3의 또 다른 아픔은 당시 사망·행방불명된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그 유가족들에게 대물림되었다는 점입니다.

가족이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처벌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자 유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피해를 봐야 했습니다. 공무원이 되고 싶어도 신원조회를 통해 공직에 입문하지 못하는 등 사회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제주도민 대다수는 4·3으로 인한 연좌제 피해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2000년 8월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4·3 유가족 7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전체의 86%가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했습니다.

제주4·3의 아픔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저는 청소년, 우리 청소년이 평화의 씨앗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평화와 아름다움을 퍼뜨리고 동시에 역사의 슬픔을 기억해야 합니다." (쉬지아치, 중국 난징외국어학교 3학년)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3평화공원에서·제주4 제77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3평화공원에서·제주4 제77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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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단 학살’ 제주·난징…“평화는 퍼뜨리고 아픔은 기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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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3일 3희생자·3희생자 열린 제77주년 4·3희생자 추념식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였어요. 거의 모든 사람이 가슴에 이번 사건의 상징인 동백꽃을 달고 있는 것을 보면서 평화와 정의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아신누어, 중국 난징외국어학교 3학년)

"매년 국가 추모일에 우리는 이렇게 돌아가신 사랑하는 동포들을 생각하며 슬퍼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평화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쉬지아치, 중국 난징외국어학교 3학년)

제주도와 중국 장쑤성 난징(南京)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930~40년대 비극적인 집단 학살이 벌어졌던 곳이라는 점입니다.

직항 노선을 통해 관광객이 서로 오가는 두 도시는 이제 아픈 역사의 '기억'도 교류하고 있습니다. 중국 난징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올해도 제주를 찾은 이유입니다.

중국 난징 학생들이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3평화공원에서·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7주년 3평화공원에서·3 추념식에 참석해 희생 영령들을 위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 해마다 양국 오가며 '아픈 역사' 배워

중국 장쑤성 난징 외국어학교 재학생과 교사, 교육청 관계자 등 20여 명은 오늘(3일) 오전 일찍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았습니다. 학생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습니다.

제주와 중국 난징 학생들은 4·3희생자 추념일을 전후해 해마다 만납니다. 인류가 겪은 참혹한 대학살 역사를 배우고, 서로의 생각을 묻고 듣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1937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일본제국군은 중국 난징 지역을 침략했습니다.

이들은 중국군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민간인도 대량으로 학살했습니다. 피해자 숫자는 최대 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정부는 1985년 8월 15일 대학살 현장에 난징대학살기념관을 설립하고,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2024년 제주-난징 학생 평화 공감 수업 모습. 제주도교육청
추념식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으며 행사를 지켜본 중국 학생들은 저마다의 소감을 풀어놓았습니다.

쉬지아치(중국 난징외국어학교 3학년) 양은 "인터넷을 통해 본 자료로 한국의 4·3사건에 대해 알고 이번에 제주에 왔다"면서 "현장에 와서 4·3사건에 대해 더 깊고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인의 진심이 드러난 데 대해 매우 감동했다"고 말했습니다.

지아신누어(중국 난징외국어학교 3학년) 군은 "한국의 4·3사건 흔적을 따라 여기에 왔다. 두 나라 모두 고통스러운 사건을 겪었다고 생각한다"면서 "중국 난징에서도 매년 12월 13일을 모일로 정하고 있다. 추모식을 통해 역사를 더욱 깊이 기억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3평화공원에서·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7주년 3평화공원에서·3 희생자 추념식에서 참석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 제주 4·3은?…6·25전쟁 다음 인명피해 큰 현대사 비극

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입니다.

참혹한 사건이 벌어진 데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뒤섞여 있으나, 1947년 이른바 3·1절 경찰의 발포 사건이 3만 명의 희생자를 낸 도화선이라고 말합니다.

1945년 일제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38도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을 각기 통치합니다.

제주도에선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고, 미군정 아래서도 궁핍한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가뭄과 흉년, 식량 부족에 전염병까지 창궐했습니다.

1947년 3월 1일, 전국 각지에서 3·1절 기념대회가 열립니다.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으로 나뉘어 열린 서울과 달리, 제주에선 하나의 행사로 치러졌습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주도로 제주 각지에 대규모 군중이 모인 집회에선 남북 분단 반대, 통일 독립 요구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기마경찰 말발굽에 치인 어린아이를 그냥 두고 떠나는 기마대를 향해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항의했습니다. 이때 미군정 경찰이 구경꾼들을 향해 총을 쏘면서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다칩니다.

3·1절 발포에 대한 거센 항의의 뜻으로 제주도민은 학생들이 학교를 가지 않고, 시장과 가게가 문을 닫고, 공무원은 행정 업무를 중단하는 총파업을 벌입니다. 제주도민 90%가 좌익색채를 띠고 있는 '빨갱이 섬'이라는 낙인이 찍힌 배경입니다.

미군정 지시로 제주도에 내려보내진 '서북청년단'은 경찰이라는 직함을 받고, '빨갱이 섬'이라 교육받은 제주에서 약탈과 살해를 이어갔습니다.

■ 무장대-토벌대 무력 충돌 속 민간인 수만 명 집단 희생

1947년, 미·소 공동위원회가 한반도 문제 해결에 실패하자 미국은 유엔에 한국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UN은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기로 했는데, 북한은 소련의 지지 아래 이 결정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UN 결정으로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만의 단독 선거를 치르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 선거를 한 달여 앞둔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선 남북 분단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남로당 무장대가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가 습격당하고, 14명이 숨졌습니다. 본격적인 4·3의 시작입니다.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 간의 협상이 결렬되고 잦은 무력 충돌이 이어지면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됐습니다.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불러온 건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이뤄진, 이른바 '초토화작전'입니다.

진압 과정에서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되었고, 중산간 지역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관 건물에도 불을 질러 폐허가 되고, 각종 산업시설도 파괴됐습니다.

주민 대다수가 영문도 모른 채 붙잡혀 형무소로 끌려가, 불법 군사재판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제주국제공항 등 이름만 대면 아는 제주의 바닷가에서, 정방폭포 등 관광지에서 대규모 총살이 벌어졌습니다.


2018년 11월 제주4‧3 당시 제주국제공항 인근에서 억울하게 학살돼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4·제주4·3 유해 4구가 공개됐다. 3희생자평화재단
바다로 수장된 이들의 시신은 해류를 타고 일본 대마도까지 떠내려갔습니다. 대마도 주민들은 해마다 4·3희생자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열고 있습니다.

대전 등 다른 지역 형무소로 이감된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 숨을 거뒀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행방불명인 4천 명은 아직 시신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유족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까' 한 줄기 희망으로 채혈에 응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발굴된 유골과 DNA를 대조하는 검사가 진행 중입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4·3위원회)가 확정한 희생자 수는 2024년 현재 1만 4천822명입니다. 이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수치일 뿐, 진상조사보고서는 4·3 당시 인명피해를 2만 5천 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 "빨갱이 자식"…연좌제로 직업조차 구하지 못해

제주4·3의 또 다른 아픔은 당시 사망·행방불명된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그 유가족들에게 대물림되었다는 점입니다.

가족이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처벌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자 유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피해를 봐야 했습니다. 공무원이 되고 싶어도 신원조회를 통해 공직에 입문하지 못하는 등 사회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제주도민 대다수는 4·3으로 인한 연좌제 피해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2000년 8월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4·3 유가족 7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전체의 86%가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했습니다.

제주4·3의 아픔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저는 청소년, 우리 청소년이 평화의 씨앗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평화와 아름다움을 퍼뜨리고 동시에 역사의 슬픔을 기억해야 합니다." (쉬지아치, 중국 난징외국어학교 3학년)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3평화공원에서·제주4 제77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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