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찾는 속에 아름다운 삶”…기자·소설가 문순태 [영상채록5·18]

입력 2025.06.26 (15:55) 수정 2025.06.2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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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소설가이자 기자, 문순태 작가는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할까. 1980년 5·18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해직 뒤 대학 교수로 갔다가 다시 언론사로 돌아온 사람. 그에게 5·18은 무엇일까, <영상채록 5·18>은 문순태 작가를 인터뷰했다.


■ 진실 보도, 제작 거부…"광주를 벗어나니까 그렇게 평화로운 거예요"

문순태
- 1941년 전남 담양 출생
- 1960년 <농촌중보> 신춘문예 당선
- 1965년 전남매일 입사
- 1981년 장편 <타오르는 강> 출간
- 1980년 전남매일 해고(당시 편집부국장)
- 1985년 순천대 국어과 교수
- 1987년 전남일보 초대 편집국장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작가는 정정했다. 문순태 작가는 타오르는 강 문학관에서 취재팀을 맞았다. 본인의 소설 '타오르는 강'의 배경인 전남 나주시에서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일본식 가옥을 사들여 문학관으로 꾸민 곳이다.

다리가 좀 불편해 보였으나, 목소리는 맑게 정돈돼 보였다. 호적은 1941년이지만 실제 1939년생이라 했다. 86세의 나이는 옛 기억도 선명히 끄집어냈다. 1980년 5월, 그는 15년 차 기자로 전남매일 신문 편집부국장이었다.

"20일 자가 마지막 신문일 거예요. 기자들이 사실 보도 안 해주면 제작 거부하겠다고 선포를 했어요. 그래서 저는 어떤 생각을 했냐면 역사적 기록만은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신문 제작은 할 수 없게 될지라도 이건 역사적 기록이니까 남겨야겠다고 생각해서 기자들한테 '쓰고 싶은 대로 다 써라', '현장 취재한 거 다 기사화해라' 해서 기사를 받았어요. 그래서 그날 20일 자 신문에 광고를 없애버리고 전부 그대로 조판을 했어요. 저도 그때 이건 발행이 안 될 거라고 하는 걸 예감을 했죠. 조판 된 거에다 등사기로 밀듯이 'OK' 대장을 뜨거든요. 그걸 확보해서 호주머니에 넣었죠. 그 바로 직후에 위에서 간부들이 내려와서 이걸 엎어버리더라고요. 발행 못 하게."

신군부로부터 사전 검열을 받을 때다. 결국 신문 발행은 못 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집단 사표를 내고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항쟁 기간, 가장 기억나는 장면을 물었다. 작가의 얘기를 그대로 옮긴다.

"상무관에서 시신을 봤을 때예요. 그때 이미 시신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어요. 요즘 전라도 사람들을 홍어에 비유하잖아요. '전라도 홍어'라고 극보수들이 그런 표현을 쓰며 전라도를 비하하잖아요. 그때 그 냄새 때문에 그 말이 나온 거거든요. 그전에는 전라도를 비하할 때 '개땅새'라고 그랬어요. 바닷가에서 뭐 고기 잡아서 사는 것들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5·18 이후로는 '전라도 홍어들' 그랬거든요. "

전남도청의 마지막 항전이 죽음으로 끝난 5월 27일, 계엄사로부터 출근해서 신문을 만들라는 전화가 왔더란다. 내용은 신군부, 계엄사가 전해준 내용으로 만들 게 뻔했다. 신문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던 문순태 부국장은 기자와 편집국장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려 피신하라고 말하고 본인도 몸을 피했다. 광주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전북 방향으로 향하다가 통행이 막혀 걸어서 정읍 시내로,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갔다. 작가는 그 버스에서 내내 울었다. "지옥 같은 광주에 비하니까, 광주를 벗어나니까 그렇게 평화로운 거예요". 그때 버스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었다.

■ "창간 정신으로 만들자"…2시간 만에 쓰인 시(詩)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문순태 작가는 일주일 만에 다시 광주로 내려와 신문을 만들었다. 다시 신문을 내지 않으면 신문사를 폐간하겠다는 신군부의 협박이 있었다. 정해진 시한이 있었고, 제작 거부 중인 기자들을 설득했다. '계엄사에서 발표한 내용이나 통신 이런 거 다 없애버리고 그냥 새로운 신문을 만든다는 각오로 만들자.' 광주 사람들의 분노와 고통과 설움, 공포...이런 것들을 응집적으로 표현하는 시를 한 편 넣고 신문을 만들자고 동료들을 설득했고 기자들의 동의가 이뤄졌다.

문순태 부국장은 슬픔과 분노가 겹쳐 잠을 못 잔다는 친구 송수권 시인에게 원고를 부탁하려 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원고 마감 시한은 있고, 학교에서 같이 교편을 잡은 적이 있던 김준태 시인에게 원고를 부탁했다.

"광주 시민들의 분노와 슬픔, 아픔, 이런 걸 표현해 낼 수 있는 시를 써 올 수 있느냐? 시간은 딱 2시간이다. 그랬더니 '아, 쓰죠.'" …그래서 2시간이 지나니까 헐레벌떡 편집국으로 뛰어 들어오는데 장시에요. 200행 정도 됐을 거야. 읽어보니까 위험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섯 군데 빨간 그걸로 지웠어요. 데스크도 역할을 했다라고 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보냈는데 그게 되돌아온 걸 보니까 한 절반 이상 빨간 줄로 다 줄 그었더라고요."

사전 검열로 삭제 표시가 된 김준태 시인의 시

그 유명한 시(詩)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전남매일에 실린 전후 사정이다. 시는 사전 검열로 누더기가 됐지만 신문 1면에 실린 무등산 사진, 전남도청 앞 분수대와 함께 광주 시민들의 가슴을 때렸다. 문순태 작가는 시민들이 신문을 가져가려고 줄을 섰고, 하루 내내 인쇄했다고 말했다. 광주 사람들이 신문을 구해 서울로, 해외로도 보냈다고 했다.

김준태 시인은 이 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고, 문순태 부국장은 해직 기자가 됐다. 문순태 작가는 당시 해직을 감사히 여겼다. 고 3 시절, 이미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작가로서 열망도 컸다. 해직이 되자 '아 이제, 쓰고 싶은 글을 맘껏 쓸 수 있겠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1985년 국립순천대학교 국어과 교수가 됐지만, 역사는 그를 '자유인'으로 오래 놔두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바람 속에 언론사들이 속속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광주에는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이 합쳐져 '광주일보'가 운영 중이었고, '전남일보'와 '무등일보'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문순태 작가는 교수직을 접고 다시 전남일보 편집국장 자리로 갔다.

"전남일보에서 사주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편집국장으로 와달라. 그래서 제가 한겨레 같은 신문을 만들고 싶은데 그걸 허용합니까? 인사권, 편집권을 줄 수가 있습니까? 주면 내가 가리다. '편집권은 주는 게 아니라 당신이 와서 뺏어가라'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작가는 쫓겨난 언론계로 스스로 돌아간걸, '부채감' 때문이라고 했다.

"취재했던 내용들 자잘한 것까지 다 그 진실을 알고 있는 내가 나 혼자 잘 살겠다고 대학교수로 와 있는 게 너무 부끄러웠어요 사실은. 그래서 미친놈 소리를 듣고 내가 신문사로 다시 왔는지도 모르죠.…저는 기자를 했기 때문에 소설가가 됐다는 얘기를 하거든요. 그 엄혹했던 시절을 기자로 뛰면서 사회의 모순, 역사의 모순 이런 것들을 낱낱이 깊숙이 보았거든요. …그래서 이걸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이걸 소설을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거예요."

타오르는 강 문학관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문순태 작가

그래서 소설을 쓰는데, 소설도 어쩔 수 없이 현실적으로 쓴다고 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관념적인 소설은 싫다고 했다.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에 초점을 둔 집필을 하는데, 그게 기자 생활을 한 때문이라 설명했다. 진실을 드러내는 와중에 그 속에서 우리의 빛나는 삶,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가란 물음을 소설을 통해 표현한다는 것이다. 기자로서 부채감, 진실 찾기의 가장 큰 과제 5·18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나는 광주 사람이라는 걸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했어요. 또 광주다운 소설을 써왔고, 전라도다운 소설을 써왔고, 제 소설 무대가 전부 광주 아니면 전라도거든요. 작가의 무대가 뉴욕일 필요도 없고 서울일 필요도 없거든요. 자기가 잘 아는 공간이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나는 늘 내가 잘 아는 내가 몸담고 살고 있는 공간을 소설 무대로 삼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 광주가 그렇게 자랑스러운데 5·18항쟁을 겪은 다음에 그 자랑스러움이 더 커졌어요."

문순태 작가는 요즘 자전적 소설을 쓰는 중이라고 했다. 요즘은 단어가 잘 생각이 안 나 글을 쓰는 데 애를 먹는다고 했다. 하지만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여전한 기억력과 말투와 눈빛은 정돈돼 있었다. 기자이자 소설가, 그의 치열한 진실 찾기가 아름다운 삶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확신한다. 문순태 작가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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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실 찾는 속에 아름다운 삶”…기자·소설가 문순태 [영상채록5·18]
    • 입력 2025-06-26 15:55:01
    • 수정2025-06-26 15:5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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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기자, 문순태 작가는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할까. 1980년 5·18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해직 뒤 대학 교수로 갔다가 다시 언론사로 돌아온 사람. 그에게 5·18은 무엇일까, &lt;영상채록 5·18&gt;은 문순태 작가를 인터뷰했다.

■ 진실 보도, 제작 거부…"광주를 벗어나니까 그렇게 평화로운 거예요"

문순태
- 1941년 전남 담양 출생
- 1960년 <농촌중보> 신춘문예 당선
- 1965년 전남매일 입사
- 1981년 장편 <타오르는 강> 출간
- 1980년 전남매일 해고(당시 편집부국장)
- 1985년 순천대 국어과 교수
- 1987년 전남일보 초대 편집국장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작가는 정정했다. 문순태 작가는 타오르는 강 문학관에서 취재팀을 맞았다. 본인의 소설 '타오르는 강'의 배경인 전남 나주시에서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일본식 가옥을 사들여 문학관으로 꾸민 곳이다.

다리가 좀 불편해 보였으나, 목소리는 맑게 정돈돼 보였다. 호적은 1941년이지만 실제 1939년생이라 했다. 86세의 나이는 옛 기억도 선명히 끄집어냈다. 1980년 5월, 그는 15년 차 기자로 전남매일 신문 편집부국장이었다.

"20일 자가 마지막 신문일 거예요. 기자들이 사실 보도 안 해주면 제작 거부하겠다고 선포를 했어요. 그래서 저는 어떤 생각을 했냐면 역사적 기록만은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신문 제작은 할 수 없게 될지라도 이건 역사적 기록이니까 남겨야겠다고 생각해서 기자들한테 '쓰고 싶은 대로 다 써라', '현장 취재한 거 다 기사화해라' 해서 기사를 받았어요. 그래서 그날 20일 자 신문에 광고를 없애버리고 전부 그대로 조판을 했어요. 저도 그때 이건 발행이 안 될 거라고 하는 걸 예감을 했죠. 조판 된 거에다 등사기로 밀듯이 'OK' 대장을 뜨거든요. 그걸 확보해서 호주머니에 넣었죠. 그 바로 직후에 위에서 간부들이 내려와서 이걸 엎어버리더라고요. 발행 못 하게."

신군부로부터 사전 검열을 받을 때다. 결국 신문 발행은 못 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집단 사표를 내고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항쟁 기간, 가장 기억나는 장면을 물었다. 작가의 얘기를 그대로 옮긴다.

"상무관에서 시신을 봤을 때예요. 그때 이미 시신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어요. 요즘 전라도 사람들을 홍어에 비유하잖아요. '전라도 홍어'라고 극보수들이 그런 표현을 쓰며 전라도를 비하하잖아요. 그때 그 냄새 때문에 그 말이 나온 거거든요. 그전에는 전라도를 비하할 때 '개땅새'라고 그랬어요. 바닷가에서 뭐 고기 잡아서 사는 것들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5·18 이후로는 '전라도 홍어들' 그랬거든요. "

전남도청의 마지막 항전이 죽음으로 끝난 5월 27일, 계엄사로부터 출근해서 신문을 만들라는 전화가 왔더란다. 내용은 신군부, 계엄사가 전해준 내용으로 만들 게 뻔했다. 신문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던 문순태 부국장은 기자와 편집국장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려 피신하라고 말하고 본인도 몸을 피했다. 광주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전북 방향으로 향하다가 통행이 막혀 걸어서 정읍 시내로,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갔다. 작가는 그 버스에서 내내 울었다. "지옥 같은 광주에 비하니까, 광주를 벗어나니까 그렇게 평화로운 거예요". 그때 버스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었다.

■ "창간 정신으로 만들자"…2시간 만에 쓰인 시(詩)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문순태 작가는 일주일 만에 다시 광주로 내려와 신문을 만들었다. 다시 신문을 내지 않으면 신문사를 폐간하겠다는 신군부의 협박이 있었다. 정해진 시한이 있었고, 제작 거부 중인 기자들을 설득했다. '계엄사에서 발표한 내용이나 통신 이런 거 다 없애버리고 그냥 새로운 신문을 만든다는 각오로 만들자.' 광주 사람들의 분노와 고통과 설움, 공포...이런 것들을 응집적으로 표현하는 시를 한 편 넣고 신문을 만들자고 동료들을 설득했고 기자들의 동의가 이뤄졌다.

문순태 부국장은 슬픔과 분노가 겹쳐 잠을 못 잔다는 친구 송수권 시인에게 원고를 부탁하려 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원고 마감 시한은 있고, 학교에서 같이 교편을 잡은 적이 있던 김준태 시인에게 원고를 부탁했다.

"광주 시민들의 분노와 슬픔, 아픔, 이런 걸 표현해 낼 수 있는 시를 써 올 수 있느냐? 시간은 딱 2시간이다. 그랬더니 '아, 쓰죠.'" …그래서 2시간이 지나니까 헐레벌떡 편집국으로 뛰어 들어오는데 장시에요. 200행 정도 됐을 거야. 읽어보니까 위험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섯 군데 빨간 그걸로 지웠어요. 데스크도 역할을 했다라고 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보냈는데 그게 되돌아온 걸 보니까 한 절반 이상 빨간 줄로 다 줄 그었더라고요."

사전 검열로 삭제 표시가 된 김준태 시인의 시

그 유명한 시(詩)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전남매일에 실린 전후 사정이다. 시는 사전 검열로 누더기가 됐지만 신문 1면에 실린 무등산 사진, 전남도청 앞 분수대와 함께 광주 시민들의 가슴을 때렸다. 문순태 작가는 시민들이 신문을 가져가려고 줄을 섰고, 하루 내내 인쇄했다고 말했다. 광주 사람들이 신문을 구해 서울로, 해외로도 보냈다고 했다.

김준태 시인은 이 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고, 문순태 부국장은 해직 기자가 됐다. 문순태 작가는 당시 해직을 감사히 여겼다. 고 3 시절, 이미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작가로서 열망도 컸다. 해직이 되자 '아 이제, 쓰고 싶은 글을 맘껏 쓸 수 있겠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1985년 국립순천대학교 국어과 교수가 됐지만, 역사는 그를 '자유인'으로 오래 놔두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바람 속에 언론사들이 속속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광주에는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이 합쳐져 '광주일보'가 운영 중이었고, '전남일보'와 '무등일보'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문순태 작가는 교수직을 접고 다시 전남일보 편집국장 자리로 갔다.

"전남일보에서 사주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편집국장으로 와달라. 그래서 제가 한겨레 같은 신문을 만들고 싶은데 그걸 허용합니까? 인사권, 편집권을 줄 수가 있습니까? 주면 내가 가리다. '편집권은 주는 게 아니라 당신이 와서 뺏어가라'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작가는 쫓겨난 언론계로 스스로 돌아간걸, '부채감' 때문이라고 했다.

"취재했던 내용들 자잘한 것까지 다 그 진실을 알고 있는 내가 나 혼자 잘 살겠다고 대학교수로 와 있는 게 너무 부끄러웠어요 사실은. 그래서 미친놈 소리를 듣고 내가 신문사로 다시 왔는지도 모르죠.…저는 기자를 했기 때문에 소설가가 됐다는 얘기를 하거든요. 그 엄혹했던 시절을 기자로 뛰면서 사회의 모순, 역사의 모순 이런 것들을 낱낱이 깊숙이 보았거든요. …그래서 이걸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이걸 소설을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거예요."

타오르는 강 문학관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문순태 작가

그래서 소설을 쓰는데, 소설도 어쩔 수 없이 현실적으로 쓴다고 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관념적인 소설은 싫다고 했다.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에 초점을 둔 집필을 하는데, 그게 기자 생활을 한 때문이라 설명했다. 진실을 드러내는 와중에 그 속에서 우리의 빛나는 삶,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가란 물음을 소설을 통해 표현한다는 것이다. 기자로서 부채감, 진실 찾기의 가장 큰 과제 5·18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나는 광주 사람이라는 걸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했어요. 또 광주다운 소설을 써왔고, 전라도다운 소설을 써왔고, 제 소설 무대가 전부 광주 아니면 전라도거든요. 작가의 무대가 뉴욕일 필요도 없고 서울일 필요도 없거든요. 자기가 잘 아는 공간이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나는 늘 내가 잘 아는 내가 몸담고 살고 있는 공간을 소설 무대로 삼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 광주가 그렇게 자랑스러운데 5·18항쟁을 겪은 다음에 그 자랑스러움이 더 커졌어요."

문순태 작가는 요즘 자전적 소설을 쓰는 중이라고 했다. 요즘은 단어가 잘 생각이 안 나 글을 쓰는 데 애를 먹는다고 했다. 하지만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여전한 기억력과 말투와 눈빛은 정돈돼 있었다. 기자이자 소설가, 그의 치열한 진실 찾기가 아름다운 삶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확신한다. 문순태 작가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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